■ 제7장 프로시안 남작령에서의 생활 □
"이거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난 그대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정말 아니라니까!"
"그것은 조사해 보면 될 것입니다. 잠시만 따라오십시오. 아무런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레이 기사단의 웨일즈는 평민 출신의 기사였다. 검술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정식으로 헤일론 백작가의 기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신분 상승을 꾀하고 헤일론 백작가의 기사가 된 대부분의 귀족가 차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신분이었다. 때문에 그들과는 곧잘 어울리지 못했다.
웨일즈는 당황한 기색으로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아홉 명의 병사들을 보고 양손을 위로 올렸다.
솔직히 말해서 잘 훈련된 병사 아홉 명을 상대로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빌어먹을 창들 좀 내려놔. 그 날에 찔리면 얼마나 아픈 줄 알아?"
창날의 날카로운 부분을 피해 몸을 흠칫 떠는 웨일즈의 말에 병사가 담담히 말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따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 제기랄. 따라가 준다, 가 줘!"
그의 막말에 경계를 늦추지 않은 병사들이 일단 그를 포박했다. 웨일즈가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병사에게 물었다.
"뭘 묻고 싶은 거야? 그리고 또 어디를 가는 건데?"
"그건 세리아 아가씨께서 물으실 거요. 지금 경께서는 아가씨에게 가는 길이오."
병사의 무심한 대답에 표정을 와락 구긴 웨일즈가 투덜거리며, 앞에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았다.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멈춘 채, 제일 앞에 있는 세리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헉! 헉! 이자인가요?"
"그렇습니다, 아가씨."
세리아의 질문에 웨일즈를 포박했던 병사가 냉큼 대답했다.
쉬지 않고 달려온 모양인지 세리아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경은 그레이 기사단이시죠?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서(Sir) 웨일즈요. 근데 이거 참, 밧줄 좀 풀어 주지 않겠소? 팔목이 뻐근해서 죽겠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챙!
그로퍼는 세리아를 대하는 웨일즈의 태도가 불량하다고 생각되자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발도술에 깜짝 놀란 웨일즈가 움찔거렸다.
"아, 거 되게 성급하시네. 농담이요, 농담. 산 사람이 농담도 하면 안 되나? 그건 그렇고, 병사들에게 들었는데 묻고 싶은 게 뭐요?"
"음, 웨일즈 경께서는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요?"
"그냥 놀았소. 나무 그늘 아래서 쉬고, 헝겊으로 검을 닦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숨쉬기 운동 좀 했수다."
그로퍼의 검이 허공을 내질렀다.
웨일즈는 검을 피하기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섰다.
"제, 제기랄. 이게 뭔 짓이오! 죽이려고 환장했수? 당신들도 평민 기피증이라고 평민들만 보면 죽이고 싶수?"
귀족들 중에 가끔 있었다. 워낙 부족한 것 없이 살다 보니, 평민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그들은 평민들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겼다. 그래서 생긴 병이 평민 기피증.
평민들을 보는 것만도 구역질이 나는 귀족만의 병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런 귀족들이 웨일즈의 얼굴만 보고도 평민이라는 것을 알고 죽기 살기로 덤빈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세리아 일행은 오히려 몰랐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로퍼 경,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게. 이자의 말이 거짓 같지는 않아 보이네."
마리엔은 일단 다혈질인 그로퍼를 말려 보고자 그들 사이로 다가갔다. 마리엔의 말에 그로퍼도 화기를 한껏 누그러뜨렸다.
"그래, 맞아요. 일단 웨일즈 경의 포박을 풀어 줘라. 잠시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예!"
세리아의 말에 병사들이 얼른 포박을 풀었다. 웨일즈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더니 남작가의 침통한 분위기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이 빌어먹을 분위기는 뭐요? 마치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나에게 지금까지 어디 있었냐고 묻는 걸 보니 그레이 기사단의 그 떨거지 놈들이 무슨 사고라도 쳤소? 에이, 이래서 귀족 놈들은 앞에서 고상한 척은 다 해도 뒤에서는 사고만 친다니까."
마치 기사들과 세리아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말하는 웨일즈였다. 모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웨일즈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귀족 열 명 중에 제대로 된 이가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잘들 지내슈. 인연이 있으면 또 봅시다."
웨일즈는 등을 뒤로 돌리더니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 터벅터벅 돌아갔다.
"이대로 내버려 두실 참입니까?"
"그러면 어쩌겠어요. 생사람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로퍼는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이었다.
"아직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후훗. 걱정 말아요. 근래 저 웨일즈 경처럼 눈이 맑은 사람은 두 번째로군요. 그 사람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요. 자! 그럼 우리도 돌아가요. 침입자는 아직 이 근방에 있을 것 같으니 그로퍼 경께서 수고 좀 해 주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대만 믿겠어요."
그들은 하루 동안 침입자를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에이전트 기사단이 그레이 기사단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로 이어질 뿐이었다.
삼십 년 내공에 해당하는 한기를 얻었다고 해서 전부 다 청령의 내공이 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청령의 새로운 몸에 적응하기 위해 단전에서 둥그런 모양으로 뭉쳐 방어하고 있었다. 청령은 꽤나 견고한 그들의 방어를 만상귀일신공을 일으켜 녹여 냈다. 처음에는 오 년 내공, 그리고 이제는 서서히 이십 년 내공을 한기로 받아들였다. 청령은 이십 년 내공이 한음지기가 있던 자리를 꿰차자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약 한 시진 정도를 더욱 정진하자 어느덧 삼십 년에 해당하는 한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하하, 생각지도 못한 기연이다. 한기로만 절정의 경지에 올랐구나. 이거 잘만 하면 빠른 시일 내에 초절정 때의 내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청령이 그렇게 혼자 떠들고 있을 때 레나가 들어왔다. 새침한 표정으로 청령을 노려보는 레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웃는 소리가 바깥에까지 들려요."
청령은 히죽 웃었다.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후후. 아무것도 아니다. 아! 혹시 레나는 심법 같은 거 배울 생각 없어?"
"심법이요? 심법이 뭔데요?"
아까 기사들에게 당하던 것을 생각하니 꽤나 마음이 아팠다. 도대체 계급이 뭐기에 사람을 이리도 힘들게 한단 말인가.
레나에게 신공절학 같은 것은 가르쳐 줄 수 없어도, 중원에 떠도는 삼재심법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었다. 삼재심법은 진전이 더디지만 다른 심법과 같이 어우러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여자에게 제일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가령 피부가 좋아진다거나, 무병장수하게 된다거나, 엄청난 동안이 된다거나……."
실제로 청령은 은은하게 풍기는 먹향에 조금 어울리지 않는, 차갑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표정이 차가운 것은 만상귀일신공의 영향이 미쳤기 때문이다. 도가 계열인 청성파는 살수문파 때문에 많이 유행을 타 상당 부분 무공들이 바뀌었다.
"정말요? 배울래요. 꼭 배울 거예요."
청령의 얼굴을 세심하게 쳐다본 레나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청령은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귀족가의 자제 같았다.
"자, 이쪽으로 와서 이런 자세로 앉아."
삼재심법은 대성하는 것이 쉬웠다. 꾸준히 십 년만 수련해도 십이성에 오를 수 있었다. 중원에서 삼재심법으로 일갑자 모으기는 평생 해도 부족하지만, 유라시아 대륙 같은 경우는 삼재심법이 신공절학이나 다름없었다. 확실히 유라시아 대륙에는 명상은 있지만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고, 심법 같은 것은 더더욱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윽! 오라버니, 이거 정말 효과 있는 것 맞아요?"
"그럼. 걱정 마."
가부좌를 처음 틀어 본 레나가 앓는 소리를 해 댔다. 레나는 청령이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대로 따랐다.
'아, 예뻐지기는 정말 힘들어.'
청령은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차례로 호흡법을 가르쳤다. 일단 천(天)의 기운을 담고, 지(地)의 기운을 뱉어 내 인(人)에 담아 두었다.
레나는 처음엔 굉장히 어설펐지만 하면 할수록 이 자세가 편하다는 것을 느꼈다. 일각 정도 지났을 때,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포착되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배 아랫부분에서 동전만 한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자, 이제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 두자. 너무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거든."
청령의 말에 레나가 뭔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에 15분, 많게는 30분 정도 하는 게 좋아."
무조건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기가 몸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족히 한 달간은 일각에서 이각 정도면 충분했다.
"아! 그리고 그 비법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면 안 된다."
"헤헷, 당연하잖아요. 예뻐지는 비법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바보는 이 세상에 없다구요."
"하긴, 그런가? 그럼 내일 보자. 내일 곧바로 서재로 향할 생각이니까 12시쯤에 점심 차려서 오도록 해."
"예, 꼭 시간 맞춰서 갈게요."
레나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한두 번씩은 꼭 부탁을 잊곤 했다. 레나가 12시를 계속 뇌까리며 방을 나서자 청령은 곧바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빌려만 놓고 본 적이 없는 책이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라인하르트 황족.'
청령은 책을 펼쳤다.
유라시아 대륙력 3765년에 일어난 일 중 제일 충격적인 사건은 당시 대륙 40퍼센트의 땅을 거머쥐고 있던 대제국 라인하르트의 멸망이다. 세간에는 당시 고위 귀족들이 프라스 제국과 그 속국에 해당되는 왕국들에 나라를 팔아먹음으로써 멸망했다는 말이 돌았는데 그 설이 제일 유력하고, 자진 붕괴했다는 설도 있다.
초유의 관심사인 라인하르트 대제국 황족들은 추격꾼들의 공격을 받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역사상에서 여신의 축복을 받은 피를 가진 이들은 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 나온 내용은 모두 라인하르트의 역사와 여신의 축복에 대한 설명들이었다. 여신의 축복은 남자에게는 한없는 카리스마를, 여인들에게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게 한다는 것이다.
"3765년이라면 이십 년 전이로군."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이다. 청령은 이 책을 보며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꼈다.
청령은 그 후로 한 시간을 독서로 때운 후에 침대에 누웠다.
평소보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었다. 한기 때문에 순간 절정에 올라 버렸기 때문일까? 청령은 눈을 꼭 감고 몸을 뒤척이다 잠에 들었다.
그곳은 커다란 동굴이었다. 바닥이 금으로 깔리고 천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동굴의 주인은 천오백 년 전부터 그곳에 레어를 틀어 온 골드드래곤 알케미온이었다.
골드드래곤은 레드드래곤처럼 흉폭하기보다는 현명하며, 힘에서도 드래곤 중에서 수위를 차지할 정도다.
곳곳이 라이트 마법으로 밝혀져 있는 알케미온의 레어에는 여느 때와 달리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노인 하나가 있었다.
알케미온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이 세상에서 추적자들의 발길을 따돌릴 수 있는 곳 말인가?"
노인이 두려운 눈빛을 띠고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이분은 라인하르트 대제국의 황태자십니다. 이분이 자랄 때까지만이라도 숨을 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드래곤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곳이 있을 것 같은가? 아마 있다면 드래곤의 레어뿐이겠지. 하나 아무리 나라고 해도 나 외에 다른 종족이 머무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또한, 내가 왜 너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지 모르겠군. 라인하르트 제국의 황태자란 것이 흥미롭기는 하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고서에는 초대 황제께서 위대하신 알케미온 님이 유희를 나오셨을 당시 드래곤인 것이 발각되어 레어로 돌아온 적이 있으시다고 전하셨습니다. 그 당시 알케미온 님은 그동안의 유희의 대가로 초대 폐하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드래곤은 유희 중에는 절대 자신이 드래곤인 것이 발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발각되었을 경우 신의 명에 따라 유희는 전면 취소되고, 곧바로 레어로 돌아와 오백 년 이상을 근신해야만 했다.
"음……."
그때를 회상하던 알케미온이 고민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한 기억이 났다. 따지고 보면 그때 알케미온이 유희를 나와 초대 황제의 부하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절대 라인하르트 제국이 세워졌을 리가 없었다.
"좋다. 그 소원이라면 가능하지. 나 또한 라인하르트 제국이 멸망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노인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는 상관이 없다더니…….'
알케미온이 손을 위로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앞에 마법진을 그렸다.
"삼백 년 전에 완성한 차원이동 마법진이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그 어느 세계가 나올지 모른다. 하나! 확실히 해야 될 것은 너는 그 아이의 일에 일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명심하겠느냐?"
차원이동이란 것은 불법입국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그 세계를 관장하는 신의 눈을 속여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차원이동을 겪은 자들이 서로 접촉할 경우, 일부러 접촉을 가한 쪽은 죽어서 그 영혼이 구천을 떠돌고 사후세계에 가서도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하나, 노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좋다. 넌 이 순간부로 드래곤과의 맹약을 했다. 이것을 잊는다면 죽어서도 편치 못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노인과 아기는 마법진 속으로 사라졌다.
* * *
본관의 접대실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있었다. 그 중심에는 세리아와 그레이 기사단의 단장인 알렌이 있었다.
칸과 부관은 세리아의 옆에 서 있고, 그로퍼는 그녀를 호위하듯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립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레이 기사단 또한 다친 알로크를 제외한 전원이 참석하고 있어 30평 남짓한 접대실이 비좁게 느껴졌다.
알렌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 송이에 십만 골드를 호가한다는 플래임 플라워가 든 상자를 내밀었다. 세리아가 턱짓으로 상자를 가리키자 부관이 상자를 열었다.
덜컥.
상자를 열자 후끈한 열기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상자에 마법 처리를 가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녹아들 정도였다.
"오오! 이것은 플래임 플라워가 맞습니다, 아가씨."
칸이 감격이라도 한 듯 붉은 꽃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가 꽃을 만져 보려 하자 알렌이 먼저 나서서 상자를 닫았다. 그러자 칸이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자, 거래 조건을 말씀해 보시죠."
세리아의 말에 알렌이 옆에 있는 기사를 쳐다봤다. 기사는 이런 자리는 처음인지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와 손에 들린 문서를 읽어 내렸다.
"헤일론 백작 각하께서 요청하신 것입니다! 첫째, 프로시안 남작은 장안의 숲에 존재하는 모든 광산 소유권을 포기한다!"
"헉! 그건……!"
칸과 부관이 놀라서 외치자, 세리아가 그런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칸은 이 조건을 절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광산의 값어치만 해도 당장 플래임 플라워를 몇 송이 살 수 있는 돈이다.
쾅!
"말도 안 되는 조건이오!"
칸이 탁자를 치며 외치자 기사가 다시 담담한 조건으로 다음 조건을 내밀었다.
"둘째, 프로시안 남작은 광산 개발과 장안의 숲 정벌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댄다. 그리고 장안의 숲을 농경지로 만들어 그 땅에서 나는 순이익의 50퍼센트를 백작령에 바친다!"
"뭐, 뭣이? 제정신이오?"
칸과 부관이 펄쩍 뛰었다. 에이전트 기사단장 그로퍼는 살기를 흩뿌리며 검을 뽑아 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꽃 한 송이의 가격으로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조건이었다.
"거참, 조용히 좀 하면 안 되나? 밑에 보니까 조건이 하나 더 남은 것 같은데 좀 들어 보슈."
웨일즈의 한 마디에 전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때 알렌이 웨일즈를 저지했다.
"넌 조용하거라!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쳇, 알았수."
그들의 말이 끝나자 기사가 다시 외쳤다.
"셋째! 음……?"
갑자기 그 기사가 말을 흐렸다.
모든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어서 입을 열어라!"
알렌의 호통에 정신 차린 기사가 다시 외쳤다.
"셋째! 프로시안 남작의 여식인 세리아 폰 프로시안은 지금 이 시간부로 크로니아 반 헤일론 백작 각하의 첩이 된다!"
"……!"
챙챙!
좌중이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성질 급한 그로퍼 단장의 경우는 벌써 칼을 뽑아 들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에 맞선 그레이 기사단도 하나 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놈들! 헤일론 백작을 등에 업었다고 오만방자하구나. 너희의 그 터무니없는 조건은 들어줄 수 없다. 아가씨를 모욕한 대가를 치러 주겠다."
칸도 더 이상 들어 줄 수 없다는 듯 스태프를 꺼내 들고 마법을 캐스팅 했다. 부관 또한 허리춤에 매단 단검을 만지며 언제든지 달려들 기세였다.
그때 세리아가 나서서 말렸다.
"모두들 그만 하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만, 그 첫째와 두 번째 조건은 어떻게 바꿀 수가 없나요?"
"아가씨! 저놈들 말을 못 들으셨습니까!"
"그로퍼 경! 제발 좀 가만히 계세요. 칸이랑 부관 아저씨도, 냉정한 사람들이 대체 왜 그래요?"
알렌이 태연한 표정으로 상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죄송하지만 헤일론 백작 각하께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양보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아쉽지만 거래는 포기해야 되겠군요. 남작님 일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화가 나지만, 그 어떤 이보다 침착한 이가 바로 세리아였다. 세리아는 팔은 떨고 있었지만, 얼굴에 띤 미소만은 절대 잃지 않았다. 그런 세리아가 이를 갈며 알렌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발, 제발 아버지를 도와주실 수 없나요? 그 터무니없는 조건을 들어준다면 우리 영지는 더 이상 영지라고 부를 수도 없을 거예요."
"반복하겠습니다만, 백작 각하께서는 불가하다 하십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때 세리아의 눈앞을 스쳐 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넓은 등을 가진 장대 같은 기사 하나가 그립 부분으로 알렌을 향해 찍어 내릴 듯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로퍼 경! 안 돼요!"
채앵!
알렌은 역시 녹록하지 않았다. 어느새 검을 빼어 든 그가, 달려드는 그로퍼의 그립을 검신으로 막아 냈다. 그로퍼가 한 발자국 떨어지더니 알렌을 노려보았다.
"오냐, 뒤에서 공격을 가하는 것을 보니 역시 쓰레기 같은 영지의 기사들이로구나! 너희는 기사도마저 잊었더냐."
알렌이 그렇게 말하자 기가 막힌 것은 에이전트 기사단이었다. 그로퍼가 발끈하고 나섰다.
"뭐, 뭐야! 어제는 본관의 병사들마저 기절시키고 침입한 놈들이 기사도를 운운하느냐?"
그러자 알렌이 무슨 말이냐는 듯 해명을 구하는 눈빛으로 그레이 기사단을 쳐다보았다. 웨일즈는 그 일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왠지 찔리는 기분에 그의 눈빛을 피했다.
"병사들? 웃기지 마라!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 너희야말로 그레이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어제 기사를 흠씬 두들긴 놈들이 너희가 아니냐!"
그로퍼도 해명을 구하는 눈빛으로 기사들을 쳐다봤지만, 기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모자라 우리 영지를 비하한 너희 그레이 기사단에 차륜전을 신청한다!"
차륜전은 일대일의 싸움이지만, 한 명이 지면 진 팀에서 다시 한 명이 나와 그 싸워 이긴 사람과 계속해서 싸우는 것을 의미했다.
"바라는 바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시간 후 연무장에서 기다리겠다."
알렌이 그 말과 함께 나가 버리자, 그레이 기사단도 그 뒤를 따랐다. 세리아는 결국 이마를 짚고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버렸다.
"아, 정말 쓸데없는 짓이에요. 이건 서로 피해만 입을 뿐이라구요."
그로퍼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 영지와 아가씨, 남작님을 비하했습니다. 게다가 힘없는 시녀들을 희롱한 것도 모자라, 저희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결투를 벌이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세리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
아버지를 볼 낯이 없어 울분만 삼킬 뿐이었다.
"크아아아악!"
머릿속을 칼로 헤집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청령은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침대에서 떨어졌다.
"크으으윽!"
청령의 머릿속에 과다한 정보와 기억들이 강제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하얀빛으로 번쩍거렸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고, 혈관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청령은 바닥을 손톱으로 긁어 대며 왼손으로는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헉! 헉! 헉!"
그렇게 일다경쯤 지났을까. 머리가 가볍게 아프기는 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노인장이 도대체 왜……?"
드래곤과 대면하고 있던 노인장은 분명 입고 있는 옷이 다를 뿐이지 그때와 같은 사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거대한 황궁이 불타고, 눈에 익은 여러 사람들이 적의 칼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아기를 껴안은 노인이 기사 몇을 호위 삼아 그대로 미친 듯이 달려 황궁을 빠져나갔다.
거기서부터 드래곤과의 대면까지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건 분명 노인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가장 확실히 알아낸 것!
'리바이브 리턴!'
그것은 분명 죽은 자도 살려 낸다는, 사제들이 목숨을 걸고 사용하는 신성마법이다. 다만, 그 살려 낸다는 의미는 처음으로 되돌린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결국 청령은 자신이 그 신성마법으로 이 세계에 흘러들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처음부터 이 유라시아 대륙의 사람이었단 말인가……?"
이곳의 말을 할 수 있었던 데는 노인장의 기억이 큰 도움이 됐지만,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이곳의 언어를 이미 들어 봤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난 라인하르트 황족이었구나. 그래, 그래서…… 그렇게 된 거였어."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신분.
청령은 자신이 대제국의 황족, 그것도 모자라 황태자라는 사실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 노인은 추기경……. 그자가 목숨을 버려 가며 날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아마도 멸망한 라인하르트 제국의 재건인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중원에 있을 때 자신을 돌봐 준 청성파 천유한 장문인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리고 멸문한 청성파.
'만약 그 비급을 몇 년만 더 빨리 보여 주었더라도 청성파는 진정 구파일방 중 지존이 되었을 텐데. 나라는 인간은 유라시아 대륙에서나 중원에서나 해가 되는 존재였구나.'
황태자라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대신 죽어 준 사람들과 청성파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은 이미 엄청난 사명감을 가진 존재였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게 됐군."
사실 생각해 보면 갑자기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라인하르트 제국을 재건하겠다고 다짐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건 어렸을 적 기억일 뿐이고, 청령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그저 청성파를 재건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청성파의 뿌리를 유라시아 대륙에 내려 그 근본을 계속 이어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에게 영지가 있다면 생각을 달리해 볼지도 모르지."
청령은 우스갯소리를 중얼거리고는 그냥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알았을까, 그저 흘려보낸 이 말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 * *
프로시안 영지에는 외성이 존재하고, 그 외성 안에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영주가 살고 있는 내성이 존재했다.
프로시안 영지의 외성에서 롱 스피어(Long Spear)을 들고 있는 병사 두 명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정말 더워 죽겠네."
"제기랄. 우리 같은 말단 병사들은 이런 곳에서 햇빛이나 쬐며 죽치고 있는 수밖에 더 있나?"
"하긴, 그 이름 높은 기사들은 편하게 의자에 앉아 쉬고 있겠지. 간간이 보고 따위나 받으면서 말이야."
그들의 이름은 한스와 존슨이었다. 한스가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그늘이 있는 곳에 가서 털썩 앉아 버렸다.
"야! 그러다가 다른 놈들이 보기라도 하면 우리 아작 나는 거 모르냐?"
"시끄러. 아작 나기 전에 더워서 돌아가시겠구먼."
한스의 말에 존슨은 살짝 고민했다. 그러고는 그 역시 한스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존슨의 만족한 표정에 한스가 사소한 일을 주제 삼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더럽게 편하지? 그건 그렇고, 너 세리아 아가씨 얼굴 봤냐? 난 저번에 봤는데 역시 소문대로야. 아니, 소문이 훨씬 못하더군!"
한스는 세리아의 얼굴을 회상하는 듯 눈을 감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존슨은 아직 이곳에 지원해서 들어온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이었기에 세리아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정말? 그 정도란 말이야?"
프로시안 영지에서 최고 미녀로 손꼽히고 있는 세리아였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도 모자랄 판이라고 극찬을 내놓기도 했다.
"그래. 그런 여자랑 데이트, 아니 말이라도 한 번 해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서라. 너 같은 놈이 무슨 재주로 그러냐? 집에 있는 마누라나 힘껏 껴안는 게 어때? 낄낄."
"나도 그러고 있다. 오늘 밤 집에 들어가면 세리아 아가씨를 생각하며 힘껏 끌어안아야겠군. 끄응!"
그는 자신의 몸을 껴안으며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존슨이 경멸 어린 기색으로 한스를 바라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야! 나 그런 놈 아니야."
당황한 한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존슨은 오히려 더욱 피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두두!
쿠콰콰콰콰!
거대한 무언가가 달려오는 소리에, 존슨이 한스의 곁에서 떨어지면서 무심코 성 밖을 쳐다보았다.
"저, 저, 저게 뭐지?"
존슨이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상함을 느낀 한스가 물었다.
"뭔데 그래?"
시큰둥하게 물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한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몬스터다! 제기랄, 한동안 잠잠하나 했더니 또 저놈들이 왔군!"
"몇 놈이나 돼 보여?"
"글쎄……."
"아니, 내 정신 좀 봐. 빨리 알려야지!"
두 병사는 서둘러 성탑에 설치된 종을 치기 시작했다.
종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슈레이더 왕국의 깃발을 흔들었다.
땡땡땡땡땡―!
몬스터의 공격을 알리는 종소리가 영지를 울렸다.
여느 때와 같이 서재로 향하던 청령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본관 근처에 위치한 연무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십여의 살기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기사들 간에 싸움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청령은 눈을 빛내며 연무장으로 곧장 향했다. 연무장에 도착한 청령은 멀리서나마 구경하기 위해 그늘에 앉았다.
한 명 한 명이 뿌리는 살기 때문에 세리아를 비롯한 부관은 숨이 막혀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나 에이전트 기사단장은 지금 그레이 기사단에게 차륜전을 신청하는 바이다. 승낙하겠는가?"
결투는 신성한 것이다. 그로퍼는 다혈질이었지만 신성한 결투에서 막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알렌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게 외쳤다.
"나 알렌은 에이전트 기사단의 차륜전을 허락하겠소. 숫자는 30 대 30으로 하겠소이다!"
당연히 기사단의 숫자가 삼십 명밖에 되지 않았으니 최대 숫자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레이 기사단의 머릿수를 세어 보던 그로퍼가 눈을 찡그렸다.
"이의 있소! 그레이 기사단은 스물아홉 명 아니오!"
얼마 전에 청령에게 얻어맞고 그대로 쓰러진 알로크가 빠져 있었다. 의사와 포션의 영향으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병실에서 꼼짝 없이 누워 있어야 할 판이었다.
알렌이 코웃음을 치더니 입술을 말아 올렸다.
"흥! 그대들이 내 부하를 공격하지 않았소? 그리고 또한 에이전트 기사단을 상대하는 데 삼십 명 전원이 나설 필요는 없소. 스물아홉 명이면 충분하오!"
"뭐, 뭐요!"
알렌의 오만방자한 말에 그로퍼가 검을 잡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여차하면 발도술로 그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그때 옆에 있던 부단장 욘지가 나섰다. 욘지는 냉철한 인물이었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검술이 좋아 부단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것이다.
"단장님, 어차피 저들은 차륜전에서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저렇게 웃는 것도 지금 이 순간뿐입니다. 참으십시오. 승리의 여신의 미소는 어차피 저희 것이 될 겁니다."
욘지의 말을 듣고 보니 타당하다고 생각한 그로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누구부터 하겠소?"
그로퍼가 당당히 앞에 나섰다.
그로퍼는 다혈질적인 노기사지만, 실력은 매우 뛰어났다. 특히 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수십 번이고, 생사를 넘나든 경험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나설 것이오."
알렌도 당당히 앞으로 나섰다.
그로퍼의 검이 롱소드라고 한다면 알렌의 검은 바스타드 소드에 가까웠다. 알렌과 그로퍼가 서로를 노려보며 고개를 숙였다. 서로 상대에 대한 예를 올리는 것이다.
청령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처음부터 예상치 못한 대련을 보게 되다니, 정말 기대되는걸."
승부는 쉽게 점칠 수 없었다. 내공의 수위를 비교하자면 알렌이 그로퍼보다 약간 높았다. 하지만 대련은 결코 내공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그로퍼에게는 알렌보다 무수히 많은 생사를 넘어온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알렌처럼 편안한 영지에서 생활한 기사가 아닌, 장안의 숲을 옆에 두고 하루도 편안히 지낼 수 없는 프로시안 영지에 있는 기사라면 응당 어떤 싸움이라도 능했다.
'재밌겠어.'
청령이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들고 서로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들어 가고 있었다.
채앵―!
슈슈슉―!
그로퍼의 속검이 여지없이 알렌의 빈틈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허업!"
그로퍼의 속검에 알렌이 여지없이 뒷걸음질 쳤다. 양측의 기사들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로퍼는 초반 페이스를 제대로 잡아 계속해서 알렌을 몰아갔다. 알렌처럼 힘으로 검술을 하는 자에게는 그로퍼와의 대결이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압!"
알렌은 어느 정도 속검에 익숙해지자 곧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그로퍼는 자신의 허리를 찔러 들어오는 검에 한 바퀴 빙그르 돌아 검을 피하더니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그러자 한순간 멍해진 것은 그레이 기사단이었다. 너무 안으로 파고들면 어쌔신이 아닌 이상 저런 롱소드로는 공격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을 뻔히 아는 에이전트 기사단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련을 쳐다봤다.
휘익!
순식간에 돌아가는 그로퍼의 검.
그로퍼가 그립 부분으로 알렌의 머리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끝났다!"
"헉!"
설마 손잡이로 가격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듯 결국 알렌은 첫 타를 그로퍼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크윽!"
쿠웅!
투구를 쓴 알렌의 머리가 크게 울렸다. 그립에 얻어맞은 충격이 상당했는지 알렌은 잠시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런 알렌을 향해 그로퍼의 발이 여지없이 날아들었다.
퍽!
"크악!"
설마 검술대련에서 발이 날아올 거라고는 상상치 못한 알렌이 그대로 가슴팍을 얻어맞고 뒤로 쿵 하고 넘어졌다.
"이, 이런 비겁한!"
알렌이 투구를 벗어 거칠게 집어 던졌다. 머리가 눌려서 앞을 가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로퍼는 그 충격을 입고도 알렌이 검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온실의 화초처럼 마냥 연무장에서 편안히 수련을 쌓은 자가 제법 기사의 명예는 알고 있는 것이다. 기사는 절대 대련 중에라도 검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검을 놓치면 그 순간이 패배요,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것이다.
그로퍼가 그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비겁하다? 대련 중에 비겁하다는 말이 어디 있나? 차륜전의 제3조항! 차륜전의 대련 중에는 검이 아니라 신체의 일부분을 사용할 수 있다! 모르는가?"
확실히 그런 조항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의미가 퇴색되어 검으로만 싸웠을 뿐이다.
"더 싸울 텐가?"
"아직 난 진 것이 아니오!"
알렌이 검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아아압!"
"자, 잠깐 멈추십시오!"
앞으로 달려 나가던 알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갑자기 소리친 병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겁지겁 달려온 탓인지 병사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헉! 헉! 지금 당장 외성으로 가셔야겠습니다. 지난번의 그 오크들이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인지 수천 마리를 이끌고 침공해 왔습니다."
"헉! 벌써 말이냐? 요즘 놈들이 성급해졌구나. 미안하지만, 알렌 경! 차륜전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소."
"자, 잠깐 기다리시오!"
그로퍼와 에이전트 기사들은 중무장을 한 채 그대로 외성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서로를 바라보던 그레이 기사단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그들을 뒤쫓았다.
하지만 점점 격차가 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뭐지? 저들은 중무장까지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저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가?"
현재 알렌은 그로퍼와의 대련으로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그는 그로퍼를 보고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마나의 양은 자신이 월등히 높았다. 하지만 승부 내내 승기를 잡을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놀라운 점은, 그의 호흡이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두두두두두두!
"취이이익!"
"화살을 쏘아라! 기름을 퍼부어라! 절대 놈들이 성벽에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된다. 성문의 방어를 강화해라! 절대 자리를 벗어나지 마라! 너희가 물러서면 너희 가족이 위험하고, 고향을 잃는다!"
수천 마리의 오크 떼들에 주눅 든 병사들을 지휘하는 제1소대 경비대장의 외침이었다. 그는 영지 안에서 기사 다음의 계급이었다.
"한스! 농땡이 치지 말고 기름이라도 퍼부어라!"
"제기랄! 내가 네 꼬붕인 줄 아냐?"
존슨의 외침에 한스가 투덜거리며 장창을 휘둘렀다. 그의 창이 오크 한 마리의 미간을 여지없이 꿰뚫었다.
"아아악!"
"이런 제기랄! 존슨!"
존슨의 비명 소리에 한스는 서둘러 창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그의 화려한 창술에 오크 서넛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직까지 직접적인 전투를 해 본 적이 없는 존슨은 한스의 등 뒤에서 보호를 받으며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고, 고맙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할 시간에 창이라도 휘둘러! 이 빌어먹을 자식아."
"꿀꺽."
옆에서 오크들의 도끼에 머리통이 박살나는 동료 병사를 본 존슨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제1소대 경비대장이 표정이 다소 상기된 채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처음과는 달리 오크들이 넘어오는 숫자가 많아졌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동요한 병사들이 도망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 굼벵이 같은 놈들은.'
"퀴엑!"
그의 말에 감복하기라도 하듯,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앞에 있던 오크가 그대로 무 썰리듯 썰려 나갔다.
경비대장이 눈이 치켜떠졌다. 옆으로 눈동자를 굴리니 어느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운 노기사 하나가 서 있었다.
"그로퍼 님!"
"이제 이곳은 내가 맡는다. 욘지! 너는 다섯 명을 데리고 성문을 막아라!"
"예!"
"우와아아아! 에이전트 기사단이다!"
병사들은 기사들이 온 것을 보고 힘을 얻었다. 확실히 기사들은 병사들과는 다른 웨폰 오러급의 경지였기에 오크 서너 마리가 한 번에 썰렸다.
그 무렵 칸과 세리아도 외성에 도착했다.
"칸 아저씨! 되도록 병사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성벽으로 올라오는 놈들에게 대규모 마법을 사용해 주세요. 저는 성벽에 올라온 놈들을 공격할게요!"
"아가씨, 이곳은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여린 마음을 가진 세리아가 보기에 이곳에는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 많았다. 그녀로서는 평생 버티기 힘든 정신적 고통을 느낄 수도 있었다.
"병사들이 죽는 마당에 제가 도망갈 수는 없어요!"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칸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세리아의 그런 모습에 칸은 대견스러워하며 미소 지었다.
'벌써 병사들을 생각하실 정도로 자라셨구나. 내가 미련했어. 이미 아가씨는 이렇게 성숙하신걸.'
항상 어린애로 보였다. 아저씨, 아저씨 하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의 모습에 겹쳐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미 그녀는 칸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자랐다는 것을.
"그렇다면 명심하십시오. 마나 고갈이 올 경우 곧바로 뒤로 빠지십시오. 아가씨 호위는 병사들에게 따로 맡기겠습니다."
"우와아아! 세리아 아가씨까지 오셨다!"
"정말 세리아 아가씨다!"
프로시안 남작령의 정신적 지주!
이미 그녀의 얼굴은 영지에 곳곳에 퍼져 있었다. 병사들의 잠을 설치게 만든다는 그녀가 외성에 나와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허걱! 정말, 네 말이 맞구나!"
존슨이 눈을 비벼 가며 세리아의 미모에 감탄했다.
"이런 멍청한 놈! 그럼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다면 창이라도 휘둘러! 기름이라도 붓든가!"
"이놈들 정말 끝도 없이 밀려오는데!"
각 병과의 대장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칸 님께서 마법을 캐스팅 하신다!"
"아가씨를 지켜라! 그리고 화살을 쏴라!"
슈슈슈슉―!
삼백 개의 화살이 하늘을 날아올라 뒤편에 있던 오크들을 꿰뚫었다.
그리고 그때, 기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칸이 캐스팅을 끝냈는지 이내 손을 높이 들었다.
"절대 불의 영역이여! 불의 신이시여. 그대의 힘을 빌려 내 앞에 있는 공간을 바꾸리라. 파이어 필드(Fire Field)!"
화르르륵!
"꾸에에엑!"
30미터 정도 되는 거리가 모두 불타는 땅으로 변했다. 4서클 마스터의 마법에 이백여 마리의 오크가 한 번에 타 죽었다. 칸은 이 공격 한 번으로 다소 지친 표정으로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매직 미사일!"
하얀 화살 모양을 한 수십 개의 마법 화살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그 마법들은 병사들이 공격할 시간을 주기 위해 성벽 위를 올라온 오크들의 눈을 가렸다. 세리아의 마법에 도움을 받아, 병사들은 오크 떼를 쉽게 도륙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끝이 없다!"
"방패병! 창병! 성문을 막아라!"
"누구든 좋으니까 화살 좀 가져와 봐!"
병사들이 저마다 소리를 꽥꽥 질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병사들의 활약에 오크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동쪽에 위치한 외성 곳곳이 불에 그을렸다.
병사들은 시체 사이를 누비며, 몬스터와 사람의 주검을 구분하기에 바빴다.
"크아악! 내 눈!"
"혀엉! 엉엉!"
이번 몬스터와의 전투 때문에 프로시안 남작령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세리아는 죽은 사람들보다도 부상자를 보는 것이 더 가슴이 아팠다. 어느 정도 진정된 상황에서 부관이 급히 달려왔다.
"피해는요?"
"보고 올립니다! 병사들 피해자 사망자 이백일흔네 명, 중상 구십 명, 경상 오백오십 명입니다. 에이전트 기사단의 피해는 없지만, 그레이 기사단의 경우 싸움에 투입되어 약 세 명의 사망자를 내었습니다. 창병과 방패병이 피해를 가장 많이 보았습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병사들 치료에 박차를 가하고, 경계에 고삐를 늦추지 마요. 지금 당장 운용 가능한 병력은 얼마나 되죠? 그런데 그레이 기사단의 피해라뇨?"
세리아의 물음에 헛기침을 한 부관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에이전트 기사단의 활약에 살짝 배알이 꼬였나 봅니다. 그들이 참가한 덕분에 우리 병사의 피해가 다소 줄었습니다. 운용 가능한 병력은 기마병 백여 기, 궁병 삼백여 명, 창병 삼백여 명, 방패병 이백여 명입니다. 마법사는 아가씨와 칸 님뿐이고, 당장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연금술사는 한 명도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하나 수성전에는 기마를 사용하지 않으니 지금 운용 가능한 병력은 팔백여 명이 다입니다."
세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레이 기사단은요?"
"그들은 일찌감치 떠났습니다. 백작령으로 향한 듯합니다."
"기사들 간에 작은 다툼이 있었는데, 과연 헤일론 백작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에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차피 헤일론 백작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 장안의 숲을 막고 있는 것은 실질적으로 우리 영지입니다. 영지전(領地戰)을 한다고 해도 폐하께서 말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탄 스무 명 정도의 기사들이 보였다.
그레이 기사단은 에이전트 기사단과는 달리 세 명의 사망자와 열 명의 경상자를 내었다. 제일 멀쩡한 웨일즈와 알렌은 다소 편안한 표정으로 백작령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단원들의 죽을상을 본 웨일즈가 알렌을 불렀다.
"거, 단장. 조금만 쉬고 갑시다. 말을 하도 오래 탔더니 엉덩이가 찢어질 것 같은데."
"……."
웨일즈의 말에 알렌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방금 전 그 몬스터 떼와의 전투를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
몬스터들 사이를 누비던 에이전트 기사단과는 달리, 그레이 기사단은 소극적으로 싸웠다. 그러면서도 피해를 입었다.
차륜전을 치렀다면 완벽히 패배했을 것이다.
왠지 분한 느낌에 알렌이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한 기사가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단장님, 백작 각하께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임무를 실패한 것을 아시면 크게 노하실 것이 분명한데."
"기사까지 죽은 것을 아시면 프로시안 남작에게 영지전까지 걸지도 모르는 일이지. 어떡하긴. 우리는 백작령으로 돌아간다. 알로크! 상처는 괜찮나?"
이들 중 상처가 제일 깊은 것은 알로크였다. 청령에게 맞은 상처가 아직도 다 낫지 않은 것이다. 알로크가 무리한 행군을 하는 것 같자 알렌이 슬쩍 손을 들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숙영한다."
그 말을 들은 기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빠른 속도로 장작을 피움과 동시에 간단한 음식이 준비되었다.
말에서 내린 알렌이 노을을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영지로 돌아가는 즉시 평소보다 훈련량을 두 배로 늘리겠다. 에이전트 기사단보다 비실대다니. 너희가 그러고도 헤일론 백작 각하의 자랑스런 기사더냐!"
"헉! 그, 그건……!"
평소에도 과도할 정도로 훈련을 하고 있는 기사들이었기에, 그들의 눈이 저마다 치켜떠졌다. 하루에 일곱 시간을 훈련하는 그들에게 두 배인 열네 시간이라 하면 잠자는 시간도 아껴야 할 판이었다. 훈련 후의 달콤한 휴식시간을 빼앗긴 기사들은 항의하려고 했지만 알렌의 한마디에 입을 꾹 다물었다.
"번복은 없다. 모두 영지로 돌아가는 즉시 각오하도록! 이번 그레이 기사단의 단원의 죽음은 모두 너희의 약함에서 비롯되었다. 명심하도록 해라!"
"예."
기사들은 저마다 굳은 표정을 하고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가씨, 잠깐 이곳으로……."
칸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인적 없는 곳으로 세리아를 이끌었다.
"칸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혹시 방금 전의 전투에서 마나폭풍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예? 마나폭풍이라니요?"
마나폭풍이란, 마나를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일어나는 현상이다. 마법사들이 클래스를 높여 승급하거나, 검사들이 다음 경지로 오를 때 마나폭풍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세리아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음…… 만약 에이전트 기사단의 실력이 상승했다면 마땅히 칭찬해야 할 일이잖아요."
칸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에이전트도, 그레이 기사단도 아니고, 병사들도 아니었습니다. 재밌는 건 오크들의 뒤에서 마나폭풍이 일어났고, 그 직후 오크 수백 마리가 동결되어 죽었다는 겁니다."
"도, 동결이요? 그렇다면 속성마법이라도 사용했다는 건가요?"
오크 수백 마리를 동결시키려면 적어도 4클래스, 혹은 5클래스 이상의 공격 마법을 시도해야 한다. 하지만 칸이 알기로 4클래스에 그런 마법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속성마법도 아닙니다. 그자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병사들이 사용하는 검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머리색이 검은색이었습니다."
"거, 검은색이요?"
병사들이나 현재 프로시안 남작령에는 검은색 머리를 한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예. 제가 생각하기엔 얼마 전 아가씨께서 룩커 강에서 발견했던 그 청년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그를 처음 들쳐 업었을 때만 해도 4클래스에 버금가는 마나가 몸을 휘감다가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그가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세리아는 처음 청령을 만났을 때를 회상하고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방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겁이 나 경계하던 모습 등등 여태껏 지켜봐 온 그의 모습은 어디를 봐도 절대 칼을 들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호호호! 아이고, 배야. 칸 아저씨, 그건 절대로 아닐 거예요."
하지만 칸은 자신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밝히기 위해 언성까지 높였다.
"아니요! 분명히 그가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검은 머리입니다. 게다가 제가 따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어쩌면 룩커 강 상류에서 떠밀려 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룩커 강 상류 쪽으로 가면 기사의 나라인 '펠타온 제국'이 존재한다. 펠타온 제국은 마법과 정령 쪽에서는 취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기사의 나라답게 기사들만의 무력으로 제국의 명성을 거머쥔 강국이었다. 나라에서는 기사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실력이 없으면 귀족의 작위마저 뺏는 나라다.
황제마저 검에 대한 지식이 빠삭할 정도로 기사를 신성하게 여기는 곳이었다.
현재 유라시아 대륙에서 검에 속성을 다룰 수 있는 나라는 고작해야 펠타온 제국의 일부 상류층뿐이었다. 듣기로는 어느 귀족가의 독문검법은 죄다 속성을 드러내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 아저씨도 알다시피 상류 쪽에서 이곳 프로시안 남작령까지 떠밀려 오는 동안 죽지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에요."
"생명의 여신 플로아 님께서 보살펴 주신 것이 아닐까 합니다."
칸의 말을 곰곰이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렇게 된 거라면 우린 엄청난 인재를 얻은 것입니다. 그를 붙잡아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알았어요. 그럼 칸 아저씨께서 일을 맡아서 그를 감시해 주세요. 아셨죠?"
"걱정 마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눈을 빛내며 대답하는 칸을 향해 세리아는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주위가 마치 환해진 듯 느껴졌다.
처음만 해도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기사들을 쫓아갔다.
"이럴 수가!"
이후 청령은 오크를 본 순간 숨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다.
기사들은 병사들을 지휘하고, 각 부대의 대장들은 병사들을 다독였다. 그렇게 수성전으로 몬스터와 혈투를 벌이던 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자 청령은 충격을 받았다.
'책에서 보던 것과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똑같다!'
인간 이외에 유라시아 대륙을 구성하는 종족! 초록색의 몸체에 돼지 얼굴을 하고 약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오크라는 종족이었다.
송곳니가 입 밖으로 나와 흉폭함을 보여 주고, 세 살 먹은 오크의 힘은 인간 성인의 세 배 정도였다. 어느 정도 훈련된 병사가 아니고서는 오크들을 상대하기 힘들었다.
"크아아악! 내 팔!"
휘리리릭! 파앗!
한 병사의 비명 소리와 함께 그의 팔이 오크의 도끼에 양단되어 날아갔다. 그것은 한참 동안 허공을 돌다가 청령의 앞으로 떨어졌다.
청령은 조심스레 팔을 치워 내고 검을 들어 올렸다.
이곳의 제련기술은 형편없는 것인지 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장에서 파는 검도 이것보다는 강도가 좋을 것 같았다. 검병(그립)을 잡은 청령이 묵직한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다. 차라리 창을 드는 것이 훨씬 나을 듯했다.
"방패병! 방패병!"
"기마병들은 모두 기름을 부어라! 그리고 물을 끓여라! 투척병들은 궁병들을 보호하라!"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비명을 내지르고 오크들에게 죽는가 하면, 오크들 사이를 누비며 동료들에게 투쟁심을 심어 주기도 했다.
청령의 시선이 칸과 세리아, 그리고 여러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기사들에게 향했다.
"낯선 곳에서는 최대한 나를 숨기는 편이 좋겠지만, 병사들이 몬스터들에게 죽는 것을 내버려 둘 수만은 없지! 하지만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야 한다."
그는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곧바로 오크들을 향해 쇄도해 나갔다. 오크들은 그의 신형을 보고 급급히 글레이브와 도끼를 들어 찍어 내렸으나, 이미 청령의 모습은 그들의 시야를 벗어난 후였다.
"하아압!"
청령이 발악하듯 잔뜩 한음지기를 넣은 검을 허공에 뿌리면서 공간을 제압해 나갔다. 그의 기세에 오크들이 주춤거리며 몸을 벌벌 떨었다.
"풍천진의(風天進意)!"
청풍검법의 절초였다. 검세가 물 흐르듯 흐르며 그 파괴력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검을 들고 춤을 추기 시작하자, 오크들이 그의 검날에 모두 얼어붙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취이익! 무서운 인간이다! 피해라!"
"미친 인간이 날뛴다! 놈은 혼자다! 취익! 공격해라!"
피하는 오크와 공격하는 오크로 갈라졌다. 오크들은 살이 얼어붙는 한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들은 여지없이 청령의 검세에 먹이가 되어 얼어붙었다.
동결되는 오크들의 숫자가 어느덧 백을 넘어서자 이제 오크들의 눈빛에 두려움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오크 백 마리를 죽이는 데 고작 반각도 걸리지 않았다. 그의 검이 허공을 휘두르면 검풍이 날아갔다. 그 검풍에 직격당한 오크들은 모두 동결되어 죽었다.
"피해라, 피해! 취익! 인간 너무 세다! 취익!"
"어딜 피해! 인간들을 핍박하다니!"
청령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뛰어올라 오크들의 머리를 가격했다. 가볍게 움직이는 그의 각에 오크들은 곧바로 머리 없는 몸이 되어 피를 흩뿌렸다.
파바밧!
"이놈! 네놈이 이들의 대장이로구나!"
청령이 허공에서 약 대여섯 번을 휘돌더니 그대로, 제일 덩치가 큰 오크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어느새 그의 검에는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까앙!
오크 로드는 다른 오크들보다도 월등히 좋은 체격을 갖고 있었다. 그의 도끼가 허공으로 치솟더니 청령의 검을 단 한 번에 막아 냈다.
청령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신은 무인이다. 무인에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한동안 내공을 잃어 나서서 싸우지 못한 청령에게 오크들은 그동안의 화풀이 대상이나 다름없었다.
'그 정도도 되지 않았으면 실망이 컸겠지.'
청령은 오크 로드가 자신의 검을 막아 내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청령은 바닥에 착지한 순간 곧바로 송서초상비를 발휘해 오크 로드를 향해 쇄도해 나갔다. 그의 검이 검풍을 일으키며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부아앙!
"인간! 어림없다."
오크 특유의 소리를 내지 않는 오크 로드가 커다란 도끼로 청령의 검풍을 갈라냈다. 하지만 청령은 이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오크 로드의 후미로 돌아가 놈의 등 한복판을 향해 장을 후려쳤다.
"최심장!"
"큭!"
오크 로드는 순간 자신의 뒤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기의 파동에 즉시 몸을 옆으로 뺐다. 하지만 최심장은 이미 그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콰앙!
거대한 충격음이 들리고, 먼지 구름 속에 오크 로드의 오른팔이 그대로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취이이이익!"
오크 로드도 결국은 오크였나 보다.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잘린 오른팔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그대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놈, 어딜!"
"취, 취익! 기, 기다려라, 인간. 목숨을 살려 준다면……."
"용서 따위는 지금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다 혼백이 된 병사들에게나 구해라!"
촤아악!
청령의 한기를 머금은 검이 그에게 용서를 빌기도 전에, 오크 로드의 머리를 두 동강으로 잘라 냈다.
"취익! 로드 죽었다! 인간에게 죽었다. 취익!"
"도망가라! 취익! 취익!"
통제를 잃은 오크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그나마 소대장 격인 오크들이 동족들을 최대한 다독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두두두두두두!
"도망가! 취익! 죽는다!"
오크들이 그대로 도망치자 청령도 영지로 재빨리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크들이 도망치자 병사들은 모두 각자의 무기를 위로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 이겼다!"
일부 병사들은 눈물을 흘렸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친구와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 그리고 영지를 지켜 냈다는 뿌듯함과 자신감의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