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장 한음지기를 되찾다 □
레나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기사들에게 성희롱을 당하는 시녀들을 보면서도 그녀는 무심코 지나쳤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자신과 같은 시기에 시녀가 된 로셀이 기사에게 거의 강간당할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레나 자신이 보기에도 로셀은 시녀들 사이에서도 제일 예뻤다. 자신이 보기에도 그러니, 남자인 기사들이 볼 땐 어떨까? 평소 로셀을 음흉하게 쳐다보는 기사들만 해도 최소 셋이나 되었다.
레나가 기사들 앞에 다가섰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고서 곧바로 후회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기사들을 건드리다니.'
레나는 항상 무언가를 행하고 곧바로 후회하는 타입이었다.
그때 기사 중 하나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야야! 이쪽도 괜찮은데? 저년보다는 차라리 이년이 더 나은 것 같아."
레나는 사실 열다섯 정도밖에 되지 않아 어려 보이는 얼굴 덕에 미녀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시녀들 사이에서 귀여운 막내로 통하고 있었다.
기사가 손목을 잡자, 레나는 곧바로 반항하며 손목을 뿌리쳤다.
"뭐, 뭐예요? 지금 어서 가지 않으면 치안대를 부르겠어요."
당당한 말과 다르게 그녀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레나……!"
로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올해 18세가 된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바깥으로 튀어나왔고 옷은 단검으로 찢어져 하얀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후후. 이년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프로시안 영지는 시녀를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가 보군. 지금 너희는 기사를 모욕했다. 대륙기사법에 의거하여 너희 생존권은 내가 쥐고 있다."
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등을 돌려 누군가에게든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주위에는 그녀를 도울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아! 울지 말라고. 반항하면 거친 맛이 있긴 하지만 꼭 그런 년들이 자살을 해서 말이지."
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하라고? 내가 보내 주는 돈으로 간신히 사는데…….'
그녀는 결국 순순히 몸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월급으로 그나마 연명하는 가족들이다. 여기서 개죽음당한다면 결코 눈을 감지 못할 것이었다.
기사 하나가 단검을 꺼내더니 능숙하게 레나의 옷을 잘라냈다. 곧바로 그녀의 속옷이 드러나자, 기사는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남아 있는 옷을 모두 찢어 버렸다. 그녀는 속옷만 걸친 채 서 있었다.
가련히 떨리는 어깨를 잡은 기사가 레나를 땅으로 넘어뜨리고서는 자신의 플레이트 메일도 벗어 내렸다.
'아, 제발…….'
이미 로셀도 체념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레나는 구렁이가 살을 헤집는 느낌이 들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침 기사의 손이 그녀의 온몸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변한 것은 그녀만의 착각일까?
푸확!
"크어억!"
레나의 앞에 있던 기사 하나가 피를 토해 내며 그대로 3미터는 날아갔다.
"뭐, 뭐냐!"
"이런! 알로크!"
기사 둘이 대경실색하며 쓰러진 기사의 이름을 불렀다. 기사의 얼굴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둔기에 강하게 맞은 듯 복부가 움푹 파여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누구냐?"
알로크라는 기사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기사들은 곧,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한 청년을 볼 수 있었다.
"큭!"
챙챙―!
검을 뽑아 든 그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달려오는 사내와 직면했다.
기사가 방심했던 탓인지 청령은 어렵지 않게 한 명을 기절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둘!
청령의 신형이 기사들을 향해 튕겨 나갔다. 빠른 시간 내에 제압하지 못하면 불리해지는 것은 청령이었다. 기사들의 내공은 이류 끝자락에서 일류 정도는 되기 때문이었다.
고작 삼류보다 약간 윗줄인 청령에게 절대 불리한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챙챙―!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령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괜히 기사가 아니라는 듯 청령의 속도를 이미 눈으로 쫓고 있었다.
'송서초상비! 빨리 제압해야 한다.'
청령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적은 내공이 순식간에 밑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허억!"
"놈이 사라졌다!"
청령의 스피드를 놓친 기사들이 당황했다. 청령은 주먹을 든 채 유유히 그들의 후미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칠게 일권을 내뻗었다.
콰앙―!
내가중수법이 가미된 공격이기 때문인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기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청령도 그리 좋은 표정만은 아니었다.
'이런, 내가중수법으로도 저 갑옷 입은 기사에게 충격을 주기 어렵다니!'
차라리 얼굴을 공격했다면 쉽게 끝났겠지만 이들을 죽인다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그렇기에 청령은 최대한 이들을 제압하려 들었다.
"으으……."
청령의 일권을 옆구리에 얻어맞은 기사가 신음 소리를 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뭐야! 뭐에 당한 거지?"
"큭! 조심해! 놈은 피스트 익스퍼트다! 전문적으로 주먹을 익힌 놈이 확실해."
"뭐, 뭐얏! 피스트 익스퍼트?"
피스트 익스퍼트는 마스터의 전 단계로, 주먹만 전문적으로 수련한 이를 말한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처음 무기를 들면 웨폰맨이라 부르고 그 경지에서 한 단계 위를 웨폰 오러라고 부른다. 기사들의 경지는 대부분 웨폰 오러 상급에서 최상급이었고, 오러를 넘으면 바로 익스퍼트에 들어간다. 익스퍼트는 나라에도 몇 없는 귀중한 인재이기 때문에 황실기사단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을 수 있다. 그 다음 경지가 바로 마스터다.
대륙십강에 든 이들이 이 마스터라는 경지에 올라 있으며, 그들의 숫자는 전 대륙을 합쳐 고작 스무 명도 되지 않는다.
기사들은 청령의 가공할 스피드를 보고 그가 익스퍼트라고 짐작했다. 청령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저들의 기세가 그런대로 가라앉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레나. 빨리 친구를 데리고 먼저 가도록 해라."
"이, 이안 오라버니!"
청령의 외침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나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길!"
"빌어먹을! 익스퍼트일 줄이야."
철컥!
기사들은 나름대로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검을 움켜쥐었다. 이미 검을 뽑아 든 이상 그것은 죽기를 각오한 것이다. 그렇다면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수밖에 없었다.
청령이 한 걸음을 걷자 한순간에 3미터가 금세 좁혀졌다. 청령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한 기사의 턱을 향해 날아갔다. 그때 커다란 살기가 청령의 기세와 부딪쳤다.
팍!
"음……!"
청령은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의 주먹을 바라봤다. 그의 주먹이 두툼하고 거대한 손에 가로막혀 있었다. 고개를 스윽 옆으로 돌리자 알렌의 무표정한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청령은 조심스럽게 주먹을 빼냈다.
'다가오는 것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싸움 중이라고 해도 내 이목을 벗어나기는 힘들 터인데.'
알렌이 기사들을 향해 호통 쳤다.
"이놈들! 사고 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알로크를 빨리 병실로 옮겨라. 너희의 일은 나중에 추궁하겠다."
"예……."
시무룩해진 기사들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렌이 다시 활짝 웃으며 청령을 보았다.
"미안하네. 기사단이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교육이 부족한 것 같네. 좀 이해해 주게나."
순간 청령의 몸에서 엄청난 기세가 뻗어 나왔다. 청령이 뚝뚝 끊기는 말투로 말하며 알렌을 노려봤다.
"다. 시. 는. 이. 런. 일. 이. 없. 었. 으. 면. 좋. 겠. 습. 니. 다."
알렌은 태연하게 청령의 살기를 받아쳤다. 그의 몸에서도 반발하는 기운이 뻗어 나왔다.
"걱정 말게나. 애들에게 꼭 주의를 주겠네."
"흠, 그럼 저는 이만. 가자, 레나."
청령의 무위에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던 레나가 로셀을 부축하고는 그대로 청령의 뒤를 따랐다.
청령이 사라지자 알렌은 청령의 주먹을 막았던 왼손을 쳐다봤다. 마치 둔기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후후, 정말 대단하군. 외부의 충격을 줄이고 내부에 이런 엄청난 충격을 가할 줄이야. 순간적으로 마나를 손에 두르지 않았다면 평생 왼손을 못쓸 뻔했어.'
알렌은 재미있다는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변방에 위치한 시골 영지에 저런 인재가 있을 줄은 몰랐군. 정말 재밌어. 나중에 한판 붙어 보고 싶을 정도군.'
기사로서의 투지가 솟아나는 것을 애써 억누른 알렌이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자, 우리도 가자."
"옙!"
기사들이 알로크를 부축했다.
알렌이 고개를 돌려서는 청령의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청령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나는 고수였다. 그자의 실력이 최소 절정의 경지에서도 수위를 차지할 정도인 것이다.
"절정의 상급 정도 된다는 것인가? 어쨌든 다행이다. 그대로 계속 싸웠으면 정말 목숨을 버렸을지도."
하루 빨리 손상된 십이경맥을 치료하고, 초절정 때의 내공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밤낮을 운기행공에 매달려도 부족할 판이었다. 청령은 이대로 침실이 있는 동관으로 가려던 참에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라버니, 설마 아까 상처라도 나신 건가요?"
옆에서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레나에게 청령은 애써 괜찮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길은 레나의 부축을 받고 있는 로셀에게 가 있었다.
"아니, 괜찮다. 그나저나 그 친구는 빨리 의사에게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괜찮을 거예요. 단순히 기절한 것 같아요."
"혹시 모르니 의사에게 보여 줘."
"네, 근데 이안 오라버니께서는 어디 가실 곳이라도 있나요?"
평소처럼 청령의 발걸음이 동관이 아닌 본관으로 향하자 이상하게 느껴진 탓이다. 청령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응. 도서관에 갈 생각이야."
레나는 평소 청령이 도서관에 자주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다만 기사들과의 싸움 이후 곧바로 도서관에 간다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오라버니는 정말 쉬지 않고 책만 파고드는 분이구나. 그런데도 그 무위는 대체……?'
기사가 쓰러지는 것은 보지도 못했다. 그저 발이 움직였고, 그 발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곧바로 기사가 날아갔던 것이다.
'그 기사들이 말한 대로 정말 오라버니가 피스트 익스퍼트일까?'
익스퍼트의 경지는 그렇게 많진 않지만, 그래도 황실에 가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대륙에 분포된 익스퍼트의 숫자만 세어도 수천 명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 청령처럼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나이에 익스퍼트에 오른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레나는 아까 기사들끼리 나눴던 말을 떠올리고는 청령을 바라보는 눈을 달리했다.
'하긴 저런 노력을 보이시는데 결과가 없다면 그것도 참 난감하겠지.'
레나가 활짝 웃으며 청령에게 물었다.
"이따가 간식이라도 만들어 갈까요?"
"아니. 책만 잠깐 빌리고 갈 거야."
"예! 그럼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아 참! 레나, 아까 본 것은 모두 잊어 주겠어?"
믿어 줄 사람도 없지만 괜한 소문이라도 퍼졌다가는 청령이 매우 난처해질 것이다. 레나는 자랑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는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럼 난 먼저 가 보마."
'확실하다! 확실해!'
본관으로 향하는 그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레나를 구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나마 있는 내공이 사라지자 기를 읽는 것에 민감해진 것이다. 청령은 본관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득의에 찬 웃음을 지었다.
청령의 발걸음이 서재 앞에서 멈칫했다.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가 자주 얼굴을 보는 청령에게 인사했다.
"아, 아가씨의 손님 아니십니까? 오늘도 서재로 들어가실 겁니까?"
"아뇨. 잠시 화장실을 들러야 할 것 같은데……."
그의 급한 표정에 병사가 잠시 웃음을 짓고는 한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쭈욱 가시면 복도 끝에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맨 끝입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청령은 바지춤을 붙잡고 그대로 뛰어갔다.
병사는 그런 청령의 행동에 의심을 갖지 않았다.
한기가 느껴지는 방에는 이 서재를 넘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청령은 병사 쪽을 쳐다보고는 복도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섰다. 복도 끝에 다다라 계단을 바라보는 청령의 입가가 호를 그렸다.
"멀지 않다."
점점 가까워지는 한기에 청령은 단숨에 계단을 박차고 올라갔다.
3층까지 무리 없이 올라간 그는 곧바로 몸을 숨겼다. 3층에는 병사들이 둘로 짝지어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청령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싸웠던 흔적을 없애고 웃는 낯으로 병사들을 향해 여유롭게 다가갔다.
"넌 누구냐!"
"썩 돌아가지 않으면 몸에 구멍을 내 주겠다."
프로시안 남작의 침실을 지키던 병사들이 들고 있던 단창을 움켜쥐며 살기 어린 말로 위협을 가했다. 청령은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손을 번쩍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혀 마치 병사들 앞에서 겁먹은 시종처럼 보이도록 했다.
"자,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화장실을 찾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무례를 범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청령의 옷은 처음에 입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중원의 옷이었는 데다가, 이곳저곳이 찢어져 더 이상 입고 다닐 수 없었던 것이다. 평범한 복장을 차려 입은 청령의 모습에 병사들은 창을 내려놓았다.
"화장실은 내려가서…… 윽!"
마침 장소를 가르쳐 주려던 오른쪽 병사가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청령이 신법을 발휘해 순식간에 병사의 수혈을 짚은 것이다.
"이, 이런! 침입…… 컥!"
청령은 당황해서 고함을 치려던 다른 병사의 수혈마저 짚고는 그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질질 끌어냈다.
"죄송하지만 한 시간만 잠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는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고 있는 병사들에게 사과한 뒤, 느긋한 발걸음으로 한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다가가 그 방문 앞에 섰다.
청령의 입 꼬리가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 경악할 만한 엄청난 한기! 최소 중원에 있는 빙정에 맞먹는 영약이라고 생각할 만한 기운이었다.
"내 호기심을 자극한 영약이 무엇인지 볼까?"
그는 한 손으로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조금씩 방문이 열리고, 그 틈새로 거대한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는 중년의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 사람?"
둔기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할 만한 한기를 가진 것이 단순히 영약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음지체(寒陰肢體)?"
중원에서도 가끔씩 태어나곤 한다. 물론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십 년에 한 명 정도, 한음지체로 태어나 지독한 한기를 다스리지 못해 스무 살에 죽는 여인의 사례를 서적을 통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여인도 아닌 남성이 한음지체라니? 남성은 강한 양기 때문에 한음지체와 상반된 기운인 태양지체로 태어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남성이 한음지체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청령이 얼떨떨한 기분으로 중년의 남성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세리아냐?"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청령이 빤히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계속해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가까이 가지 않는 한은 보지 못할 것이다.
청령은 그 자리에서 멈춘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쿨럭! 쿨럭! 이 아비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은데, 어서 해 주지 않겠느냐?"
청령을 자신의 딸인 세리아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청령은 이 사내가 세리아의 아비인 프로시안 남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벌써 조건을 제시하더냐? 무엇이냐? 그렇게 말을 하기 힘들 정도라면 거래는 하지 말거라. 처음부터 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쿨럭! 쿨럭!"
그는 연신 기침을 했다.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주위의 온도가 더욱 내려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저런 모습으로는 하루도 살지 못하고 자살을 생각했을 것이다.
남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주신의 인도에 따라 난 여기까지가 허락된 목숨인 것 같구나. 네 할아버지에게 이 땅을 물려받아 최고의 영지로 만들려던 내 꿈은 여기에서 끝인가. 후후. 쿨럭! 쿨럭! 그래도 너 만큼은 이 영지를…… 영지를 소중히 해 줬으면 좋겠구나."
그의 모습에 청령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 말은 마치 유언과 같았다. 프로시안 남작이 눈을 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쿨럭! 후후. 이거 졸립구나. 이후의 일은 너에게 모두 위임하겠다. 세리아, 정말 미안하구나. 지금껏 해 준 것이 없어서……. 후후후. 이대로 간다면 나도 네 엄마를 만날 수 있겠지."
활짝 웃는 남작.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백만대군에 홀로 맞서는 장군 같아 보였다.
청령이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남작은 이내 눈을 뜨고 세리아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 가려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발소리가 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누, 누구……?"
남작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청령이 남작의 몸을 감싸고 있던 두꺼운 이불과 옷을 벗겨 내자 그의 눈이 흔들렸다. 복부에 살짝 손을 대 본 그는 단전을 감싸고 있는 지독한 한기에 혀를 내둘렀다.
청령은 곧바로 아혈, 마혈을 순서대로 점하고 남작의 몸에 양손을 댔다. 청명심법으로 주위에 기운이 뻗어 나가는 것을 막고, 만상귀일신공을 일으켜 내공이 모이는 대로 곧바로 남작의 몸에 불어넣었다.
청령은 새삼 없어진 열양지기가 아쉬웠다. 열양지기라면 남작의 몸속에 있는 한기를 쉽게 제압해 나갔을 것이다. 한편으론 다행인 점도 있었다.
'열양지기라면 능히 제압이 가능하지만, 나의 내공으로 만들기는 힘들지! 만상귀일신공의 패도적인 기운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나서 곧바로 잃어버린 한음지기의 자리로 안착시켜야겠어.'
애초에 한음지기를 되찾기 위해 이곳까지 오지 않았던가. 사람이 지독한 한기에 당하고 있었으니, 사람도 살리고 한음지기도 되찾고 꿩 먹고 알 먹고였다.
프로시안 남작은 몸을 울리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하지만 왠 줄은 몰라도 입에서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표정만 와락 구겨서는, 자신의 몸을 짓이기는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했다.
몸속에 있던 한기가 마치 자아라도 가지고 있는 양 새로운 마나에 대항하여 맞붙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 기운은 작고 작았지만 갈수록 힘이 더해 갔다.
어느새 그 기운들은 마나 보유고(단전)까지 치고 들어와 한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기들이 주춤하기 시작하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마나가 단전을 뒤덮었다. 집을 잃은 한기들이 뿔뿔이 흩어져 몸속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곧바로 마나들 또한 나눠져 몸속에서는 마나와 한기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남작은 자신의 마나로도 충격을 가하지 못한 이 한기들이 도망친다는 사실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통쾌함에 몸부림쳤다.
'한기들이…… 눈 녹듯 사라지다니.'
남작이 한참 놀라움을 표출하고 있을 때 청년, 아니 청령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단전을 점령하는 것까지는 쉬웠다. 그 기세로 만상귀일신공의 기운으로 몰아붙이니 제아무리 지독한 한기라도 몸부림을 치면서 도망을 갔다. 그러더니 놈들이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반격을 가해 오는 것이다.
'이거 제압하기가 쉽지 않겠는걸.'
일단 이 기운을 제압해서 단전으로 끌어들여야 내공으로 한음지기가 될 수 있었다. 청령은 마치 처음 빙정을 먹었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온몸으로 한기의 반격을 받아 냈다. 청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되도록이면 빨리 제압해야겠어. 내공이 얼마 남지 않았군.'
한기가 뿔뿔이 흩어졌으니, 따로따로 모아서 단전으로 이끌어야 했다. 물론 그 단전은 청령의 단전이다.
왼손이 한기를 빨아들이고 오른손으로 한기를 제압해 나간다. 잃어버렸던 한음지기를 되찾자 청령이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빨아들인 내공의 양만 해도 족히 이십 년 내공을 상회했다.
청령은 남작의 몸에 있는 한기 중에서 반 정도를 내공으로 만들었다. 그 양이 삼십 년을 조금 넘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하군. 일갑자의 한기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청령이 계속해서 작업하려던 순간, 그는 두 손을 떼고 숨을 죽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발소리만 들어도 몇은 되어 보였다.
청령은 숨을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스윽 둘러보고는 얼른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때맞춰 덜컥 열리는 문소리에, 그는 숨을 죽인 채 청명심법으로 주위의 기운을 갈무리했다.
프로시안 남작령에 하나밖에 없는 기사단의 이름은 에이전트이다. 삼십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몬스터의 땅인 장안의 숲을 근처에 두고 있어 실력들이 제법 대단한 자들이었다.
기사들 다섯 명이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청령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차, 남작에게 점혈해 놓은 것을 풀지 않았다……!'
에이전트 기사단의 단장인 그로퍼는 냉철하고 충성심이 강한 노기사였다. 그는 방금 전 영주를 지키던 병사들이 쓰러졌다는 보고에 허둥지둥 침실로 달려왔다.
때마침 세리아도 부관에게 보고를 듣고 병사들 열 명을 동원해 본관 출입문을 봉쇄하고 곧바로 달려왔다.
"어서 신관을 불러요! 아버지의 상태가 어떤지 봐야겠어."
세리아의 외침에 기사 하나가 달려 나갔다. 세리아가 곧바로 의자에 앉아 남작의 코에 손가락을 대었다.
"휴우. 다행히 몸은 괜찮으세요."
침실을 지키는 호위병사 둘이 기절해 있었다는 보고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아버지의 안위를 깨닫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기사들도 세리아의 말 한마디에 화색을 띠었다.
아니, 화색을 띠는 것은 오히려 남작이었다. 온몸에 일갑자나 되는 한기를 품고 살았던 그는 자신의 몸이 호전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남작은 이렇게 묻고 싶은 것을 속으로 삼켰다. 아까부터 말을 하려고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것은 아혈을 점혈당했기 때문이었다. 마혈까지 점혈당한 그는 손가락 하나 맘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덜컹!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온 기사의 뒤로 신관이 보였다. 프로시안 영지에 둘밖에 없는 신관이었다. 세리아는 오랜만에 만난 듯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 마리엔 님. 두 달 만이죠? 정정하시네요."
하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백발의 노인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껄껄, 이놈! 고작 두 달 동안 노부가 여신님의 곁으로 갈 줄 알았더냐? 생명의 여신 플로아 님께서는 나에게 아직 사명감이 있다고 올라오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신관의 사회적인 계급은 남작과 맞먹는다. 설사 자작 이상 급의 귀족들이라고 해도 신관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마리엔이라 불린 노신관은 줄곧 어렸을 때부터 세리아를 보았기 때문에 마치 손녀를 만난 듯이 대했다.
"아, 어서요. 할아버지. 얼른 아버지 상태를 봐 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녀의 재촉에 마리엔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리엔이 갑자기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남작의 몸이 하얗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 강렬한 빛에 팔로 눈을 가린 채 실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헛, 이 기운은!'
신성력의 기운에 반응한 것은 청령이었다.
낯설지 않은 이 기운에, 청령의 머릿속에 용아천에서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리바이브 리턴?'
용아천에서 노인장은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자신은 이 세계에 와 있었다.
죽을 것 같은 순간에 느낀 그 이상한 기운은 현재 남작 옆에 서 있는 노인의 기운과 유사했다.
'같은 종류인가……? 그랬구나! 노인장의 기는 이 유라시아 대륙의 기운이었어.'
청령이 그렇게 짐작하고 있을 때 마리엔이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를 닦고서는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상황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몸에 가득했던 한기의 기세가 누그러졌구나."
"예에?"
"헛! 마리엔 님, 그게 정녕 사실입니까?"
기사들과 세리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나 잠시 후 마리엔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아직도 치료가 완전히는 불가능하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플래임 플라워가 있지 않은 이상은 확실한 치료가 불가능할 게야."
그만 해도 어디인가.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좋은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마리엔 님."
"아니다. 언제든지 이 노부를 불러 주거라. 심심하면 신전에 놀러 와도 좋단다. 고지식한 페그 녀석이랑 있으려니 여간 심심해서 말이야. 껄껄껄."
페그는 마리엔의 제자였다. 다섯 살에 우연히 신전에 찾아왔다가 마리엔의 눈에 띄어 사제가 되었는데, 여신 플로아에 대한 믿음과 재능이 매우 뛰어난 자였다.
"그런데 마리엔 님, 아버지가 평소와는 다르게 말을 한 마디도 안 하시는데 왜 그러신 거죠?"
"아무래도 한기가 누그러지면서 생긴 일시적인 현상인 것 같구나.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게야. 그건 그렇고, 그 침입자라는 놈이 누군지는 알아낸 게냐?"
세리아가 고개를 힐끔 돌리며 기사들을 쳐다보자, 기사들이 저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더니 세리아에게 본관을 봉쇄하라는 명을 받은 병사가 들어왔다.
"아가씨! 본관 근처에서 수상한 자를 발견했습니다."
"뭐라구요? 알았어요. 지금 당장 그자를 포박하세요. 마리엔 님과 그로퍼 경은 저를 따라오시구요. 욘지 경은 병사들에게 이 침실을 지키게 하세요."
"알았습니다."
에이전트 기사단의 부단장인 욘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두 방을 나섰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청령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오더니 몸을 쭈욱 폈다.
"에구구, 정말 위험했다. 발각될 뻔했어."
청령은 남작의 아혈과 마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남작이 신기한 듯이 청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기에 나를 도와줬는지 모르겠군."
청령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도와주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순수 한음지기를 얻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따님인 세리아 소저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난다면 언제든 찾아와 주겠나? 아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내 병을 치료할 수 있는가?"
청령은 살짝 고심했다. 만약 남작이 정말 한음지체를 가졌다면 그것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음지체는 끊임없이 한기를 내기 때문이다. 마르지 않는 우물을 비워 내려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몸으로 한음지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남작은 다른 병에 걸렸다고 봐야 했다.
"매일 이 시간에 한 번씩 들르겠습니다. 저도 장담은 하지 못합니다."
청령은 그 말과 함께 창문을 열고 그곳으로 뛰어내렸다. 프로시안 남작은 청령을 부르려다가 깜짝 놀랐다.
"자, 잠깐! 여기는 3층……!"
청령은 사뿐히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반 갑자의 내공을 보유하게 된 청령에게 3층 정도의 높이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아직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한음지기를 확인하고는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좋아.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천천히 내 내공으로 완벽히 흡수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