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머리로 판단하기보다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할 때
■ 제5장 머리로 판단하기보다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할 때 □
프로시안 영주의 서재는 도서관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규모를 가진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곳에는 언제부터인가 도서관과 같은 담당 사서가 생겼고, 간단한 출입증만 있으면 들락날락할 수 있을 정도로 왕래가 잦아졌다.
출입증은 사서와 친분이 있으면 쉽게 발급받을 수 있기 때문에 평소 점심시간 때면 시녀와 시종들로 북적거렸다.
이곳을 담당하는 사서인 베룬 준남작은 평소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해 사서가 되기를 자처한 자였다. 그는 서재 내에 안 읽어 본 책이 없을 만큼 독서량이 대단했다.
그는 책에서 눈을 떼었다.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을 고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자 만족한 웃음을 보였다. 책을 읽으며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 것이다.
베룬 준남작이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 순간 책에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베룬이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자 한 청년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룬은 살짝 기분이 나빠졌지만 방금 전의 그 좋은 기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이내 물었다.
"찾는 것이 있소?"
"글을 배우고 싶습니다."
"글이라고 하면……."
대륙어를 포함하여, 유라시아 대륙에는 수십 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한다.
"대륙어를 찾고 있습니다. 혹, 책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대륙어라면 따라오시오."
계속 책상에 앉아 있었던 탓인지 몸이 찌뿌드드했다. 좀이 쑤시던 때에 책을 찾는다는 사람이 있었으니 스트레칭 겸해서 잠시 몸을 일으켰다.
왼쪽 책장의 끝으로 다가선 베룬이 안경을 스윽 닦고는 제목 없는 책들을 이리저리 꺼내 보았다.
"어디 보자. 대륙어라. 사람들이 찾지 않는 책이라 구석에 넣어 뒀더니 잘 보이지가 않는군."
대륙어 입문서 중에는 오백 년 전 프라스 제국에서 편찬된 책이 제일 인기가 있었다. 따라 하기가 쉽고 금방 배울 수 있는 책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오백 년 전 편찬된 책이라, 제목이 없다 보니 좀 오래 걸리오."
오백 년 전 학자 말살정책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 프라스 제국의 5대 황제였던 베이로니아 반 프라스는 폭군이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를 없애고자 학자들을 제거하고, 대륙의 모든 책을 불태웠다. 그때 학자들은 목숨을 연명하고 책을 편찬하기 위해, 제목 없이 책을 내곤 했다.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베룬이 책을 휘리릭 넘겨 보더니 화색을 띠었다.
"아, 여기 찾은 것 같소. 이것이오. 웬만큼 아둔한 사람도 3개월이면 글을 뗄 수 있을 정도로 기본이 탄탄한 책이오."
베룬이 아둔한 사람 운운한 것은, 자신의 앞에 있는 청년이 그렇게 멍청해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배우려는 의지도 있고 열정도 엿보이지만, 얼굴만 반반한 머릿속이 텅 빈 자 같았다. 그저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유식한 척하려는 시종같이 보인 것이다.
책을 받아 든 청년이 책을 한번 만져 보더니 표지에 묻은 먼지를 입김으로 불었다. 몇 년간 손도 안 댄 책이다 보니 엄청나게 쌓인 뿌연 먼지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책을 펼쳐 본 청년, 청령이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아니오. 그럼 난 이만."
베룬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그는 사람이 없는 테이블로 가서 조용히 펜과 종이를 꺼내 들었다. 여기 오기 전에 레나가 챙겨 준 것들이었다.
'중원의 문자에 비하면 턱도 없이 외우기 쉬운 글자야. 이 정도라면 며칠이면 문제없겠어.'
중원에 있을 때는 방 안에 틀어박혀 심법을 단련하거나 책을 읽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을 잡고 글공부를 하자 그 모습이 마치 서생처럼 먹향이 진하게 풍겼다.
* * *
프로시안 남작령 옆에는 헤일론 백작령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헤일론 백작은 슈레이더 왕국에서 다혈질적이고 색을 탐하는 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능력은 검술에 있었다. 나이는 사십 줄에 접어들어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에 도달해 있었다. 보통 오십이 되어야 가까스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는 것을 본다면 굉장히 빠른 발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프로시안 남작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아침에 찾아온 부관의 보고 때문이었다.
"현재 프로시안 남작의 병세가 위독하여 그의 여식인 세리아가 '플래임 플라워'를 찾는다는 정보입니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 약초가 아니면 고칠 수가 없답니다."
"플래임 플라워?"
백작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부관을 쳐다보았다.
"손발이 차가운 자들에게는 최고의 약초라는 찬사가 있습니다. 현재 프로시안 영지 재정상 십만 골드나 하는 플래임 플라워는 구할 수 없습니다."
프로시안 영지의 일 년 세금은 오만 골드다. 평민들은 1골드만 있어도 며칠간은 먹고살기에, 오만 골드면 엄청난 액수였다. 하지만 프로시안 영지의 세금 대부분이 몬스터의 침입을 막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남는 게 없었다.
"다른 정보에 따르면 장안의 숲 곳곳에 금과 미스릴 광산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프로시안 남작은 쉬쉬하는 모양이지만, 이것은 기회입니다. 플래임 플라워와 맞바꿀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프로시안 영지에는 장안의 숲을 개척하고 그곳을 농토로 메운 뒤 광산을 개발할 돈과 인력이 없었다. 그들로서는 훗날을 도모하며 그 사실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헤일론 백작은 달랐다. 그의 재력은 왕국 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으며, 사병들과 기사들의 힘은 날로 강대해졌다.
"저희는 그저 플래임 플라워와 장안의 숲의 그 땅, 그리고 보급을 지원받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들이 쉽게 거래를 하겠느냐?"
"어차피 절박한 것은 그들이고, 저희는 하나도 아쉬운 게 없습니다."
"음…… 좋아. 그럼 이번 일에 누구를 보내면 좋겠느냐?"
백작령에는 프로시안 영주의 목숨과 거래를 벌일 만한 능력이 있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백작은 부관을 보내고 싶었지만, 옆에서 보필하는 부관이 없으면 그 자신이 불편했다.
"백작각하! 이번에 새롭게 창단한 그레이 기사단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능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입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령에는 백오십 명의 기사들이 있고, 총 네 개의 기사단이 있었다. 이번에 창단된 그레이 기사단은 삼십 명으로 구성된 기사단이었다. 기사단 하나가 프로시안 영지의 기사들과 맞먹는 전력이었다.
"좋다. 내가 곧바로 친필 서한을 써 줄 터이니, 그들을 프로시안 영지로 보낼 채비를 하도록 하거라."
* * *
청령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어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의 서재에서 먹고 자고 모든 것을 해결했다.
가끔씩 레나가 찾아와 안부를 물었지만, 청령은 괜찮다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레나가 찾아올 때마다 손수 만든 음식을 내밀었기 때문에 그다지 배고프지 않았다.
멀찍이서 책을 읽던 베룬이 청령을 힐끔 쳐다보며 기특하다는 듯 웃음 지었다.
"흠, 정말 처음에 봤을 때와는 다르군. 달라. 나보다도 일찍 오고, 늦게 나갈 줄이야……."
그는 청령이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베룬은 청령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음을 자책했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봐선 몰라. 신기하다, 신기해."
그때 마침 청령이 자리에서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섰다. 그가 보던 책은 덮여 있었다. 청령은 책을 들어 제자리에 꽂아 놓고는 베룬을 향해 다가왔다.
"오늘은 이만 갈 생각이오?"
"아닙니다. 이번에는 사전과 역사서를 보고 싶습니다."
"아니, 글도 제대로 못 읽는 사람이 어떻게 역사서와 사전을 본단 말이오?"
베룬이 심드렁하니 말하자 청령은 웃음을 지었다.
"이틀 전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문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뭐, 뭣이오!"
글을 이틀 만에 뗐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머리 좋은 어린아이도 최소 1개월은 걸린다. 그만큼 대륙어는 심오하고 오묘한 언어였다. 게다가 역사서와 사전을 찾을 정도가 되려면 2개월은 지나야 한다.
그런데 고작 이틀이었다. 아이들보다 30배나 빠른 속도였다. 베룬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베룬의 눈에는 그런 청령이 오만하게까지 보였다. 베룬이 청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 묻겠소. 그 대답 여하에 따라 역사책과 사전을 드리겠소이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문제없습니다."
베룬은 처음에는 쉬운 문제를 냈다. 제대로 배운 사람이라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청령은 문제를 내자마자 곧바로 답을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그것보다 어려웠지만 이번에도 청령은 여유롭게 맞힐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어려워지는 문제 역시 청령은 척척 맞혔다.
'세,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베룬은 기절초풍할 것만 같았다. 열 문제 중에 청령이 답을 말하는 시간이 채 2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다음 문제를 냈다.
방금 전에 낸 문제들이 몸 풀기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웬만한 대륙인들도 맞히기 힘든 것이었다. 바로 고대에 쓰던 대륙어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청령은 쉽게 맞혔다.
"이쯤이면 됐습니까?"
청령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묻자 베룬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그렇소. 그럼 곧바로 역사서와 사전을 드리겠소이다. 어떤 역사서를 원하오?"
"유라시아 대륙에 있는 나라들의 건국기와 설화, 전설 모든 것들을 원합니다."
"분량이 엄청날 텐데?"
"상관없습니다."
"그럼 자리로 돌아가 있으시오. 내가 찾아서 가져다주겠소."
"예, 그럼."
베룬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청령이 원한 책들을 하나하나 꺼내 주었다. 쌓아 놓은 책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많았다.
백여 권을 웃도는 책에, 독서를 하고 있던 다른 이들마저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청령은 중간에 놓인 책 한 권을 빠른 속도로 빼내었다. 놀랍게도 책을 쌓아 놓은 더미들이 무너지지 않았다. 이 책에는 고대국가들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고대국가들에 대한 설명에는 빠지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이종족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종족이라 하면 인간유사종족이라고도 불리는데 그들은 바로 장인의 손 드워프, 축복 받은 종족 엘프, 마나의 어머니라 불리는 드래곤 등이었다.
고대국가 시절 더불어 살던 그들은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는데 드워프는 산으로, 엘프는 숲으로, 드래곤은 동굴로 사라졌다. 이에는 많은 설이 있는데 이종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고, 제일 유력한 설은 그들이 개체 수가 적어 은밀히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호오!"
사전에 나온 이종족의 그림 중 엘프의 그림을 본 청령이 탄성을 내뱉었다.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외모였다. 혹시 미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엘프에 대한 설명에는 그림이 오히려 부족하다고까지 써 있었다.
청령이 드워프를 슬쩍 보니, 그들은 4척(120센티미터)정도의 짤막한 키에 나이를 먹을 수록 장인이 된다고 쓰여 있었다. 드워프와 엘프는 견원지간이라 할 수 있었다. 드워프는 광산을 개발하고 나무를 베지만, 엘프는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드래곤은 중원의 용과 유사했다. 차이점이라면 이무기처럼 여의주를 통해 용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해츨링이 나이가 먹으면 드래곤이 된다는 점이다. 중원의 용에게 날개만 붙이면 영락없는 드래곤과 같았다.
청령은 반 시진 만에 그 책을 독파하고 다른 책을 꺼내려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생각해 보니 이틀 동안 책만 읽는 바람에 잠을 자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내상이 완전히 치료된 것이 아니었기에 잠은 중요한 치료 수단이었다.
청령은 베룬에게 부탁해 한 권의 책만 달랑 품에 낀 채, 나머지 책은 한쪽 구석에 처박았다. 베룬은 그간 청령을 좋게 봤는지 흔쾌히 허락했다. 청령은 곧바로 서재를 나와 동관으로 향했다.
동관으로 향하는 동안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세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여기 계셨네요! 한참을 찾아 돌아다녔어요."
"무슨 일입니까?"
"내일 헤일론 백작령에서 그레이 기사단이 올 거예요. 웬만해서는 그들과 부딪쳐서 좋을 게 없거든요. 그러니 웬만해서는 밖으로 나오지 마시라고요."
그녀는 영주의 딸이다. 귀족인 것이다. 그리고 청령은 일개 평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세리아는 청령이 걱정되어서 찾아다녔던 것이다.
"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어차피 서재에만 처박혀 있을 생각이었다. 청령도 괜히 기사들과 엮이고 싶진 않았다. 청령이 곧바로 세리아를 지나쳐 동관으로 향하자,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저기! 잠깐만……."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세리아는 몸을 배배 꼬며 입을 열지 못했다. 청령을 보면 마음이 이상했다. 모성애 비슷한 감정이 이는 것도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욧!"
그러고는 곧바로 본관으로 달려갔다. 청령이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틀 동안 서재에 머무는 사이 레나와도 상당히 친해졌다. 레나는 청령을 정성껏 모시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자주 먹을 것을 싸 들고 서재로 향했다.
레나는 어느 정도 청령과 말을 트고 지낼 수 있었다. 예전처럼 격식을 차리는 사이가 아니었다. 레나는 오늘 시녀들과 있었던 일을 조잘거리며 떠들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레나는 사실 제법 수다쟁이였다.
동관에 들어서자 레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청령의 옆으로 찰싹 붙었다.
"이안 오라버니. 사실 말예요, 저희 집에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는데, 얘들이 쌍둥이거든요! 그런데 서로 자기가 먼저 태어났다고 우기는데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 아세요?"
이안은 이 세계에서의 청령의 이름이었다. 청령이란 이름의 발음이 어려워 생각나는 이름 중 하나를 아무것이나 내뱉은 것이다.
청령은 굳이 레나를 피하지 않았다. 레나의 말을 듣다 보면 그녀가 상당히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의지가 될 것은 수다밖에 없었다.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그런 수다 말이다. 여기 와서 시녀들 외에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글쎄?"
"푸훗, 놀라지 마세요. 사실 여동생이 먼저 나왔는데, 걔가 숨을 못 쉬어서 잠깐 심장이 멈춘 적이 있어요. 그리고 곧바로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그 소리에 여동생의 심장이 깜짝 놀라 다시 되살아났다는 거 아니에요! 여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다시 태어났다고 치면 둘이 동시에 태어난 게 되기 때문에 둘 중 누굴 우위에 둘지 모르겠어요."
"하하. 그래?"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레나는 조잘거리며 떠들다가 청령이 들고 있던 책을 발견하고는 이리저리 살펴봤다.
"어라? 이 책은…… 여신의 축복을 받은 라인하르트 황족에 대한 것이네요."
"라인하르트?"
청령이 무엇이냐는 듯 묻자 레나는 아는 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헤헷, 사실 라인하르트 황족은 모두 여신의 축복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남자들에게는 무한한 카리스마를 보여 주고, 여자들에게는 아낌없는 매력을 발산한다고. 대부분의 라인하르트 황족들은 검은 머리를 하고 있는데…… 그러고 보니 이안 오라버니도 검은 머리네요."
유라시아 대륙에 검은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당히 드물었다. 물론 레나가 청령을 라인하르트 황족이라 보는 것은 아니었다.
"라인하르트라는 나라는 못 들어 봤는데?"
"이십여 년 전에 멸망한 국가예요. 프라스 제국과 그 속국들 모두 유라시아 대륙의 40퍼센트를 차지하는 거대한 땅을 가진 라인하르트 제국을 두려워했지요."
"그래?"
왠지 상당히 정감 가는 이름이었다.
청령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레나가 침대 시트를 깨끗하게 갈아 놓았다. 더 이상의 악취는 이제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청령은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프로시안 영지에는 이른 아침부터 삼십여 명으로 구성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워― 워―!"
말을 진정시킨 중년의 남자가 성벽을 바라보고는 외쳤다.
"문을 열어라! 나는 헤일론 백작님의 서한을 가지고 온 그레이 기사단의 단장 알렌이다!"
성벽 위에 있던 병사는 어제부터 보고를 받은 것이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서를 보여 주시오!"
알렌은 귀찮은 표정을 짓더니 품속에 있던 확인서를 꺼내 들었다. 눈 좋은 병사가 확인서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어라!"
꼬박 며칠을 달려온 탓인지 기사들은 저마다 쉬고 싶은 생각에 곧바로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안내하겠다는 자들을 거절하고는 곧바로 본관 쪽으로 향했다.
세리아가 시녀와 기사 몇을 대동한 채 이미 본관에 마중 나와 있었다. 그레이 기사단은 세리아를 보고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기 바빴다.
이것은 명백히 귀족을 무시하는 행사였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기사단의 뒤에는 헤일론 백작이 있었다.
헤일론 백작은 이 근방에서는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대한 영지와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귀족이었다. 당연히 기사들로서는 자부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렌 경이라고 하셨나요? 일단 오늘은 쉬시지요.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녀는 직접 그레이 기사단을 안내했다. 세리아의 아름다운 자태에 그레이 기사단 전원이 헤벌쭉 침을 흘렸다. 저토록 예쁜 여인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단장 알렌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교계에 나가면 눈독 들일 귀족들이 많겠군. 백작님이 탐내시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것이 세리아에 대한 알렌의 첫인상이었다.
세리아가 안내한 곳은 동관이었다. 안내를 하는 동안에도 자꾸 청령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손님을 접대하는 데 동관만큼 괜찮은 곳도 없었다. 사전 연락을 통해 레나에게 말은 해 놓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조치는 그들의 방을 1층에 잡는 것이었다.
"전담시녀들을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시녀들을 통해 전해 주세요."
그녀의 고운 목소리에 기사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세리아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 무표정을 짓고서는 등을 홱 돌려 버렸다.
세리아가 사라지자 알렌은 단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너희는 헤일론 백작각하의 기사들이다. 백작각하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놀도록!"
기사들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그중 한 어린 기사가 크게 외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장님! 그거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자, 그럼 내가 지시하지 않는 동안에는 뭘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예!"
기사들의 대답이 동관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세리아 아가씨께서 그레이 기사단 분들이 동관에 머무르시니 최대한 그들을 피해 다니라 하셨어요, 오라버니."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청령은 레나의 말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어차피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내공도 없고 무공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과 맞서 봤자 하등 좋을 것이 없었다.
지금 청령에게 중요한 것은 손상된 십이경맥이 치료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이 세계의 역사와 간단한 지식에조차 무지했으니 그 점에도 염두를 두고 있었다.
새로운 무공이라고 해 봤자, 십이경맥을 치료할 때까지만 사용할 목적으로, 현재 청성파의 청풍검법을 토대로 만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은 서재에 가지 말고 내상을 치료할 겸 무공 창안을 해야겠다.'
청령은 일단 만상귀일신공을 운용했다. 그리고 청명심법으로 최대한 기를 갈무리하여 바깥으로 절대 드러나지 않도록 주위를 기울였다.
'좋아, 일단 됐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만상귀일신공을 운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기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청령은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레나에게 웃음을 지었다.
"레나, 이제부터 책을 읽어야 하니, 잠시 나가 줄래?"
레나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작게 투덜댔다.
"쳇, 오라버니는 저랑 놀아 주기 싫으신가 봐요. 하루 종일 빨래에 설거지에, 얼마 전에는 오라버니 방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시트를 빠느라고 이 가녀린 팔뚝이 알이 다 뱄다고요."
"그럼 여기 앉아 봐."
청령이 손짓으로 가리킨 곳은 침대 모퉁이였다. 갑자기 레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거, 거긴 왜요?"
"글쎄 그냥 여기 앉아 봐."
청령의 재촉에 레나는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침대 모퉁이에 앉았다. 생각해 보니 너무 말이 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이가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그는 아가씨의 손님이었다.
청령은 개의치 않고 내공을 조금 끌어올렸다. 그의 손에 작은 기운이 맺히더니 허공에 손가락을 찍었다.
탕탕!
"아!"
추궁과혈의 수법이었다. 레나는 피로가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곧바로 몸속으로 들어오는 이질적인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청령이 그녀의 몸속에 내공을 불어넣은 것이다.
"자, 됐지?"
"어떻게 하신 거예요?"
놀란 듯 묻는 레나의 말에 청령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안마에 재능이 있나 봐."
안마라는 말에도 레나는 별 의심 없이 곧바로 바깥으로 나갔다. 추궁과혈은 정확한 혈 자리를 알고 있어야만 펼칠 수 있기에 삼류들이 펼쳤다가는 백치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청령의 내공은 이류에도 미치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다만 혈도의 위치는 손바닥 보듯 꿰고 있었다.
청령은 운기행공을 하면서 무공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켜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청성파 무공들의 대부분은 패도적이고 악랄하기 짝이 없는 것들뿐이었다. 청령이 마공을 사용하는 잠룡수라대에게 크게 밀리지 않았던 것은 청성파의 무공 또한 마공과 같이 패도적이기 때문이었다.
청령이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칠십육로무형지!"
미세한 공력이 끌려 올라오더니 십이경맥 부분에 이르자 청령의 입이 벌어졌다.
"크윽!"
진원진기를 반이나 소모했으니 십이경맥이 심한 손상을 입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나 해서 무공을 펼쳐 본 청령은 새로운 무공에 더욱 집착을 느꼈다.
"멀쩡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청명심법과 만상귀일신공, 최심장뿐이군. 송서초상비(松鼠草上飛)는 나보다 윗줄의 고수를 만났을 때는 통하지도 않을 테고."
송서초상비는 말만 그럴듯하게 가져다 붙인 이류무사들의 신법이었다. 평상시에도 기(氣)를 워낙 많이 먹기 때문에 빙허임풍처럼 경공같이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청령에게 제일 시급한 것은 검법이었다. 십이경맥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검법은 청풍검법밖에는 없다. 일류무공은 아니지만 한때나마 청풍검이라 불리던 청성파 장문인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으니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무공에 대해 골머리를 앓다 보니 어느덧 또다시 하루가 지나갔다.
고민하는 것은 청령뿐만이 아니었다. 세리아 또한 본관 집무실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아가씨! 이것은 명백히 우리 프로시안 영지를 깔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명을 내리신다면 당장 그놈들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맞습니다! 그놈들은 기사도마저도 버린 놈들입니다."
세리아는 기사들의 항의에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레이 기사단은 하루쯤 지나고 나서야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속시녀들을 희롱하고, 영지 곳곳에서 행패를 부린 것이다. 심지어는 선량한 영지민에게 시비를 걸어 돈을 요구하는 놈들도 있었다.
보다 못한 기사들이, 세리아가 집무를 보러 오자마자 곧바로 달려온 것이다.
"후우. 조금만 참아 주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알렌이 가지고 온 것은 플래임 플라워였다. 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약초!
세리아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약초가 필요했다.
기사들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결국 물러섰다. 하지만 세리아로서도 그들의 괘씸한 짓을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하루 빨리 영지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겠어.'
"부관!"
세리아가 크게 외치자 한 곳에서 영주 대리로서 집무를 보고 있던 부관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섰다. 그는 프로시안 영지에서 이십 년을 넘게 일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적절한 상황에 임기응변식 대처에 놀라운 인물이었다.
부관은 세리아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곧바로 시원스런 대답을 내놓았다.
"저와 칸 님을 데리고 알렌 경과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부관은 이런 일에 능통하니 접촉을 시도할 때 제일 중요시되는 인물이다. 칸은 4클래스 마법사였으니 그들의 기선을 제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었다.
"언제쯤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것은 시간을 두고 차차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절대 조급해 한다는 것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급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 그들이 유리해진다. 그렇다면 아무리 허무맹랑한 거래 조건이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아가씨께서는 절대 우리 영지의 기사들과 그들의 접촉을 피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기사들끼리 싸움이 일어나면 양패구상만 될 뿐이다. 프로시안 영지는 그나마 남아 있는 기사들을 잃게 되는 일이다.
"그럼 부관이 나머지 일을 처리하고, 병사들과 기사들을 철저하게 관리해 주세요. 그리고 그들이 치고 다니는 사고의 피해를 줄일 방법도 생각해 보시고요."
세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 나가자 부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어디를 가시는지요?"
"잠시 아버지께 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요새 바빠서 얼굴을 못 보여 드렸거든요."
"예, 그럼 살펴 가십시오. 나머지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세리아가 살짝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가 곧장 향한 곳은 아버지의 침실이었다. 집무실에서 침실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뚝.
세리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길을 돌려 창밖을 보자 그곳에는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남자 하나가 메이드복을 입은 시녀를 희롱하는 것이 보였다.
기사도를 운운하는 기사들이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양아치 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세리아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때 마침 그레이 기사단의 단장인 알렌이 다가왔다. 알렌의 눈동자를 바라본 세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저 기사들보다도 더욱 타락한 자.'
그녀의 본능은 알렌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알렌이 사고치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다만, 이 일을 주도하는 것이 알렌이라고 짐작이 되었다. 그러니 자신의 부하들이 저런 짓을 해도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를 만날까 합니다, 알렌 경."
"후후. 그러십니까? 이거 어쩌나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인 프로시안 남작의 숨이 헐떡거리는데 말입니다. 빨리 만나 보는 게 좋을 겁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세리아가 주먹을 움켜쥔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언성을 높였다.
"……알렌 경! 지금 당신은 귀족을 모욕하고 있어요!"
"제가 그러지 못할 위치입니까?"
"……."
세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보통 기사들의 신분은 준남작이다. 귀족도 아니고, 평민도 아니다. 준남작들은 영지를 갖지 못하고, 세금도 철저하게 낸다. 다만 그들이 평민들과 다른 것은 평민들보다도 높은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중 신분상승을 많이 꾀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백작 휘하의 기사단장은 적어도 남작의 힘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었다.
"후후, 빨리 거래를 진행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저희도 이런 구질구질한 곳에서 더 있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리아가 이를 갈며 낮은 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사흘 후로 하겠습니다."
"아니요. 조금만 더 빨리 잡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내일은 어떻습니까?"
"좋아요."
"플래임 플라워에 대한 거래 조건은 내일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닐 겁니다. 영지 사정으로 충분히 가능한 것일 테니……."
알렌은 말을 하는 도중 묘한 웃음을 지었다. 세리아는 이 상종 못할 기사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듯 심한 모멸감을 느끼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침실에 들어서자 문 밖에서도 느껴지는 한기에 저절로 세리아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침실 한가운데 위치한 침대 위에는 허옇게 무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누워 있었다.
"……?"
"예, 아버지."
그녀는 침대 옆에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는 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앉아 있는 의자가 매섭게 차갑고, 맞잡은 아버지의 손은 한겨울의 눈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아버지를 보며 울분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최대한 눈물을 삼켰다.
"우느냐?"
아버지의 걱정스런 말투. 눈은 완전히 의지를 상실해서, 총명했던 눈빛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세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더 이상 아버지를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요, 전…… 울지 않아요."
"그럼 다행이구나."
아버지는 하루 종일 천장만 바라보고 산다. 세리아가 고개를 돌린 것도 모를 것이다.
"부관이 그러더구나, 헤일론 백작이 보낸 그레이 기사단이 왔다고. 그들이 가져온 것이 플래임 플라워……라지?"
"걱정 마세요, 아버지. 반드시 거래를 성사시킬 테니까요."
"심히 걱정이 되는 구나……. 헤일론 백작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아마도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거래를 하려고 들 테지. 나의 목숨 값이라면서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요. 그 어떤 것이라 해도 지불할 수 있으니까요. 아버지의 목숨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요."
순간 남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거라."
"예?"
순간 세리아는 자신의 귀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 조건이 충분히 감당 가능한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거래를 하지 말거라. 어차피 나 하나의 목숨은 그리 중요하지가 않아. 부관에게 들어 보니 영주 자리는 나보다는 너에게 어울리는 듯싶구나."
장안의 숲을 끼고 있는 변방의 작은 영지지만, 프로시안 영주가 딴 마음을 품었더라면 벌써 사라지고 없어졌을 것이다. 남작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청춘을 불태웠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려고 어떻게 하고 있는 줄 진정 모르시나요? 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등을 돌렸다.
"무엇이라 해도 상관없어요! 아버지만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한 세리아가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갔다. 문 닫는 소리를 들은 남작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후후, 정말 제대로 자랐소. 여보…… 그렇지 않소?"
"으다앗!"
뚜둑!
관절이 비명을 내질렀다.
청령은 기지개를 쭉 켜며 하품을 했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했다.
청령이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조용히 올려놨다. 붓으로 쓰는 거라면 할 만하지만, 펜이라는 신기한 물체로 글씨를 쓰다 보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결국은 한 것이라곤 별로 없구나."
하루 만에 무공이 만들어졌다면, 개나 소나 무공을 만든다고 설쳤을 것이다. 물론 기존의 무공을 새롭게 변형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힘들었다.
"에휴. 열양지기나 한음지기, 그 둘 중 하나의 기운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최대한 그것들을 고려해서 좋은 무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텐데. 진정 아쉽구나, 아쉬워."
한숨을 내쉬던 청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내공을 되찾는 동안 꾸준히 훈련을 해서 체력을 보강할 생각이었다.
지난번 귀창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은 실력의 차이도 있지만 체력 문제가 제일 심각했다.
'그러고 보니 귀창은 어떻게 됐을까?'
초절정을 넘어 화경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청령과 고작 한 단계 차이지만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청령이 지금껏 보아 온 인물들 중 제일 강한 자였다.
용아천의 물살은 제법 강했다. 계속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둑이 무너져 같이 쓸려 나갔을 것이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예의 노인장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노인장이 했던 말은 확연히 대륙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말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그는 노인장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또 이유도 모른 채 이계로 끌려왔다.
어느새 바깥으로 나온 청령의 눈이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불똥을 튀었다. 처음 보는 이들이 지나가는 시녀들을 희롱하기 바빴다. 그런 광경은 한 곳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저들이 얼마 전에 왔다는 그 기사들인가?"
프로시안 영지의 기사들과 비슷한 기세를 갖춘 자들이었다.
레나에게 듣기로는 헤일론 백작령에서 온 그레이 기사단이라고 들었다. 그들이 왜 방문했는지에 대해서는 레나 역시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레이 기사단은 막강한 힘을 지녔어요. 괜히 건드리면 좋은 꼴을 못 보니 최대한 방 안에서 숨어 지내세요.'
프로시안 영지의 기사들보다도 더욱 거칠다고 들었다. 오히려 프로시안 영지의 기사들은 다른 기사들에 비해 얌전한 편이였다. 어디까지나 남작의 능력을 보고 지금껏 믿고 따라온 기사 중에 기사였기 때문이다. 기사도를 중시하며 뼛속까지 기사인 자들 말이다.
청령이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한 곳에서 뚝 멈췄다. 그곳에는 청령의 전속시녀인 레나가 기사들 여럿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 내 내공은 고작 이류 수준도 못 되는 삼류다!'
프로시안 영지가 그레이 기사단을 막지 못하는 이유는, 헤일론 백작령의 힘이 그만큼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귀족들의 계급을 이해하게 된 청령이었다.
남작, 자작, 백작, 후작, 공작 순으로 올라가는 귀족의 계급에 의하면 남작은 결코 백작의 일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중원이나 이곳이나 같은 이치였다. 힘없는 자는 항상 당할 뿐이었다.
청령의 다리가 자연스레 움직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레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세리아가 곤란에 처할 수도 있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시녀들을 구하는 것이 중요했다. 무엇보다 아는 사람인 레나가 당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는 문제였다.
'머리로 판단하기보다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는 바로 가슴의 말을 따라라.'
천유한 장문인이 심심찮게 해 준 말이었다. 남자는 때론 머리로 판단하기보다는 가슴이 시키는 그대로 움직여야 하는 거라고.
휘익!
청령의 각(脚)이 날카롭게 허공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