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4화 (4/60)

■ 제4장 프로시안 영지 □

대대로부터 프로시안 남작령은 천대받는 영지였다. 영지의 동쪽에는 몬스터의 천국인 '장안의 숲'이 존재했다. 게다가 영지의 80퍼센트가 황무지인 데다, 몬스터들의 침입이 끊이지 않아 영지민의 숫자는 고작 십만에 불과했다.

그 장안의 숲에 두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에 있던 중년의 여인이 두 손으로 치마를 들어 올린 채 앞서 가는 여인을 뒤쫓았다.

"헉헉! 아가씨! 그곳에 가면 위험하다니까요."

"괜찮아, 유모. 칸 아저씨께 들었는데, 장안의 숲 초입에는 몬스터가 없다고 했어. 아버지의 생명이 위태위태한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야."

앞서 가는 여인의 얼굴은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모습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어딜 가도 미인 소리를 들을 여인이었다. 그녀도 다소 힘들었는지 소매로 땀을 닦아 내고는 허리춤에 매달린 물통을 집었다.

"에이, 물이 없잖아! 유모! 어디 물을 마실 만한 곳이 없을까?"

그녀는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넣고는 물통을 다시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장안의 숲에서 유일한 수원(水源)이 있다면 룩커 강으로, 앞으로 10분 정도는 더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유모는 젊은 여인이 다칠까 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가씨, 그냥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이 이상 들어가면 몬스터들의 공격을 당할지도 몰라요."

그녀의 걱정 어린 말투에 여인이 살짝 웃었다.

"걱정 말라니까. 내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 난 위대한 칸 아저씨에게 마법을 배운 사람이라니까. 흥!"

칸은 프로시안 영지에 단 하나밖에 없는 4클래스 유저 마법사였다. 여인은 지난 십오 년간이나 마법을 배웠다. 다행히 노력과 재능이 결실을 맺어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3클래스 마스터라는 경이로운 경지에 올라 있었다.

걱정 말라던 그녀도 장안의 숲의 위험을 잘 알고 있기에 뒤꿈치를 들어서 사뿐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모는 더 이상 그녀의 뜻을 꺾지 못했다. 현재 프로시안 남작령에는 커다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프로시안 남작이 며칠 전부터 앓아누운 것이다.

큰돈을 들여 신관과 의사들을 불렀지만 그들 모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남작님의 병은 현재 저희들의 실력으로 고칠 수 없는, 대륙에 전례가 없을 정도로 드문 병입니다.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장안의 숲에 있는 '플래임 플라워'뿐일 겁니다."

화염의 꽃이라 불리는 플래임 플라워는 온몸에 열을 올리는 만병통치약이었다. 그 약의 뿌리를 먹으면 무병장수할 수 있고, 잎을 달여 먹으면 손발이 차가운 사람들의 병이 씻은 듯이 낫는다는 것이다.

현재 프로시안 남작은 손발이 차갑고 온몸의 내장이 서서히 정지되고 있었다.

그 병을 고치기 위해, 프로시안 남작의 여식인 '세리아 폰 프로시안'이 발 벗고 나섰다. 인근 영지는 물론 왕궁에까지 기별을 넣어 그 약을 구하려 했으나 플래임 플라워는 영지를 팔아서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약초였다.

유모는 어쩔 수 없이 세리아를 쫓아오긴 했으나, 막상 이곳까지 오자 강경하게 말리지 않은 것이 크게 후회되었다.

"아가씨, 한 시간만 둘러보고 약초가 없으면 빨리 영지로 돌아가는 겁니다. 알았죠?"

그녀가 재차 묻자 세리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약초를 찾으면 곧바로 돌아갈게. 유모 먼저 가."

"아가씨! 정말……."

"쉿!"

유모가 큰 소리를 내려 하자 세리아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들의 앞을, 4미터에 달하는 트롤이 침을 질질 흘리며 지나갔다.

트롤이 지나가자 세리아와 유모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트롤은 영지 기사들도 손쉽게 이길 수 없을 만큼 강한 몬스터였다.

트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더욱 발걸음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세리아가 룩커 강을 발견하고서 손바닥을 마주쳤다.

"유모는 여기서 상황을 봐 줘. 몬스터가 나타나면 재빨리 도망가. 알았지?"

"아, 아가씨는요?"

"난 일단 물통에 물을 채워야지. 목이 말라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구. 자, 그럼!"

"아, 아가씨……!"

유모는 말도 크게 못하고 답답할 지경이었다. 결국 세리아의 고집대로 그녀를 놓아주고 말았다.

세리아는 주위 동태를 살피며 재빠른 손놀림으로 물통에 물을 채웠다.

'역시 플래임 플라워는 숲의 초입에서는 구하기가 힘든 걸까?'

하지만 아까 트롤을 본 이후로는 더 이상 들어가기가 겁이 났다. 세리아가 물통의 뚜껑을 닫고 일어서려고 할 때, 그녀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깜짝 놀란 유모가 세리아의 곁으로 황급히 달려왔다.

"아, 아가씨, 어디 안 다치셨어요? 무슨 일이에요? 헉!"

유모는 말하다 말고 손가락을 앞으로 뻗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앞에는, 통나무에 매달려 떠내려 온 젊은 사내가 있었다.

"사, 사람이에요, 아가씨!"

"나도 보면 알아. 유모, 일단 이 사람을 끌어내자."

"끄, 끌어내자고요? 누구인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다가 변이라도 당한다면……."

"우리 프로시안 남작가는 결코 위험에 빠진 사람을 내버려 둘 정도로 매정하지 않아!"

세리아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사내를 물가로 끌어올렸다. 다행히 그 몸무게가 그다지 무겁지 않은 듯했다.

가슴에 손을 대자 미약한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이대로 뒀다간 죽겠어! 빨리 영지로 데려가자."

"지금 그 사람을 데리고 영지로 가시겠다고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아직 신변 확인도 못했는데……."

"그럴 시간 없어! 이대로 뒀다간 죽을 것 같단 말이야! 나한테 맡겨."

세리아가 무릎을 꿇고 마치 신에게 기도하듯 입으로 주문을 외웠다.

"주신 마르드 님이시여! 미천한 제가 자연의 힘을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스트랭스(Strength)!"

3클래스 마법인 스트랭스는 대상자의 근력을 서너 배로 상승시켜 주는 마법이었다. 세리아가 사내를 들쳐 업고 끙끙거리는 발걸음을 한발 한발 내디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세리아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등에 업힌 사내가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기 시작했다. 온몸이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유모, 나 좀 도와줘. 영지로 돌아가서 칸 아저씨를 데려와 줘, 빨리!"

"예, 아가씨!"

유모가 서둘러 영지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본 세리아가 풀밭에 사내를 뉘였다. 세리아가 그의 뺨을 살짝 때리며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이봐요! 괜찮아요? 제 말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사내의 눈빛이 희미해져 갔다. 세리아가 왼손으로 목걸이를 감싸 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힐링(Healing)!"

목걸이가 환하게 빛나며 뿌연 빛이 사내의 몸을 감쌌다. 힐링은 외상을 치료해 주는 2클래스 마법이었다. 그녀가 손에 쥔 목걸이는 힐링을 하루에 한 번 시전 가능케 해 주는 마법 아티팩트였다.

"좋아, 일단 응급치료는 했고……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하지? 아! 인공호흡!"

순간 세리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게졌다. 처음 본 남자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세리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내의 흐려진 초점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근두근!

귀창의 창에 뚫린 심장이 어느새 다시 뛰기 시작했다.

물에 빠진 뒤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청령은 몸을 추스르기 위해 내공을 움직였다. 하지만 단전이 텅 비어 버린 것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진원진기의 반 이상이 날아가 내공을 쌓는 것이 상당히 힘들 듯했다.

'으윽, 이 고통은 도대체…….'

청령은 고통을 무시하고 최대한 내공을 쌓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생사현관과 임독양맥이 모두 막혔고 십이경맥에 손상을 입어 소주천을 하는 데만도 일각이라는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그래도 다시는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 되지 않은 것만도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구나. 그건 그렇고, 여기는 영산인가? 주위에 분포된 기가 청성산보다도 훨씬 많구나.'

청령이 소주천을 한 번 더 펼친 뒤, 한 줌 정도 생긴 내공으로 혈을 뚫어 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현재 몸 상태로는 혈을 뚫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청령은 일단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최대한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에 자연스레 그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렇게 잠시 후 흐린 초점에 한 여인이 잡혔다.

"헉! 벼, 벽안인!"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새파랗다. 머리 색깔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윤기 있는 금빛이었다. 책에서만 봤던 벽안인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청령이 놀라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드시나요?"

청령은 처음 들어 보는 벽안인의 언어에 자신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중원의 언어는 아니었지만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노인장은…….'

용아천에서 둑이 무너져 물에 쓸려 가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노인장. 노인의 모습만은 방금 전 본 것처럼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정신은…… 듭니다."

머릿속이 더욱 혼란해졌다. 알아듣는 것은 고사하고, 그 언어까지 구사하게 될 줄은 몰랐던 일이다. 그것도 마치 제 언어 사용하듯 능숙하게 혀가 꼬이며 말이 튀어나왔다.

"일어나실 수는 있나요?"

청령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 정신이 깨어 있는 것만도 힘든 일이었다. 눈을 감는다면 다시 오랜 잠에 들 것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그대로 누워 계세요. 유모가 칸 아저씨를 데리러 갔으니까 곧 올 거예요."

칸이 누군지는 모르나 청령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청령이 바닥에 누워 있은 지 10분 정도가 지나서야 멀리서 작게 쿵쾅거리며 땅이 울렸다. 발소리로 보아 대략 두 명 정도 되는 듯했다.

'이 아가씨가 말한 칸이라는 사람과 유모 되는 분이겠군.'

청령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곧이어 도착한, 흰머리가 힐끗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숨을 고르며 들고 있던 지팡이로 몸을 의지해 입을 열었다.

"헉! 헉! 세리아 아가씨, 영주님의 일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그냥 영지에서 편안히 계시면 될 것을 뭐 하러 장안의 숲까지 오셨습니까? 장안의 숲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나 계신 겁니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장안의 숲의 위험에 대해 설명했건만, 기어코 사고를 터뜨리고 마는 세리아였다.

세리아가 입을 삐쭉 내밀며 딴청을 피웠다.

"그래도 내 아버지인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어쩌라구요? 어찌 됐건 칸 아저씨, 이분을 급히 영지로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칸이 청령의 미약한 숨소리를 듣고 서둘러 그를 업었다. 칸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내상이 상당히 깊은 것 같습니다. 영지에 도착하는 대로 신관보다는 의사를 데려와야겠는데요."

신관이 하는 일은 돈을 받고 저주를 풀어 주거나 외상 입은 자를 치료하는 일이었다. 내상을 입은 경우는 의사에게 처방전을 받아 꾸준히 약을 먹는 것이 옳았다.

세리아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 달 동안은 푹 쉬라는 의사에 말에 청령은 침대에 누워 운기조식을 했다. 만상귀일신공이 팔성의 경지에 오르면 누워서도 운기가 가능했다.

일각이나 걸렸던 소주천이 이젠 반각도 걸리지 않는다. 그의 단전은 중원에 있을 때보다도 빨리 차올랐다.

청령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봤다. 처음에 봤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세상에, 달이 두 개 떠 있는 나라라니!

아무리 벽안인이 사는 나라라 해도, 달이 두 개 뜬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청령은 용아천에서의 일을 뚜렷이 기억해 냈다.

둑이 무너지고 쓸려 내려가던 청령에게 물살을 헤치며 다가온 노인장. 이상하게도 그 노인의 기억들(그의 지식들)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청령은 처음엔 이 상황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면 도대체 설명할 수가 없을 듯했다. 하지만 볼을 꼬집은 후에는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중원이라는 세계, 그리고 또 다른 세계인 유라시아 대륙.

유라시아 대륙은 프라스 제국과, 펠타온 제국이 휘어잡고 있으며 그 주위에 열 개의 왕국이 존재했다.

청령은 그중에서도 슈레이더 왕국이라는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에 있었다.

운기를 하는 도중에도 청령이 깜짝 놀란 일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중원을 압도하는 기(氣)가 사방에 가득 차 있었다. 삼재심법(三才心法)만 꾸준히 수련해도 십 년이면 절정에 들 정도였다. 중원에서는 상승절기를 수련한다 해도 십 년 안에 절정에 들기 힘들었다.

그것을 깨달은 청령은 한껏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만상귀일신공은 신공절학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상승경지다. 이곳에서 일 년 정도만 운기해도 충분히 초절정일 때의 내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다만, 열양지기와 한음지기를 진원진기의 반과 함께 날려 버리는 바람에 기연이 있지 않은 이상은 다시 얻기가 힘들었다.

청령은 운기조식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세리아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몸은 좀 좋아지셨나요?"

"예, 생각보다 내상이 깊지는 않았으니까요."

세리아는 청령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도 이따금씩 그가 머무는 방을 찾아오곤 했었다. 세리아가 방을 쭈욱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 하고 계셨나요? 아까부터 계속 방에만 계시던데."

"명상을 좀 했습니다."

청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리아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임은 틀림이 없지만, 그녀의 심장 바깥에 머무는 기를 보면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마법이라는 것이었나……?'

노인장의 기억 속에서 찾은 마법. 심장 바깥에 마나라는 기를 둘러 고리를 완성하여 단계를 높이는 무공(?)이다.

청령은 지난번 힐링이라는 낯선 기술에 자신의 외상이 치료되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란 적이 있었다. 마치 마교에서 사용하는 사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청령의 모습에 세리아는 도리어 웃음을 지었다.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그저 제가 사람을 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 말이죠. 아! 그건 그렇고, 아직도 못 물어봤네요. 이름이 뭐예요?"

청령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중원에서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힌 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묻는 것이 정도(正道)였다. 하지만 청령은 그녀를 나무라진 않았다.

중원과는 전혀 다른 이계. 충분히 다를 수 있었다.

"청령이라 합니다."

"처려요?"

세리아의 발음이 상당히 꼬였다. 청령이 헛기침을 하고는 정정해 주었다.

"청! 령!"

"청……령…… 어렵네요."

하나하나 따라 하는 모습이,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 같았다. 청령은 그녀의 이름이 세리아인 것을 알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러자 세리아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내심 물어볼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필요하신 게 있다면 요 앞에 있는 시녀 레나에게 부탁하면 될 거예요. 아니면 칸을 찾아가도 돼요. 칸 아저씨가 어디 계시는 줄은 아시죠?"

모르면 물어보면 될 일이다. 청령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부탁할 일이 있었다.

"아, 소저. 이 성에 서고가 있습니까?"

"어디 보자. 서고, 서재라…… 아! 아버지가 쓰시던 서재라면 있긴 있어요. 뭐, 지금은 그 서재를 사용하시지 않으니까……."

"그럼 한동안 그 서재를 이용하겠습니다."

"서재를요?"

그녀는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이 세계의 문화와 현재 유라시아 대륙 간 정세에 대한 청령의 지식은 매우 빈약했다. 노인장의 기억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세리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프로시안 남작은 평소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해, 서재의 크기가 다른 영주들보다도 남달리 컸다. 평소 세리아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남작의 서재에 들어가 답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인 남작도 기꺼이 허락한 일이다. 누구든지 원하면 서재에 드나들 수 있고 사서까지 있어 서재라기보다는 거의 도서관 수준이 되어 있었다.

"후후. 좋아요. 내일 아침 일찍 시녀를 통해 출입증을 보내 드리도록 하죠. 또 뭐 필요하신 건 없죠?"

"그것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죠."

그녀가 살짝 인사를 하고 바깥으로 나가자 청령은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탓인지 그는 곧바로 운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청명심법을 사용해 절대로 내공수위를 내보이지 않았다.

청령의 방을 나온 세리아의 옆으로, 대기하고 있던 칸이 달라붙었다.

"아가씨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후우. 말도 마세요. 들어가기 전에 마나스캔을 펼쳐 봤는데, 평범한 사람과 별다를 바 없는 수준이에요."

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 그럴 리가! 제가 그자를 업었을 때 그의 마나는 4서클에 버금갈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아가씨께선 느끼지 못하시겠지만, 가끔씩 저 방에서 마나의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세리아는 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봐도 동년배로 보이는 청년이 4서클에 버금가는 마나를 가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흥! 그만 포기하시라니까요. 그건 착각이에요. 스무 살의 나이에 4서클 정도의 마나를 가진 자는 지금껏 대륙십강밖에 없다구요."

"하긴, 그렇겠군요. 에휴∼ 우리 영지에 도움이 될 인재라고 생각했는데……."

대륙십강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이름난 초인들을 가리킨다. 두 개의 제국이 두 명씩 보유하고 있으며, 나머지 여섯 명은 다른 왕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대륙십강의 일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적국에 크나큰 두려움을 줄 수 있었기에, 각 나라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럼 아가씨께서는 그자를 왜 도와주시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저 얼굴 반반한 평민에 불과한데 말이죠."

"글쎄요? 뭐랄까…… 그자는 뭔가 사람의 힘을 끌어들이는 능력을 가진 것 같아요."

그 말에 칸이 껄껄 웃었다.

"허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런 능력을 가진 자는 지금껏 라인하르트 황족뿐이었습니다. 라인하르트가 멸망한 지도 어언 이십 년이 지난 이때, 죽은 황족이 나타날 리는 없잖습니까?"

"그냥 그런 생각을 막연히 해 본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 우린 정말 엄청난 힘을 갖게 된 것일 텐데……."

80퍼센트가 황무지인 프로시안 남작령은 대대로 서러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남작의 땅이 후작령만큼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장안의 숲의 몬스터들을 프로시안 남작령 혼자서 막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민들의 세금은 모두 영지를 보호하는 데 사용되곤 했다.

특산물 하나 없는 데다, 몬스터 때문에 매일같이 사람이 줄어드는 영지인 프로시안 남작령.

"호호호!"

세리아는 자신이 한 말에 크게 웃으며 본관으로 향했다. 여신의 축복을 받은 라인하르트 황족들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침 일찍 배정받은 손님을 모시기로 한 레나는 방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진동하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이것이 대체……."

악취의 근원을 찾기 위해 주변을 스윽 둘러본 레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사내의 몸 밑에서 검은 빛깔의 물이 침대를 물들였기 때문이다.

밤을 새 가며 운기행공을 한 청령은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눈을 번쩍 떴다. 손상된 십이경맥 때문에 밤새 힘겨운 사투를 벌이느라 심신이 피로했다.

내공으로 내상을 치료하고, 소주천으로 단전과 혈을 깨끗하게 닦아 냈다. 그 과정에서 불순물처럼 껴 있던 찌꺼기가 악취를 풍기며 모공을 통해 나갔다.

'내공은 그리 많이 되찾지 못했지만, 내상은 7할 정도 치료가 된 것 같군.'

고작 이틀 만에 이룬 쾌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 전에 찾아온 의사가 보았다면 대경실색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십이경맥이 치료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나?'

임독양맥을 뚫는 일은 내상이 치료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생사현관도 힘들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십이경맥이 손상되면 내공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치료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청령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무공이 십이경맥을 차례대로 순행하기 때문에 손상이 되면 무공의 사용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음……."

청령은 방 안에 진동하는 악취에 뒤늦게 눈살을 찌푸리며 창문들을 죄다 열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레나를 향해, 청령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거 어쩌죠? 치워야 할 것 같은데."

"아! 제, 제가 치우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낮추어 주십시오. 저같이 낮은 자에게 어찌 존대를……."

중원에도 신분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에서의 신분은 무림인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귀족들이라는 자들도 무림인들과 엮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무림인들도 귀족들을 우대하지 않는다.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무림인들은 신분의 차이를 따지지 않았다. 그들의 신분은 바로 무공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청령은 누구에게나 말을 낮추지 않았다.

"차차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직은 이게 편해서……. 게다가 저도 그리 높은 신분은 못 됩니다."

"예, 정 그러시다면…… 사람들이 있을 때는 낮춰 주십시오. 만약 마님께서 보시면 호되게 혼이 납니다."

레나는 이제 열다섯 살이 된 소녀였다. 그녀에게 시녀장(마님)은 엄한 사람이었다.

"그러도록 하지요."

청령은 체념한 듯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그때 레나가 이마를 쳤다.

"아! 맞다. 아가씨께서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청령에게 내밀었다. 어젯밤 세리아에게 부탁했던 서재 출입증이었다.

간단명료한 내용이 쓰인 서재 출입증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본 청령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깝게도 의사소통은 가능했지만 글을 읽지는 못했다.

참으로 웃긴 일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 세계의 글을 깨우치는 수밖에 없겠군. 서재에서 할 일이 많아졌어.'

레나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령에게 조심히 물었다.

"괜찮으세요?"

"예. 아, 이름이…… 레나 소저 맞으십니까? 실례지만, 씻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됩니까? 서재에 바로 갈 생각이라……."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손님이 머무르는 동관에 있던 청령은 맨 아래층으로 내려가 커다란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귀족의 저택이라 해도 프로시안 남작령이 워낙 변방이다 보니 시설이 썩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청령은 이것저것 가리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잠자코 일각 반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레나가 씻겨 주겠다며 욕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청령은 당황하여 그녀를 내쫓았다.

"상당히 개방적인 곳이로군. 남녀가 유별한데 탕까지 들어올 줄은……."

중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누군가를 씻겨 준다는 것은 황제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청령은 문화적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서재로 향했다.

서재는 본관에 있었다. 동관에서 본관으로 가는 데는 약 10분 정도의 시간이 소모된다. 본관으로 향하는 청령의 눈에, 연무장에서 두꺼운 갑옷을 입고 목검을 휘두르는 이들이 보였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청령이 묻자 레나가 곧바로 대답했다.

"이곳 프로시안 영지를 지키는 에이전트 기사단 분들이세요. 저분들과는 웬만해서는 부딪치지 않는 게 좋아요. 기사 분들 중에는 성격이 까칠하신 분들이 많거든요."

레나는 슈레이더 왕국 기사법에 의거해 즉결처분 당한 시녀를 몇 보았기 때문에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청령도 그다지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기사들을 보고 상당히 실망한 것이다.

'이곳에는 심법이 없는 건가? 어째서 죄다 삼재심법 같은 자잘한 것들뿐이냐. 중원에 비하면 환상적일 정도로 기가 꽉 차 있는데 내공이 저리도 적다니…….'

맨 앞에서 기사들을 가르치는 노기사의 내공도 고작 삼십 년 내공을 웃돌 뿐이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기사들만 해도 십오 년 내공 이상을 가진 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제일 나은 이가 고작 절정의 문턱에 들어선 노기사뿐이라니……. 이곳의 수준이 낮은 건가? 아니면 이 세계의 수준이 낮은 건가.'

청령은 무심히 고개를 홱 돌리고 레나의 뒤를 쫓았다. 상대가 강했다면 찾아가서 한 수 배워 볼 호기가 있었지만 저 기사들과 붙으면 실망만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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