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3화 (3/60)

■ 제3장 용아천 □

쿠구구궁!

청성파의 화려한 전각들이 무너져 내렸다. 무사들이 곳곳에 난 불을 끄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서 불을 꺼라! 불이 옮겨지면 안 된……."

슈슈슉―!

어둠 속에서 날아온 암기가 무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곳곳에서 암기들이 날아와 귀신같은 솜씨로 무사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청성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이 혼비백산해 바깥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습이다! 제자들과 무사들은 들어라! 제자들은 불을 끄고 무사들은 적을 제압하라!"

장문인 천유한의 외침이 끝남과 동시에, 청성파 무인들이 하나하나 진영을 갖춰 갔다.

장로들과 장문인 또한 각각 검을 뽑아 들고 소리치며 적들을 향해 거침없이 휘둘렀다.

혈파의 무사들이 난입하자 청성파 무사들과 제자들은 모두 검을 뽑아 들고 적에 맞섰다.

챙챙챙―!

몇 초식을 서로 겨뤄 본 자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몸을 떨었다. 그들 모두가 바로 청성파 제자와 무사들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혈파의 무공들. 그것은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실력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났으니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죽고 무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살아남은 자 중 한 명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청성파의 역사는 무너지지 않는다! 청성파 만세!"

만세를 외친 제자의 입에서 피가 토해졌다. 어느새 그의 가슴에 혈파의 고수가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그 외침이 터짐과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괸 채 만세삼창을 불렀다.

"청성파 만세! 청성파 만세! 청성파 만세!"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죽어 쓰러질 때까지 제자들과 무사들의 외침은 천하를 울렸다. 청성파가 멸문하는 데는 고작 한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장문인과 장로들, 청성파의 최고 배분인 유경련만이 살아남아 숨을 쉬고 있었다.

유경련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자들이 이토록 외쳐 주었으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살 만큼 살았으니 나 또한 저들과 같이 뼈를 묻겠다."

확고한 그의 뜻에, 유경련만은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던 장로들 입이 꾹 다물어졌다.

"유한아, 너만큼은 꼭 살아남아 청성파를 재건하거라. 자, 이것을 너에게 주겠다."

유경련의 품속에서 몇 개의 비급서가 나왔다. 그것은 청령이 떠나기 전에 놓고 간 것들이었다.

"이, 이것은?"

비급서를 받아 든 장문인 천유한이 손을 떨었다. 장로들도 비급서들의 제목을 본 순간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구하천풍검법, 빙허임풍, 구하천풍장법…….'

"이것만큼은 절대 저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만약 너에게 변고라도 생기면 이 비급서를 즉시 불태워 버려라."

"아, 아니 됩니다! 어찌 장문인이라는 자로서 문파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전 이곳에 남아 저들의 목을 가지고 황천길에 오르겠습니다."

"이놈! 네가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죽어서 어찌 조상님들을 웃는 낯으로 뵙겠느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천유한의 말에 유경련이 다시 비급서를 빼앗아 들었다.

화르륵―!

비급서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어느새 공력을 끌어올린 유경련이 불태워 버린 것이다.

"허억, 처…… 유경련 어르신! 그것만은!"

장로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비급서들이 재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 비급들을 익히고 있는 제자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청성파가 이대로 멸문한다 해도 그 아이라면 반드시 청성파를 재건할 것이다."

"그 아이라면……!"

"청령. 그 아이가 이 비급서를 나에게 넘겼다."

그 말과 함께 유경련의 몸이 궁신탄영의 수법으로 앞으로 튕겨 나갔다. 검을 뽑아 든 그가 호랑이의 맹렬한 기운을 검에 담아 힘껏 외쳤다.

"덤벼 봐라, 이것들아! 노부가 너희를 지옥으로 보내 주마!"

쿠콰강!

호랑이가 아무리 늙었다 한들 그 용맹함이 사라지겠는가! 유경련은 정말 뼈를 묻기로 결심했는지 다음 순간 진원진기를 끌여들였다. 그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날렵해졌다.

진원진기를 사용한 자들은 살아남는다고 해도 더 이상 내공을 수련할 수 없는 일반인의 몸이 된다. 무인에게는 자존심인 진원진기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결코 사용하지 않을 고귀한 기운이었다.

장로들, 그리고 장문인까지 모두 진원진기를 사용해 적들을 패퇴시켰다.

그런 그들의 앞에 열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열둘 중 맨 앞에 있던 자가 창을 가지고 나섰다.

"네놈은 누구냐!"

그자에게서 솟아나는 기운이 범상치 않음을 느낀 유경련이 외치자 그림자가 그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그건 염라대왕에게 물어보거라!"

그의 창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유경련을 향해 쇄도해 나갔다.

유경련은 그자와 맞선 지 일각 만에 무릎을 꿇었다. 장로들 또한 또 다른 그림자들에 패해 싸늘한 주검이 되어 청성파의 장원에 쓸쓸히 널브러졌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구파일방 중 하나인 청성파.

청성파의 이름은 오늘로부터 역사서에서 지워졌다.

열두 개의 그림자 중 창을 쓰고 있는 자가 옆에 있는 그림자에게 물었다.

"다음 대상이 누군가, 삼호?"

"얼마 전 혈룡대의 열 명의 살수들을 죽인 자가 있습니다. 그가 다음 대상입니다."

"좋다. 위치는?"

"용아천을 끼고 있는 아미산입니다."

"아미산이라면 아미파가 있던 곳 아닌가?"

"아미파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아미파는 이미 멸문한 지 상당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래? 그럼 좋다. 아미산으로 움직인다!"

"예!"

그들이 사라진 뒤 유경련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왼쪽 어깻죽지에서 옆구리까지 단 한 수에 베인 그는 청령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천유한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인으로서 칼에 맞아 죽는 것은 여한이 없지만 청성파가 자신의 대에서 무너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령아……! 내 자식 같은 놈. 너만은 죽지 말거라.'

혈파 대부분의 임무를 혈룡대가 처리한다면, 누군가를 암습하는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잠룡수라대(潛龍修羅隊).

총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잠룡수라대는 오늘 한곳에 다다랐다. 옆에는 웅장한 폭포가 있고, 나무 옆에 치워진 시체들은 모두 흑의를 입고 있었다.

잠룡수라대원은 그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홉 명의 상처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한 명에게 당했을 공산이 매우 큽니다. 다른 한 명의 경우 내가중수법에 의해 내장이 상해 사망했습니다."

"적의 숫자는 얼마 정도로 추정이 되는가?"

"보폭으로 볼 때 작은 것은 대여섯 살 정도 되는 어린아이고, 다른 보폭은 여인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럼 적은 둘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희미하지만 다른 한 명이 더 존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신기하게도 보폭이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전투를 치르고, 자리를 뜰 때까지 최상급 경지의 경공술을 쓰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어? 그 시간이 제법 짧지 않은데 그렇게 오래 있었다면 많은 공력의 소유자인 것이 틀림이 없군. 그래, 그들이 이곳을 떠난 지는 얼마 정도 되어 보이는가?"

"약 세 시진(여섯 시간) 정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쫓는다면 용아천에서 맞닥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 그럼 십일호와 십이호는 이곳에 남아 현장을 보존한다. 이호부터 십호는 나를 따라와라. 가자!"

"존명!"

잠룡수라대의 대장인 일호는 창을 귀신같이 쓴다 하여, 서도 귀창이라 불릴 정도로 창술의 고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며, 그의 수하들도 암기와 독에 매우 능했다.

그들은 발자국이 남아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찌나 빨랐는지 그들의 신형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 * *

일전의 싸움으로 상당히 기운이 쇠약해진 연이와 검하은이 힘들어 하자 청령은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루빨리 청성파로 돌아가기 위해 세 시진을 넘게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이번 휴식이 이리도 달콤할 수가 없었다.

한숨 돌린 연이가 냇가에서 입을 적셨다.

밤에 있었던 일로 인해 공포에 질릴 법도 하건만, 연이는 상당히 잘 참아 내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청령은 검각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청령이 일각도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이가 살짝 입을 내밀고 투정을 부렸다.

"오빠, 다리가 너무 아파. 좀만 더 쉬었다 가자."

"연아!"

그런 연이의 행동에 그만 검하은이 크게 꾸짖으려던 중 청령이 연이에게 다가가 등을 내밀었다.

"자, 어서 업혀. 내가 너무 강행군을 했나 보다."

"헤헤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연이가 청령의 등에 업혔다. 겉보기엔 왜소해 보였던 청령의 등이 의외로 상당히 넓고 편했기에 연이는 곧바로 잠들어 버렸다.

연이의 코고는 소리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던 검하은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해요. 연이가 원래 이런 아이가 아닌데."

"후후, 여기까지 군말 없이 따라온 것도 응당 칭찬해야 할 일입니다."

검하은은 슬쩍 하늘을 쳐다보았다. 며칠째 내리는 폭우에 땅이 질퍽해졌기 때문에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남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청령의 발자국을 봤을 때는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바, 발자국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

물론 무인들에게 이런 흙바닥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녀도 충분히 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진정 놀라게 한 것은, 연이를 업은 이후에도 지금까지 쭉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음?"

그때였다. 청령이 눈을 반짝이며 귀를 쫑긋거렸다.

검하은이 그런 청령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시죠?"

"앞쪽에서 병장기 소리가 들립니다."

"예?"

검하은이 깜짝 놀라서 공력을 끌어올렸다. 오감을 극대화했지만 그녀는 병장기 소리의 '병'자도 들을 수 없었다.

'대, 대체 어디서 들린다는 거지?'

"빨리 갑시다.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다음 순간 청령이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 그의 신형은 어느새 저 멀리 가 있었다. 검하은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 *

섬서에 위치한 석가장은 예로부터 상계를 이용해 그 세를 불려 나갔다.

그들의 힘이 날로 강해져서, 상단을 세운 지 고작 삼십 년 만에 천하이십대상단의 반열에 들 수 있었다.

보통 산적들은 석가장의 깃발만 봐도 벌벌 떨건만, 석가장의 소가주인 석윤서 앞에는 지금 도합 이백여 명으로 보이는 산적 떼가 늘어서 있었다.

석윤서가 앞으로 나서며 호기롭게 외쳤다.

"너희는 이 깃발이 보이지도 않더냐! 썩 물러나지 않을까!"

석윤서가 이렇게 당당한 이유는 당연히 무사들에게 있었다. 무사들의 숫자가 팔십 명을 넘는다. 석가장의 무공은 과거 오십 년 전에 천하백대무공의 반열에 오른 적이 있을 정도로 상승절기였다.

석가장의 무공을 익힌 무사 열 명만 있어도 산적 백 명 정도 때려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물며 팔십 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있으니 고작 이백여의 산적에게는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얼굴이 털로 뒤덮인 중년의 사내가 거대한 도를 휘두르며 산적들의 앞으로 나섰다.

"어린놈이 감히 겁도 없이 어디서 떠드는 것이냐? 너희는 이 앞으로 지나갈 수 없다."

"흥! 지나갈 수 없다니! 감히 힘없는 농민들을 꼬드겨 산적이나 만들어 놓은 주제에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석윤서도 이제 약관에 불과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상승절기를 익힌 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훌륭한 사부와 영약을 바탕으로 웬만한 무인들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멍청한 놈! 너희는 이 앞이 어디인 줄이나 알고 있느냐!"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용아천이 아니더냐!"

"흐흐, 용아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겠다는 것이냐! 얼마간 내린 폭우로 인해 지금 용아천이 어떤 상황인 줄이나 알고 있느냐!"

용아천은 폭우 때문에 물이 불어나 쉽게 건널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석윤서가 이 길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너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썩 꺼져라!"

석윤서의 허리춤에서 번쩍 하는 도가 뽑혀 나오자 산적 대장이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놈이! 천하이십대상단에 들어간다는 석가장이라기에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이리도 멍청한 놈인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오늘은 친히 너희를 상대하기 위해 손님들이 와 계시다!"

그의 말과 함께 밑동이 어른 허리만 한 나무 위에서 두 개의 신형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들을 바라본 석윤서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허헉! 흑백쌍마(黑白雙魔)! 설마 네놈들, 녹림채였단 말이냐? 이럴 수가!"

저들이 처음부터 상단에 시비를 걸어 왔다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만큼 흑백쌍마의 무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항상 둘이 짝을 지어 다니는 흑백쌍마는 이미 나이 팔십을 넘긴 노괴였다. 장법을 얼마나 귀신같이 쓰는지 녹림채에서는 십대고수에 들 정도였다.

"껄껄껄. 이런 촌구석에도 우리의 별호를 들어 본 놈이 있구나. 안 그렇습니까, 형님!"

"그렇구나, 아우야. 헐헐, 오늘은 기분이 매우 좋구나."

석윤서는 도를 든 손을 살짝 내려놓았다. 현재 산적들과 무사들이 싸우게 되면 양패구상이다. 지금의 그에게는 싸움을 피하고 상단의 물건을 하루빨리 가져다주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석윤서가 그들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안녕하십니까? 무림의 말학 석윤서라 합니다."

"껄껄, 네가 석가장의 첫 번째 아들이로구나. 얘기는 많이 들어 봤다. 도법으로 쾌검술을 구사한다지?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구나."

석윤서가 노괴를 힘껏 째려보다 눈을 풀었다. 그러고선 그의 품속에서 금전이 든 주머니를 꺼내 그들에게 던졌다.

"그건 제 작은 성의입니다. 부디 그걸로 노여움을 푸십시오."

두 노인 중 왼쪽에 있는 자가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 수법이 얼마나 빠른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절정에 오른 금나수법이다! 최소 대성한 것이 틀림이 없다.'

만약 금나수법으로 암기를 던졌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석윤서였다.

노인이 주머니를 열어 보더니 살짝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의 노여움을 풀기에는 조금 적은 것 같구나. 안 그렇습니까, 형님?"

오른쪽에 있던 노인도 주머니를 보더니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그런 것 같구나. 아무래도 노여움을 풀지 못하겠다. 내 너희를 죽이고 그 물건을 가져가야겠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또다시 품속을 들어갔다 나온 석윤서의 손에는 이번에도 작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그의 손이 허공으로 던져진 순간 노인의 손이 다시 주머니를 붙잡았다.

흑백쌍마가 주머니를 확인한 순간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 과연 석가장의 재력은 만만치 않구나. 하나, 이런 금액을 서슴없이 내놓는 걸 보니 네가 갖고 가는 물건의 금액이 얼마나 할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구나!"

석윤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받을 건 다 받고 결국에는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흑백쌍마 어르신들, 조심하십시오. 저 또한 요물들에게 상단의 물건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파밧―!

그가 귀신같이 도를 뽑아 들고, 번개 같은 속도로 노인의 머리 위에서부터 쪼갤 듯한 기운으로 내리쳤다. 그의 보법이 얼마나 빨랐는지 노인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후웅!

도가 허공을 갈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 있었던 그들의 신형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실로 대단한 신법이구나! 어쩔 수 없다. 혼자서는 어떻게 상대할 실력이 아니다.'

석윤서가 무사들을 보더니 손가락으로 산적들을 가리켰다. 곧 석윤서를 지키는 수신호위 세 명이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이들은 석가장에서도 이십 대에 드는 고수들이었다.

"석가장 무사들은 당장 정도를 어지럽히는 산적들에게 매운 맛을 보여 주거라!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 석가장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음을 새겨 주어라!"

그의 외침에 무사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들고 산적들을 향해 달려갔다. 산적들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활시위를 무사들에게 겨눴다.

"쏴라!"

휙휙―!

이백여 개나 되는 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왔다. 무공수위가 낮은 자들이 화살에 맞아 속절없이 쓰러졌다. 바닥에 점점 시체들이 쌓이자 무사들은 동료의 시체를 방패막이 삼아 앞으로 진군해 나갔다.

"죽어라! 이놈들!"

하나 둘씩 접근해 오는 무사들이 생기자 산적들은 활을 버리고 각자 자신 있는 병장기를 꺼냈다. 그리고 하나 둘 무사들과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챙―챙! 채앵!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산적들과 검을 섞어 본 무사들의 눈에 경이가 어렸다.

'이놈들! 결코 그냥 산적들이 아니로구나. 녹림채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거늘. 최소 삼류무사 정도의 무공은 익혔다.'

산적들의 검에서 깔끔한 삼재검법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적들의 숫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무사들은 그 삼재검법을 막는 데만도 급급했다.

한편 석윤서는 흑백쌍마의 무위에 대경실색할 정도였다. 게다가 환경마저 불편해, 산에서는 최고라는 흑백쌍마는 마치 아직도 내리는 대폭우조차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바닥을 훑고 다녔다.

실로 지고한 경지에 오른 경공술이었다.

"분광검법(分光劍法)!"

이번에는 흑백쌍마가 동시에 놀랐다. 석윤서와 그의 수신호위가 펼치는 것은 점창파의 분광검법이 틀림이 없었다.

다만, 그 분광검법이 분광도법이 되어 도로 펼쳐지고 있었다. 석가장 쪽에서 자신들에게 맞게 개량한 것이 분명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석가장의 초대 가주가 점창파의 방계제자로구나."

"멍청한 노인네! 한눈팔고 있을 시간이 없다!"

분광도법의 절기들이 석윤서의 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분광도법은 과연 쾌도술이 분명해 보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빠르기로 노인의 몸을 베어 내고 있었다.

그때, 노인이 이채를 발산하며 그 도를 간단히 피해 냈다. 순간 허공을 가른 가공할 위력의 도를 수신호위 하나가 대신 얻어맞았다.

"커헉!"

방심하다 가슴이 꿰뚫린 수신호위는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다. 순간 눈동자가 멍해진 석윤서는 곧바로 도를 빼 들고 노인을 향해 불같이 화를 냈다.

"이놈! 가, 감히! 용서할 수가 없다."

"어린놈이 어른 공경을 할 줄 모르는구나!"

노인의 장이 석윤서의 가슴을 후려쳤다.

"크흑!"

제법 공력이 실린 공격이었는지 석윤서가 뒤로 주춤거리며 열 보나 물러났다. 그의 입가에는 선혈이 흘러내렸다.

석윤서가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그의 수신호위는 피떡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곳의 상황은 조금 나았다. 무사들은 가까스로 산적들을 전멸시켰다. 하지만 그들 중 멀쩡히 두 다리로 땅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석윤서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흘흘흘, 어린놈이 까분 대가는 확실히 치러야겠구나. 너희 사지를 잘라 한낱 미물의 먹이로 줘야겠다!"

"쿨럭, 네, 네 이놈! 내 죽는다 해도 원귀가 되어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껄껄껄, 그런 놈들이 한둘이었는 줄 아느냐? 잔말 말고 어린놈은 죽어라!"

그의 손바닥이 무서운 기세로 석윤서의 복부를 향해 쇄도해 나갔다.

* * *

잠룡수라대는 어느 정도 발자국을 쫓아왔을 때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들 중 추적을 전문적으로 하는 삼호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발자국을 쫓아오는 동안 벌써 수백 번을 넘게 침을 삼켰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곳에서 보폭이 세 개에서 하나로 줄었습니다. 어린아이의 보폭이 사라졌고, 또한 희미했던 보폭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자취를 감춰? 그들이 설마 허공답보라도 해서 우리의 이목을 숨겼다는 것인가?"

허공답보가 어떤 경지인가. 경공술에서 최고로 일컫는 경지가 아니던가?

삼호는 지금껏 자신이 생각해 오던 것을 결국 털어놨다.

"지금까지의 발자국을 보아 희미한 발자국을 가진 자가, 어린아이를 업고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발자국이 사라진 이유는…… 아마도 이자는 지금까지 경공술을 사용해 본 적도 없는 자가 아닐까 합니다."

"경공술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어떤 경공술이기에 자네가 그리도 놀라는 것인가?"

"지금까지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의 결론이 나왔는데, 처음에 희미한 발자국은 가면 갈수록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그리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지요. 이것으로 볼 때 그는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경공술의 경지가 한 단계씩 상승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능한 얘기인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 경공술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다른데, 아마 이것은 수십 년 전에 실전된 청성파의 빙허임풍이나, 소림사의 최고 보법인 나한보(羅漢步)나 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 발자국의 주인이 그 무공을 익히고 있을 확률은 없나?"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실전된 무공이 다시 나타날 리도 없거니와, 나한보를 익히고 있는 자는 소림사에서도 최고 배분을 가진 몇몇 자들을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이 발자국의 주인은 장법과 권법의 고수다. 하나, 경공술의 경지는 지극히 낮은 건가?"

"그렇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경공술은 신공절학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만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좋아. 그럼 남은 발자국이라도 쫓아야겠다. 그들의 위치는 파악할 수 있는가?"

"무리는 없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용아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좋다. 이번 일은 혈룡대처럼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

"예!"

그들은 몰랐다. 설마 자신들이 쫓는 상대가 얼마 전 혈룡대 열 명의 살수들을 일각도 안 되는 시간에 괴멸하고, 자신들이 멸문시킨 청성파의 상승절기를 익힌 제자라는 것은.

* * *

휘리리릭!

콰앙! 콰앙!

허공에서 연이어 폭발음이 들려왔다. 흑백쌍마 중 오른쪽에 있던 노인이 오른손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크윽! 네, 네 이놈!"

석윤서는 대경실색했다. 천하에 그 누가 흑백쌍마의 장을 막고 그들을 물러서게 한단 말인가.

놀랍게도 그는 이제 갓 약관이 돼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 청년이 뒤돌아보며 외쳤다.

"이보십시오, 형장!"

그의 공력이 담긴 외침에 석윤서가 정신을 가까스로 차렸다.

"당장 무사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형장이 죽는다면 상단은 누가 이끌겠습니까?"

석윤서는 그 말투에서 먹향이 풍기는 것을 깨달았다. 겉보기에는 너무나 왜소해서 정말 서생이나 하기에 딱 알맞은 사내였다.

하지만 그의 무위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흑백쌍마를 장으로 밀어내고 꿈쩍도 하지 않는 사내! 그것은 천하에 감히 누구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흑백쌍마가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무사들 쪽으로 몸을 돌리는 석윤서의 모습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이놈! 어디를 가는 것이냐! 내 당장 네놈의 목을 따 주마."

청년과 살짝 대결해 본 흑마가 아우 백마를 말렸다.

"아우야, 진정해 보거라. 아무래도 앞에 있는 저 아이가 보통은 아닌 것 같구나. 흘흘, 정말 오랜만에 상대가 되는 놈을 만난 것 같다."

"아니, 형님! 지금 제 손자보다도 못난 놈이 보통이 아니라니요? 그건 형님이 방심했을 뿐이었습니다. 잘 보십쇼, 이 아우가 제대로 한 수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노인의 손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알아본 석가장 사람들이 신음을 삼켰다.

"허억, 마교에서 실전되었다는 소수마공이 아닌가? 설마 녹림채에서 발견한 것이더냐!"

"껄껄껄, 이 노부의 소수마공을 알아보는 놈이 있구나. 아직 대성하지는 못했지만 네놈들을 끝장내는 데는 고작 사성으로도 충분하다!"

노인이 방금 전 석윤서를 도운 청년을 향해 일장을 후려쳤다. 청년도 지지 않겠다는 듯 장과 장을 맞부딪쳤다.

콰앙! 콰앙!

연거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청년은 소수마공에도 불구하고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노인의 안색이 조금씩 새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그때 청년의 입에서 나지막한 절기가 흩뿌려졌다.

"최심장(催心掌)."

"허억!"

소수마공을 전개하고 있던 노인이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보법을 펼쳐 최심장의 영역을 벗어났다.

세상에 알려지길, 최심장은 청성파의 지독한 독장이었다. 사실 청성파는 검과 장법에도 능숙하지만, 암기와 독에도 조예가 매우 깊었다. 그것은 백 년 전만 해도 청성파 근처에 살수문파가 많이 들어서서 한동안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청년이 펼친 최심장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이, 이놈! 넌 청성파의 제자가 분명하구나!"

그 청년의 정체는 청령이었다. 청령은 한숨을 푹 쉬면서 손을 털어 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무기는 검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장법을 오랫동안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는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아 들었다. 끝이 뭉툭하고 거무튀튀한 것이 별로 좋은 검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보는 바대로 그것은 좋은 검이 아니었다. 청성파를 떠나올 때 가까이에 있던 검을 그냥 꺼내 온 것뿐이었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정도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것이오? 아무리 녹림채라고 해도 석가장은 쉽게 무시할 만한 곳이 아니거늘."

"오호! 이놈, 우리가 녹림채라는 것을 어찌 알았느냐?"

노인들이 호기심 짙은 표정으로 쳐다보자 청령이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중원 일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귀를 닫지 않은 이상은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지요. 노괴들은 흑백쌍마라 불리는, 정도를 어지럽히는 녹림채의 일당이 아니오?"

"노, 노괴?"

흑백쌍마는 자신들을 노괴라고 부르는 청령의 말에 기가 찼다.

"이놈!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네놈에게 그따위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오늘 네놈의 피로 목을 적셔야겠노라!"

"좋다, 아우야! 나도 이번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구나."

흑백쌍마는 각각 혼자서도 매우 강한 무위를 보이지만, 둘이 뭉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 둘이 합공을 펼치면 천하백대고수들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그때 청령의 손가락에 두 줄기의 강기가 맺혔다. 그리고 강기는 곧바로 흑백쌍마를 향해 쇄도해 나갔다.

휘이익―!

바로 칠십육로무형지를 펼친 것이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간 강기가 곧바로 흑백쌍마 노괴들의 미간을 강하게 때렸다.

탕!

노괴들의 호신강기가 크게 출렁거렸다. 노괴들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내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의 빠른 강기라니! 호신강기가 없었으면 영문도 모른 채 죽었을 것이다.'

두 노인이 앞과 뒤를 맡아 청령을 향해 장을 휘갈겼다. 청령은 곧바로 초식을 전개했다.

"구하천풍검법. 제일초식 풍룡비상!"

그의 몸이 순식간에 허공을 박차고 올라갔다. 십 장이나 떠오른 청령이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이초식 파지풍룡!"

풍룡의 위력은 가히 하늘을 가르고, 땅을 박살 낼 정도였다.

석윤서는 청령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초식명 그대로 가히 땅을 때려 부술 정도의 위력이로다. 어디의 후기지수인지는 모르겠다만, 그곳에서 용을 키워 냈구나!'

순간 목표물을 놓친 흑백쌍마는 자신들이 서 있던 땅이 흔들리자 곧바로 보법을 펼쳐 벗어났다. 하지만 곧 검에 내공을 주입한 청령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강한 검기를 흩뿌려 댔다.

"삼초식! 와룡연쇄참!"

촤르륵―!

검기를 뿌려 대는 모습이 누워 있는 용과 흡사했다. 청령의 파상공세에 밀린 흑백쌍마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어 검기들을 향해 장을 후려쳤다.

쿠웅!

"크윽!"

그러고는 곧바로 벌렁 누워 버렸다. 장을 후려치자 마치 만근은 될 법한 돌에 부딪친 듯 그 여파가 대단했다. 그들은 손목을 부여잡고 이를 꽉 깨물었다.

"허억! 허억! 허억!"

청령은 몇 초식을 사용한 것만으로도 지쳐서 숨을 헉헉거렸다. 그의 약점이라면 상대가 싸움을 오래 끌면 끌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신공절학을 익혔다 한들, 밑받침되는 체력이 없으니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청령의 앞으로 나긋한 향기를 풍기는 여인이 검을 뽑아 들고 나섰다.

"검 소저?"

다름 아닌 검하은이었다. 그녀는 연이를 업고 정말 이를 악문 채 신법을 전개해서 달려왔다. 만약 한밤중에 임독양맥이 뚫려 일취월장하지 못한 상태였다면 청령을 쫓지 못했을 것이었다.

청령은 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검 소저. 신법을 전개해 쫓아오시느라 많이 힘들었을 터인데, 그것도 연이까지 업고.'

흑백쌍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상을 입은 것인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고작 저딴 애송이의 공력이 우리보다 강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더 이상 덤벼들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군.'

흑백쌍마는 고심 끝에 물러나기로 했다. 이 이득 없는 싸움을 계속해서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애송이!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만 다음에 만났을 때는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거라. 흘흘흘. 모두 돌아가자꾸나."

흑백쌍마의 외침에, 몸을 추스를 수 있는 산적들이 하나 둘 일어나 동료들을 이끌고 숲 속 깊숙이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후 정확히 일각 동안 말을 꺼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청령은 검을 검집에 아무렇게나 집어넣고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석윤서는 호법도 없이 운기를 하고 있는 청령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겠지. 정말 대단하군. 패도적인 무공으로 보아 청성파의 후기지수인 것 같기도 하지만, 저런 검법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그는 대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무림초출인 청령이었기에 호법이란 것 자체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한편, 자진해서 운기에 들어간 청령의 호법을 서기로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검하은이었다. 그녀는 호법 없이 운기를 하는 청령을 보며 대경실색했다.

'아무리 세상일에 무관심하다고는 하나, 이토록 바보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 무림인은 설사 가족과 같이 있더라도 호법을 서는 것이 당연한데…….'

청령이 일어난 것은 운기에 들어간 지 한 시진이 지나서였다. 깨어나는 것에 맞춰 석가장의 소가주인 석윤서가 다가와 포권을 취했다.

"반갑습니다, 소협! 가까이서 뵈니 이토록 젊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석가장의 소가주인 석윤서라 합니다."

청령도 그에 마주 포권을 취했다. 책에서만 봤던 것들을 실제로 하니 조금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물론 석윤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 또한 무림에 칭찬이 자자한 석 형을 보아 반갑습니다. 청성파의 제자인 청령이라 합니다."

석윤서는 청령이란 이름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니, 청령이라 하면 청성파에서 따돌리는 제자가 아니었던가! 분명 검술보다는 방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해서 검을 잡아 본 적도 어릴 때 이후로는 없다고 했는데?'

그러다 곧 손바닥으로 이마를 쳤다.

'그랬군, 청 공자는 청성파에서 은밀히 키운 고수가 틀림없구나. 일부러 세상에 괴상한 소문을 퍼뜨려 청 공자를 키우려는 속셈이었어.'

그는 청성파의 계략에 탄성을 질렀다.

"그나저나 청 소협께선 어디를 가고 계셨던 겁니까?"

"아, 청성파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세상이 워낙 흉흉한지라, 더 이상 중원에 있을 수가 없어서……."

"청성파요?"

석윤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청령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을 말해 줘야 하나……. 쩝, 이거 말하기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청성파 제자인 청 공자가 꼭 알아야 할 문제니 말하지 않는 것도 곤란하고.'

그는 곧 청령을 쳐다보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청 소협, 초면에 실례되는 말이지만…… 지금 청성파는 이미 멸문하고 없어졌습니다."

"예에?"

그 말에 놀란 것은 청령뿐만 아니라 검하은도 마찬가지였다. 구파일방의 한 곳인 청성파가 그렇게 빨리 무너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청령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돌아갈 곳도 없었다. 혈파의 눈을 피해 천하를 주유하거나, 은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청령이 무거운 얼굴을 하고는, 밑동이 어른 허리 굵기만 한 나무들이 우거진 깊은 산 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연이가 그를 쫓아가려 했지만 검하은이 저지했다.

"연아, 청 공자는 괜찮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자. 응?"

검하은은 청령의 현재 모습이 검각이 무너졌을 때의 자신의 모습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자신을 향해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줄 사부는 사라지고, 한솥밥을 먹던 사형들과 사제들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정말이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청령 오빠……."

연이가 청령의 뒷모습을 보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어느새 청령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크윽!"

일각 정도 걸어서 들어온 곳은 작은 공터였다. 그는 공터 가운데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흐흑, 장문인 어르신! 어, 어찌 이리도 허망하게 가신단 말입니까! 예! 대답이라도 해 보십시오! 제발!"

그는 하늘에 대고 그렇게 외쳤다. 아직도 비가 내리는지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청령은 천유한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청성파가 무너진다면 그도 가문과 함께 뼈를 묻을 위인이었다.

청령은 비급서를 너무 늦게 내민 것을 진정으로 후회했다.

"제기랄!"

청령이 주먹으로 바위를 깨뜨렸다. 깨진 바위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청령은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피로 물들었다.

그때였다.

청령의 손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검집으로 향했다.

"……그대들은 누구신데, 저를 훔쳐보고 계십니까?"

청령이 서 있는 작은 공터의 바깥 삼 장 뒤로, 수풀 사이에 은신하고 있는 자들의 기운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총 아홉인가? 실로 대단한 자들이 아닐 수 없구나. 이토록 가까이 와서야 느낄 수 있다니.'

"저에게 볼일이 있다면 다음에 와 주십시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작게 흔들렸다. 그것을 신호로 총 열 명의 그림자가 청령의 앞으로 뚝 떨어졌다. 그림자의 숫자를 세어 본 청령이 얼굴을 굳혔다.

'이럴 수가! 열 명이었다니! 저 거대한 창을 든 자의 기운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내뻗는 살기에 청령이 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껏 청령의 무지막지한 공력을 담아내느라 검신 곳곳이 금이 가 있었다.

청령은 소매로 눈을 훔쳤다. 아직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창을 든 그림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네가 얼마 전 혈룡대의 살수들을 죽인 자가 맞느냐?"

순간 그의 몸에서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살기가 뻗쳐 나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살기에 미쳐 버렸을 것이다.

청령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살기를 내뿜었다.

"얼마 전 아미산에서 나에게 적의를 드러내며 공격했던 흑의인들이 맞다면, 그대들이 말한 혈룡대는 내가 죽인 게 맞을 것입니다."

잠룡수라대의 대장 귀창이 청령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대단한 고수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먹향이 진하게 풍기는 서생 짓이나 하는 것이 어울릴 풍모였다. 하지만 귀창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아무리 풍모가 서생 같다 해도, 실체는 단 한 수에 혈룡대의 아홉을 몰살한 장본인이다. 방심했다가는 내가 당한다!'

귀창은 얼마 전 유경련과의 대결을 생각해 보았다. 진원진기를 사용해서 달려드는 유경련보다 현재 눈앞에 있는 청년이 훨씬 위협적으로 보였다.

"방심하지 마라! 놈은 청성파의 조무래기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놈이다."

그렇게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무공을 익힌 청령이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청성파라는 이름이 나오자 오히려 그의 귀에는 천둥 번개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자, 잠깐!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청령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귀창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다시 말해 주었다.

"후후. 네 실력이 청성파 쓰레기들과 근본이 다르다고 말했다. 자, 됐느냐?"

"하, 하나만 묻겠습니다. 혹시 청성파를 멸문한 것이 바로 그대들입니까?"

청령의 표정이 돌변했다. 청령의 눈이 부릅떠지더니, 이내 폭발할 것 같은 공력이 그의 인도에 따라 검으로 전해졌다.

그의 공력이 검에 더해지자 이 척 정도의 검강이 솟아났다.

우웅우웅―!

검곡이 주위를 매섭게 울렸다.

청령의 그런 모습에 귀창이 입가에 호를 그리며 창을 꼬나 쥐고 말했다.

"그렇다. 그 장문인은 물론이거니와, 늙은이들의 피까지 모두 내 창을 적셨다."

파앗―!

그 말과 함께 청령의 신형이 허공을 강하게 밟으며 그들을 향해 쇄도해 나갔다.

"이런 개자식들! 내 손으로 너희를 죽여 원귀가 된 청성파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겠다!"

청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빙허임풍의 신법을 펼친 그의 신형이 귀창의 코앞까지 닿은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청령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귀창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맞부딪쳤다.

채앵―!

파란색 검강과 붉은 창강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팽팽한 접전.

서로를 노려보던 둘 중에 청령이 먼저 검을 뗐다.

그 순간을 노린 잠룡수라대가 청령의 목을 향해 붉은 궤적을 그리며 암기를 날렸다.

타타타탕―!

호신강기에 부딪힌 암기들이 속절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청령은 그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공력을 끌어 모았다. 그의 손끝에 파란 강기가 맺혔다.

"칠십육로무형지!"

휘휘휘휙―!

아홉 개의 강기가 귀창을 제외한 잠룡수라대원들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싸움에서 껴들지 말라는 경고처럼 보였다.

"허헉!"

"억!"

귀창을 제외한 잠룡수라대의 모든 이들이 기겁을 하며 방어초식을 펼쳤다.

타앙!

그들의 단검은 칠십육로무형지를 막아 내기에 손색이 없었다. 다만, 그 충격이 커서 싸움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손목에 충격이 가해졌다.

귀창의 눈썹이 심하게 떨렸다.

'도대체 저 지법은 뭐란 말인가? 저런 지법이 있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청령은 칠십육로무형지가 한 명도 죽이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털어 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검에 공력을 더욱 강하게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삼초식 와룡연쇄참!"

구하천풍검법의 삼초식인 와룡연쇄참이었다. 청령의 검에서 검기가 흩뿌려졌다.

"내가 가만 놔둘쏘냐!"

귀창의 창이 한껏 공력을 머금고 허공에서 유린하는 검기들을 차례차례 막아 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로서도 쏟아지는 검기들을 모두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미처 막지 못한 검기들이 잠룡수라대를 공격했다. 와룡연쇄참은 고작 지법과는 다르다. 오직 대상을 죽이기 위해 날아가는 살초였다.

파악―!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다소 내공이 약한 잠룡수라대의 세 명의 머리가 그대로 터진 것이다. 목을 잃은 몸은 앞으로 주춤주춤 삼 보를 움직여서는 그대로 꼬꾸라졌다.

"이, 이놈이!"

귀창이 살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부하를 잃은 상심이 컸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고작 약관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은 청년의 초식을 막지 못했다는 생각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순간, 귀창의 기세가 변했다.

푸확―!

지금껏 내보이던 살기가 아니다. 엄청난 살기가 삽시간에 주위를 뒤덮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숨이 턱 막힐 듯한 살기다.

"마공이로군."

청령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공의 특징은 빠른 시간 내에 초절정의 경지를 밟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다만,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심마(心魔)라는 벽에 가로막혀 미쳐 죽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지금 청령의 눈앞에 있는 귀창은 그 심마의 경지를 뛰어넘어 어느덧 극마(極魔)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귀창이 마공을 펼친 순간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온몸에 혈관이 지렁이처럼 피부 위로 튀어나왔다.

"잘 아는군. 아수라혈심법이다. 크크큭. 지금까지 나의 이런 경지를 보고 살아남은 놈은 아무도 없지. 청성파의 수뇌부들도 이것을 보고 죽어 나갔다!"

극마의 경지는, 정파의 구분으로 따지면 초절정 다음인 화경이다. 하지만 화경은 상대가 안 된다. 마공의 장점은 무공이 너무나 패악하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무공으로는 마공을 절대 뛰어넘을 수 없었다.

청령은 만상귀일신공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상대가 아무리 마공을 익힌 잔혹한 자라 해도 사람이다. 심장을 파괴하면 살아남을 수 없고, 머리가 터져도 숨이 끊어진다.

그의 검강이 삼 척으로 늘어났다. 만약 무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봤다면 경악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 누가 약관의 나이에 검강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청령은 귀창의 뒤에 남은 다섯 명의 잠룡수라대를 보며 검을 가슴 쪽으로 모았다.

자신보다 고수를 상대할 때 제일 좋은 방법은 기습을 하는 것이다. 눈어림으로 볼 때 청령과 귀창의 거리는 고작 삼 장도 되지 않는다. 무림인들에게 이 거리는 발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불과했다.

청령의 오른발이 슬쩍 앞으로 움직였다.

"만상귀일검법 일초식 일섬검(一纖劍)!"

만상귀일신공을 펼쳤을 때만 제 위력을 발휘하는 만상귀일검법이었다. 청령의 발이 빠르게,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검이 귀창의 목을 향해 일선으로 찔러 들어갔다.

후앙―!

하지만 귀창은 절대 녹록하지 않았다.

'빠르다. 마공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눈으로 쫓는 것만으론 늦었을 것이다!'

다음 순간, 귀창이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검을 흘리고 창대 부분으로 청령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허업!"

크게 틈이 벌어진 청령은 검을 회수하려 들었다. 공격하기보다는 옆구리로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퍼억―!

청령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옆으로 처박혔다.

* * *

"령 오빠가 너무 늦어."

연이는 반 시진이나 지나도 청령이 나타나지 않자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검하은이 그런 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청 공자는 금방 올 거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고 싶으셨을 테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검하은의 표정이 침울해지자 석윤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출발할 채비를 했다.

"검 소저, 그럼 저와 함께 청 소협을 찾으러 가 보죠. 아직 소협께 고맙단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듯합니다."

워낙 경황이 없었던지라 간단한 인사치레를 주고받았을 뿐이다. 검하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연이도 그녀의 손을 꼬옥 잡으면서 외쳤다.

"나도 갈 거야!"

"그래, 같이 가자."

별일 없을 거라 애써 생각하며, 세 사람은 가벼운 마음으로 청령이 사라진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헉! 헉! 헉!"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겼다. 청령의 몸 이곳저곳에는 생채기가 많이 나 있었다. 청령이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호신강기를 펼치지 않았다면 이번 공격에 순식간에 허리가 두 동강이 날 뻔했다.

"우웩!"

청령이 입에서 선혈을 뱉어 냈다. 분홍빛의 피였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청령은 소매로 입가를 쓰윽 닦아 내고는 두 발로 지면을 버티고 검을 들어 올렸다.

가볍기 그지없던 검이 지금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그 모습에 귀창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정말 대단한 놈이로다. 그 순간에 호신강기를 치다니! 자칫 살려 놨다간 이십 년, 아니 십 년만 있어도 천하를 위협할 놈이다!'

그만큼 청령의 재능은 뛰어났다. 귀창은 자신의 손으로 아직 펼치지도 못한 날개를 부러뜨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한편 청령은 주위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귀에 세 사람의 미세한 발소리가 들렸다. 청령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이런, 연이와 검 소저로구나. 다른 한 명은 석 형인가? 하필이면 이때!'

괜히 싸움에 휘말렸다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워낙 먼 거리라 눈치 챈 사람은 청령과 귀창뿐이었다.

청령이 검을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욕설을 내뱉으며 광기에 씌여 달려들던 청령의 말투가 어느새 변해 있었다. 만상귀일신공을 일으키자 심신이 편하게 가라앉은 것이다.

잠룡수라대는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고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암기를 매만졌다.

귀창이 청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는 석가장의 소가주인 석윤서가 있다. 만약 그가 무사들을 이끌고 온다면 최소 몇 명은 죽을 것을 각오해야겠지. 괜한 충돌은 피하는 게 좋다.'

귀창은 유능한 소대장이었다. 무공만 강했다면 결코 잠룡수라대의 수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안내해라."

"좋습니다."

청령이 빙허임풍을 펼치며 먼저 사라지자 잠룡수라대도 가볍게 경공술을 펼쳤다.

청령이 도착한 곳은 용아천의 상류 쪽이었다. 산세가 워낙 험해 다른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곳이었다.

옆구리에 난 상처가 워낙 심해 점혈을 해도 피가 멎지 않았다. 청령은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지만 눈앞에 서 있는 잠룡수라대의 귀창을 보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청령과 귀창의 경공을 따라오지 못했던 잠룡수라대들이 속속 도착했다.

청령의 시선이 검으로 향했다.

'공력을 너무 많이 소비했다. 결국 검이 버티지 못하는구나.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는지…….'

귀창이 청령을 쏘아보았다.

"이곳을 너의 무덤으로 정했느냐?"

"……."

무덤으로 정하기에는 초라한 곳이었다. 청령은 굳이 귀창의 말에 대꾸할 마음이 없었다. 그저 내공을 끌어올려 왼쪽 손바닥으로 몰아넣을 뿐이었다.

그의 손바닥이 초록색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장법을 사용하기 직전의 현상이었다.

"후후. 그래. 무인들은 말이 아닌 무공으로 대답을 하지."

귀창은 정말로 청령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기쁜 마음으로 창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입가가 순간 말려 올라갔다.

휘리릭―!

청령은 발을 떼자마자 곧바로 최심장을 휘갈겼다.

"헉! 피해라!"

"최심장이다!"

쾅!

허공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커다란 폭격 소리! 지독한 독장에 잠룡수라대가 대경실색하며 급급히 자리를 피했다.

청령은 따로 떨어진 이들을 하나하나 쫓았다. 뒤에는 귀창이 쫓아오고 있었지만 그의 신법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청령의 손아귀에 붉은 빛깔이 은은하게 빛났다.

파앗!

그의 팔이 갑자기 사라진 듯 보이고 잠시 후, 그 손에는 여지없이 잠룡수라대 중 한 명의 목이 대롱대롱 잡혀 있었다.

"케엑!"

하지만 그는 곧바로 청령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청령이 힘을 써서 그를 패대기친 것이다.

"크아아악!"

그의 목이 붉게 물들었다. 열양지기의 화기에 순식간에 당한 것이다. 귀창은 온 힘을 끌어올린 청령의 신법을 쫓을 수 있을 정도로 신법의 귀재가 아니었다. 결국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노옴! 쥐새끼처럼 피하지 말고 맞서라!"

부웅!

귀창의 창이 청령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청령은 침을 꼴깍 삼켰다. 식은땀이 등골을 지나 흘러내렸다.

또다시 청령을 놓치자 귀창이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었다. 귀창은 창은 귀신같이 다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창과 함께 보냈기에 신법이나 보법에는 능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청령의 빙허임풍은 천하십대신법에 들 정도로 대단한 비급이었다. 청령은 그렇게 잠룡수라대를 하나하나 붕괴하고 있었다.

귀창이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잠룡수라대는 이미 자신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청령보다는 귀창이 나았다. 청령은 대부분의 내공을 손실했다.

"큭!"

청령이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신음 소리를 냈다. 상처가 터져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청령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어느새 다가온 귀창이 그의 목을 향해 창을 휘두른 탓이었다.

"읍!"

청령은 입술을 깨물고 곧바로 검신으로 창대를 막았다. 그러자 곧바로 창이 다시 찔러 들어왔다. 공력을 머금은 공격이었다. 청령도 곧바로 내공을 운용했다.

하단전에 있던, 한 줌밖에 없던 내공이 검신을 타고 발현되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옅은 빛이었다.

채앵!

촤르륵!

청령의 신형이 뒤로 일 장이나 밀려 나갔다. 그의 발밑이 깊이 파여 있었다. 그만큼 귀창의 창술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흐흐흐. 네놈의 운명이 이제 다했다는 것을 하늘이 말해 주고 있구나."

청령은 분했다. 청성파의 복수를 하지 못했다는 것에 하늘에 가서도 장문인을 뵐 낯이 없었다.

"흐아압!"

귀창이 그대로 창을 계속 밀었다. 청령의 발이 땅바닥을 깊게 패며 밀려 나갔다.

콰지직!

"으응?"

청령이 들고 있는 검신의 중앙부가 가뭄 난 땅처럼 쩍쩍 갈라졌다.

쨍그랑!

검신이 깨어지고, 그 파편이 허공을 비산했다. 그 순간 귀창과 청령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청령의 다문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푸욱―!

왼쪽 가슴이 불에 덴 듯 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청령의 가슴팍을 귀창의 창이 정확히 꿰뚫었다. 그곳은 심장이 있는 곳이었다.

청령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충혈 돼 있었다. 그 붉은 안광을 본 귀창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흐흐. 하지만 어차피 이대로 죽을 놈이거늘, 이토록 주눅 들 이유가 없다.'

순간, 청령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그의 내공이 순식간에 손을 타고 흘러왔다. 진원진기의 기운을 사용한 것이다.

그의 손이 심장을 꿰뚫은 창대를 붙잡았다.

"후후. 지, 지금 우, 우리의 발밑에 뭐가 있는지 아시오?"

귀창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은 용아천 상류에 위치한 둑 위였다. 귀창의 눈이 커졌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억지로 힘을 써서 창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무리였다. 만근이라도 되는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무게였다.

"그래도 같이 가야 쓸쓸하지 않을 것 아니오!"

"놔, 놔라! 이놈! 당장 놓지 못할까!"

청령의 왼손이 둑을 가리켰다.

"구하천풍장!"

그의 손에서 맹렬한 기운이 솟아났다. 그 기운이 둑을 때리자, 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얼마 전에 내린 엄청난 폭우로 인해 지금 둑 주위에는 엄청난 물이 차올라 있었다.

콰앙!

쏴아아아!

"아, 안 돼!"

귀창의 비명 같은 한 마디는 그대로 물에 파묻혀 버렸다. 엄청나게 불어났기에, 귀창 같은 고수라 해도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 이거면 돼. 이거면…… 먼저 간 청성파 사람들을 볼 낯은 있겠지.'

그때였다.

물에 쓸려 가는 그를 향해 한 노인이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 * *

전투의 흔적을 발견한 석윤서와 검하은의 낯빛이 대번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아무래도 전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자리를 옮긴 듯하군요."

석윤서의 말에 검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윤서가 말을 이었다.

"추적술은 조금은 배웠습니다만, 어디로 옮겼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경공술이 대단한 고수들입니다."

"석 공자! 공자께서는 지금 연이를 데리고 상단으로 돌아가 계셔 주시겠습니까?"

"아니, 검 소저께선 어쩌시려고……?"

"잠시 이 일대 좀 둘러보고 갈 생각이에요. 일각 안에 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연이를 데려가세요. 제가 꼭 찾으러 갈 테니까……."

"언니! 난 가기 싫어."

그 무렵이었을까.

콰콰콰쾅!

연이은 굉음에 검하은이 귀를 쫑긋 세웠다.

검하은은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신법을 전개했다. 임독양맥이 뚫린 그녀의 신법은 석윤서의 눈으로도 쫓기 힘들 정도였다. 검하은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 줘요.'

신법을 펼치는 그녀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다, 당신은……?"

청령의 입에서 간신히 그 말이 튀어나왔다. 수압이 워낙 세서 말하기조차 힘들었다.

"드래곤은 태자마마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처사입니다. 한때 라인하르트 제국의 추기경인 제가 어찌하여 마지막 남은 고귀한 핏줄을 죽게 내버려 두겠나이까."

청령은 노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명 익숙한 듯은 한데,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중원의 언어가 아니었다.

노인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마르드 님! 제 간청을 들어주소서. 먼 이계의 구천에 떠도는 원귀가 된다 해도 드래곤과의 맹약을 잊은 저를 용서하시옵소서!"

노인은 물속에서도 거침없이 말을 했다. 그의 입속으로 물이 들어갔다. 헛구역질을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그때, 청령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노인의 몸이 어둡고 캄캄한 물속을 비출 정도로 빛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리바이브 리턴(Revive Return)!"

그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절대적인 디바인 포스를 바탕으로 한 마법. 그것은 신성사제들만, 그것도 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득한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대마법이었다.

청령의 눈앞이 흐려졌다. 노인의 말에 정신을 조금 차리긴 했지만 애초에 심장이 뚫린 것이다. 진원진기로 간신히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긴 했지만 애당초 그 이상은 무리였다.

'아…….'

청령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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