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인하르트-2화 (2/60)

■ 제2장 청령을 뒤따르는 노인 □

혈룡대(血龍隊).

흑의를 입은 자들은 자신들을 이렇게 말했다. 총 백여 명으로 이루어진 혈룡대는 혈파에서 수십 년간 키운 단체였다.

한 명 한 명이 절정의 끝을 바라보는 경지였으니 웬만한 문파로서는 손도 대지 못하고 멸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본교에서 지고한 명령을 하나 받았다.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이 땅 중원에 있는 모든 문파를 멸문해라. 그들에게 마도천하가 다가왔음을 알려야 할 것이다.'

그들은 명령대로 모든 문파들을 멸문했고, 혼자서는 힘든 오대세가나 구파일방 같은 명문파의 경우에는 떼로 쳐들어가 이미 제조법이 실전된 벽력탄을 이용해 하루아침에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

중원은 그렇게 혈파에 의해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 많던 청성파의 손님들도 자신들의 문파가 공격당했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돌아갔다.

쏴아아―!

한 방울 내리던 빗방울도 어느덧 폭우로 돌변하니 청성파 사람들 중에도 바깥으로 나온 자가 없었다. 이미 장문인과 장로들은 머리를 맞대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고, 사람들 모두는 어두운 얼굴을 쉽사리 펴지 못했다.

중원에 퍼진 소문.

구파일방 중 이미 아미파와 소림사, 그리고 점창파가 멸문을 당했고 개방이 봉문했다. 오대세가에서는 사천당문이 멸문의 위기에 다다라 있었다.

"불과 오십 년 전 그 제조법이 실전된 벽력탄을 이용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지 않소. 우리도 그에 합당한 방어책을 내야 되는 것 아니오?"

청한 장로의 말에, 그의 앞에 앉아 있던 노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바로 청성파의 최고 배분인 유경련으로, 천유한 장문인의 할아비 되는 자였다.

"후우―! 한 장로는 모르겠지만, 벽력탄의 위력은 그 하나로도 전방 오 장을 초토화할 수 있소. 그 어떤 방법으로도 벽력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오."

"하, 하지만 유경련 사숙조 선배님! 이대로 당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청성파가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눈뜨고 바라볼 순 없습니다. 저라도 나서서 싸워 한 놈의 목이라도 베고 죽어야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무림맹에서 이미 독자적으로 움직인 것 같소이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땐데 이제야 움직였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혈파의 위치를 추적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버렸을 것이라 생각하오. 무림맹은 추가적으로 각 문파의 후기지수들을 강제집병할 것 같소."

"후, 후기지수들을 말입니까?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후기지수들이야말로 미래의 중원을 이끌어 갈 주역들이건만, 차라리 우리 장로들이 가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유경련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 눈빛이 언성을 높인 한 장로를 째려보았다.

"나라고 별수 있는 줄 아시오? 장로들은 양성할 수 없지만, 후기지수들은 다시 키우면 된다는 게 현재 무림맹의 생각일 것이오."

장로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쑥덕거렸다.

"후기지수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별 방법은 없소. 그저 제일 처음 출전한 무사들이 혈파를 멸문하기를 바라는 것 밖에는."

사흘이 지났다.

방 안에 틀어박혀 자신이 이론적으로만 익힌 심법과 검법 등을 자세히 연구 중이던 청령은 아침 일찍 한 장의 서신을 받을 수 있었다.

친애하는 청령 공자에게.

청성파의 위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곳입니다. 우리 무림맹은 그 청성파의 인재들을 경험과 훈련을 목적으로 현재 중원을 어지럽히는 혈파를 친히 멸문시켜 중원의 안정을 되찾고 싶습니다. 신진 영웅이 되어……(중략)…… 그리하여 이 서신을 받은 후 이틀 안에 낙양으로 속히 모여 주십시오.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을 영웅이라는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내용에 불과했다. 후기지수들 전부가 이 말에 속아 입신양명을 하기 위해 낙양으로 모일 것이다.

청성파에서 낙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말을 타고 꼬박 이틀은 가야 한다.

청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나마 말의 투레질 소리를 들으니 이미 사형들은 떠난 모양이었다. 청령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청령도 낙양으로 가는 것을 알 테지만, 그들은 그를 결코 사제로 여기지 않았다.

'이 버림받은 기분을 지우기 위해 매일같이 청성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사람들과 친해졌는데…… 역시 사형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가 무공의 수위를 밝히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사형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들은 이번에는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청령을 따돌렸다.

철퍼덕―!

신을 신고 있던 청령의 발밑에 진흙이 잔뜩 묻었다. 하지만 청령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청령은 비를 맞으며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이윽고 유경련과 천유한이 머무르는 거처에 가서 절을 한 번씩 하고는 옷을 털어 낸 후 바로 길을 떠났다.

대문을 나온 청령은 지금껏 자신이 머물렀던 청성파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약간 떠올랐다.

만상귀일신공을 익힐 때, 같이 손실되었던 빙허임풍(憑虛臨風)을 펼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미 만상귀일신공을 팔성이나 이룬 청령에게 오랜 시간 빙허임풍을 사용하는 정도야 가뿐했다.

'장로님들과 장문인 어르신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신법은 최대한 자제해 가면서 사용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론적으로만 익혔던 기술들을 낙양에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내 몸에 익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청령의 눈이 이채를 발한 순간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몸은 놀랍게도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오 장씩 쭉쭉 뻗어 나갔다.

"현재 내가 익히고 있는 무공을 총정리하자면……."

내공심법에는 만상귀일신공이 존재하고, 신법에는 빙허임풍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미 대성한 청명심법도 있었고, 검법에는 만상귀일검법(萬象歸一劍法)과 다섯 초식으로 이루어진 구하천풍검법(九河天風劍法)이 있다.

장법은 일류무공인 최심장(催心掌)을 대성하고 있으며, 손실된 구하천풍장(九河天風掌)을 오성이나 이루었다.

또 권법은 천풍무형신권(天風無形神拳)을 고작 삼성 이루었지만, 무공초식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지법은 칠십육로무형지(七十六路無形指)로 일성이지만, 삼십 장이나 떨어진 곳의 암석에 구멍을 뚫을 정도였다. 그 외에도 청성파의 여러 무공들을, 이론뿐만 아니라 그 초식들을 가볍게 몸에 익혀 두고 있었다.

'어차피 이틀 안에만 낙양에 도착하면 된다.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야 최소 방해는 되지 않을 테지. 방 안에 틀어박혀 이론적으로 익힌 무공은 실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후후, 생각해 보니 지하석실에서 발견한 무공들이 이리 도움이 될 줄이야.'

과거 청령은 정말 서생이 될 운명에 처한 재능 없는 제자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머리가 총명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장난을 좋아하던 그였기에, 마치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청성파 안을 매일같이 들쑤시고 다녔다. 그런 그가 여러 공헌을 세운 조상들의 무덤가에서 지하석실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석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진법을 파훼해야 했기에 그는 나날이 진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삼 년째 되는 날 그는 비밀을 풀고 드디어 지하석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놀랍게도 석실에서 발견한 것은 이미 청성파에서 실전되었다는 무공들이었다. 그 무공을 남긴 조상은 당시 청성파에 자신의 진전을 이을 제자가 없자 무공들과 함께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후에 누군가 자신의 무공들을 발견할 경우 청성파에서 진전을 이을 자를 찾아 달라는 글귀가 석실 안쪽에 적혀 있었다.

청령이 출발하기 전 유경련의 거처에 들렀던 것은 그저 인사를 드리려는 것뿐만 아니라 무공들을 전해 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사본에 불과했다. 청령이 진본을 모두 외운 후 예전에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청령의 신형이 눈에 보이지 않을 빠르기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로 보이지 않는 작은 그림자가 그를 쫓았다.

다섯 시진(열 시간)을 꼬박 달린 청령의 내공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청령은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을 생각으로 더욱 발을 놀렸다.

쏴아아아!

길이가 최대 이십 장은 될 법하고, 폭만 해도 사십 장은 되는 웅장한 폭포가 청령의 눈앞에 나타났다.

중원 전역에 내리는 폭우 때문인지 폭포의 깊이가 남달라 보였다. 청령은 폭포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곧바로 장작을 구해다가 장작을 피운 후, 가부좌를 틀어 앉아 만상귀일신공을 운용했다.

'내공의 양이 만만치 않은데 빙허임풍이 생각보다 많은 내공을 잡아먹는군, 후후. 하긴, 이렇게 오랫동안 신법을 펼쳐 본 건 처음이니 내공의 양을 조절하지 못했어.'

문파에서는 신경 쓸 것이 한두 개가 아니라 신법을 펼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는 온몸이 피로에 지쳤으면서도, 겉으론 지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뻤다.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바깥에 나와 신법을 펼치고 폭포 앞에 서서 무공을 연마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도 꿀 수 없는 얘기였다.

그는 하단전에 빠른 속도로 차오르는 내공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낙양에 가면 실력 좋은 후기지수들이 많이 있겠지. 그곳에서 청성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려면 그때까지 내가 익힌 무공에 최대한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유리개걸하며 돌아다닌 그때에 자신을 거둬 준 고마운 천유한 장문인. 그에게는 목숨으로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지금쯤 장문인 어르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까? 실전된 청성파 최고 무공들이 발견되었는데. 아마 때가 때인 만큼 지금은 아니겠지만, 세상이 잠잠해지면 폐관수련에 들어가시겠지."

터무니없는 실력으로 혈파를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영약으로 내공을 늘리고 온실의 화초처럼 나무를 상대로 검을 휘두른 후기지수들에게, 목숨을 걸고 싸워 온 혈파인들과의 결투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청령은 죽으러 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지금껏 얼굴 한 번 못 본 부모가 생각나 원망스런 기분이 들었다.

"후후, 부모가 날 그렇게 낳아 놓고 버리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했을 텐데."

타고난 운명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청령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모에 대한 생각을 훌훌 털어 버리고 폭포와 대면했다.

웅장한 폭포의 모습에 주눅이 들 만도 했지만 청령은 단전에서 공력을 끌어올렸다.

실제로 신법이나 신공 이외에 무공을 펼쳐 보이는 일은 처음이었다. 머릿속으로만 펼칠 때와는 달리, 내공이 모든 혈들을 유린하며 그의 손에 모였다.

"칠십육로무형지!"

이윽고……

그의 손가락 하나에서 하얀 기운이 화살처럼 쇄도해 나갔다.

쒜에엑―! 퍼엉!

폭포의 중간 부분이 잠시 삼 장 정도 뚫렸다가 되돌아왔다. 물줄기가 세차게 튀었다.

"구하천풍장! 하압!"

호기 어린 기합과 함께 구하천풍장이 펼쳐졌다.

청성파의 무공은 본래 악랄하고 잔혹한 것들이 많았다. 구하천풍장의 위력은 아홉 갈래의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다수를 상대로 한 싸움에나 사용할 만한 무공이었다.

보이지 않는 구하천풍장의 위력이 폭포의 십 장을 여지없이 꿰뚫고는 사라졌다.

"구하천풍검법 일초식 풍룡비상!"

아홉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구하천풍검법의 묘미는 그 초식들이 모두 연결돼 있다는 데 있었다. 그중 첫 번째 초식 풍룡비상은 시전자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수십 장을 뛰어오르게 하는 수법이었다.

청령의 몸이 십 장은 날아올랐다. 허리춤에서 두툼한 칼을 꺼내 든 그가 검을 아래로 내리치며 외쳤다.

"제이초식 파지풍룡(破地風龍)!"

검이 순간 옅은 실날을 흩뿌리더니 방금 전까지 청령이 서 있던 땅을 강하게 타격했다.

쿠웅―!

이윽고 땅이 와르르 무너졌다. 청성파의 무공은 대부분 힘을 표출하는 것들이 많았다. 초식들의 이름에 '풍룡'이 들어가는 것은, 풍룡이 악랄하고 지독한 힘을 표출하기 때문이었다.

"조절이 조금 미숙하네. 확실히 체력 면에서는 조금 힘들긴 해."

청령은 땀을 닦아 내고는 다시 한 번 검을 들어 올렸다.

순간 누군가가 장작불을 향해 무작정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상당히 빠른 속도. 무림인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저런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이윽고 청령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무림인을 보고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 * *

한 여인이 숲 속을 재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여인의 등에는 한 소녀가 업혀 있었는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복면인 열이 쫓고 있었다.

그녀와 복면인들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걸로 봐서, 용빼는 재주가 있지 않은 이상은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하악! 하악! 놈들을 너무 물렁하게 봤어."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 용모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각의 소각주였던 검하은이었다. 지금은 검각이 멸문을 당한 후 혈파의 혈룡대에게 사흘을 넘게 쫓기는 몸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후기지수였다고 한들, 절정고수들을 여럿이나 상대할 정도로 내공이 깊지는 않았다.

검을 여러 번 섞어 본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냅다 도망가기로 결정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장작불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순간, 그녀의 눈이 번쩍 하는 이채를 발했다.

'이런 깊은 산속에 누군가가 있다고? 정말 다행이야. 최소한 연이라도 남겨 두고 갈 수는 있겠어!'

그녀는 지체 없이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검하은을 뒤쫓던 혈룡대 일원들이 일제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 어찌해야 합니까? 인근에 사람이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호! 상관없다. 어차피 사람이 있다고 한들, 살인멸구를 해서 세상에서 지워 버리면 그만이다."

복면인들은 시퍼런 단검을 뽑아 들고 검하은의 뒤를 쫓았다.

검하은은 장작불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숨이 멎을 뻔했다. 웅장한 폭포, 그리고 그 앞에 월광을 받으며 서 있는 사내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사내였기 때문이다.

"처, 청 공자가 어째서……?"

왜 이곳에 청령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한편, 청령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검 소저? 어, 어떻게 검 소저가 여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어서 빨리 연이를 데리고 도주하세요! 이렇게 있다간 죽을지도 모른다구요!"

최소한 연이라도 살려 보낼 생각이었다. 검하은이 등에 업힌 연이를 청령에게 넘겼다.

마혈을 점했는지 연이는 죽은 듯 마비된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연이를 넘기고 나서야 검하은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연이가 청 공자와 안면을 트고 있었으니 다행이야. 이로써 연이는 살아남을 수 있겠지. 연이야! 넌 검각의 마지막 후손이야. 네가 훗날 이 일을 기억한다면 검각을 재건해 주길 바란다!'

"어서 가시라니까요?"

그녀가 소리친 그때까지도 청령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였다. 복면을 뒤집어쓴 일단의 무리가 검하은의 뒤를 급습해 왔다.

"이, 이런! 제가 이들을 최대한 막아 보겠어요. 이 틈을 타서 얼른 도망가세요."

그녀는 아직도 머뭇거리는 청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검하은이 보기에 청령은 일류도 되지 못한, 이류무사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 도망간다 해도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녀는 장검을 꺼내 들고 내공을 주입했다. 실낱이 흩날리는 것처럼, 그렇게 검기(劍氣)가 솟아올랐다.

하지만 청령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은 검각을 무너뜨리기로 작정을 했나요? 아니면 저들과 동조라도 했나요?"

청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어서요!"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복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옆구리가 불에 덴 듯 시큼한 느낌이 들었다.

"크윽!"

사흘이나 계속되는 추격전에 내공을 소모하고 정신적 피로감에 휩싸인 검하은이 그들의 공격을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검하은은 옆구리를 왼손으로 감싸고 검병을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끄, 끝났어. 최소한 일각(15분)이라도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들을 너무 과소평가한 게 나의 잘못이었어. 이, 이토록 허무하게, 백오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검각이 무너지는 것인가?'

그녀의 고운 이마가 찡그려졌다. 그녀의 눈앞에 용맹한 기운을 담고 있는 열 개의 검이 나타났다. 그때였다.

그녀에게 전음이 들려왔다.

"살고 싶다면 당장 뇌려타곤을 하십시오, 검 소저! 그리고 전 여자를 두고 도망가는 그런 놈이 아닙니다."

그녀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뇌려타곤은 형편없게 땅바닥을 구르는 자존심을 버리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음대로 땅바닥을 볼품없이 굴렀다.

당연히 열 개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그들은 설마 콧대 높은 검각의 소각주가 뇌려타곤을 할 줄은 몰랐기에 순간 허점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허점을 틈타 청령이 장을 후려쳤다.

"구하천풍장!"

그의 손바닥에서 아홉 갈래의 맹렬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복면인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들은 재빨리 검을 거둬들이고 방어 초식을 펼쳤다.

콰앙!

"큭!"

장을 맞은 복면인들이 그 강력한 공력을 견디지 못하고 오 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구하천풍장의 위력이 아홉 명을 즉사시켰으나, 아직 한 명의 복면인이 살아남았다.

그는 그들 중에 기세가 제일 거대했다. 복면인들을 이끌고 있던 대장이었다. 그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제길, 설마 저년이 믿는 구석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군. 그래도 그렇지, 우리 혈룡대가 이토록 허무하게 당할 줄이야…… 그렇다면!'

순간 복면인 대장이 땅에 누워 있는 검연의 앞으로 다가가 칼을 목에 대었다.

"여, 연아!"

연이는 마혈을 점해 있어 움직일 수 없는 몸이었기에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 입술을 벌벌 떨 뿐이었다.

"잠깐, 더 이상 움직이지 마라. 만약 너희 둘 중에 누구라도 움직이면 이 고운 목이 순식간에 잘려 나갈 테니까."

"더, 더러운 놈! 감히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이를 인질로 잡다니."

"어, 언니. 나, 난 괜찮으니까 그냥 이놈을 죽…… 꺄악!"

복면인이 칼을 살짝 누르자 연이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이상 입을 열면 가만두지 않겠다. 너희도 검을 내려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끄윽!"

칼이 연이의 목을 더욱더 비집고 들어갔다. 복면인들의 칼에는 대부분 극독이 묻어 있기에, 미미하나마 그 상처를 통해 독이 침투했다. 연이는 물론, 검하은도 옆구리에 당한 상처 때문에 얼굴빛이 대번에 변하고 있었다.

검하은은 사실상 극독에 중독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윽고……

검하은은 결국 검을 내려놓았다. 다리가 어찌나 부들거리는지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연이는 내가 잘 알아서 구하겠소. 검 소저는 촌각이라도 빨리 운기를 하시오."

"하, 하지만……!"

"당신 말대로 검각을 이대로 무너뜨릴 작정입니까?"

검각의 재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상승경지의 무공을 가지고 있는 자가 꼭 필요했다. 연이는 삼류 수준도 되지 못했으니, 검하은이 없다면 혼자 검각을 재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검하은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는 곧바로 운기에 들어갔다.

그것을 본 복면인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런 상황에 운기에 들어간다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운기 중에는 개미 한 마리가 몸을 기어 다녀도 기혈이 뒤틀릴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복면인과 검하은의 거리는 고작해야 일 장 반. 그리고 검의 길이가 삼 척 정도 되니 고작 두 보만 걸어가 찌른다고 해도 검하은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복면인은 검하은과 청령의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적어도 삼 장은 돼 보이는 거리였다. 아무리 상대가 일장에 아홉의 혈룡대를 죽인 자라 해도 자신은 혈룡대에서 경공술로 극의를 이뤘다. 중원을 둘러보아도 신투가 아닌 이상 자신을 경공으로 이길 자는 없었다.

'저년의 목을 취한 후 곧바로 다시 인질극을 벌이면 된다. 멍청하군! 이런 상황에서 운기라니. 하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이겠지.'

운기를 한다고 해도 치료가 가능한 독이 아니었다. 살짝 베기만 해도 일각이면 어떤 고수라도 죽일 수 있는 극독이었다.

'흐하하, 결국 운기 때문에 고통의 시간만 늘어날 뿐이다. 저놈이 아무리 고수라 해도 저년에게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공격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반보를 움직였다. 어찌나 은밀했는지 먼지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복면인이 연이의 목에서 칼을 떼고 마지막 남은 한 보 반을 걸으며 검하은에게 칼을 뻗은 것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파밧!

그때, 청령이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검하은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손목이 번개같이 움직여 검신을 쳐 냈다.

탕―!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청령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는 복면인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쿠웅!

내가중수법이 가미된 공격이었는지라, 복면인은 겉은 멀쩡했으나 내상이 깊었다. 즉사했는지 다리에 힘이 스르륵 풀려서는 그대로 쓰러졌다.

청령은 복면인을 밀쳐 내고 곧바로 연이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령, 령 오빠……."

"더 이상 말하지 마. 몸에서 힘을 빼."

간절히 자신을 부르는 연이를 보던 청령이 아혈을 점했다. 일단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볼 일이었다. 점해 있던 마혈을 풀고 곧바로 연이를 일자로 눕혔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움직이자, 연이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추궁과혈의 수법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연이의 거골혈, 견정혈, 결분혈, 경문혈 등을 점해서 더 이상 독이 어깨 밑으로 퍼지는 것을 막았다. 길이 막히자 독 기운이 팔과 머리 쪽으로 밀고 들어갔다.

청령은 곧바로 연이의 모공 쪽으로 내공을 집어넣었다.

만상귀일신공으로 얻은 내공들은 모두 악랄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청령의 공력이 독 기운을 일순간에 휘어잡았다. 청령은 이마에 난 땀을 닦아 낼 새도 없이 곧바로 거골혈부터 경문혈까지를 다시 점했다가 풀고 자신의 공력으로 임독양맥을 타통하여 하단전으로 이끌었다.

"쿨럭!"

연이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튀어나왔다. 파랗게 질려 있던 얼굴에는 어느새 편안한 기색이 깃들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임독양맥을 타통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연이가 자신의 내공을 더 잘 받게끔 몸에 살짝 변화를 준 것뿐이었다.

청령은 자신의 내공을 손바닥으로 다시 흡수했다. 공력들이 하단전에서 뽑아져 나와 청령의 손바닥으로 모였다.

그의 손바닥에는 극독과 공력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게 바로 그 독이로군. 생각보다 지독해. 이 정도 위력이라면 혼자서 중소문파를 무너뜨리는 것도 일도 아니겠어.'

화르륵―!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열양지기에 독이 한순간에 타올랐다. 청령은 재빨리 호수로 달려가 연이의 목을 축여 주고, 운기에 들어가 있는 검하은의 등 뒤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옷을 찢자 마침내 속곳이 드러났지만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속곳까지 그대로 찢었다. 그녀의 뽀얀 살결이 월광 때문인지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는 곧바로 검하은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제부터 제 말 잘 들으십시오. 검 소저에게 열양지기의 공력을 밀어 넣을 것이니, 내 공력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혹시 고통이 뒤따르더라도 입을 열어선 절대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거의 경악 상태에 빠져 있었다.

열양지기가 어떤 기운인가. 태양지체가 아닌 이상은 몸과 어우러지지 않아 백이면 백 죽는다는 희대의 기운이 아니던가!

하나, 그녀는 뛰어난 안목으로도 청령이 태양지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상 청령이 갖고 있는 열양지기는 그가 붉은 전갈의 내단을 먹고 만상귀일신공으로 운기해서 우연히 얻은 기운이었다. 다만 그때 열양지기뿐만 아니라 빙정을 먹고 얻은 한기까지 있었으니, 그 둘이 상쇄해 태양지체가 아니라도 청령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청령은 열양지기가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검하은의 모공을 통해 공력을 집어넣었다. 그의 공력이 마음껏 몸속을 유린하고 다니는 극독을 하나하나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처 부위도 크고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그녀의 몸에 퍼진 독은 연이의 경우보다 훨씬 심했다.

"크윽."

고통의 단말마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하지만 열양지기는 너무 거대한 기운이었기에, 검하은이 쉽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연이의 몸에 흘러 들어간 열양지기의 양은 미미했지만, 검하은의 단전에 들어간 공력은 극독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도 같이 불태우고 있었다.

청령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대로 가다간 독을 잡기도 전에 화상으로 검 소저가 죽을 것이다. 아까와 같이 그냥 열양지기를 뺀 공력으로 무작정 잡아서 소멸시키는 방법밖에는 없어.'

그는 서둘러 열양지기를 거둬들이고, 연이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할 정도로 포악한 공력으로 극독을 잠재웠다. 하지만 독이 퍼지는 속도와 잠재우는 속도가 거의 일치했기에 독을 잡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었다.

아무리 심후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청령이라 해도 힘들고 지치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곧바로 임독양맥을 향해 공력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이의 경우 나이가 어려 불순물이 없기에 임독양맥을 뚫는 일이 매우 쉬웠지만(물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미 약관의 나이가 지난 검하은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임독양맥을 타통하기 위해서는 건드리기만 해도 죽을 수 있는 여러 개의 사혈과 자칫 식물인간이 될 수도 있는 마혈들을 지나쳐야 했다. 청령의 공력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한 빨리 해치워야 했다.

그는 곧바로 임맥과 독맥을 향해 기운을 나누어 밀어 넣었다. 신경이 둘로 분산되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으으읍!"

억지로 뚫으려고 하니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질끈 깨물렸던 검하은의 입술이 조금씩 열렸다. 그녀의 고운 이마가 고통으로 찡그려졌다. 그때였다.

뻥―!

그녀는 마치 무언가가 안에서 폭발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매우 편안해지면서 그동안 독 때문에 숨도 못 쉬던 공력이 서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역시 연이와는 다르군. 그녀 혼자서도 충분히 독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그 독을 내공으로 바꿔 독기가 상승기운이 되는 기연을 얻을 수도 있을 테지.'

청령이 공력을 거둬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나무 사이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청령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애초에 폭포에서 수련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좋은 성과를 얻었다. 내심 내공 운용법이 미숙하다 생각하던 그였기에 이 일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고, 연이나 하은 또한 임독양맥을 타통하는 기연을 얻었으니 앞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으다다닷!"

그가 기지개를 켜며 팔을 쭉 뻗자 뼈마디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곁에는 연이가 그렁그렁한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연이 또한 하룻밤 새에 피부가 굉장히 고와졌다.

그러고 보니 내심 검 소저가 왜 여기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연아, 어서 여기 앉아 봐."

"응, 오빠!"

연이도 자신을 치료해 주고 구해 준 사람이 청령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잘 따랐다.

"저 사람들한테 쫓기던 이유가 도대체 뭐야?"

연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른다는 의미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을 훌쩍였다.

"흑흑, 우앙! 검각에 돌아가니까…… 흐윽, 각주님이랑 언니 오빠들이 다 죽어 있었어. 흑! 흑! 그리고 갑자기 이상한 아저씨들이 쫓아와서 언니랑 나는 무조건 도망갔어."

그러면서 청령의 품 안으로 쏘옥 파고들어 왔다. 청령은 그 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걱정 마라. 이제부터 이 오빠가 지켜 줄게."

혈파가 중원정벌 계획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 만약 그들이 정말 세상에 나온다면 중원정벌은 순식간에 이뤄질 테고, 그때부터 중원은 마도천하가 될 것이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청령은 청성파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무림맹의 말을 따르고 있어, 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결코 가만히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등 뒤에서 검하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슬쩍 품에 안고 있던 연이를 풀어 주었다.

연이가 재빨리 달려가 하은의 품에 안겼다.

"어떻게 하다니요.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낙양으로 갈 겁니다. 낙양에는……."

"낙양도 좋은 방법이죠. 확실히 후기지수들끼리 은밀히 만나는 것보다는 백주대낮에 사람 많은 낙양이라면 혈파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군사의 계략은 정말 대단했어요.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혈파는 귀신같이 파악하고 사람이 많은 낮에 후기지수들을 공격했죠."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청령은 진정 분노했다. 무림의 일로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을 것이 눈에 훤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무림맹의 군사인 제갈벽이 배신을 했다는 것이 제일 유력해요."

"아니, 군사가 배신이라니요?"

그는 아직 중원의 자세한 소문이나 진위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제갈벽은 예전부터 매우 간사한 인간이었어요. 대세가 혈파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생각하니 여지없이 몸을 돌린 거죠. 그 증거로, 현재 제갈벽의 모습은 낙양에서의 일을 추진한 뒤로 볼 수가 없어졌어요. 오대세가에서 살아남은 세가도 고작 제갈세가뿐이죠."

"흐음!"

청령은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제갈벽을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그때 청령이 이마를 쳤다.

"아! 그러고 보니 후기지수들을 강제집병 하겠다는 것도 제갈벽 군사입니까?"

검하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거기까지 설명한 적도 없건만 청령은 이미 한발 앞서 가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막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래도 한때는 서생의 삶을 살면서 먹향을 풍기며 책에 파고든 적이 있었다. 그때는 무공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허투루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청령은 다시 움직일 채비를 마쳤다.

"그럼 검 소저께서는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검하은은 갑자기 혼란에 휩싸였다. 밤새도록 도망만 다녔으니 어디로 가서 몸을 숨길지는 생각해 둔 바가 없었다.

"그럼 일단 저와 같이 청성파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청성파는 호락호락한 문파가 아니니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비급이 있지 않은가! 그 비급을 맛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청성파 사람들은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고 한이 맺혀 구천을 떠돌 것이다.

검하은은 잠시 머뭇거렸다. 자기 때문에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닐지 생각한 것이다.

청령이 빙그레 웃으며 연이를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갈 데도 없는 데다가, 연이가 있지 않습니까? 연이를 위해서라도 청성파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검하은이 연이를 힐끔 쳐다보았다.

"좋아요. 그럼 그때까지 잘 부탁해요, 청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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