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 (199/200)

“이들 회사는 해신해운의 기관 투자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들 회사로부터 의결권을 위임받은 위임장입니다.”

“······!”

사람들은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기세를 탄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당당하고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가 총회장에 울려 퍼졌다.

“존경하는 주주 여러분, 블루오션은 이번 총회에서 1호 안건인 지주사 전환 안건을 기각하여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그리고 블루오션이 제안한 기존 이사 중 2명의 해임과 2명의 새로운 이사 선임을 요구합니다.”

“해임될 이사가 누굽니까?”

“해임될 이사는 사내 이사인 권동민 이사와 권동호 이사입니다.”

“······!”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권동호 부사장과 권동민 부사장을 공동 대표 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이 상정된 상황.

블루오션의 제안대로라면 블루오션은 공개적으로 권동호, 권동민 부사장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주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래도 그동안 오너 일가가 해신해운을 잘 이끌어 온 공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대 회장님의 공로입니다. 그리고 공로는 세습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 해신해운의 임원진은 출신이 아닌 능력을 기준으로 꾸릴 것입니다.”

“······!”

“하지만 제 말은 앞으로 오너 일가를 전적으로 배척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능력이 있는 분들과는 적극 협조할 생각입니다. 저희와 함께하실 의향이 있으신 분들이면 오너 일가는 물론 다른 주주들과도 적극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흥! 협력은 무슨!”

내가 말을 마치자 권동호 부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꿈도 꾸지 말게! 우리는 경영권을 넘길 생각도 없고, 자네와 협력할 생각도 없으니까!”

“맞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군!”

일부 주주들은 권동호 부사장의 말에 동조하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총회장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발언권을 얻은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권세아라고 합니다. 이번에 상속받은 지분까지 계산하면 총 5.7%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주주입니다.”

신경영

-해신해운 본사 23층 대강당 임시 주주 총회장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고 총회장을 가득 채웠다.

“뭐라고 했지?”

“······!”

“5.7%를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5.7%의 지분. 대기업인 해신해운의 지분을 개인이 그렇게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기관이 아닌 개인이 그 정도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는 오너 일가를 제외하고 가능성이 없었다.

권세아가 말했다.

“네, 맞습니다. 저도 이 집안······ 의 사람입니다.”

“······!”

“하지만 저는 오늘 블루오션을 지지할 생각입니다. 주식 회사인 해신해운의 주주는 재벌 가문이 아닌 주주이고, 주주는 회사에 가장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권세아의 말을 듣고 있던 권동호 부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냐! 네 말은 우리 집안이 일군 이 회사를 저, 저 근본도 없는 놈에게 넘기겠다는 뜻이냐! 그게 이 회사에 가장 이득이 되는 일이라는 말이냐!”

권동호가 불같은 눈빛으로 권세아를 노려본다.

평소의 권세아라면 권동호 부사장 앞에서 한껏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평소와는 다르게 당당한 목소리로 권동호 부사장에게 대답했다.

권세아는 이제는 더 이상 권동호 부사장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았다.

“네, 오라버니.”

“······!”

“오라버니?”

웅성거리는 주주들을 뒤로하고 권세아가 말을 이어갔다.

“저는 블루오션 아니 장보고 기술고문이 해신해운의 경영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장보고 기술고문이 해신해운에 재직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성과를 보여줬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공적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나요?”

권세아가 주주 총회장을 크게 둘러보았다.

“······.”

권동호 부사장도, 권동민 부사장도 그리고 그들이 미리 주총장에 배치한 총회꾼들 중 어느 누구 하나도 권세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참 소란스럽던 주주 총회장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조용히 가라앉았다.

주주 총회장을 가득 채운 주주들도 각자 고민을 이어가는 표정. 더 이상 발언권을 요청하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단상 위 의장석에 앉아 있던 해신해운의 대표 이사 박원용 사장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표결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총회를 진행하던 김용진 과장이 안내를 시작했다.

“주주분들께서는 입장 시 받은 OMR 카드 3장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당 OMR 카드에는 인적 사항과 각 안건에 대한 찬성과 반대 투표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주주들이 그 말에 고민하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OMR 카드 작성에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계시면 주변에 있는 해신해운 직원들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부터 표결을 시작하겠습니다.”

고민하던 사람들이 OMR 카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총회장에서는 적막만이 감돌기 시작했다.

주주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 해신해운의 미래를 결정할지도 모르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지.’

할 만큼 했다. 이제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할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의장 박원용 대표 이사가 마이크에 입을 대고 말했다.

“그럼 의결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총회장에서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 * *

-해신해운 본사 로비 앞

며칠 후.

끼이익,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해신해운 본사 빌딩 로비 앞에 섰다.

검은색 대형 세단이었지만 잘 관리가 되고 있는 모양. 차체에는 먼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반짝반짝 빛이 날 지경.

운전석에 타고 있던 기사가 차를 정차시킨 후 차에서 내렸다.

그는 뒷좌석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차 문을 열고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차의 뒷좌석에서 내린 사람은 검은색 대형 세단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젊은 외모의 남성이었다.

마치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그는 얼마 전 실시된 지난 임시 주주 총회에서 해신해운의 대표 이사로 새로 선임된 신임 사장이었다.

그가 로비에 들어서자 측면에 설치된 화면에서는 환영 문구가 재생되고 있었다.

현수막에 기재된 문구.

“장보고 사장님의 취임을 축하합니다.”

* * *

-해신해운 본사 9층 사장실

엘리베이터가 9층에서 멈췄다.

‘10층이 아니라 9층으로 출근하다니 기분이 묘하네.’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다.

그동안 출근했던 법무팀이 위치한 곳은 본사 10층.

매일같이 출근하던 사무실 바로 밑에 있는 곳이다. 하지만 회사의 최고 경영진들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일반 직원들은 마음 편하게 내려올 수도 없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일반 사무실과 다른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한 걸음을 앞으로 천천히 내딛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비서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를 했다. 사장실의 비서들이 나를 향해서 인사를 하다니. 어색한 순간이었지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장보고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비서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뒤쪽에 마련된 비서실에서 한 남성이 걸어 나왔다.

그는 그동안 박원용 사장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인사팀 출신으로 회사 내부에서 평가가 좋은 인물이었다.

그는 다가오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비서실장입니다.”

“네,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나는 손을 내밀어 비서실장과 손을 마주 잡았다.

비서실장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는데 어딘가 어색한 표정.

아무리 성격이 좋은 비서실장이라고 해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하 직원으로 하대하던 사람이 사장으로 나타났다.

어색할 수밖에.

경영진이 바뀌면 비서실장도 바뀌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비서실장으로 누구를 임명할지도 고민을 해봐야겠군.’

아마 현 비서실장도 앞으로 인수인계가 마무리되면 현업으로 발령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을 터.

비서실장이 손을 들어 안내하며 말했다.

“장보고 사장님, 사장실은 이쪽입니다.”

비서실장이 나를 사장실로 안내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에는 ‘대표 이사 장보고’라고 새겨진 명패가 놓여 있었다.

“가구들은 말씀하신 대로 기존에 박원용 사장님이 쓰시던 가구를 교체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보통 취임하시면 가구를 새로 맞추는 게 관행이라 새로 맞추시면 좋을 텐데······.”

“괜찮습니다. 사용감도 없고 새거나 다름없어 보이는데요.”

“네, 사장님.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연락해 주십시오.”

“네, 일 보세요.”

비서실장은 인사를 한 후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사장실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큰 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은 큰데 물건이 없어서 그런지 어딘지 삭막해 보이는 기분도 들었다.

그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

신라일보,

“해신해운의 선장이 교체되다”

지난 XX일 개최된 해신해운 임시 주주 총회에서 파란이 일어났다.

해신해운의 지배 구조에 반대하며 대주주로 갑자기 등장한 두바이 해운 회사와 오너 일가 사이에 벌어진, 명분 다툼, 여론전, 주총전 등 각종 진통 끝에 최종 승자가 결정되었다.

XX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해신해운에서 실시된 임시 주주 총회에서 해신해운을 이끌 새로운 대표 이사가 선임되었다.

주총 의장인 박원용 사장은 개회 선언한 뒤 안건을 정식 상정했다. 하지만 회사 측이 제안한 지주사 전환 안건은 가결 정족수를 넘지 못해 부결됐다. 이는 당초 업계 예상을 뛰는 결과였다.

지주사 전환 부결 발표가 나오자 주총장에는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현장에 상주하던 주주들 사이에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해신해운을 운영해 왔던 오너 일가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블루오션은 보유하고 있던 12%의 지분 외에도 많은 우호 지분을 확보한 채로 임시 주주 총회에 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블루오션에 협조하겠다고 밝힌 주주들은 두바이 국부 펀드(4%), 크레딧싱가폴 헤지 펀드(4%), 도하에너지(2%), 인도네시아 국부 펀드(2%) 기타 개인 주요 주주(4%) 등이었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업계의 예상과 달리 반전을 이끈 주주들이 있었다. 이들은 오너 일가 측에 우호적인 주주로 예상되던 주주들로, 해성기업(2%), 우리 사주(4.64%), 그리고 오너 일가의 가문인 것으로 추정되는 권 모 씨(5.71%)가 블루오션에 표를 던진 것이다.

총회장을 나서는 해신해운 선원노동조합의 이대성 이항사는 “글로벌 해운 회사로 성장한 해신해운의 진정한 주인은 주주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재벌들이 소수 지분을 가지고 회사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주주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중략)

유혜영 기자.

+

잠시 후.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비서실장이었다.

“사장님, 임원 회의 가실 시간입니다.”

“네, 다들 오셨나요?”

“음, 아직까지 오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신임 사장이 취임한 후 처음 실시하는 임원 회의에 불참하는 사람이 있다니?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 일이었지만 나는 예상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장으로 부임한 이후 처음 실시하는 임원 회의였다.

* * *

-해신해운 본사 9층 VIP 회의실

이사회가 개최된 장소는 9층에 있는 VIP 회의실로 들어섰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신해운의 주요 임원들이 모두 자리했다.

상무보 이상의 임원들과 팀장 이상 보직자들은 전부 참석하라고 지시한 상태였기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자리에 앉으시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음 역시.’

보이지 않는 얼굴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임원들은 참석했지만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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