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홍보팀 통해서 기사를 언론에 내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홍보팀장은 뭐라고 하던가?”
“내일 주요 경제지와 한양일보에서 조간으로 실어주겠다고 약속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 우리도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네.”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할 테니 신문에 실린 기사들 전부 출근하자마자 보고하도록.”
“네, 부사장님 알겠습니다.”
권동민 부사장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어려 있었다.
‘블루오션······.’
상대방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가?
실체가 없는 상대방과 싸움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한쪽 구석에 자리했다. 지난 몇 개월간 이어진 불면증이 오늘 밤도 계속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영권 분쟁 (1)
-해신해운 본사 8층 재무그룹
다음 날.
이른 아침 시간.
평소보다 빠르게 회사에 도착한 권동민 부사장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비서는 자신의 상사가 도착하자 힐끔 눈치를 살폈다. 그간의 경험으로 큰 사고가 나는 날에는 항상 아침부터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후우우.”
권동민 부사장의 얼굴이 그다지 밝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비서는 한차례 짧은 한숨을 내쉰 후 방으로 따라 들어섰다. 긴장한 기색.
“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음, 김 비서, 좋은 아침.”
다행히 권동민 부사장은 일상적인 인사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부사장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지만 저런 일상적인 인사라면 오늘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비서는 생각했다.
오늘 하루도 조용히 지나갔으면. 비서는 속으로 생각하며 신문을 건넸다.
“부사장님, 주요 신문사의 조간입니다.”
“그래, 테이블 위에 두고 가게.”
“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챙겨 온 신문을 내려놓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잠깐.”
권동민 부사장이 비서를 불러세웠다.
“네?”
꿀꺽.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비서.
“음? 왜 그렇게 놀라는 표정인가?”
“네? 제가요?”
비서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허허허, 커피 한잔 갖다주게.”
“네 부사장님.”
“신문은 10대 일간지 전부 다 준비한 건가?”
“네? 평소에 보시는 신문들로 챙겼습니다.”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겠군.”
“······.”
“홍보팀에 내려가서 오늘 들어온 신문은 다 챙겨 오게.”
“네, 알겠습니다.”
비서는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간다.
“에휴······. 답답하기는.”
대표이사 자리를 차지하면 비서부터 갈아 치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요즘 진행되는 일이 다 이런 식이다. 뭐 하나 생각대로 순탄하게 흘러가는 일이 없었다.
아니, 밑에 데리고 있는 부하 직원들 중에 제대로 된 인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하나같이 성에 차지 않았다.
‘내 밑에도 장보고 같은 놈이 있었더라면······.’
아니다. 제법 능력이 아까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 봤자 일개 직원에 불과한 놈이다. 특히 아버지 권영호 회장의 장례식장에서 권세아 옆에서 알짱거리는 모습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사에 남겨둬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놈이었다.
‘사사건건 일을 방해하기도 했으니 이 기회에 처리하는 게 맞다.’
일단 한직으로 발령을 냈고, 아버지 권영호 회장도 없으니 이제 차장에 불과한 장보고 따위가 설치는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권동민 전무가 신문을 집어 들었다.
홍보팀을 통해 내보내기로 한 기사가 있었다.
제대로 실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신문을 펼치기 시작했다.
+
미래경제,
“해신해운 해외 투기 세력에 못 넘긴다.”
“국제 헤지 펀드 같은 해외 투기 세력이 해신해운 경영권을 인수해서는 안 됩니다.” 권동민 해신해운 부사장(45)은 xx일 기자 간담회를 갖고 “헤지 펀드들이 국내 기업을 헐값에 인수한 뒤 자산 매각, 배당, 감자 후 증자 등을 통해 이익을 챙기고 빠지는 사례가 여러 건 있었다”며 “국내 최대의 국적선사이자 오랜 해운업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해신해운이 해외 투기 세력의 재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권동민 부사장은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해운업을 지속적으로 영위할 의사가 없는 투기 세력이 경영권을 침탈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헤지펀드들이 실제로 해신해운의 경영권을 공격하려는 징후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최근 최대 주주로 떠오른 두바이 국적의 블루오션의 주주가 해외 투자 세력으로 알고 있다”라며, “아직 그 배후 세력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고 있진 못하지만 정황상으로 볼 때 헤지 펀드들이 해신해운의 경영권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동민 부사장은 “해외 투기 세력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적선사가 넘어가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며. “선대를 이어온 해운 명가의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자신의 역할을 다짐했다.
(중략)
+
“음, 좋군.”
홍보팀을 통해 지시한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아버지 권영호 회장 사후 형 권동호 부사장과 경영권 분쟁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해신해운의 대주주로 떠오른 투자자가 나타난 것이다. 블루오션이 눈엣가시였다.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는 것이 중요했다.
이놈들이 설마 해신해운 경영권 자체를 차지하려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일 주주로 최대 지분을 들고 있는 블루오션은 오너 일가 입장에서는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다른 주요 주주들과 협작을 하는 경우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고, 대주주의 자리를 권씨 일가가 아닌 다른 투자 세력이 가지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부사장님, 신문을 더 챙겨 왔습니다. 신라일보도 지금 좀 늦게 들어왔다고 해서 챙겨왔습니다.”
“그래.”
권동민 부사장이 신문을 받아 들었다.
“음?”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
신라일보,
“재벌, 해신해운의 진짜 주인인가? 소수 지분으로 회사를 유지하는 방법은?”
해신해운의 대주주로 등극한 블루오션 측이 해신해운 측에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한 정관 변경과 독립적인 사외이사 후보 선임을 제안하기로 했다. 특히 블루오션은 차기 경영권 승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능력 있는 대표이사를 선임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고 밝혔다.
블루오션은 XX일 보도 자료를 통해 해신해운의 기업 가치 재고를 위해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한 제안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블루오션이 보유한 해신해운 지분은 올해 X월 기준 12%가량이다.
블루오션은 특히 해신해운이 지주 회사로 전화할 계획이 있는지 설명을 요구했다. 또 권영호 회장 사후 사장으로 선임될 가능성이 높은 권동호, 권동민 부사장에 대해 사회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사가 사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며 기업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냈다.
이에 따라 블루오션은 해신해운의 주주 총회에서 지배 구조 개선을 위한 정관 변경, 독립적인 사외이사 선임, 능력 있는 전문 경영인 선임을 골자로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일단 전자 투표 도입을 제안하고, 범죄로 금고 이상 실형 확정 판결을 받은 자는 이사가 될 수 없도록 자격을 강화한다는 정관을 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블루오션은 특히 재벌 가문이 전체 발행 주식에 비해 소수 지분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출자 전환, 지주 회사 설립 등 복잡한 지배 구조를 통해 회사를 편법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면 주주들에게 정당한 주주권 행사가 가능하도록 보장할 것이라며 경영 참여를 선언한 배경을 밝혔다.
( 중략 )
유혜영 기자
+
쾅!
“뭐야 이거!”
권동민 부사장이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당장 홍보팀장 올라오라고 해!”
“네.”
비서는 어깨를 움찔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오늘도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홍보팀장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사장님, 부르셨습니까?”
“부르셨습니까?”
권동민 부사장을 들고 있던 신문을 홍보팀장에게 냅다 집어던졌다.
“야 이 새끼야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신문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지만 홍보팀장은 예상한 반응인 듯 피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신문은 홍보팀장을 빗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저도 방금 기사를 확인했습니다.”
“야이 새끼야 그동안 언론사 상대한다고 가져다 쓴 돈이 얼만데 이런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 해?”
“그게 신라일보 기자가 워낙··· 깐깐한 친구라.”
“뭐? 깐깐? 이 새끼가 어디서 말대답이야!”
권동민 부사장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뭐, 지배 구조를 개선해? 소수 지분으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허허허. 이런 미친 작자를 봤나! 이 기사를 쓴 기자 이거 뭐 하는 놈이야!”
“신라일보 기잔데 제법 산업계에서는 발이 넓다고 알려진 친구입니다. 이번 기사는 그렇지만 평소에는 우리 회사에 좋은 기사를 많이 써준 사람인데······.”
쾅!
권동민 부사장이 책상을 다시 한번 강하게 내리쳤다.
“어이 홍보팀장,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몰라? 이놈들 말대로 곧 주주 총회가 있을 텐데 소수 주주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고!”
“네, 죄송합니다.”
“주총 전까지 여론 단속을 잘해야 하니 언론사들 관리에 빈틈이 없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신라일보 기자에 대해서 좀 알아 오고, 필요하면 내가 신라일보 사주 측에 연락할 테니 방법을 모색해봐!”
“네, 알겠습니다.”
홍보팀장이 연거푸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빠져나갔다.
* * *
-해신해운 본사 10층 인사팀
“장보고 차장? 여긴 무슨 일?”
내가 본사 10층으로 들어서 인사팀으로 향하자 나를 발견한 인사팀장이 놀라며 다가왔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인사팀장은 나의 눈빛을 마주하기가 께름칙한지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장보고 차장, 오늘부터 부산 지사 운항팀에서 일하는 것으로 인사 발령이 있지 않았나? 아직 부산에 안 내려갔나?”
“아직 안 내려갔습니다.”
“음? 챙길 물건이라도 남았나?”
“부산에 안 내려가려고요.”
“뭐?”
나는 대답 대신 정장 상의 주머니에 넣어둔 봉투를 꺼냈다.
“뭔가 이게?”
“사직서입니다.”
“뭐?”
“퇴사하려고요, 사직서 제출하려고 왔습니다.”
“저, 정말인가?”
당황한 표정의 인사팀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알아서 자발적으로 퇴사를 해준다고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겠지. 해고를 못 하니 부산 지사로 발령을 한 것인데 알아서 퇴사를 해준다고 하니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고 인사팀장으로서는 얼마나 좋은 일인가.
‘좋은 날도 얼마 안 남았을 겁니다.’
인사팀장을 한차례 노려본 후 나는 인사팀 옆에 있는 법무팀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보고!”
나를 발견한 현재형 상무가 손짓을 하며 불렀다.
“실장님.”
“안 바쁘면 커피 한잔하고 가게.”
현재형 상무는 나를 회의실로 데리고 갔다.
현재형 상무는 지난 인사이동 때 경영지원본부장에서 물러나고 법무실장으로 발령이 났다.
법무팀에 법무실로 승격된 것처럼 보였지만 경영지원본부장에서 물러나는 인사 발령이었느니 누가 봐도 좌천성 인사 발령이었다.
현재형 상무가 말했다.
“사직서는 잘 제출했나?”
“네. 허허허. 뭐, 후련하네요.”
“내가 먼저 퇴사하려고 했더니······.”
“상무님은 제가 말씀드린 대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음, 일단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참고 있기는 할 텐데······. 사실 당장 때려치우고 어디 작은 변호사 사무실이라도 개업하고 싶은 심정이라네. 도형준 부사장님도 그런 식으로 나가시고 자네도 퇴사하는 이곳에 무슨 미련이 있어 남아있겠나?”
현재형 상무는 회사에 있던 정이 다 떨어진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무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오래 안 걸릴 겁니다.”
“자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참고는 있네만 도대체 무슨 계획인가?”
“자세한 내용은 아직 말씀 못 드리고요. 지금은 그저 믿어 달라는 말씀밖에 못 드리겠네요. 그래도 제가 가만히 있을 놈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하하하.”
현재형 상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작업을 시작할 거니까요. 보시면 알 겁니다.”
“음?”
현재형 상무가 궁금해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불안해하는 현재형 상무를 안심시키기 위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
해신해운 그룹웨어 사내 포털 익명 게시판에 한 글이 올라왔다.
글의 내용은 간단했다.
최근 몇 년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과를 만든 회사의 인재를 회사의 경영진이 아무런 이유 없이 부당하게 한직으로 발령을 내서 퇴사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
+ 제목: 모난 돌이 정 맞는다더니 결국 이렇게 됐네요. +
└ 익명 : 법무팀 장보고 차장 이야기 아님?
└ 익명 : 이렇게 될 줄 알았음.
└ 익명 : 헐! 대박, 쫓겨난 거였어?
└ 익명 : 이제 장보고 차장님 못 보는 건가요? ㅠ
└ 익명 : 솔직히 그동안 경영진이 싼 똥 장보고 차장이 다 치운 건데······.
└- 익명 : 누가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