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93/200)

드르륵, 백경운 변호사는 그동안 준비한 자료를 붙여놓은 이동식 화이트보드를 끌고 앞으로 나섰다.

화이트보드는 작은 글씨로 가득 차 있었다.

왼쪽에는 숫자들이 표시되어 있었고 오른쪽에는 화살표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순서를 기재해둔 것처럼 보였다.

백경운 변호사가 말을 이어갔다.

그는 화이트보드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현재 해신해운의 주요 주주들입니다.”

그 숫자의 정체는 주주들의 지분율이었다.

“개별 지분을 보면 대주주는 아니지만 우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은 아무래도 오너 일가입니다. 돌아가신 권영호 회장의 지분이 7.87%, 그리고 특수 관계인인 가족들의 지분이 합계 16.12%입니다. 이들 지분을 합치면 23.99%입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경운 변호사가 말을 이어갔다.

“여기에 우호 지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주주들이 있습니다. 우선 해신항공이 11%, 우리 사주가 4.64%, 해성기업이 2%입니다. 그리고 자사주가 있기 때문에 여차하면 자사주를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른 기관 투자자는 없습니까?”

“주요 투자자로는 연금 공단이 있습니다. 약 10% 상당입니다. 연금 공단은 우량주에 투자하기 때문에 국적 선사 중 1등 기업인 해신해운의 지분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분 싸움이 전개되면 연금 공단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해질 것입니다.”

다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문제는 외국인 지분입니다. 국내 주주들이야 아무래도 해신해운의 현 경영진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외국인이나 외국계 투자자들은 입장이 다릅니다. 우선 1대 주주인 블루오션이 12%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단일 주주로는 최대 주주입니다. 그리고 두바이 국부 펀드가 4%, 헤지 펀드의 자금으로 추정되는 크레딧싱가폴을 통해 최근 주식을 매입한 투자자들이 약 4%, 도하에너지와 인도네시아 국부 펀드가 각 2%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백경운 변호사가 중요한 대목인 듯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어갔다.

“결국 지분 싸움의 핵심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외국인 지분권자들만 합쳐도 오너 일가의 지분과 차이가 없고 대주주도 블루오션이기 때문입니다.”

“으으음!”

사람들은 다른 의견이 없는 듯 보였다.

백경운 변호사가 말했다.

“일단 외국인 지분 중 도하에너지, 인도네시아 국부 펀드, 두바이 국부 펀드는 우리에게 우호적인 세력입니다. 다들 장보고 차장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관들입니다.”

통수 (2)

-서울 여의도 모처 사무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백경운 변호사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부분 나와 우호적인 세력이라니?

반쯤 의심하는 듯한 시선도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아무리 내가 회사에서 잘나가는 직원이라도 사람들이 선뜻 믿기 힘든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설명이 좀 필요하겠군.’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별거 아닙니다. 허허허.”

정재훈 사원이 물었다.

“차장님, 주요 외국인 투자자들이 대부분 차장님과 밀접한 관계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박!”

정재훈 사원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장보고 차장을 믿고는 있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어차피 회사에서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기 일보 직전이니 퇴사를 각오하고 장보고 차장을 돕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원군들이 있다니?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정재훈 사원의 경직된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고 있었다.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 인연이 좀 있는 사람들이 우연히 해신해운에 투자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허허허.”

나의 설명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궁금증을 풀지 못하는 눈치였다.

“도하에너지는 사장이랑 좀 친하고요.”

“······.”

“인도네시아 국부 펀드는 예전에 도움을 줬던 분이 있는데 지금 대통령이 되셨다네요? 허허허.”

“······?”

“······!”

“네?”

사람들이 크게 입을 크게 벌린 채로 나를 바라본다.

‘뭐 처음부터 대통령이었던 건 아니고.’

삼등 항해사 시절 인연을 맺었던 마헨 수비안토 장관은 전생의 기억 그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 사람들은 항해사 시절 인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야말로 나의 우방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두바이 쪽 자금은 국부 펀드와 AP사 쪽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

“국부 펀드를 운영하는 사람은 잘 아시죠?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명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분인데. 두바이 왕자들 중 한 명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놀랄 기력도 없어 보였다.

“아! 그리고 두바이 국부 펀드의 한국 투자 자금은 제 동생이 어차피 운용하고 있으니까요.”

“······!”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사람들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지 몰랐다. 나의 입에서 나온 인물들이 하나같이 쟁쟁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백경운 변호사가 이어서 말했다.

“말씀드린 대로 외국계 주요 주주들은 대부분 우호 세력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요?”

“네, 대주주입니다. 가장 급선무는 대주주인 블루오션을 우리 쪽으로 포섭하는 일일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단일 주주로는 12%의 지분을 보유한 블루오션을 포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특히 블루오션은 최근 지분을 확대한 후 적극적인 경영 참여를 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블루오션 측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유혜영 기자가 물었다.

그녀는 예전부터 블루오션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블루오션의 내부자에게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장보고의 도움으로 한 차례 관계자를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 전부였다.

유혜영 기자가 이어서 말했다.

“사실 제가 여러 번 취재하려고 시도를 했거든요. 하지만 도무지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블루오션의 실소유자들에 대한 정보가 꽁꽁 감춰져 있었다.

유혜영 기자도 도무지 실소유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실소유자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으으음!”

“사실 그게 문제지.”

사람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한재명 과장도 말을 보탰다.

“선대기획팀과 자금팀에서도 접촉을 시도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쪽도 만나지 못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사람들이 잠시 침묵했다. 고민해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저, 사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네?”

“······?”

“블루오션이요. 블루오션 실제 소유자를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유혜영 기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차장님 그게 정말인가요?”

“네.”

“블루오션의 실소유자를 알고 있다고요?”

“하하하. 네, 바로 여기 있습니다.”

“······?”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옆에 서 있는 동생 장해진의 등을 두들겼다.

“블루오션의 실소유자입니다.”

“······?”

“······!”

장해진은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대답했다.

“뭐, 제가 모은 돈은 아니고요. 사실은 투자자는 따로 있습니다. 저는 블루오션에 투자한 투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하하.”

사람들은 실제 투자자가 누군지 궁금한 표정이었지만 장해진은 아직은 투자자의 신상에 대해서는 비밀이라며 답변을 거부했다.

유혜영 손을 들어 올리며 기자가 물었다.

“그런데, 외국계 지분을 전부 다 더하더라도 과반이 안 되지 않나요?”

백경운 변호사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좀 더 여론을 형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론 형성이라면 소수 주주들을 모아서 표 대결을 하겠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음, 소수 주주를 모은다라.”

유혜영 기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소수 주주의 지분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이들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평가하는 우호 지분은 오너 일가의 지분에 우호 세력의 지분을 합친 숫자에 약간 못 미치는 상태.

국내 주주들의 마음을 얻지 않는 이상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백경운 변호사가 말했다.

“지분 관련해서는 아직 오픈할 수 없는 정보들도 좀 있습니다. 좀 더 확실해지면 정보를 공유하겠습니다.”

“······?”

“뭐, 일단은 오너 일가 쪽 지분을 상당 부분 뺏어 올 계획이라는 것만 알려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백경운 변호사가 화이트보드 오른쪽에 적혀 있는 순서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앞으로 진행할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좀 전과는 달리 이제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주요 외국인 지분은 우호 세력이고, 대주주는 우리 쪽 사람이었다.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백경운 변호사가 말했다.

“우선 블루오션은 지난 X일 해신해운 지분을 추가로 매입해 12% 상당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론 보도를 통해 해신해운의 경영권에 참여할 목적이라는 보도를 내보냈습니다.”

유혜영 기자가 자기가 쓴 기사 덕분이라는 듯 손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네, 유혜영 기자님 덕분에 일단 선전 포고는 한 셈입니다. 이제 착착 단계를 밟아 나갈 생각입니다.”

“어떻게 진행되는 건가요?”

“우선 대형 회계 법인에 해신해운에 대한 기업 가치 평가 보고서를 의뢰해놓은 상태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기업 가치 평가 보고서를 의뢰했다는 이야기가 해신해운에도 전해질 겁니다.”

“그다음은요?”

“보고서가 접수되면 블루오션 명의로 공식적으로 해신해운에 지주사 설립 계획이 있는지 질의서를 보낼 계획입니다.”

“지주사 설립이요?”

“네, 권동호 부사장이 해신그룹으로부터 독립해 독자 경영하겠다는 목표가 있다고 합니다. 그 방안으로 지주사 설립을 고민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내부 정보가 있으니 추진될 것으로 보이지만 공식적인 대답은 그런 계획이 없다는 답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유가 뭔가요?”

“뭐, 정보를 아직 오픈하지 않기 위해서일 텐데, 공식적으로는 특정 투자자에게만 중요 정보 사항을 줄 경우 공시 위반이 될 수 있다는 변명을 할 가능성이 높겠죠.”

“이후, 우호 세력을 동원해 주식 추가 매입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후 지주사 설립 반대 및 지배 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임시 주주 총회를 요구하는 청구서를 이사회로 발송할 계획입니다.”

백경운 변호사가 유혜영 기자에게 물었다.

“뭐, 좋은 기사 없을까요?”

유혜영 기자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이런 기사 제목 어떨까요?”

“음?”

“해신해운, 오너 일가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지주사 전환.”

백경운 변호사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좀, 약한 거 같은데요?”

“그래요? 음······.”

유혜영 기자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재벌, 회사의 진짜 주인인가? 소수 지분으로 회사를 유지하는 방법은?”

백경운 변호사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혜영 기자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출자 전환 문제도 있고, 최근에 여러 기사들이 재벌들의 지배 구조에 관해서 한번 써보려고 했는데 뭐, 겸사겸사 잘됐네요.”

탁탁!

백경운 변호사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화이트보드를 두들겼다.

화이트보드에는 앞으로 계획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자, 시간이 부족합니다. 다들 시작합시다.”

+

주식 매입→기업 가치 평가 보고서 의뢰→해신해운에 지주사 전환 여부 질의→주식 추가 매입→경영권 참여 공시→지주사 전환 반대 및 주주 제안, 임시 주총 소집 및 법적 조치

+

사람들은 화이트보드에 적힌 세부 계획을 눈에 새기기 시작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앞둔 특수 부대원들처럼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해신해운 본사 8층 재무그룹

며칠 뒤.

해신해운 재무그룹장 권동민 부사장의 보고서를 읽던 중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음, 이게 무슨 소리지?”

권동민 부사장 앞에는 회계팀장이 서 있었다.

“회계 법인의 내부 정보를 전달받은 내용입니다. 블루오션에서 해신해운의 기업 가치를 평가해달라는 의뢰를 했다고 합니다.”

“이유가 뭐야?”

“그것까지는 잘······.”

“이 미친 새끼가! 모르겠으면 다야!”

퍽! 권동민 부사장이 결재판을 회계팀장에게 집어 던졌다. 결재판은 날아와 회계팀장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야 이 새끼야! 넌 뭐 하는 놈이야! 월급 받는 놈이 모른다고 하면 다야!”

“죄, 죄송합니다.”

“어휴 이 답답한 새끼들!”

권동민 부사장의 호통에 회계팀장이 고개를 조아렸다.

권동민 부사장은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책상 위에 놓인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회계팀장은 권동민 부사장의 이런 성질을 잘 알고 있는 듯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권영호 회장의 온화한 성격과는 달리 아들들의 성질이 그야말로 고약했다.

특히 권동호 부사장은 젊은 시절 직원들에게도 폭언과 폭행을 한 혐의로 수사를 받기도 했다.

이유는 한 터미널 공사 현장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직원이 자신을 ‘아저씨’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권동호 부사장은 터미널 공사 현장에서 직원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한 직원의 손에 있던 흰 종이 뭉치를 빼앗아 바닥에 던졌는데, 이를 촬영한 영상이 인터넷에 공개돼 논란이 된 것이다.

작업자들에게 폭언하는 음성 파일도 함께 공개됐는데, 당시 작업자들에 의하면 권동호 부사장이 그들을 무릎 꿇린 채 얼굴을 때리고 무릎을 걷어차는 등 폭행까지 했다고 증언했다.

둘째인 권동민 부사장은 첫째 권동호 부사장에 비해서는 외부에 알려진 악명이 덜했지만,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놈이 그놈, 난형난제, 용호상박이라는 비범한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권동민 부사장이 회계팀장에게 물었다.

“그건 어떻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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