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은 어떠신가요? 권동호 부사장님과 권동민 부사장님 양쪽에서 임원들을 포섭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많던데요.”
“그렇긴 한데, 나는 뭐, 그런 사내 정치 쪽으로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 현재형 상무는 그런 사람이었지.
사내 정치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전생과 달리 현생에 임원까지 승진한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앞으로 해신해운에 진짜 필요한 사람은 이런 사람이지.’
대부분의 임원들은 지금 경영권 다툼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번 싸움에 어떻게 줄을 서냐에 따라서 향후 자신들의 입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현재형 상무가 말했다.
“음, 자네만 알고 있게. 사실 권영호 회장님도 돌아가셨고 해서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가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릴까 하는 생각도 있다네.”
“네? 퇴사를 하신다고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래.”
“왜 갑자기 퇴사를 하시겠다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하하하. 아직 결심한 건 아니고 그런 생각도 해봤다는 거라네. 내가 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도 사실 권영호 회장님과의 인연 때문이거든.”
현재형 상무가 변호사로 개업하지 않고 사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까지는 알지 못했다.
지금부터 몇 년이 지나면 사내 변호사들이 대거 많아지는 시대가 오지만 아직까지 사법 연수원을 졸업한 변호사들이 회사로 바로 입사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현재형 상무처럼 사내 변호사로 입사하는 것은 아직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변호사의 숫자가 시장에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형 상무가 말을 이어갔다.
“대학 때 지도 교수님이 해상법 전공 교수님이었지. 그분 소개로 사법 연수원 졸업 즈음해서 권영호 회장님을 만났다네. 회장님이 이야기해주는 해운업계 이야기에 매료되어서 회사로 입사하게 되었지.”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그리고, 요즘에야 인기가 많이 시들었지만 옛날에는 해상법 변호사들이 몸값이 높았다네. 국제 거래가 많다 보니 외국 회사가 의뢰인이지 않은가. 그리고 타임 차지로 변호사 보수를 지급하니 다른 분야보다 자문료가 넉넉했거든.”
말을 마친 현재형 상무가 왠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아직은 현재형 상무가 필요한 시기였다.
곧 닥칠 불황기에 해신해운은 수많은 법률 쟁송에 휘말린다.
현재형 상무가 어느 때보다 중심을 잡아줘야 할 시기라는 뜻이었다.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는 그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아직 해신해운에서 할 일이 많은 그였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퇴사할 이유가 없는데.’
혹시, 그 사람들 때문인가?
임직원들 중에는 오너가 자제들의 난폭한 성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의 표정을 힐끔 살핀 후 물었다.
“그래도 상무님, 회사를 그만두실 필요는 없잖아요? 그만두시려는 이유가 따로 있으신가요?”
“음······.”
“혹시 권동호 부사장이나 권동민 부사장 때문인가요?”
“······.”
현재형 상무는 성품이 온화하고 점잖은 인물.
권동호 부사장이나 권동민 부사장과는 결이 맞지 않았다.
현재형 상무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딱히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컨테이너사업본부장 권동호 부사장은 권영호 회장이 별세하자 가장 빠르게 회사 인사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당시 경영지원본부장이었던 신강일 상무에게 접근해 그를 압박했다.
전생의 기억대로라면 현재형 상무에게 권동호 부사장과 권동민 부사장 측의 회유와 협박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상무님, 혹시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잠시 저한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음? 그게 무슨 소린가?”
“제가 방법을 좀 찾아보겠습니다.”
“무슨 방법?”
“회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요. 허허허.”
현재형 상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대답 대신 그저 크게 웃어 보였다.
< 띠링! >
+
<메인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진행에 따른 메인 퀘스트를 진행합니다.
“해신해운의 경영권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질 예정입니다! 경영권 다툼에서 승리하세요!”
세부 퀘스트 : 경영권 다툼
클리어 조건 : 경영권 확보
제한 시간 : 차기 대표이사 선임 전까지
보상 : 명성 + 500, 글로벌 명성 상승, 경영권 확보
실패 시 : 해신해운 파산 가능성 상승
+
부고 (2)
-서울 모처의 사찰 인근
다음 날.
달리는 도형준 부사장의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뒷자리에는 도형준 부사장과 현재형 상무가 앉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물었다.
“부사장님, 회장님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치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저희가 장례식장에 가도 되는 겁니까?”
“임원들은 모두 참석하기로 했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네.”
“임원이요? 저는 임원이 아닌데요?”
“음, 장보고 차장은 특별히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네.”
“네?”
“회장님 생전에 말씀을 남기셨다는군······.”
“그렇군요······.”
최근까지도 권영호 회장은 종종 나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우리를 태운 차는 한참을 달렸다.
그리고 어느새 한 사찰 앞에 멈춰 섰다.
사찰 앞에는 검은 세단들이 빼곡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사찰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들 검은색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사람들 중에는 해신그룹 재벌가의 사람들도 있었다.
종종 사고를 쳐서 신문이나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보였다.
“자, 들어가지.”
도형준 부사장의 뒤를 따라 사찰 안으로 들어섰다.
일렬로 늘어선 줄 뒤에 섰다. 조문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차분한 분위기에서 조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때.
앞에서 잠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흥! 여기가 어디라고!”
“······.”
남자의 고성 소리가 크게 한 차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곧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음?”
크게 소리친 사람은 다른 아닌 해신해운의 컨테이너사업본부장 권동호 부사장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권동호 부사장 앞에서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권세아 대리였다.
권동호 부사장 옆으로 해신해운의 재무그룹장 권동민 부사장이 다가왔다.
“형님, 보는 눈이 많은데 무슨 일입니까.”
“왜? 내가 무슨 못 할 말이라도 했나?”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자들도 사찰 밖 주변에 있고요. 말이 새어 나가서 좋은 것이 있습니까?”
“흥!”
권동호 부사장이 콧방귀를 뀌자 권동민 부사장이 조용히 권세아 대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조문을 마치고 돌아가도록 해라.”
“······.”
권세아 대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안으로 들어섰다.
홀로 법당 안으로 들어서는 권세아 대리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저벅저벅.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옮겨졌다.
빠르게 달려간 나는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어!”
권세아 대리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인지 크게 당황한 눈치.
나도 나의 등 뒤로 강하게 내리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집안의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인 권세아.
그 옆에 나타난 한 남자를 향한 시선은 결코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탓일까.
손을 슬며시 빼내려 하는 권세아 대리의 손을 도리어 살며시 강하게 쥐었다.
“······?”
나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권세아 대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조문하러 온 거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마치고 해. 우선 인사를 드려야지.”
“······.”
권세아 대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나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해신해운 7층 컨테이너사업본부, 권동호 부사장실
탕!
권동호 부사장이 들고 있는 서류를 책상에 세게 내려쳤다.
“이거 도대체 뭐 하는 새끼들이야!”
권동호 부사장 앞에는 선대기획팀장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은 채로 서 있었다.
살짝 얼굴이 상기된 권동호 부사장의 고성이 이어졌다.
“이 블루오션인지 하는 놈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두바이에 해운업으로 등록된 회사라고 합니다.”
쾅! 권동호 부사장이 책상을 다시 한번 내려쳤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묻나? 이놈들이 뭐 하는 놈들인데 우리 회사 주식을 12%나 매입했냐 그 말이야!”
“그건 아직······.”
선대기획팀장이 대답을 이어가지 못하고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쾅!
촤라락. 권동호 부사장이 집어 던진 서류가 선대기획팀장의 다리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이? 자네 제정신인가? 아직도 정보를 확인하지 못했단 말이야?”
“네, 죄송합니다······.”
“자네, 이놈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이 얼마인지 모르나?”
“······.”
“어? 12%! 무려 12%야!”
“······.”
“그게 무슨 뜻이야? 어! 내가 들고 있는 지분보다도 높다 이 말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두바이 지점장은 연락해봤나?”
“네, 안 그래도 방금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어제 직접 주소지로 찾아가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무실 주소로 등록된 장소가 경호가 심한 사유지 안에 있어 사전 예약이 없이는 단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연락을 해서 찾아가야지!”
“메시지를 여러 차례 남겼는데도 답변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미친 새끼들!”
권동호 부사장이 흥분한 듯 씩씩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혹시, 권동민 이 새끼가 중간에서 장난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제가 확인해본 바로는 권동민 부사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뭔데?”
“권동민 부사장이 얼마 전에 해신항공 그룹의 재무담당 이사와 비서실장을 만났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뭐?”
권동호 부사장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비겁하게 큰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아니겠지?’
아버지인 권영호 회장이 평생을 헌신해 일궈낸 해신해운이다. 권영호 회장이 해신그룹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경영을 하겠다는 일념하에 젊은 시절부터 전 세계를 발로 직접 뛰어다니며 키운 회사다.
그런데 다시 해신항공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간다고?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외국계 지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해신항공이 보유하고 있는 해신해운의 지분은 11%.
적지 않은 지분이다. 하지만 최근 4%의 지분을 추가로 매수한 두바이 해운 회사 블루오션이 12%의 지분을 들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바이 국부 펀드가 약 1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면 해신항공에게 비굴하게 머리를 숙일 필요도 없었다.
특히 권동호 부사장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 또 있었다.
그건 바로 권세아가 들고 있는 3.12%의 지분이었다.
아버지 권영호 회장의 지분이 상속되면 권세아의 지분도 약 5.7%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였다.
두통이 밀려오는 듯했다. 권동호 부사장은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 * *
-서울 여의도 모처 카페.
며칠 뒤.
+
신라일보,
“권영호 회장 별세… 해신해운 경영권 향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