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초조한 표정으로 내 책상 옆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
경영지원본부장이자 법무팀을 겸하고 있는 현재형 상무.
그는 손톱이라도 물어뜯고 있는 듯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따르릉!
내 책상 위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음?”
현재형 상무의 시선도 나를 향했다. 나는 그와 시선을 빠르게 교환한 후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법무팀 장보고 차장입니다.”
“장보고 차장님, 저 탱커팀 권도성 차장입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탱커팀의 권도성 차장.
그는 LNG 운반선 입찰을 위해 카타르 출장 중인 상태였다.
도하에너지에서 발주한 SFE 프로젝트 1-1단계 입찰 결과가 오늘 발표되기 때문이다.
1단계에 발주된 LNG 선박은 40대가 넘지만, 1-1단계는 총 4척의 LNG 운반선에 대한 입찰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수화기 너머. 권도성 차장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장님! 성공했습니다. 입찰 땄습니다!”
“총 4척 모두 우리가 따낸 겁니까?”
“네! 맞습니다.”
나는 조용히 현재형 상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YES!”
현재형 상무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더니 소리를 질렀다.
나는 수화기를 너머로 말했다.
“차장님, 전화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저야 뭐, 장보고 차장님이 준비해주신 내용으로 입찰 넣은 게 전부인걸요. 그래서 탱커팀에게 연락하기도 전에 차장님께 전화드렸습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나는 기분 좋게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후 말했다.
가장 빠르게 건조가 시작될 SFE 1-1단계 프로젝트.
첫 계약을 따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태성중공업, 수출 외환 은행과 함께 준비한 컨소시엄이 위력을 발휘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선소와 해운 회사, 금융 기관이 힘을 합치자 다른 나라의 경쟁 선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도하에너지에서 추진 중인 SFE 프로젝트에서 발주될 LNG 선박은 150척에 달한다.
그 중 첫 입찰 결과인 4척에 대한 입찰만 진행되었을 뿐이다.
아직 샴페인을 터트리기에는 이른 순간이었다.
하지만 의미가 있는 결과다.
이번 입찰이 성공하면 해신해운과 태성중공업 사이에 체결한 대형 컨테이너선 4척에 대한 건조 계약을 LNG선 4척의 건조 계약으로 내용을 변경하기로 합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성그룹과의 첫 협업이 성공적이었다는 점도 중요했다.
태성의 힘이 필요한 사업이 또 있었기 때문.
터미널사업팀과 함께 준비하고 있는 부산신항 유류 중계기지 터미널 사업.
전략적 투자자로 AP사 이외에 한 곳이 더 필요했다.
내가 눈독을 들인 회사.
그 회사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재벌 그룹인 태성그룹의 상사, 건설 부문 기업사 태성물산이었다.
부고 (1)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몇 개월 후.
“장보고 차장님, 이 기사 좀 보세요.”
정재훈 사원이 다가오며 말했다.
“뭔데?”
“터미널 사업팀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 관련해서 기사에 좀 나왔네요.”
“그래?”
“네, 유류 중계기지 터미널 관련 기사가 있네요.”
정재훈 사원이 신문을 건넸다.
“부산신항에서도 제법 의욕적인데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 경쟁이 만만하지 않으니까.”
부산신항은 세계 5위권의 컨테이너 물량을 자랑하는 대형 항구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항구이지만 문제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항구들.
부산신항이 경쟁해야 하는 주변 국가의 허브 항구들은 너무 강력한 상대였다. 홍콩, 상하이, 싱가폴과 같은 세계에서 가장 큰 허브 항구가 바로 부산신항의 경쟁 상대.
특히 새롭게 떠오르는 중국의 항구들이 부산항의 뒤를 바짝 뒤쫓고 있는 실정이었다.
‘쉽지 않은 상황이야.’
나는 신문을 펼쳐 보았다.
+
신라일보,
“부산신항 유류 중계기지 건설 추진 본격화”
해운업계와 항만업계의 숙원 사업이 시작된다. 부산신항이 유류 중계기지 조성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부산신항만공사는 XX일 부산신항 유류 중계기지 제3자 민간 투자 사업자 공고를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유류 중계기지는 정박 중인 선박에 연료유를 넣어 주는 제반 시설을 갖춘 항만 시설을 말한다. 유류 중계기지를 갖춘 허브 항구를 갖는 것은 국내 해운업계와 항만업계의 숙원 사원으로 꼽혀 왔다.
부산신항은 세계 5위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취급하는 항구이지만 지금까지 유류 중계기지가 없어 선박에 공급하는 연료유가 다른 경쟁 허브 항만에 비해 비싸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부산신항만공사는 X월 유류 중계기지 민간 사업자 평가와 우선 협상 대상자 선정, XX월 환경 영향 평가, XX월 말 국토해양부 실시 설계 승인 신청 등을 거쳐 20XX년 완공을 목표로 내년 초 공사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유류 중계기지는 부산신항의 남쪽 컨테이너 터미널 2-4단계 옆쪽에 들어설 계획이다. 관계자는 유류 탱크, 배관, 급유 시설, 방파제 등이 건설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는 “유류 중계기지가 건설되면 부산신항의 경쟁력이 상승해 고부가 가치 허브 항만으로 도약할 것”이라며 “고용 창출과 대형 컨테이너 선박 유치에 따른 물동량 증대로 지역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역량 있는 업체가 터미널 운영사로 참여할 것인지 여부가 사업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며 사업의 성공 여부에 대해서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 중략 )
유혜영 기자
+
‘음, 일단 입찰 내용은 전생 기억 그대로군.’
전생에도 해신해운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유류 중계기지 터미널 입찰에 참여했다.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유류 중계기지 터미널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유사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전생에는 정유사를 투자자로 추가 영입하는 데 실패했다.
‘물론 이번에는 다르지만.’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프로젝트에 AP사가 투자자로 참여할 것이 기정사실.
비공식적으로 AP사의 사장 나민 아세르의 구두 약속을 확보한 상태였다.
프로젝트가 실패할 큰 위험은 없어 보였다.
‘이 일은 이대로 무리 없이 마무리될 테니까 큰 걱정이 없는데······.’
이상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그때.
갑자기 사무실 전체에 잔잔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 뭐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소리에 정재훈 사원이 중얼거렸다.
-해신해운 총무팀에서 알려드립니다.
‘총무팀?’
사내 방송이 시작되자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음? 혹시?’
-금일 오전 10시경 권영호 회장님께서 별세하셨습니다.
“아!”
사내 방송을 듣자 직원들 사이에서 가볍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지금부터 평생 해신해운을 위해 노력해오신 회장님의 삶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방송에 맞춰 자리에서 기립했다.
평소 바쁘게 움직이는 사무실은 금세 고요해졌다.
약 1분간 직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조용히 고인을 기리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회장님의 유지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조용하고 간소한 가족장을 원하는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회사 차원의 별도 분향소 설치나 추모 행사를 하지 않을 예정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끝나자 직원들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뒤숭숭한 분위기에 바로 업무로 복귀하지 못하는 눈치.
“장보고 차장.”
그때 갑자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형 상무였다.
“네, 상무님.”
“지금 시간 괜찮으면 잠시 내려가서 커피 한잔하면서 산책 좀 할까?”
“네, 상무님.”
나는 현재형 상무를 따라나섰다.
로비 밖으로 나가자 해신해운 직원들이 이곳저곳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담배를 피우며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직원들도 있었고, 한 손에 자판기 믹스커피 잔을 들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직원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별세한 권영호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고, 회사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의 귀에도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이 너무 갑자기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불안하네.”
“왜?”
“차기 회장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셨으니까.”
“그래도 차기 회장은 컨테이너사업본부장님이 되겠지?”
“왜?”
“아무래도 컨테이너사업본부가 가장 크기도 하고 장남이잖아.”
역시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권영호 회장 사후에 누가 해신해운의 선장이 될 것인지 여부였다.
현재형 상무도 직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나에게 물었다.
“장보고 차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뭘 말입니까?”
“차기 회장으로 누가 될 것 같은가.”
“글쎄요.”
내가 말을 아끼자 현재형 차장이 눈을 흘긴다.
“음? 자네가 모르는 것도 있는가?”
“아직은 모르겠네요.”
“아직은 모르겠다?”
“네.”
“그럼 곧 알게 되겠군?”
“글쎄요. 허허허.”
물론 전생의 기억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전생의 기억과는 다르게 사건이 흘러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전생에 권영호 회장 사후에 벌어졌던 이른바 왕자의 난.
그건 바로 한국 해운업의 왕이라고 불렸던 권영호 회장의 두 아들 사이에 벌어진 경영권 다툼이다.
해운업계에서 바다의 왕자들이라고 불렸던 장남과 차남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왕자의 난이라 불렸다.
경영권 다툼 초기에는 장남의 우세가 점쳐졌다.
해신해운의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컨테이너사업본부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해신해운 회사 내부에서의 입지가 탄탄했기 때문.
그리고 집안의 장남이라는 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무래도 해신그룹에서 장남인 권동호 부사장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일이 발생했다.
수세에 물려 있던 중 차남의 결정적인 조력자가 등장했던 것.
해신그룹의 대표 계열사인 해신항공이 재무그룹장 권동민 부사장의 경영권 승계를 공개적 지지한 것이다.
해신항공과 해신해운은 상호 간 외부 세력의 적대적 M&A를 방어하기 위해 상당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신항공이 주주권을 행사하는 경우에는 장남 권동호 부사장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언론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권세아였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권영호 회장의 막내딸.
평소에는 같은 집안의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던 권세아에게 장남 권동호 부사장과 권동민 부사장 모두 손을 내밀었다.
권세아의 지지를 받은 사람은 재무그룹장인 권동민 부사장.
해신항공과 권세아의 지지를 받은 권동민 부사장이 권씨 가문의 조력으로 차기 회장 자리에 오른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발생했지.’
해신항공이 해신해운의 경영에 간섭하기 시작한 것.
같은 해신그룹으로 묶인 재벌 집단이라고 해도 그동안 독자 경영을 해온 회사였다.
하지만 해신항공의 회장은 동생인 권영호 회장이 생을 달리하자 해신해운 경영권에도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해신항공에서 파견된 임원들이 해신해운의 요직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해운업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영진들이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불황기를 겪고 있던 해신해운의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표류한다.
뱃사공이 많으니 그야말로 배가 산으로 가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현생은 다르다.
‘이번에는 해신해운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지.’
나는 현재형 상무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