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200)

“많이 안 좋으신 건가요?”

도형준 부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에서는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형준 전무는 해신해운의 임원 중에서 권영호 회장의 최측근으로 오랫동안 권영호 회장을 보필한 사람.

특히 최근에는 권영호 회장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부사장으로 승진까지 하지 않았던가?

승진한 도형준 부사장은 권영호 회장의 장남 권동호 부사장과, 권동민 부사장이 벌이는 경영권 다툼이 표면화되지 않도록 갈등을 봉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것은 도형준 부사장 뒤에 권영호 회장이 그동안 일선으로 복귀에 경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도형준 부사장이 회장의 복심이었기 때문에 오너가 자제들도 그를 상대하기 어려워했다.

그런데, 만약 권영호 회장이 없다면?

그 말은 권영호 회장 사후에도 도형준 부사장이 경영권 다툼을 봉합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회장님 저택으로 들어가다니?’

건강이 예상보다도 훨씬 안 좋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때.

< 띠링! >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

<메인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진행에 따른 메인 퀘스트를 진행합니다.

“해신해운의 회장 권영호 회장은 오랜 지병으로 투병 생활 중입니다. 권영호 회장이 생을 마무리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의 유지를 이어받으세요!”

세부 퀘스트 : 유언

클리어 조건 : 권영호 회장의 유지를 계승

제한 시간 : 권영호 회장 사망 전까지

보상 : 명성 + 100, 글로벌 명성 상승, 사내 평판 상승

실패 시 : 사내 입지 감소, 해신해운 파산 가능성 상승

+

“으으음!”

아, 이런 예상은 빗나가는 일이 없구나.

예상은 했지만 막상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전생과 달리 현생에 권영호 회장과 쌓은 인연이 가볍지 않았다.

전생에 그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별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현생에 쌓은 인연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찌릿 저리는 느낌이었다.

선박 건조 계약 (3)

-평창동 권영호 회장의 저택

하늘에서는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폭우가 쏟아졌다.

도형준 부사장과 나를 태운 차는 권영호 회장의 저택에 도착했다.

끼이익. 차가 멈춘다.

문 앞에는 우산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권영호 회장의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였다.

“오셨습니까.”

도형준 부사장이 타고 있는 뒷문을 열면서 집사가 말했다.

“회장님은 침실에 계십니다. 오시면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

“네.”

도형준 부사장이 굳은 얼굴로 대답하며 집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집사를 따라 권영호 회장의 침실을 향해 가는 저택 안은 유난히 조용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거운 기운이 집안의 분위기를 짓누르고 있는 기분.

“들어가시죠.”

집사가 권영호 회장의 침실 방문을 열며 말했다.

도형준 부사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회장님, 도형준입니다.”

도형준 부사장의 목소리도 평소와는 다르게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오··· 형준이 자네 왔는가?”

침대에 누워있던 권영호 회장이 침대 위로 상체를 일으키려고 하자 집사가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회장님, 편하게 누워 계십시오.”

“허허허. 아니야. 잠시 앉아 있고 싶군.”

권영호 회장이 몇 마디를 한 후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불과 몇 달 전에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후 제법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할 일을 마쳤다는 뜻일까?

해신해운이 권영호 회장이 선언한 신경영 체제에 들어서자 급격하게 그의 기력이 쇠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얼굴이 보고 싶어 자네들을 불렀네.”

“네, 회장님. 자주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허허허, 아니야······.”

권영호 회장이 기침을 콜록거리자 집사가 달려와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으으음.”

가볍게 입을 축인 권영호 회장이 말을 이어갔다.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네?”

“오늘 당장 죽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

“허허허.”

한차례 웃음을 터트린 권영호 회장이 말했다.

“이봐 형준이.”

“네, 회장님.”

“예전에 미국이며 유럽이며 전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지 않았던가.”

“네, 어디 그곳뿐이겠습니까. 선대 회장님이 회사를 경영하시던 시절에 전화가 오면 바로 중동이며, 남미며 바로 가방을 챙겨서 비행기로 날아갔지요.”

“허허허. 그래, 그랬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군.”

“저도 바로 어제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 그랬지.”

권영호 회장이 도형준 부사장 옆에 있는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장보고 차장.”

“네, 회장님.”

“그래도 자네 덕분 지난 몇 달간 즐겁게 지냈다네.”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회장님.”

“허허허. 그래.”

웃음을 마친 권영호 회장이 진지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보고 차장.”

“네.”

“자네가 해신해운 역사상 최연소 차장이라지?”

“네?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그것참 대단하군.”

나를 승진시킨 사람이 이런 칭찬을 하자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도형준 부사장.”

“네, 회장님.”

“자네는 차장으로 진급했을 때 나이가 어떻게 됐나?”

“글쎄요······. 아마 30대 중후반이었을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래 아직 서른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차장이라니······. 내가 장보고 차장을 너무 빨리 진급시킨 건가?”

“글쎄요. 뭐,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지요. 외부 컨설팅 업체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 회사도 인사 적체가 너무 심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능력 있는 젊은 직원들에게 기회를 많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렇지.”

권영호 회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형준 부사장, 동호와 동민이가 입사했을 때 직급이 뭐였지?”

“음··· 제 기억으로는 부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래 그랬군. 하지만 동호와 동민이 모두 다른 회사를 거친 후 30살이 넘어서 해신해운으로 불러들였던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야말로 재벌 직계 가족만큼 빠른 승진이구만? 껄껄껄.”

권영호 회장이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으음, 장보고 차장.”

“네, 회장님.”

“그래, 나의 세 번째 자식은 괜찮을 것 같은가?”

‘세 번째 자식?’

아 해신해운!

지난번 권영호 회장을 만났을 당시 나는 권영호 회장의 ‘세 번째 자식’이 첫째와 둘째의 경영권 싸움으로 멍들어간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 전략이 먹혔다.

권영호 회장을 설득해 신경영 체제를 선언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나는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을 겁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신조선 계약도 대부분 정리가 되었습니다. 해운업 시황과 상관없이 장기간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전용선 계약 비중을 늘릴 수 있도록 영업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이거 참 웃기는 사내로군. 아니, 겁이 많은 건가? 아니면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계속되는 권영호 회장의 질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권영호 회장이 나를 바라보며 실소를 짓더니 말했다.

“이거 자네도 나를 뒷방 늙은이로 여기는가?”

“네? 아닙니다.”

“언제까지 나를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회장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개를 돌려 도형준 부사장을 바라보았지만 도형준 부사장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권영호 회장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나의 세 번째 자식 말일세.”

“······!”

“세아를 말하는 것이네. 나의 세 번째 자식.”

“세······ 아!”

‘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돌려 도형준 부사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권영호 회장의 말을 듣고도 미동조차 없었다. 놀라지 않았다는 뜻.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 권세아 대리의 정체를 이 사람도 예전부터 다 알고 있었구나!’

하긴 도형준 부사장은 권영호 회장의 최측근. 그런 사람이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권세아 대리가 해신해운으로 입사하면서 경영기획팀으로 배정받은 것도 우연이 아니었겠지.

몇 번 넌지시 도형준 부사장을 상대로 운을 떼본 적은 있었다.

그때마다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은 모르는 척 연기를 했던 것이 분명했다.

“장보고 차장.”

“네, 회장님.”

“그래 자네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계획이 뭔가?”

‘계······ 획?’

< 띠링! >

+

<돌발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진행에 따른 돌발 퀘스트를 진행합니다.

“장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권영호 회장의 마음을 획득하세요!”

세부 퀘스트 : 장인의 마음

클리어 조건 : 권영호 회장의 호감도를 획득

제한 시간 : 권영호 회장의 저택을 떠나기 전까지

보상 : 명성 + 100, 결혼(?)

실패 시 : 이별 및 퇴사의 가능성.

+

“······.”

‘뭐야 이건?’

계획이라니? 무슨 계획?

권영호 회장은 아픈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정식으로 세상에 공개하지도 않은 막내딸이라고 하더니······.’

권영호 회장은 해신해운 직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기업인.

나도 그의 성품과 능력을 존경해왔다.

하지만 자신의 막내딸인 권세아 대리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도 부르지 못한 상황을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재벌가의 사정은 있었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 재벌가 나름의 고충은 있었겠지. 그렇게 이해하려고 했지만 납득은 되지 않았다.

기업인 권영호는 존경했지만 아버지 권영호는 존경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권세아 대리와의 관계도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녀도 자신이 재벌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세간에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막내딸에 대한 아버지의 부성이 다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갑자기 뜬금없이 계획이라니?

‘아! 혹시?’

결혼 계획 뭐 이런 걸 말하는 건가?

권영호 회장은 어쩌면 투병 생활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재벌가의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 인간이다.

사람은 다 똑같다. 돈이 많으나 적으나, 죽음을 앞두고는 드넓은 우주 속의 띠끌과도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도 마지막이라는 것을 예감하자 막내딸이 눈에 밟힌 것이 분명했다.

권영호 회장이 다시 물었다.

“그래, 자네 생각을 말해보게. 앞으로 계획이 있나?”

“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뭐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음? 잘 지내다니 무슨 소린가?”

“네?”

권영호 회장은 알 수 없는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소릴 하는 겐가?”

“네?”

“두 사람이 잘 지내든 말든 젊은 사람들의 일이 아닌가. 내한테 일일이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지.”

“······?”

‘왜 이래? 방금 전까지 계획 어쩌고 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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