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5화 (185/200)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던가, 최선의 제안을 보낸 후 겸허하게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저는 이번 입찰에 우리나라 해운, 조선, 금융업을 대표하는 회사들을 전부 참여시킬 계획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국내를 대표하는 대형 해운 회사 2곳, 그리고 태성중공업, 선박 금융을 담당할 금융 기관을 처음부터 참여시키는 메가 컨소시엄으로 입찰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

“그리고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비장의 무기?”

나는 가방에서 신문을 꺼내 들었다.

해양수산부 오재민 장관의 인터뷰가 실린 신라일보 기사였다.

‘왜 저래?’

내가 신라일보를 꺼내 들자 유진태 사장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사장님, 신라일보에 실린 오재민 해양수산부 장관의 기사 내용을 혹시 보셨습니까?”

“네, 저도 봤습니다.”

“그럼, 잘 아시겠군요. 곧 정부에서 해운, 조선, 항만업을 지원하는 공기업을 통합해서 실행력 있는 기관을 신설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SFE 프로젝트를 우리나라 기업들이 따낸다면 막대한 국부가 창출되는 프로젝트입니다. 해운 회사와 조선소, 금융 기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에너지 공기업도 관련이 되지요.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새로 신설되는 공기업이 적극 지원해서 계약을 성사시킨다면 어떨까요?”

“음······!”

“그림이 좀 나오지 않을까요?”

유진태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유진태 사장이 테이블 위로 마주 잡은 두 손을 주물럭거리며 계속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

침묵하는 시간이 제법 길게 이어진다.

나도 나의 패를 전부 오픈한 상태. 더 이상 보여줄 카드는 없었다. 그리고 이쯤 했으면 태성중공업이 결단을 내려야 되는 순간이다.

밥을 차려서 떠먹여 준 것인데 밥상을 걷어찬다면 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으으음!”

고민을 이어가던 유진태 사장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진태 사장은 결심을 내린 듯했다.

선박 건조 계약 (2)

-태성중공업 회의실

회의실 사람들은 모두 유진태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것인가.

태성중공업 유진태 사장은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

“좋습니다.”

“······!”

“우리 태성중공업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겠습니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눈을 크게 떴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태성중공업의 영업팀장이었다.

“사, 사장님?”

“이런 기회가 찾아왔다면 잡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그렇긴 하지만······.”

“나는 결정했네.”

“네 사장님,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로 합의로 계약을 해지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습니다. 컨테이너선이 총 4척이니 금액이 적지 않습니다. 내부적으로도 절차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진태 사장이 고개를 끄덕인 후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미리 생각해둔 계획이 있지.’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장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음?”

“우선, 계약이 체결되어 있는 대형 컨테이너 선박 4척에 대해서는 건조 순서를 변경해주십시오. 지금 계약되어 선주들은 모두 배를 빨리 인도받고 싶어 하니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유진태 사장이 바라보자 영업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능하다는 뜻.

“태성중공업의 수주 물량이 적어도 2~3년 치는 밀려있을 테니, 그 정도 시간이면 SFE 프로젝트 1차 분량이 발주되었을 것이니 기존 컨테이너선 4척 건조 계약은 LNG 운반선 건조 계약으로 변경하고, 나머지 추가 입찰되는 선박은 추가로 계약을 하는 방법입니다.”

영업팀장이 나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좋은 생각입니다. 당장 계약을 해지한다는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내부적으로도 처리하기가 편할 것 같습니다.”

유진태 사장도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내가 활짝 웃으며 대답하자 유진태 사장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장보고 차장님, 듣던 대로 수완이 참 좋으시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듣던 대로 수완이 좋다고?’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들은 거지?

< 띠링! >

+

“메인 퀘스트 달성을 축하합니다. 당신의 활약으로 해신해운의 재무 건전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높은 악성 계약의 위험을 제거했습니다!

보상 :

-당신의 명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스킬 레벨이 상승합니다.

[투자유치 Lv.7]

[협상 Lv.21]

[기업가의 정신 Lv.7]

[재무회계 Lv.2]

-칭호 [계약의 달인]을 획득합니다.

비고 : 조심하세요! 태성중공업의 경영진이 당신을 사윗감으로 눈독 들이고 있습니다.

+

‘뭐? 사윗감?’

화들짝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유진태 사장을 바라보았다.

“음? 왜 그러십니까?”

유진태 사장은 다소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하하하.”

이 양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정확히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 * *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회의실

몇 주 후.

회의실에서는 법무기획파트의 업무 보고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법무팀의 간부들이었다.

법무팀장을 겸하고 있는 경영지원본부장 현재형 상무, 법무팀 보험파트장인 박기성 부장, 컴플라이언스 파트장인 허동재부장 그리고 기획파트장인 내가 참석했다.

현재 보고를 하고 있는 사람은 한재명 과장. 그는 그동안 진행된 신조선 건조 계약 변경에 대한 성과를 보고했다.

“이상으로 계약 변경을 목표로 했던 계약 중 태성중공업 외 나머지 조선소들과의 계약은 모두 협상이 완료되었습니다.”

한재명 과장은 뿌듯한 표정으로 보고를 마쳤다.

“음, 수고했네.”

현재형 상무가 말했다.

“그럼, 태성중공업과 체결된 4건 외에는 목표로 했던 계약은 다 정리가 된 것이군?”

“그렇습니다. 태성중공업과는 일단 건조 순서를 변경한 상태입니다. LNG 운반선 입찰 결과에 따라 추가 협상이 필요합니다.”

“음, 좋군.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지난 몇 주간 법무팀 기획파트에서 제법 성과가 보이고 있는 상황.

신조선 건조 계약은 목표를 달성한 상태.

이제 남은 것은 용선 계약을 정리하는 것이다.

현재형 상무가 물었다.

“장보고 차장,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

“일단, 선대기획팀과 협의를 마쳤습니다. 선대기획팀에서 선대 확충을 위해 협상 중이던 정기 용선 계약 규모를 줄이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래?”

“네, 그동안 협상 중이던 계약 건들은 대부분 협상이 중단된 상황입니다. 선주들과 협의를 진행한 후에 계약 기간을 줄이든지 용선료를 조절해서 꼭 필요한 선박들만 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의논을 마쳤습니다.”

현재형 상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장보고 차장.”

그때, 보험파트장 박기성 부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부장님.”

“내가 듣기로 이번 달 말에 싸우스팬(Southpan) 사람들이 한국으로 들어와 본사의 선대기획팀을 방문한다고 하는 말이 있던데 맞는가?”

“네, 맞습니다. 선대기획팀에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하던가?”

“뭐,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마 협상 중이던 용선 계약을 우리가 중단하겠다고 하니 관련 이야기를 하려고 들어오는 게 아닐까요.”

“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런데 그 회의에 법무팀도 참석하는 건가?”

“네, 선대기획팀에서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박기성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턱을 쓰다듬었다. 고민이라도 있는 듯 생각에 빠진 표정.

‘박기성 부장이 싸우스팬 사람들이 방문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도 해운업계에서 제법 오래 근무했으니, 이곳저곳에 인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싸우스팬은 전생에 해신해운이 파산할 당시 대형 컨테이너선 9척을 용선해주고 고가의 용선료를 받고 있던 캐나다 국적의 해운 기업이다.

이들도 그리스 선주들과 비슷하게 직접 컨테이너 운송업을 하지는 않는다. 선박을 건조하여 소유한 후, 컨테이너 운송업을 하는 해신해운과 같은 정기선사들에게 용선해주는 용선업이 이들의 주된 영업이었다.

나에게는 애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전생에 해신해운이 최종적으로 파산하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된 것도 이들과의 협상 실패 때문이었다.

싸우스팬은 해신해운의 재무적 곤경에 처했을 때 용선료 협상 요구를 일축했다. 해신해운의 계획에 사사건건 딴죽을 걸고 방해를 했기 때문에 협상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대였다.

해신해운 파산 이후 더욱 공분을 샀던 것은 싸우스팬이 글로벌 선사로 성장하는 데는 우리나라 국책 은행의 지원이 컸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열 받을 일이 아니다.

그것도 결국 양쪽의 이해에 따른 비즈니스의 결과가 아닌가?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던가?

‘그래도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지.’

파산할 당시 느꼈던 설움은 아직도 나의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져 있었다.

복수까지는 아니지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며칠 뒤 퇴근 시간 무렵.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현재형 상무가 뒷짐을 쥔 채로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뒷모습에는 이런저런 고민이 깃들어 있었다.

유난히 10층 사무실이 조용하게 느껴졌다. 마치 폭풍 전야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따르릉!

‘음?’

책상 위 전화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법무팀 장보고 차장입니다.”

- 장보고 차장, 날세, 도형준.

“네, 부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도형준 부사장은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한 상태.

도형준 부사장과 권동민 부사장이 승진해 회사에는 총 3명의 부사장이 있었다.

권영호 회장의 장남인 권동호 부사장에 이어 차남인 권동민 부사장, 도형준 부사장으로 승진해 3명의 실세 부사장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마치 삼국지의 삼국 정세처럼 위태로운 균형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도형준 부사장이 말했다.

- 오늘 저녁에 시간 되나? 아니 지금 별일 없나?

“네, 별일 없습니다.”

- 그럼, 바로 로비로 내려오게. 차를 대기시켜놓겠네.

‘무슨 일이지?’

도형준 부사장의 목소리가 제법 다급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궁금증이 커졌다.

나는 빠르게 책상을 정리한 후 로비를 향해 내려갔다.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가자 바로 앞에는 검은 승용차가 정차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검은 승용차의 뒷자리 창문이 내려갔다.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도형준 부사장이었다.

“장보고 차장, 왔나?”

“네, 부사장님.”

“빨리 타게. 시간이 없네.”

나는 빠르게 문을 열고 차에 승차했다. 내가 탑승하자 차는 빠르게 출발했다.

도형준 전무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보통 네이비색이나 차콜그레이색 정장을 즐겨 입는 그였기에 약간 낯선 모습이었다.

기사는 조용히 고개를 뒤로 돌려 도형준 부사장에게 물었다.

“부사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평창동으로 가지.”

“네, 출발하겠습니다.”

‘평창동이라면?’

평창동이라면 권영호 회장의 저택이 있는 곳이었다.

‘권영호 회장님 집으로 가는 건가?’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도형준 부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의 시선을 느낀 듯 대답했다.

“그래, 회장님댁으로 가는 길이네.”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나의 질문에 도형준 부사장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이지?’

혹시?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부사장님.”

“음?”

“혹시 회장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으음······, 맞네.”

도형준 부사장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짧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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