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200)

손목에 찬 시계를 살피던 한재명 과장이 말했다.

“일찍 올라가서 기다리죠. 기다리는 게 비즈니스 매너 아닙니까? 허허허.”

“네 파트장님, 그런데 협상이 될까요?”

“글쎄요. 두고 보면 알겠죠.”

나는 걱정 말라는 듯 활짝 웃었다.

하지만 나의 아름다운 미소도 그를 안심시키지는 못한 듯했다.

택시 안에서부터 한재명 과장은 계속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그는 애초에 법무기획파트 주도로 추진되는 프로젝트에 대한 확신도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해운 회사는 앞다투어 선박을 발주하려 하는데 반대로 계약을 취소하라니? 제정신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 아닌가?

한재명 과장이 경직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다들 선대를 추가하려고 한다는데 지금 선박 계약을 취소하는 게 좋은 판단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뭐, 그런 결정은 우리 실무진들이 하는 게 아니고 위에서 하는 거니까요.”

나는 손을 들어 올려 하늘을 가리켰다. 권영호 회장이 병환 중에도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권영호 회장이 부산신항에서 신경영을 선언한 이후 해신해운은 비상 경영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전사적인 비용 절감을 통한 수익 구조 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지만 이런 위기감을 직원들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경영진부터 말단 직원들까지. 전사의 직원들이 같은 비전을 공유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나는 한재명 과장에게 말했다.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선박 공급량도 너무 많아요.”

“그래도 다른 회사들은 다들 선대를 확충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순간을 노리는 겁니다. 남들도 모두 알아차릴 때는 늦습니다. 한재명 과장님, 선박 금융 조선주 업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가 뭡니까?”

“신조선 지수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업의 업황을 보여 주는 지표들 중에서 해양 컨설팅 업체에서 발표하는 ‘신조선가 지수’는 조선업의 업황을 예측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수였다.

“과장님, 얼마 전에 발표된 지수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구체적인 수치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호황기가 시작된 2000년도 초반과 비교하면 두 배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180포인트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음······, 그렇군요.”

“놀랍지 않습니까? 일이백 하는 물건도 아니고, 몇천억 원을 넘어서는 선박 가격이 두 배가 뛰었다는 사실이요?”

“그렇긴 한데, 수요가 많으니 뭐 가격이 오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장이 계속될 수 있다고 믿고 두 배 넘게 오른 선박 가격으로 배를 사는 것도 미친 짓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의 경영진도 선박 가격이 곧 하락할 것이라 것에 베팅을 한 것이죠.”

“······.”

“우리 회사가 세계 탑 쓰리(Top 3) 정기선사들과 경쟁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밖에 없습니다. 이번 기회를 잘 살려야 해요.”

한재명 과장이 나의 말을 이해한 것인지 아닌지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과장님 어깨가 무겁습니다.”

“제가요?”

“네, 결자해지해야죠.”

“결자해지?”

“신조선 금융 계약을 체결한 분이 아닙니까. 계약을 취소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죠. 아, 제 말은 우리가 아니고 한재명 과장님을 말한 겁니다. 결자해지니까요. 허허허.”

“네······? 제가요?”

한재명 과장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내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태성중공업 본사 회의실

잠시 후.

태성중공업의 회의실로 들어섰다.

본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덜컥, 문이 열리고.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짧게 자른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직원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태성중공업 담당잡니다.”

한재명 과장이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음? 담당자만 혼자 온 것 같은데요.”

“네, 팀장도 아는데 안 보이네요. 담당자만 온 것 같습니다.”

뭐, 실무진 담당자들 간의 회의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해신해운을 대표해서 온 것이다.

그런데 젊은 담당자 한 명만 회의실로 보내다니?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한재명 과장님, 태성중공업 영업팀 팀장도 참석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그렇게 들었는데······.”

“음, 오늘 미팅에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 예정인지 알려줬나요?”

“네, 자세히는 아니지만 대략적으로는······.”

“그런데도 담당자만 보냈다라······?”

회사들 사이에 미팅을 실시할 때는 참석자를 알려주는 것이 비즈니스 매너.

참석하기로 한 팀장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

나를 무시하는 건가? 아니면 해신해운을 무시하는 건가?

해운 회사는 조선소의 고객.

일반적인 비즈니스 관계라면 고객사가 갑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지금은 해운 호황기에서 이어진 조선업 초호황기.

선박 발주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조선소가 오히려 갑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해신해운이 도입하려던 선대 확충을 보류했다는 소식이 업계에 전해진 상황이었다. 태성중공업 입장에서는 더 이상 VIP 고객이 아니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음, 일단 한번 의중을 살펴볼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명함 지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갑습니다. 해신해운 법무팀에서 일하는 장보고 차장입니다.”

“아 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태성중공업 영업팀에서 일하는 박도훈 대리라고 합니다.”

박도훈 대리와 명함을 교환한 후 자리에 착석했다.

“말씀은 듣긴 했는데요. 파트장님이신데 참 젊으시네요?”

“허허허. 그렇습니까?”

“네, 해신해운에 새롭게 떠오르는 신성이라고 회장님 심복이라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하던데요?”

“제가요?”

“네, 저도 궁금해서 좀 알아봤습니다. 부럽습니다. 저보다도 젊다고 들었는데요. 대단하시네요.”

“허허허.”

‘음? 내가 해신해운 회장의 심복이라고?’

뭐,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해신해운 내부에서도 최근 나에 대한 평가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런데 박도훈 대리님, 영업팀 담당자이시면 요즘 진짜 바쁘시겠습니다?”

박도훈 대리가 나의 질문에 활짝 웃었다.

“네, 맞습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해운업계가 호황이니까 연락이 이곳저곳에서 끊기질 않네요.”

“요즘도 선박 발주 문의가 많은가요?”

“네, 계속 증가하는 추세네요. 특히 컨테이너 선박 문의가 많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서 그런지 정기선사들 사이에 대형 컨테이너 선박을 도입하려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렇군요.”

“해신해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박도훈 대리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이건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요. 해신해운은 국적 선사니까 제가 알려드리는 겁니다. 어디 가서 소문내시면 안 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맨스크가 이번에 도입한 대형 컨테이너선 말인데요. 1만TEU급 선박 아닙니까?”

“네, 저도 신문 기사를 봤습니다.”

“회사에서 2만TEU 이상 컨테이너선도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2만TEU요?”

한재명 과장은 깜짝 놀란 표정.

“네, 정말 크지 않습니까? 선박 사이즈 커지는 속도가 참 무시무시한 수준입니다.”

“그렇군요.”

“정기선사들 간에 대형 선박 도입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추세이니 해신해운도 경쟁에 뒤처지면 힘드실 겁니다.”

“······.”

박도훈 대리의 충고는 고맙지만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다.

‘2만TEU급 선박이라.’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201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 2만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들이 시장에 공급되기 시작한다.

지금 발주되는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크기는 1만TEU급.

2만TEU급 선박이라면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큰 컨테이너선의 선복량 두 배에 달하는 선박. 길이만 400m에 달한다.

선박의 길이가 400m라는 말은 배를 수직으로 세우면 63빌딩(264m)보다도 훨씬 크고, 미국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443m)에 비견될 수 있는 크기라는 뜻이었다.

전생에도 경험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박도훈 대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이유가 궁금할 뿐.

태성중공업 담당자 박도훈 대리가 한재명 과장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장보고 차장님, 한재명 과장님한테 대충 이야기는 들었는데요.”

“네.”

“오늘 회사를 방문하신 이유가 해신해운에서 발주하기로 한 계약을 변경하기를 원하신다고 하시던데요.”

“네? 변경이요?”

“네?”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모르는 척을 하자 당황한 사람은 오히려 박도훈 대리였다.

“음? 제가 한재명 과장님한테 전해 듣기로는 해신해운에서 선박 건조 계약을 취소하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한재명 과장님, 무슨 소립니까 그게?”

나는 한재명 과장을 바라보았다.

“······.”

한재명 과장은 나를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치.

이 미친 인간이 왜 이러는 거지? 한재명 과장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박도훈 대리님, 뭔가 이야기가 잘못 전달된 것 같습니다.”

“네?”

“제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태성중공업에 큰 프로젝트를 제안하려고 온 겁니다.”

“······?”

“대리님 말대로 제가 해신해운 회장님 심복이라면, 제가 컨테이너선 건조 계약 몇 건 취소하려고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

박도훈 대리는 눈만 껌뻑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려는 프로젝트 말인데요.”

“네.”

“사이즈가 좀 큰 프로젝트입니다. 대리님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결재 권한을 가진 상사분을 모시고 오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태성중공업 (2)

-태성중공업 회의실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박도훈 대리는 나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 프로젝트 규모가 크다 보니까요. 아무래도 권한을 가진 분이 참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

박도훈 대리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박도훈 대리를 유심히 살펴본다.

30대 초반의 나이, 눈빛이 날카롭다. 스마트(Smart)해 보이는 인상이다.

태성중공업은 채용 인원이 많지만 대부분 공대 계열이거나, 현장직 근무자들이다.

이렇게 젊은 직원이 본사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뜻은 명문 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아마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태성그룹에 입사했겠지?’

어릴 때부터 큰 난관 없이 좋은 학교를 거쳐 굴지의 대기업에서 근무를 하는 사람.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고객사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다지 비위를 맞춰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큰코다칠 텐데.’

다소 건방진 태도였지만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전생과 현생의 경험을 합치면 눈앞에 있는 젊은 청년보다는 적어도 수십 배에 달하는 경험을 한 연륜이 있질 않은가?

특별히 그의 행동에 화가 난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 나의 계획대로 진행이 된다면 박도훈 대리와 손발을 맞출 일이 많은 상황.

이번 기회에 기선 제압을 해놓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홀짝이던 박도훈 대리가 대답했다.

“음, 뭐 저한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사실 해신해운에서 비용 절감에 힘쓰고 있다는 이야기가 이미 업계에 파다합니다. 그런 상황이니 뭐, 추진하려는 프로젝트가 크다고 해봤자······.”

“150척!”

“풉!”

박도훈 대리가 홀짝이던 커피를 뿜었다.

“컥컥!”

내 옆에서는 한재명 과장이 기침을 계속 콜록거렸다.

박도훈 대리가 물었다.

“네? 뭐라고요? 150척?”

“앞으로 추진될 프로젝트에서 발주가 예상되는 선박의 숫자입니다. 총 150척입니다.”

“······!”

“그것도 벌크선이나 컨테이너선이 아닙니다.”

“그럼?”

“LNG 선박입니다.”

“······!”

박도훈 대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어어?”

박도훈 대리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150척? LNG선이라고요? 어···, 잠깐만 그러면 금액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박도훈 대리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얼토당토않은 숫자에 깜짝 놀란 듯 노트북을 펼쳐 계산기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 이게 도대체 얼마야? 이런 계약이면 도대체 전결 권한이 누구한테 있는 거지?”

노트북으로 그룹웨어에 접속한 박도훈 대리가 전결 규정을 뒤지며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많이 놀란 모양이네?’

자신감이 넘치던 좀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LNG 선박은 태성중공업과 같은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선박 중 가장 선가가 높은 선종 중 하나.

구조가 간단한 일반 벌크선과는 비교할 수도 없고, 유조선이나, 컨테이너선과 비교해도 월등히 비싼 선종이다.

LNG를 운반하는 선박이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고, 위험도가 높은 화물을 운송해야 하는 만큼 이를 제대로 건조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춘 조선소도 많지 않다.

다른 선종(선박의 종류)과 비교해서는 선가(선박의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수주량으로 세계 탑 쓰리 안에 드는 태성중공업이라고 하더라도 단일 프로젝트로 150척의 LNG 선박을 수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규모였다.

LNG 선박 150척을 발주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반, 아니 반의반, 아니 단 몇 척이라도 수임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대박이 아닌가?

특히, 영업팀에서 근무하는 박도훈 대리 입장에서는 이런 계약을 체결할 수만 있다면 말 그대로 평생 할 영업을 한 번에 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 계약을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앞으로 사내에서 그의 입지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나 다름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 기회가 일생일대의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침을 꼴깍 삼킨 박도훈 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살짝 창백해진 상태였다.

“어, 저 장보고 차장님?”

그의 말투도 제법 공손해진 상태.

“네.”

“괜찮으시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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