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6/200)

“네, 해운업 사이클이 있지 않습니까. 곧 호황기가 마무리되면 불황기가 도래할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때를 노려야 합니다.”

“불황기에 선박을 도입하자는 말인가?”

“네, 저가에 선박을 매수해서 고점일 때 선박을 판다. 시세 차익을 누리고 비용도 줄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허허허, 불황기에 추가로 선박을 발주하는 게 가능하겠나?”

“그래서, 그리스 선주들은 호황기에 불황기를 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음?”

“해운 회사들은 호황기에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신조선을 발주합니다. 하지만 그리스 선주들은 반대로 행동합니다. 호황기 이후 불황기가 올 것을 대비해서 현금을 비축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불황기의 끝에 선대를 대규모로 발주해서 도약할 기회를 얻습니다.”

“······.”

“2000년대 이후 유례없는 호황기를 누렸습니다. 산의 정상에 올라오면 다음은 무엇일까요?”

“음?”

“내려갈 일만 남았습니다. 높이 올라온 만큼 내리막길도 가파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불황기를 지금부터 대비해야 합니다. 이번이 우리 해신해운이 맨스크와 같은 탑티어 정기선사들과 계속 경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입니다.”

“······.”

강당에는 조용한 침묵만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회사의 실세인 권동호 부사장과 설전을 벌인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확신에 찬 표정은 아니었다.

아직도 시장은 호황기다. 이런 시기에 불황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 것일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하는 직원들도 나의 눈에 들어왔다.

‘대강당에 있는 사람들 전부를 설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설득할 목표는 해신해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

바로 권영호 회장이었다.

“음···.”

권영호 회장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시작했다.

“권동민 전무···.”

“네, 회장님.”

“지금, 컨테이너사업본부에서 추진하는 계획대로 선박들을 도입하면 재무적으로 무리가 없겠는가?”

“지금, 신조선 지수가 매우 높긴 합니다. 금융 기관들이 선박 금융에 적극적이긴 하지만 신조선 발주 비용 자체가 워낙 비싸긴 합니다.”

“감당 못 할 정도인가?”

“그렇진 않습니다. 지금 운임 수준이면 운영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음···.”

재무그룹장 권동민 전무의 말에는 맹점이 있었다.

지금 운임 수준이 유지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답변이었다.

권영호 회장도 이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만약 장보고 과장 말대로 선박이 진수되는 시점에 불황기가 도래해서 운임이 하락한다면 어떤가?”

“안 그래도 장기적으로 선박 공급이 과잉될 것으로 보고 운임 하락을 예측하는 의견이 최근 많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AP사와의 계약 덕분에 선박유 구매 단가를 낮춰 수익 구조가 많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지만 운임이 장기적으로 하락한다면 금융 비용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입니다.”

“음···.”

권영호 회장이 고민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장보고 과장 말대로 불황기에 중고선을 구입하는 경우에는?”

“뭐, 과거의 불황기를 고려하면 신조선 가격은 고점과 비교해서 25% 가까이 저렴하게 도입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음···.”

“회장님, 하지만 장보고 과장의 의견에도 한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장보고 과장 말대로 불황기가 도래하면 선박 금융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불황기에 선박을 건조하는 데 자금을 빌려줄 금융 기관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재무그룹장 권동민 전무의 의견을 들은 권영호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영호 회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회장님, 권동민 전무님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현금을 최대한 비축해야 합니다. 불황기를 대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때입니다. 불황기에 다른 회사들은 감히 선박을 도입할 생각을 못 할 것입니다. 그때 가격이 폭락한 신조선을 발주해 격차를 줄여야 합니다. 신조선 발주도 용이하지 않으면 불황기에는 연식이 얼마 안 된 선박들이 매물로 시장에 많이 나옵니다. 상태가 좋은 중고선을 대량 매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중고선?”

권영호 회장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해신해운은 벌크선을 중고선으로 구매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컨테이너선은 신조선을 발주하는 것이 기본적인 영업 방침이었다.

하지만 기존 원칙을 고수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모색해야 할 시기다.

“네, 회장님, 앞으로 몇 년 동안 공급될 선박량이 전 세계 선박의 절반에 달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런 공급 과잉 시대이니 불황기를 견디질 못할 회사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때 지금 신조선 가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에 선대를 확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으으음!”

권영호 회장이 평소에 생각해왔던 방법은 아니다. 그동안의 해신해운의 경영 방침과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기존의 방법으로 맨스크와 같은 탑티어 정기선사들과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방법을 모색할 시기일지도 몰랐다.

권영호 회장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음, 일단 장보고 과장의 좋은 의견을 잘 들었네. 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을 할 수는 없겠지. 경영진들과 다시 한번 의논해 보도록 하겠네.”

말을 마친 권영호 회장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나에 대한 신뢰가 가득했다.

전 사원이 모인 이 자리에서 공식적인 결정을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나는 권영호 회장의 심경에 큰 변화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띠링! >

+

“메인 퀘스트 달성을 축하합니다. 당신의 활약으로 해신해운의 미래가 중요한 기로에 접어들었습니다.”

보상 :

- 당신의 명성이 상승합니다.

- 권영호 회장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 사람들이 당신을 권영호 회장의 측근으로 생각합니다.

- 해신해운의 핵심 인재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 해신해운 오너가의 일원이 당신을 애정합니다.

+

* * *

며칠 뒤.

+

신라일보,

"회사명 빼고는 다 바꿔라!"

지난 20XX년 X월 X일. 그동안 건강상의 이유로 활동을 자제하던 해신해운의 권영호 회장이 오랜만에 부산신항을 찾아 ‘해신해운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해신해운이 그동안 우리나라의 1등 국적선사 지위에 안주해왔다”며, “글로벌 경영 환경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류 해운 회사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 탑티어 정기선사들과의 격차가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권영호 회장의 진단이었다.

권영호 회장은 “이때까지 해신해운은 실질보다 외형과 규모를 중시하는 외부 평가에 연연했다. 일선 경영진의 관심은 실질적인 혁신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정기선사 순위에서 올해 몇 등을 했는지에 집중돼 있었다.”며, “그리고 그러한 결과 해신해운의 실질적인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장기적 생존 전략이 부재했다”고 밝혔다.

권영호 회장은 “우리는 1등 국적 선사라는 자만심에 눈이 가려져 위기를 진정한 위기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이대로 가다간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다. 등허리에 식은땀이 난다”고 지적했다.

이런 권영호 회장의 말에 해운업계 관계자들은 놀랍다는 후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해신해운은 우리나라 1등 국적선사이자 세계 정기선사 중 8위권에 해당하는 글로벌 선사”라며, “해운업이 2000년대 이후 장기간의 호황기를 거치며 성장하고 있는데 이런 위기의식을 강조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해신해운 관계자는 “당분간 권영호 회장이 직접 경영 일선을 챙길 예정”이라며, “권영호 회장이 전사 직원을 불러 모아 새로운 해신해운을 여는 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권영호 회장과 전사원이 위기의식을 공유했다”고 밝혔다.

한편 권영호 회장은 신경영을 선언하며 “외형적으로 규모를 확대하는 전략을 수정할 타이밍”이라며, “질적 개선을 통해 회사의 수익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장기 비전을 마련하겠다. 회사의 인적 구조도 대대적인 개편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권영호 회장은 부산에서 신입 해기사들이 모인 연수원을 방문해, “회사의 젊은 인재들도 능력이 있다면 나이와 경력에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기회를 부여할 것, 해신해운의 미래는 역량 있는 젊은 리더들에게 달려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후계 구도가 뚜렷하지 않은 해신해운의 경영 상황을 지적하며, 권영호 회장의 심경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이 아냐는 관측을 쏟아냈다.

유혜영 기자.

+

인사이동 (1)

-여의도 인근의 레스토랑

며칠 후 저녁 시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스테이크가 놓인 접시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권세아 대리가 말했다.

“음?”

“요즘 일어나는 일들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가?”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그녀를 바라본다. 애써 감정을 지우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이런 일상도 회사 생활도······.”

“회사 생활이 왜?”

“해신해운에 입사해서 일하는 게 이렇게 즐거울 거라고 생각을 못 했기도 했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을 마주한다. 권세아 대리의 눈빛은 평소와는 다르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음······. 그거 알아요? 저는 사실 제법 비밀이 많은 여자랍니다.”

권세아 대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 알고 있어.”

“······.”

“사연 없는 사람은 없잖아.”

나의 대답이 의외인 듯 그녀가 물었다.

“그래요? 오빠도 사연이 있어요?”

“나도 그렇지.”

“어떤 사연?”

“나도 남들에게 말 못 하는 비밀이 제법 많거든.”

“나한테도?”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칫!”

권세아 대리가 토라지기라도 한 척 그녀의 조그만 입을 샐쭉거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그럼,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당연하죠.”

“사실······.”

권세아 대리가 몸을 테이블 앞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나 돈이 엄청 많거든 회사는 취미로 다니는 거야.”

“네?”

권세아 대리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취미로 회사를 다니다니. 무슨 재벌가 사람들이나 할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권세아 대리가 농담인가 싶어 나의 표정을 살펴보지만 나는 진지하기만 하다.

“음······. 그렇군요.”

가끔 이렇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돈이 많다니? 자기 앞에서 할 소린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모아놓은 돈이 제법 많다고 하니까.”

“제법 많은 게 아니고 엄청 많은 거라니까.”

“네······. 알았어요.”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음······.”

권세아 대리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

“몰라요. 말 안 해줄래요. 자꾸 장난만 치고.”

“장난? 난 사실대로 말해준 건데.”

“몰라요.”

“그러지 말고 이야기해봐. 내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몸이거든. 고민도 좋고 비밀도 좋고.”

“그래요?”

권세아 대리가 입을 쌜쭉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저도 사실 많거든요.”

“뭐가?”

“돈이요. 저도 돈 많다고요.”

“음······.”

그렇겠지. 뭐 재벌가의 자제이니까.

“그래도 나만큼은 아닐 거야.”

“······.”

권세아 대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무슨 자신감이야? 하지만 나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하다.

권세아 대리가 가지고 있는 해신해운 지분이 상당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과 비슷한 규모라면 나의 자산은 이미 그것을 초과한 상태. 그동안 쩐주 자갈치 최 부자와 두바이 국부 펀드에서 일하는 동생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이 상당했기 때문. 그들 사이에 나는 투자의 신으로 불리고 있었다.

권세아 대리가 말했다.

“저, 회사를 옮기게 될지도 몰라요.”

“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자 권세아 대리는 이제야 만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이제, 좀 놀란 표정이네요.”

“무슨 소리야 갑자기 회사를 옮기다니?”

그녀가 해신해운에서 몇 년간 일을 하다가 퇴사 후 홀연히 몸을 감췄다는 전생에 들은 이야기가 기억났다.

‘전생에는 외국 회사로 다시 취직해서 나갔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설마?’

“그럴 사정이 좀 생겼어요.”

“어디······ 멀리 떠나는 건 아니지?”

“음?”

“뭐 해외로 나간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권세아 대리는 나의 표정을 살피더니 기분이 좋은 듯 활짝 미소를 짓는다.

“해외를 왜 나가요 제가.”

“하하하. 그래 다행이네.”

“아마, 오션솔루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될 것 같아요.”

“오션솔루션?”

오션솔루션은 해신해운의 자회사 중 가장 큰 회사로, 권영호 회장이 최대 주주로 등재되어 있는 IT 기업이다.

해운, 항만 물류 전문 IT 기업으로 해신해운과 여러 물류기업에 IT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기술력과 노하우를 인정받아 제법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다른 자회사들과는 달리 전생에는 해신해운이 파산한 이후에도 살아남은 저력 있는 곳이다.

‘이상하네. 오션솔루션으로 갔다는 기억은 없는데.’

전생의 기억과는 달랐다.

향후 물류 IT 산업이 시장성 있다고 판단한 권영호 회장이 각별히 아끼고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회사이기도 했다.

전생의 기억대로 모두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권세아 대리는 전생에 회사에서 그다지 중용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다. 몇 년간 근무하다가 해외로 홀연히 떠나 버렸다.

시간이 자나서야 사람들이 그녀가 권영호 회장의 막내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권영호 회장이 아끼는 오션솔루션으로 자리를 이동하다니?

어쩌면 권영호 회장에 심경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 * *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며칠 후.

+

신라일보,

“해신해운 대규모 인사, 조직 개편 예고··· 신경영 시대를 대비한다.”

해신해운이 권영호 회장의 경영 일선 복귀로 조직 재정비와 인사 시기를 앞당겼다.

권영호 회장은 지난 XX일 그룹 경영과 관련한 신경영 메시지를 선언하였는데, 대대적인 인사와 조직 개편이 이어지는 수순으로 예상된다.

아직 시점이 구체화되진 않았지만 우선 예년보다 인사와 조직 개편 시점이 빨라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통상 해신해운이 12월 초 정기 임원 인사를 시작으로 인사 및 조직 개편을 단행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 달여가량 빠르게 조직을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해신해운의 경영권을 둘러싼 후계 구도는 더욱 오리무중 상태다. 권영호 회장이 전격적인 경영 복귀를 위한 행보를 시작함과 동시에 내부적으론 경영권 다툼을 둘러싼 회사 내부의 잡음을 단속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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