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200)

“아!”

그는 두어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주변을 살짝 둘러보더니 귓속말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장 과장, 오늘 회사의 주요 경영진들은 전부 참석할 예정인 거 알고 있나?”

“네? 네. 공지 봤습니다.”

“그래···.”

박원용 사장 이하 본사의 임원은 전부 참석할 예정이라는 공지가 전사에 이미 공지된 상황.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형준 전무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럼 잘해보라고.”

“네? 뭘요?”

“뭐든지, 사업이든 뭐든.”

도형준 전무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앞으로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야.’

요즘 나를 바라보는 도형준 전무의 시선이 예전과 달라진 느낌이다.

예전에는 패기 넘치는 후배를 바라보는 선배의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같은 선상에서 나란히 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랄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맨 앞줄은 임원들이 앉을 테니까 비워두고.’

강당 맨 앞에서 두 번째 줄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남들보다 일찍 대강당으로 올라온 이유는 앞자리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여기가 좋겠어.’

발표자들과도 멀지 않은 자리. 간섭하기에 딱 좋은 자리였다.

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방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총무팀에서 알려드립니다. 2시 정각부터 본사 대강당에서 타운 홀 미팅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미리 보고된 팀별 필수 인원을 제외하고는 전원 타운 홀 미팅에 참석해주시길 바라며 행사 시작 10분 전까지 입장을 완료해주시기 바랍니다.”

* * *

잠시 후.

행사를 시작할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둘 사람들이 대강당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때 강당 뒤쪽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색 올백 머리.

본인의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권동호 부사장이 앞장서서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컨테이너사업본부의 임원들과 팀장들이 그를 수행하는 호위 무사들처럼 줄지어 대강당으로 들어섰다.

권동호 부사장이 맨 앞줄 왼쪽에 착석하자 그 뒤로 피라미드처럼 직급별로 컨테이너사업본부 사람들이 하나둘 착석했다.

“뭐야 이거, 무슨 조직이야?”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무그룹장인 권동민 전무였다.

권동민 전무가 두세 명의 측근 임원들과 대강당 앞문으로 들어오며 권동호 부사장에게 다가섰다.

“형님, 이거 뭐 겁나서 이런 데 오겠습니까. 무슨 조폭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뭐 이렇게 우르르 몰려다닙니까?”

권동민 부사장이 손가락으로 권동호 부사장 뒤에 자리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시비를 걸었다.

권동민 전무가 권동호 부사장 뒤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자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앉게.”

어린 시절부터 저놈은 저랬다. 상대해주는 쪽이 손해. 권동호 부사장이 권동민 전무를 상대할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쳇! 재미없네.”

권동민 전무는 권동호 부사장이 자기를 상대해 주지 않자 반대편 오른쪽으로 걸어가 맨 앞줄 오른편에 착석했다.

가운데 앉아 있는 나를 두고 왼쪽에는 권동호 부사장 진영의 사람들이 오른쪽에는 권동민 전무 쪽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대강당에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도 안에서 흐르는 미묘한 기운을 느낀 듯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대강당 왼편에 권동호 부사장 뒤로 그를 지지하는 임원들과 컨테이너사업본부와 터미널사업본부의 직원들이, 오른편에는 권동민 전무와 그 뒤로 재무그룹과 벌크사업본부의 직원들이 대치하는 구조로 자리를 잡았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강당에서 행사를 준비하던 도형준 전무가 권동호 부사장이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는 내려와 인사했다.

“도 전무, 행사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경영기획본부장이 회사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라는 건 해신해운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인데 뭐 이런 일까지 한다고 이 고생입니까?”

권동호 부사장의 말속에는 뼈가 있었다.

“저는 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사장님 지시 사항인데요.”

“그래요?”

도형준 전무가 권동호 부사장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낸다. 반박하기보다는 능구렁이처럼 박원용 사장 핑계를 댔다.

아무리 오너가 자제인 권동호 부사장과 권동민 전무가 회사의 실세라고 해도 아직 공식적인 대표 이사는 권영호 회장과 박원용 사장이다.

권동호 부사장도 공식적으로는 자신의 상사인 박원용 사장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이라면 도형준 전무가 박원용 사장 뒤에서 이 일을 벌인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형준 전무를 바라보는 권동호 부사장의 시선이 곱지는 않았다.

해신해운 전사 직원들이 대강당을 빼곡 채웠다.

가장 늦게 한 사람이 들어왔다.

마이크를 잡고 있던 총무팀 직원이 말했다.

“사장님 들어오십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사람은 해신해운의 대표 이사 박원용 사장이었다.

도형준 전무는 도착한 임원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박원용 사장이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는 그에게 달려왔다.

박원용 사장과 도형준 전무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자리로 이동했다.

두 사람이 앉은 곳은 맨 앞줄 가운데 자리.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의 바로 앞이었다.

타운 홀 미팅 (1)

-해신해운 본사 대강당

타운 홀 미팅은 아직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각 사업본부의 팀들이 사업 계획과 앞으로의 비전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각 사업본부장이나 그 밑의 임원들이 나와서 사업본부별 중점 사업을 발표하고, 개별 팀장들이 구체적인 사업의 추진 현황을 전사 직원들과 공유했다.

다른 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지만 대강당을 채운 직원들은 자기 일이 아닌 다른 팀 사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영혼 없는 표정이었다.

그중에 제법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팀은 구매팀과 터미널 개발팀. 세계적인 메이저 오일 회사인 AP와의 장기적인 제휴 관계를 맺고 유류 중계기지 터미널 사업에 참여하기 위한 MOU 체결까지 이루어낸 이야기는 제법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경영기획팀에서 타운 홀 미팅을 추진한 취지는 발표자와 객석 사이의 활발한 토론이었건만 실상은 발표자들의 일방적인 주입식 발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진행을 맡은 도형준 전무가 말했다.

“자, 그럼 이제는 컨테이너사업본부의 권동호 부사장님께서 컨테이너사업본부의 현황에 대해 공유해주시겠습니다.”

권동호 부사장이 소개를 받고 천천히 강당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강당 위에서 가볍게 묵례를 한다.

짝짝짝.

강당의 오른편에서는 기계적인 박수 소리가, 왼편에서는 우레와 같은 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신도들인가?’

권동호 부사장이 앉아 있던 자리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열성적으로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교주를 향해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는 사이비 종교의 신도들처럼 권동호 부사장의 호위 무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개받은 권동호 부사장입니다. 컨테이너사업본부의 현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권동호 부사장은 어디서 본 건 있는 듯 정장 상의 재킷을 벗더니 넥타이를 풀고 편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타운 홀 미팅이라고 하더니 분위기가 너무 딱딱하군요.”

“하하하.”

“아마 오늘 행사를 주최하신 분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시진 않았나 보군요.”

“하하하.”

별로 웃기지도 않은 듣기에 따라선 도형준 전무를 저격하는 것처럼 들려서 불편할 수도 있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강당 왼쪽에서는 권동호 부사장의 어색한 농담에 호응이라도 하려는 듯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권동호 부사장은 영화도 할리우드 영화만 즐겨 본다고 알려진 인물.

미국 사대주의자냐고 그를 두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권동호 부사장은 그런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미국 대기업의 경영자들 모습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었다.

오늘도 다른 발표자들과는 달리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발표를 이어갔다.

하지만 발표가 진행될수록 그의 밑천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권동호 부사장은 타운 홀 미팅의 취지를 망각하고 오늘을 자신의 치적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세계 10위권의 선복량, 글로벌 정기선사 정시성 평가 세계 3위.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 발주 등 굵직한 그의 성적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쯧쯧.’

안타깝게도 지금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치적들이 해신해운을 파산으로 몰아간 것들이었다.

회사가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권동호 부사장은 지금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치적들을 부하 직원들의 책임으로 돌리며 한직으로 전보시키거나 임원들을 해고하는 방법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호위 무사들을 대동하고 다니며 자기 사람들을 챙기던 평소 카리스마 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런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권동호 부사장은 자신의 치적 자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마도 경영권 다툼을 염두에 두고 직원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기회로 삼을 생각이 분명해 보였다.

‘저렇게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으니 될 일도 안 됐던 것이 아닐까?’

나는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권동호 부사장이 말을 이어갔다.

“특히, 최근 세계 글로벌 정기선사(컨테이너선사)들 사이에 규모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도 뒤처지지 않도록 선대 확충에 힘쓸 계획입니다. 특히 신조선 발주 외에도 용선 규모를 늘려···.”

갑자기 발표를 이어가던 권동호 부사장의 말이 멈췄다.

객석에서 손을 치켜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다.

권동호 부사장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고개를 돌려 도형준 전무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는 직원 중에 감히 자신의 말을 끊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도 전무님, 뭐 질문이 있는 거 같은데 발표를 마무리하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권동호 부사장의 말에 도형준 전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타운 홀 미팅이니 자유롭게 진행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부사장님.”

“네?”

“아메리칸 스타일로 자유롭게 토론하는 게 어떻습니까?”

도형준 전무의 말에 권동호 부사장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네만. 발표는 마치고 질문은 마지막에 듣기로 하지요.”

하지만 도형준 전무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안 해봐서 잘 몰랐네요. 그럼 제 스타일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자유롭게 논박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지요.”

“뭐? 도 전무!”

권동호 부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도형준 전무를 노려봤다.

그때.

“허허허, 그것도 재밌지 않은가.”

강당 맨 뒤. 한쪽 구석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휙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

“회장님 아니야?”

“권영호 회장님?”

그동안 건강을 이유로 두문불출하던 권영호 회장이 강당 맨 뒤에 있었던 것이다.

“권동호 부사장, 젊은 직원들이 회사의 미래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네, 회장님.”

“성심껏 설명해주고 회사의 미래에 대해 직원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자신감을 심어 주시게.”

“······네 회장님,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권동호 부사장은 예상치 못한 권영호 회장의 등장에 당황한 듯 공손하게 고개를 대답했다.

도형준 전무가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거기, 손을 드신 분 누구신가요. 일어서서 본인을 밝히고 질문 있으면 자유롭게 토론을 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도 발언권을 얻고 싶으면 언제든지 손을 드시면 제가 적절히 개입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도형준 전무의 지목을 받고 자리에 일어섰다. 총무팀 직원이 달려와 마이크를 나에게 건넸다.

“저는 법무팀 장보고 과장입니다. 우선 부사장님 발표를 잘 들었습니다. 감명 깊은 내용이라 이렇게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권동호 부사장이 중간에 참견한다.

“그래, 장보고 과장 그럼 내 설명을 좀 더 듣고······.”

물론 나는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지금 발표 내용이 핵심이었고 반드시 지금 짚고 넘어갈 주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사장님, 정기선의 선대 규모(선박 수)를 계속 확충할 생각이라고 하셨는데 세계적으로 선박 수가 너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나의 도발적인 질문이 시작됐다.

“음?”

“선박이 너무 과잉 공급되고 있다는 우려가 됩니다.”

“······장보고 과장이라고 했나?”

“네.”

“법무팀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뭘 모르고 질문을 하는군.”

“네?”

“현업의 상황을 이렇게 잘 모른다 이 말이야!”

“······.”

“법무팀같이 백 오피스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이렇게 지금 해운 시장에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고 있다니!”

“상황 인식이 이래서야 어떻게 영업 일선에 있는 직원들이 제대로 도움을 받을 수 있겠나!”

권동호 부사장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별안간 나를 힐난했다. 아니다. 그는 나를 저격한 것이 아니다.

백 오피스(Back office) 영업 일선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후방 지원 업무를 받는 관리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느닷없는 권동호 부사장의 말에 백 오피스로 분류되는 직군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갔다.

권동호 부사장이 컨테이너사업본부의 영업통으로 현장 영업을 강조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장소에서 편 가르기를 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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