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200)

“첫째 권동호 부사장, 둘째 권동민 전무.”

“······.”

“마지막은······.”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권영호 회장도 도형준 전무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의 마지막 자식은 해신해운입니다.”

“······.”

그저 실없는 소리로 들렸을까? 맥 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권영호 회장.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허무맹랑한 헛소리가 아니다. 제법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였다.

“셋째를 이렇게 키우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다른 자식들에게 준 애정보다 결코 적었다고 말씀하진 못하실 겁니다.”

“······.”

“전부 회장님 자식이지요.”

‘권세아 대리도, 해신해운도 모두 회장님 자식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놓지는 않았다.

그래도 권영호 회장은 제법 경청하는 모습.

다행히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잘 이끌어 온 덕분인지 나의 말에 제법 흥미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회장님, 셋째를 좀 더 신경 쓰셔야 합니다.”

“으으음.”

나의 말에 권영호 회장이 작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셋째라는 말을 듣고 해신해운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권세아 대리를 떠올렸을까? 궁금증이 생겼지만 권영호 회장의 오묘한 표정은 답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회장님, 지금 첫째, 둘째 싸움에 셋째가 크게 멍들고 있습니다.”

“음? 무슨 뜻인가?”

“아니 겨우 멍 같은 게 아닙니다. 회복될 수 없는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권영호 회장이 눈에 이채가 서린다. 나의 말에 흥미가 생긴 표정.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첫째와 둘째의 다툼이 점입가경입니다. 실적이 필요하다는 명목하에 무분별하게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괜찮겠지요. 하지만 곧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런가?”

“지금은 유례없는 해운 호황기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해운호황기 뒤에는 언제나 불황기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권영호 회장도 고개를 끄덕인다.

해운업이 싸이클을 탄다는 것은 교과서적인 이야기다.

문제는 불황기가 언제 시작되느냐는 것이다. 권영호 회장도 그 부분을 지적한다.

“아직 불황기에 들어선다는 시그널은 없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이유는?”

“유례없는 호황기 뒤에 찾아오는 불황기도 유례없는 불황기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으으음.”

나의 말에 권영호 회장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는다.

“지금 해신해운이 추진하려는 사업들은 호황기가 계속 지속되지 않으면 회사를 위기로 내몰 일들입니다. 늦기 전에 반드시 정리를 해야 됩니다. 아직 마지막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들을 말하는 겐가?”

아직 나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표정은 아니다.

하지만 제법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회장님, 내용이 좀 긴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나의 말에 권영호 회장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하하하. 나는 오늘 한가하네. 자네들이 괜찮다면 이 기회에서 장보고 과장의 고견을 한번 들어보지.”

나는 고견이라는 말에 손을 들어올려 뒷통수를 긁적인다. 고견이랄 것까진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없다면 나도 모르는 일이었을 테니까.

“아! 내 정신 좀 보게 이거 손님들을 불러놓고 대접을 제대로 못했군.”

권영호 회장이 탁자 위에 놓인 벨을 눌렀다. 잠시 후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찻잔은 치우고, 내가 아끼는 위스키하고 안주를 좀 챙겨오게.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으니.”

집사가 권영호 회장의 말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위스키를 드시는 건 좀....”

“허허허. 나는 향만 맡을 생각이니 걱정하지 말게, 여기 손님들에게 드릴 것이니 내가 각별히 아끼는 그놈으로 챙겨오게.”

“아, 알겠습니다.”

집사가 나가자 권영호 회장이 나를 바라본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듣는 표정이다.

“자, 그럼 한번 들어볼까.”

평창동에서의 밤이 제법 길어지는 순간이었다.

* * *

-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며칠 후.

모니터를 바라보던 정재훈 사원이 혼잣말을 시작했다.

“어? 뭐야 이건? 요즘 참 다이나믹하네. 과장님 이것 좀 보세요.”

“뭔데?”

“공지가 하나 올라왔는데요.”

드르륵. 정재훈 사원이 의자를 뒤로 밀더니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경영기획팀에서 또 쓸데없는 일을 벌이나 봐요.”

“허허허.”

나는 그의 뜬금없는 소리에 실소를 흘렸다.

영업팀 같은 현업팀에서는 간혹 경영기획팀에서 하는 일들을 이렇게 폄하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영업하느라 바쁜데 본사의 기획팀에서는 매번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니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뭔데 그래?”

“공지가 새로 하나 올라왔는데요, 전 사원이 다 모이는 타운홀 미팅을 개최한다네요?”

“타운홀 미팅?”

“네, 강당에 본사 전 직원이 참여하는 토론회를 개최할 예정이라네요.”

“오호? 그래?”

타운홀 미팅(Townhall meeting).

미국의 역사에서 시작된다. 정책결정권자나 선거에 들어가는 후보자들인 지역 주민들을 직접 만나 설명을 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듣는 장(場)을 말한다.

직접민주주의적 발상이 반영되어 있는 제도로, 미국 참여민주주의의 중요한 토대로 평가되는 행사였다.

최근에는 정치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기업에서 경영자들이 직원들과 의견을 나누는 행사를 부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전사적인 사안이나 상황을 임직원 전부와 공유하는 의사소통의 장으로 타운홀 미팅 방식을 활용하는 것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이상적인 행사였지만 한국에서는 경영진들이 사실상 보여주기식 행사로 치르는 경우도 많았다.

정재훈 사원의 반응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내가 흥미를 보이자 정재훈 사원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이런 행사는 다 보여주기식 아닌가요?”

“그래?”

“네, 기획팀에서 하는 일들이 다 그렇잖아요.”

“다 그렇다니 어떤데?”

“맨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회사 비전이 어쩌고저쩌고, 가치가 어쩌고저쩌고 떠들기나 하니까요.”

음, 어려운 문제다.

회사의 문화. 공유하는 가치 등은 회사의 경영진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문제.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비전과 회사의 가치, 사내 문화를 전사의 직원들이 공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막상 가장 밑에서 일을 수행하는 말단 사원들에게는 그저 윗사람들이 떠드는 공염불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정재훈 사원이 간만에 투덜이 본능을 일깨웠다.

“그리고,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무슨 타운홀 미팅이에요.”

“글쎄, 나는 좋은 것 같은데.”

“네?”

“괜찮은 행사 같다니까? 제법 재밌을 것 같은걸?”

정재훈 사원은 나의 말에 입을 쌜쭉 다물었다.

“뭐, 경영진의 보여주기식 행사로 끝나니까 불만이라는 이야기 아니야?”

“네······. 보통 그러니까요.”

“우리 같은 말단 직원들 이야기를 듣는 게 행사의 취진데 이야기할 기회를 안 준다는 거 아니야?”

“음...”

정재훈 사원이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우리 같은 말단 직원이라고 표현하는 건 좀 그렇네요.”

“왜?”

“저는 말단 직원은 맞지만 과징님은 자타공인 회사의 핵심인재잖아요?”

“허허허.”

나는 한번 웃어 보인 후 말했다.

“그럼 정재훈 사원에게도 기회를 좀 줘야겠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이긴? 타운홀 미팅에서 활약할 기회를 좀 줘야겠다는 뜻이지.”

정재훈 사원의 표정은 하얗게 질려갔다.

해신해운 직원들이 전부 모인 장소에서 나서는 것은 그의 성격상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정재훈 사원은 보기보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

그리고 그의 눈앞에 있는 저 사악한 하지만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직장 상사.

지금까지 경험해온 바로는 저 사람은 한다면 반드시 하고야 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인사 청문회 (1)

-해신해운 본사 7층 컨테이너사업본부장실

방 안에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성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남자.

그는 해신해운 권영호 회장의 장남이자 컨테이너사업본부장을 맡고 있는 권동호 부사장이다.

고민이 많은 것일까. 나이에 비해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흰머리가 많았던 권동호 부사장의 머리 색은 회색빛에 가까워 보였다.

권동호 부사장은 젊은 나이에도 염색을 하지 않고 회색빛 머리 색을 고수했는데, 머리카락을 바짝 당겨 머리 옆으로 붙인 ‘올백’ 헤어스타일을 고수했다.

소문에는 29세의 어린 나이로 해신해운에서 임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권동호 부사장이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했던 것이 그의 습관이 되었다고 한다.

재벌가에 자라 젊은 시절부터 대기업 임원 생활을 한 탓일까? 그는 점잖은 성격의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저돌적이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합리적 절차보다는 힘을 앞세우는 권위적, 독단적 캐릭터라는 것이 권동호 부사장에 대한 직원들의 평가였다.

그에 대한 평가에서 알 수 있듯 권동호 부사장은 업무 능력보다 구설수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스타일이었다.

아니, 사실 권동호 부사장이 해신해운의 컨테이너사업본부를 맡은 시점은 해운업의 유례없는 장기 호황기였기 때문에 그의 업무 능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기 힘든 측면도 있었다.

권동호 부사장의 앞에는 컨테이너사업본부의 팀장들이 있었다.

권동호 부사장은 주변을 둘러보며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경영기획팀에서 타운홀 미팅을 추진한다고?”

“네, 부사장님.”

“갑자기 왜?”

권동호 부사장은 대답한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 저돌적인 안광이 뿜어지는 듯하자 시선을 마주한 선대기획팀장은 어깨를 움찔거린다.

‘왜 나한테···.’

선대기획팀장은 권동호 부사장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말투로 대답을 이어갔다. 권동호 부사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게··· 경영기획팀에서는 회사가 당면한 현안에 대해서 전 직원들이 참여해서 솔직하게 토론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라는 원론적인 대답밖에···.”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실체가 있는 이야기를 해!”

“경영기획팀에서 자세한 내용은 공유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허! 이 새끼들이!”

쾅! 권동호 부사장이 오른손을 들어 책상을 쾅 내리쳤다.

‘나한테 미리 보고도 하지 않고? 도형준 이 새끼!’

권동호 부사장은 경영기획본부장을 떠올렸다. 직접 여러 번 손을 내밀었건만 그는 건방지게도 아직 제안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와 의논도 하지 않고 이런 전사적인 행사를 주최한다? 권동호 부사장은 경영기획팀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권동민 전무가 수작질을 한 건 아니겠지?”

“네, 재무그룹 구매팀장에게 넌지시 떠봤는데 자기들도 당황하고 있답니다.”

“음···. 그건 다행이군.”

권동호 부사장이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사업본부별로 발표를 준비하라고 했다는 게 정말인가?”

“네, 임원회의 보고 대상인 사업들은 전부 포함하라는 사장님 지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각 사업본부의 비전과 추진하는 사업을 전사 직원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라고 합니다.”

“뭐? 설명과 동의?”

권동호 부사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이 미친놈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

“내가 왜 컨테이너사업본부에서 하는 일을 직원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하나?”

권동호 부사장이 딱히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선대기획팀장이 대답했다.

“사장님 지시 사항이라고 합니다.”

“흥! 그 양반은 이제 곧 뒷방 늙은이가 될 것 아닌가!”

“······부사장님 그럼 어떻게 준비할까요?”

권동호 부사장은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생인 권동민 전무와의 경영권 다툼이 암중에서 펼쳐지고 있는 타이밍이다.

자신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는 상황에 전사 직원들을 모아놓고 발표회를 가져야 한다니?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리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의 전 직원이 모이는 자리이니 각 사업본부에 대한 평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뭐, 어쩔 수 있나? 일단 시키는 대로 준비를 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내가 직접 발표를 할 테니 자료를 최대한 꼼꼼하게 준비를 하게.”

그 말에 깜짝 놀란 선대기획팀장이 반문했다.

“부사장님이 직접 발표를 하시겠다고요?”

“그래, 자네는 뉴스도 안 보나?”

“네?”

“회사의 CEO가 직접 발표 장소에 나와 신제품을 소개하는 장면들이 요즘 많이 있질 않나! 우리 회사도 앞으로 세련미를 좀 더 갖춰야 해.”

“네······.”

선대기획팀장은 권동호 부사장이 과연 뉴스에 나오는 다른 회사의 CEO들처럼 프레젠테이션 역량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별로 걱정되는 행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어차피 형식적인 행사니까.’

그냥 각 사업본부의 대표들이 형식적으로 발표를 하고 영혼 없는 답변을 주고받는 그림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선대기획팀장은 감히 권동호 부사장의 말에 딴지를 걸 자신이 없기도 했다.

권동호 부사장은 오너 일가 중에서 경영과 사생활에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많은 구설을 낳은 인물이었다.

컨테이너사업본부에서는 권동호 부사장이 왕이나 다름없었다.

직원들 사이에는 “자리를 걸지 않고선 부사장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인사는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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