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몇 년 전에 최우수사원상도 받은 해기사 출신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그 이후로도 간간이 소식을 전해 들었네. 도형준 전무가 자네 칭찬을 많이 하더군.”
“그, 그렇습니까? 허허허.”
예상치 못한 칭찬에 나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권영호 회장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 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쭉 해신해운 선박을 탔다고?”
“네, 인턴부터 시작했으니 뼛속부터 해신맨입니다.”
“하하하.”
권영호 회장이 나의 말에 기분이 좋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해신맨이라······.”
권영호 회장이 혼자 중얼거렸다.
“직원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참 고마운 일이군.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하는 직원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았는데······ 도 전무 그렇지 않나?”
“허허허. 저희 때와는 아무래도 다르겠지요.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친구들은 회사에 많습니다.”
“그래?”
“네, 능력도 저희 때보다 훨씬 출중하지요. 제가 지금 대학을 졸업했다면 전 아마 회사에 입사도 못했을 겁니다.”
“자네 농담이 늘었구만?”
“회장님, 농담이 아닙니다.”
“으하하하.”
권영호 회장이 기분이 좋은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좀처럼 웃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고맙네. 허허허.”
권영호 회장이 한참 웃음을 터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래 장보고 과장, 오늘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있는가?”
글쎄, 짐작되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말을 삼가기로 결심했다.
굳이 이런 자리에서 까지 오버(?)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겸손이 최고의 미덕일 때도 있으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잘 모르겠다는 말은 조금은 안다는 뜻 아닌가?”
‘말 장난을 하자는 건가?’
고개를 들자 노회한 권영호 회장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전생에는 대면할 기회가 없어 몰랐지만 의외로 재밌는 성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네,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오호, 그래? 그럼 한번 들어볼까.”
“그동안 제가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혼내려고 부르신 게 아닐까요?”
“뭐? 으하하하!”
권영호 회장이 배를 잡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
‘저렇게 웃을 정도로 재밌는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그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은 아닌듯 보였다. 도형준 전무도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권영호 회장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표정.
별 시답잖은 농담에 저렇게 즐거워하다니.
투병생활로 몸이 약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외로움?
그것도 아니면 화려한 재벌가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 인생 마지막에 느끼는 덧없음인가?
권영호 회장 정도 되는 재벌은 아니었지만 전생의 나도 부산에서 운이 좋아 자수성가로 제법 성공했다는 말을 말년에 들었던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은 전생의 반도 살지 않았지만 전생보다 훨씬 많은 돈을 모은 상황.
재물로도 채울 수 없는 인생의 공허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생에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권영호 회장이 말했다.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사고를 친다고 딱히 생각하진 않았다네.”
“감사합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나는 감사를 표했다. 그 동안 내가 벌여온 행적을 떠올린다면 감히 사고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자신이 재벌 회장이라면? 권영호 회장이 이렇게 깨어있는 사람이었구나!
“뭐,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자네를 부른 건 아니라네.”
“네?”
‘그럼 왜?’
“도형준 전무가 자네를 한번 만나보라고 추천하더군.”
“네?”
“도 전무 말로는 자네가 모르는 것이 없다더군.”
“······.”
“신기할 정도로 말이야.”
나는 권영호 회장의 말에 고개를 돌려 도형준 전무를 바라보았다. 도형준 전무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형준 전무님이 나를 만나보라고 했다면 이유가 있을 텐데······.’
< 띠링! >
‘이 타이밍에?’
갑자기 퀘스트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
<메인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진행에 따른 메인 퀘스트를 진행합니다.
“권영호 회장은 고민이 많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주고 그의 마음을 훔치세요.”
세부 퀘스트 : 고민상담
클리어 조건 : 권영호 회장의 신뢰 획득
제한시간 : 다음 인사이동 전까지
보상 : 명성 + 100, 사내 명성 상승
실패 시 : 지점으로 전보
+
‘뭐야 이거?’
뭘 훔쳐? 징그럽게!
그런데 퀘스트 내용이 신기하다.
‘고민상담이라니?’
이 늙은 양반의 고민을 들어주라는 건가?
실패하면 전보된다고?
부산이나 다른 국내 지사로 발령이 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절대 용납 못 하지!’
아직 본사에서 할 일이 많았다.
훽 고개를 돌려 도형준 전무를 노려본다.
능구렁이 같은 양반이다. 그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을 뿐 고개는 정면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표정.
‘아니야. 좋은 기회일지도 몰라.’
권영호 회장의 마음을 훔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성과인가.
앞으로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회사에서 잘나가는 사람 라인 타보겠다고 직장인들이 얼마나 발버둥을 치는가? 무려 회장 라인을 탈 수 있는 기회였다.
문제는 그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지만······.
눈치가 빠른 인간들은 다들 차기 권력인 권동호 부사장이나, 권동민 전무 라인을 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뭐, 나는 그놈들 라인을 탈 생각을 없으니까.;
빨리 두뇌를 회전시켜 본다.
내가 권영호 회장이라면?
물론 산적한 고민들이 쌓여있다.
해운업이 유례없는 호황기를 보내고 있지만 위기의 순간이 없는 게 아니다.
이렇게 큰 회사를 운영하려면 얼마나 많은 고민이 필요한가?
‘그래도 이런 고민은 아닐 거야.’
평생 회사를 경영해온 사람이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마주하는 위기의 순간은 매번 있었다.
뛰어난 경영자라면 오히려 그런 순간을 즐겨야 한다.
우리나라 재계에서 10위권 안에는 드는 해신그룹의 주력사인 해신해운의 회장.
대기업의 오너이자 재벌가의 일원인 그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뭘까.
‘아! 혹시? 그 일 때문인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재벌가의 회장이라도 사람이다. 나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죽음 앞에 사람은 얼마나 겸손한가?
재벌이라도 피해나갈 수 없다.
그 순간 가장 걱정되는 일이라면?
역시 한 가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권영호 회장에게 대답했다.
“회장님.”
“음?”
“혹시 요즘 고민이 많으십니까?”
“허허허. 그렇다네. 어찌 알았나? 듣던 대로 눈치가 참 빠른 모양이군?”
“그 고민 말인데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호? 내 고민이 뭔지 알고?”
권영호 회장이 입을 삐죽거린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시종일관 대화에 관심 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도형준 전무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의 잘생긴 얼굴을 향했다. 권영호 회장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도형준 전무의 얼굴은 걱정 반, 기대 반.
“회장님.”
“그래, 장보고 과장.”
“애정 고민 아닙니까?”
회장 권영호 (2)
- 평창동 권영호 회장의 자택
눈을 끄게 뜬 권영호 회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다.
“뭐? 장보고 과장 지금 애정 문제라고 했나?”
“네, 애정 문제요.”
탁!
탁자 밑으로 도형준 전무의 손이 내 허벅지 위에 올려졌다.
도형준 전무는 손에 힘을 줘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애정 문제라니 이 무슨 망발인가?
눈을 힐끔거려 바라보니 도형준 전무는 당황한 듯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으흐흠!”
도형준 전무가 헛기침 소리로 나를 제지하려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자식 걱정 때문에 그런 고민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자식에 대한 애정 뭐 그런 문제가 아니냐는 뜻입니다.”
“음? 무슨 소린가? 자식 걱정이라니?”
나의 말에 권영호 회장이 눈을 부릅떴다.
“회장님, 혹시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나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역사?”
“네, 뭐, 조선시대라던가.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글쎄....”
“관심이 없어도 사실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역사 드라마만 봐도 잘 알 수 있으니까요. 후계가 튼튼하지 못하면 조정이 위태로워진 이야기들 말입니다.”
“음....”
나의 말을 들은 권영호 회장의 표정이 밝지 않다. 사실이니까. 그리고 그가 전생에도 죽기 전까지 깨끗하게 정리를 하지 못한 문제였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면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배를 타면서 초임 항해사나 실습항해사를 만나면 제가 가르쳐 주는 것은 항상 동일했습니다. 사람은 다른데 신기하게도 하는 실수는 비슷하더군요. 저도 바다에서 배웠습니다.”
“반복이라....”
“해신해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아무도 감히 입 밖으로 후계 구도를 튼튼히 해야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겠지요. 속으로는 다들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직 회장님 눈치를 보는 것이겠지요.”
권영호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자네 말은 역사 속의 왕들처럼 빨리 회장 자리를 넘겨주라는 뜻인가? 가장 애정하고 아끼는 자식에게?”
“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뭐? 그럼 무슨 뜻인가?”
권영호 회장은 짧게 반문하고는 나의 대답을 기다린다.
“제가 애정 문제라고 한 이유는 사실 다릅니다.”
권영호 회장의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회장님은 애정하는 자식이 몇 명이 있으신가요?”
나의 질문에 권영호 회장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마 권영호 회장은 도형준 전무로부터 들은 말을 떠올린 것일지도 몰랐다. 신기하게도 모르는 게 없다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권영호 회장은 2명.
해신해운의 컨테이너사업 본부장 권동호 부사장과 재무그룹장 권동민 전무. 하지만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막내딸이 있었다.
바로 권세아 대리.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권영호 회장은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권세아 대리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권세아 대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보고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비공식적인 사내 커플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사이였으니까.
아직 자신의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한 권영호 회장은 얼굴에는 살짝 긴장한 기색이 흘렀다. 막내딸인 권세아 대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긴장한 표정의 권영호에게 말했다.
“3명입니다. 회장님의 자식은.”
“······.”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 세 개를 폈다. 하나를 접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