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200)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경영기획본부장 도형준 전무였다.

- 도형준[경영기획본부장]: 장보고 과장.

- 장보고[법무팀/과장]: 네 전무님.

- 도형준[경영기획본부장]:오늘 저녁에 시간 되나?

‘무슨 일이지?’

도형준 전무는 해신해운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자 핵심 임원 중 한 사람.

그 말은 도형준 전무가 별 다른 이유 없이 그냥 술이나 한잔 하자고 나에게 연락할 한가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

그리고, 오늘 제법 중요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빠질 수 없지.’

- 장보고[법무팀/과장]: 네, 전무님. 괜찮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별일 없습니다.

- 도형준[경영기획본부장]: 그래, 다행이군 저녁에 나하고 같이 갈 곳이 있으니 6시 정각에 1층 로비에서 만나지.

- 장보고[법무팀/과장]: 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지....?

- 도형준[경영기획본부장]: 가면서 알려주겠네.

- 장보고[법무팀/과장]: 네 알겠습니다.

* * *

- 해신해운 본사 1층 로비

잠시 후 퇴근 시간 6시.

퇴근시간이었지만 로비는 아직 한산했다.

약속이 있는지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며 빠른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몇몇 눈에 들어올 뿐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근 전이었다.

해신해운의 공식적인 근로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해신해운은 해외주재원 근무 기회가 많고, 외국 국적의 직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기업문화는 비교적 자유로운 대기업에 속한다.

대기업 중에 퇴근시간도 빠른 축에 속했지만 오후 6시가 지나자마자 칼퇴근을 하는 용기 있는 직장인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사람들도 슬쩍 눈치를 보며 6시 30분쯤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때 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보고 과장, 일찍 왔군.”

고개를 뒤로 돌리자 거울처럼 반짝거리는 갈색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도형준 전무였다.

평소에도 흐트러지는 모습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좀 더 복장에 신경을 쓴 것이 분명해 보였다.

“네, 전무님.”

끼이익!

그때 검은 대형 세단이 다가오더니 우리 앞에 섰다.

“타지.”

도형준 전무에게 제공된 회사 차량이었다.

차에 탑승하자 기사는 조용히 고개를 뒤로 돌려 도형준 전무에게 물었다.

“전무님, 어디로 모실까요?”

“평창동으로 가지.”

“전무님, 평창동이면 권용호 회장님 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네, 출발하겠습니다.”

기사가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권영호 회장님 집으로 간다고?’

깜작 놀라 고개를 돌려 도형준 전문를 바라보았다.

“전무님, 회장님 댁으로 간다고요?”

“그래.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인가?”

“갑자기 회장님 댁으로 간다는데 그럼 제가 안 놀라게 생겼습니까?”

“하하하. 자네가 이렇게 놀라는 표정이라니! 미리 말 안 해주길 잘했군.”

‘뭐가 저렇게 즐거운 거지?’

도형준 전무는 기분이 좋은 듯 한참을 웃어보였다.

나는 그의 웃음이 멈출 때쯤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전무님.”

“음?”

“그런데, 회장님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으음······.”

도형준 전무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많이 안 좋으신 건가요?”

도형준 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형준 전무는 해신해운의 임원중에서 권영호 회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이었다.

어느새 회사 내부에서 세력을 키운 권영호 회장의 장남 권동호 부사장과, 권동민 전무가 경영권 다툼을 앞두고 임원들을 차례차례 포섭해 나가고 있었다.

비공식적으로 이 두 세력에 가담하지 않은 인원은 도형준 전무와 인사팀과 총무팀을 담당하는 경영지원본부장밖에 없었다.

숫자로 단순 비교하면 권영호 회장의 장남인 권동호 회장 쪽에 줄을 선 임원들이 우위.

해신해운에서 컨테이너사업본부가 가장 비중이 크기고 하고, 컨테이너사업과 업무적으로 연관이 큰 터미널사업본부, 부산지사에 있는 해사그룹본부의 임직원들이 권동호 부사장 라인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벌크사업본부, 3자물류를 담당하는 물류사업본부 쪽이 권동민 전무쪽 세력으로 암암리에 분류되고 있었다.

물류사업본부와 벌크사업본부는 해신해운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지는 사업 분야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차남 권동민 전무가 불만세력을 포섭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내 세력으로 비교하면 장남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회사 내부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인사권을 쥐고 있는 경영지원본부장과 회사 비전과 관련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경영기획본부장의 입장이 아직 모호했다.

만약 차남 권동민 부사장이 이들을 포섭할 수 있다면 사내 세력도 그야말로 백중세라고 할 수 있는 상황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달리는 차 속에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신강일 상무······.’

경영지원본부장 신강일 상무.

그가 전생에 했던 선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랫동안 권용호 회장의 최측근으로 분류되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경영권 다툼의 한복판에 있었다. 한쪽 세력에 포섭된 지 오래였다.

능구렁이같이 복심이 깊은 사람답게 본심을 오랫동안 숨겼던 것에 불과했다.

인사팀, 총무팀, IT팀을 담당하는 경영지원본부장 신강일 상무가 권영호 회장의 차남 재무그룹본부장 권동민 전무 진영이었던 사실이 권영호 회장 사후에 밝혀진다.

아마도 영업통인 컨테이너사업 본부장 장남 권동호 부사장보다는 같은 백오피스 출신인 차남 권동민 전무 쪽으로 가담하는 것이 자신의 영달에 좋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뭐, 다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일반 직원들은 경영권 분쟁이 어떻게 결론이 나든 크게 상관이 없다. 하지만 임원들은 다르다. 임원들은 지금 총성 없는 전쟁 한복판에 서있는 상황이었다.

임시직원에 불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싸움에서 줄을 잘못 서서 패배한다면?

한순간에 백수가 될지도 모른다. 다들 자신들의 미래를 걸고 한판 큰 도박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문제는 지금 해신해운의 처한 상황이다.

경영권 다툼을 핑계로 임원들이 회사 운영이 뒷전이라면?

해신해운 전사의 역량을 영혼까지 탈탈 끌어모아도 앞으로 닥쳐올 위기의 파도를 해신해운호가 제대로 넘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임원들이라는 놈들이 이런 헛짓거리에 정신이 팔려있다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좀 더 과장하면 해신해운은 물이 서서히 끓고 있는 냄비 안에 들어있는 개구리와 결코 다르지 않은 신세다.

개구리들은 누구 하나 물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뜨거워지는 온도에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적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어.’

권영호 회장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도형준 전무 덕분에 생각하지도 못한 기회가 생겼다.

어떻게 이 기회를 활용할 것인가?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회장 권영호 (1)

- 평창동 권영호 회장의 자택

두두두. 달리는 차 밖으로 갑자기 빗물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일기 예보에 비는 없었던 거 같은데······.’

“비가 오는군.”

같은 생각인지 도형준 전무도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유를 알 순 없지만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차분했다. 비가 오니 감성적인 된 것일까?

비가 내려서인지 어두컴컴한 창밖. 큰 대저택들이 비탈길 위로 줄지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채의 대저택들이 늘어선 모습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성처럼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끼이익. 차가 정문 앞에 도착하자,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차 문을 열었다.

“장보고 과장, 들어가지.”

“네.”

도형준 전무가 먼저 차에서 내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집사의 안내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집사는 조용히 1층 한쪽에 마련된 응접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지만 안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도형준 전무는 이 공간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자신이 앉을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보고할 내용을 생각하는 것인지 도형준 전무는 양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전무님?”

오른손을 들어 올려 한번 빙글 돌렸다. 권영호 회장이 오기 전까지 방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깐 구경 좀 해도 될까요?”

이 녀석은 긴장이라는 것은 안 하는 것일까? 도형준 전무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응접실 내부를 빠르게 살폈다.

‘음, 생각했던 모습하고는 좀 다르네?’

권영호 회장의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고고한 취향인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재벌가의 집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오히려 해신해운 홍보관 같은 느낌이었다.

각종 상패들과 그동안 해신해운이 쌓아온 업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재벌 회장의 응접실이라기보다는 저명한 학자의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방안에 담겨 있는 공기. 해신해운의 역사가 이 방에 고스란하게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에 걸려있는 사진.

해신해운이 그동안 쌓아온 발자취가 담겨 있었다.

회사를 생각하는 권영호 회장의 애정도 강하게 느껴졌다.

‘LA 롱비치 터미널 같은데?’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속에서 젊은 시절의 권영호 회장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미국에 전용 터미널을 건설하고 고생한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보였다.

‘그래 이런 회사였지.’

해신해운은 이런 사람들의 노력으로 커온 회사였다.

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한 궁금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권영호 회장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일까?’

그는 한평생을 바쳐 해신해운을 일구어냈다.

해신그룹의 회장이 아버지로부터 운수업을 물려받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룹의 비주류 사업에 불과했다.

해신해운을 세계적인 해운회사로 이끈 것은 권영호 회장의 공이었다.

평생을 바친 회사가 자신의 사후에 회사가 파산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권영호 회장 사후에 벌어질 일을 떠올리자 권영호 회장이 한편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이마를 툭 두들겼다.

‘재벌 회장을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나도 참 많이 컸네.

전생에는 감히 마주 볼 수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측은지심이라니. 이번 생은 다르긴 달라도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컥.

그때 철컥 소리가 나더니 응접실 문이 열렸다.

“어떤가?”

등 뒤에서 작고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집 뒤편으로 산 아래에 있는 산골 물 흐르는 소리와 산기슭을 훑으며 오르내리는 산바람이 좋은 곳인데, 갑자기 날씨가 이렇게 되어서 아쉽군.”

고개를 돌리자 응접실로 들어서는 권영호 회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형준 전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나도 인사를 올린 후 걸음을 옮겨 도형준 전무 옆으로 다가갔다.

“자! 모두 앉지.”

권영호 회장의 뒤를 따라 우리도 자리에 착석했다.

권영호 회장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예전 기억보다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젊은 시절 직원들과 전 세계를 뛰어다녔다고 하더니 그런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안광이었다.

“법무팀의 장보고 과장입니다.”

“알고 있네. 허허허.”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권영호 회장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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