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6/200)

이제야 해신해운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긴장한 듯 자기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 고객사 중 한 곳을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권도성 차장의 창백한 얼굴도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후의 일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압둘 무바라크는 해신해운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해신해운과 도하에너지는 중동에서의 물류 사업 확대를 위한 공동 투자를 약속하는 내용의 전략적 제휴 합의서(Strategic Alliance Agreement)를 체결하는 것으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 * *

잠시 후.

압둘 무바라크와 나는 회의실에서 독대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하하하! 미스터 장, 정말 오랜만입니다.”

“네, 사장님, 그런데 언제 카타르로 돌아가신 겁니까?”

“뭐, 카타르로 복귀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타르 제3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좋은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을 주시지 깜짝 놀랐습니다.”

“미안합니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라 저도 정신이 없었습니다.”

“네, 허허허. 농담이니 크게 마음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압둘 무바라크 사장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자주 연락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편하게 알려주시고.”

압둘 무바라크가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도하에너지에서 추진 중인 SFE 프로젝트에 해신해운을 참여시켜 달라는 부탁을 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오늘은 참기로 했다.

‘좀 모양 빠지니까.’

그건 회사 대 회사로 당당하게 진행해야 할 대규모 프로젝트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대등한 자리에서 주고받는 게 있어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과거의 호의를 바탕으로 거저먹으려고 하는 것은 내 성미에도 맞지 않은 일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에 기대서 일을 진행할 일이 아니고, 도하에너지 입장에서도 거절할 수 없는 흥미로운 제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해신해운에도 이득이 되고, 도하에너지에도 도움이 되는 그런 매력적인 제안을 들고 당당하게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대로 보내기는 좀 아쉬우니까?

이 찬스를 날려 먹을 순 없지.

‘좀처럼 없는 기회니 지인 찬스를 써야지.’

나는 압둘 무바라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음흉한 미소가 내 얼굴에 드리워졌다.

압둘 무바라크는 나의 표정 변화를 눈치챈 듯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갑자기 사라졌다.

“사장님, 언제까지 한국에 계실 예정입니까?”

“음? 아직 며칠 더 있을 계획입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럼, 괜찮으시면 돌아가시기 전에 저랑 한 번 더 만나시죠.”

“음, 글쎄요.”

“······!”

압둘 무바라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스터 장, 밀항자 신분으로 비너스호에 있을 때와는 신분이 다릅니다.”

“······.”

“저도 이제 꽤 바쁜 사람입니다.”

압둘 무바라크는 실없는 농담을 했다.

* * *

다음 날.

+

신라일보.

도하에너지 “한국과 강력한 파트너십··· 해운, 물류 분야 역할 기대”

세계 최대 액화 천연가스(LNG) 수출업체인 카타르 국영기업 도하에너지(Doha Energy)사의 압둘 무바라크 사장이 국회를 방문했다.

압둘 무바라크 사장은 국회의원 오재민 의원과 공동으로 개최한 기자 회견장에서, ‘미래 에너지 산업과 물류 산업을 위한 국제 공조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기자 회견을 개최했다.

압둘 무바라크 사장은 “도하에너지는 한국의 기업들과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큰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특히 압둘 무바라크 사장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추켜세우며 해운, 조선, 항만 분야에서의 협력을 촉구했다.

그는 “한국은 조선과 해운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라며, “조선업, 해운업, 항만업과 물류업 분야에서도 모두 성과를 내고 있는 기업은 한국이 유일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굉장히 많고 더 확대된 파트너십을 통해, 한국의 과학 기술을 통한 더 큰 역할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한국과 강력한 파트너십하에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해운, 조선 사업에 관심이 많은 한국의 정치인을 만나 큰 영감을 얻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중략)

한편, 도하에너지의 압둘 무바라크 사장은 짧은 방한 일정 동안 다양한 횡보를 펼쳐서 주목을 받고 있다.

도하에너지가 적극적인 해외 자원 개발 사업과 중동에서의 물류 사업 확대를 위해 해신해운과 전략적 협력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해신해운과 도하에너지는 지난 xx일 해신해운 본사 9층 회의실에서 공동 투자를 약속하는 내용의 전략 제휴 합의서(Strategic Alliance Agreement)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xx일 방한한 도하에너지사의 압둘 무바라크 사장과 해신해운의 박원용 대표이사 사장은 xx일 해신해운의 회의실에서 이 같은 내용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도하에너지의 압둘 무바라크 사장은 카타르의 왕세자로 책봉된 제3 왕자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어 앞으로 중동에서의 해신해운의 입지가 대폭 상승할 것으로 업계 관계자는 기대하고 있다.

해신해운의 박원용 대표는 “도하에너지사는 카타르의 국영 기업으로 왕족 및 국부 펀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세계 최대의 에너지 수출 회사로 우리나라에 액화 천연가스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기업”이라며, “글로벌 에너지 회사와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해신해운의 중동 지역에서의 물류 사업이 또다시 탄력을 받을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해신해운의 박원용 사장은 “이번 협약은 평소 중동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직원 덕분에 이루어진 성과”라고 밝혀 그 직원의 정체에 대한 업계 관계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유혜영 기자.

+

창사 기념일 사내 체육대회

-서울 근교의 어느 체육공원

토요일 아침.

해신해운 본사의 임직원들이 이른 아침부터 서울 근교의 체육공원으로 모여들었다.

약 천여 명에 가까운 임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자 학창 시절 운동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암!”

일찍 도착해서 행사 준비를 돕고 있던 정재훈 사원이 크게 하품을 하다가 다가오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장보고 과장님! 여깁니다!”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정재훈 사원 근처로 다가섰다.

“과장님, 일찍 오셨네요.”

“어쩌다 보니 일찍 도착했네. 뭐 도와줄 일 있나?”

“없습니다.”

각 팀에서 1명씩 차출됐다. 아침 일찍 도착해 총무팀이 준비하는 행사를 도와준 것인데 이런 일은 언제나 그렇듯 각 팀의 막내들이 불려 다녔다.

법무팀에서는 당연히 정재훈 사원이 불려 나왔다.

정재훈 사원이 나의 근처로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주말에 아침부터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왜? 운동 싫어하나?”

“아니요! 운동은 좋아하죠. 창사 기념일도 좋고, 체육대회도 좋은데 왜 주말 아침에 이런 행사를 하냐 이 말이죠.”

“음, 그건 그러네.”

“요즘 회사에서 이런 행사를 주말에 하면 직원들이 다들 싫어하는데 말이죠. 이런 거 보면 해신해운도 참 고루한 면이 있다니까요.”

맞는 말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과거 한국의 성실했던 직장인들은 주말이랄 것도 없이 회사를 위해 희생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꼰대스러운 임원들은 일하려고 부르는 것도 아니고 같이 놀려고 모인 건데 유난 떤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주말에 이런 행사를 핑계로 직원들을 동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정재훈 사원의 얼굴에 썩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불손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내가 사장이면 주말에 이런 행사 하자는 품의가 올라오면 절대 결재를 안 해줄 텐데 말이죠.”

“흐흐흐. 그런 생각을 하니까 사장이 안 되는 게 아닐까?”

“아! 젠장! 그게 문제네요. 흐흐흐.”

정재훈 사원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과장님이 나중에 사장님이 되면 이런 행사는 좀 막아주세요.”

“음? 사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글쎄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봤거든요. 나는 무리지만 장보고 과장님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을 말이죠.”

“나도 할 수 있으면 본인도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야지. 정재훈이가 이렇게 자신감 없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실제로 그랬다. 정재훈 사원은 어린 나이지만 강단이 있달까 아니면 눈치를 안 보는 타입이랄까. 신입 사원답지 않은 자신만만한 캐릭터였기 때문.

‘신입 사원이 벌써 승진을 포기했기 때문에 이런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나?’

어쩌면 그의 자신감의 근원은 언제든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 퇴사하기에 제일 좋은 시점이 신입 사원일 때다. 신입 사원일 때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다시 신입 사원으로 지원하는 사람도 많았다.

몇 년 더 회사를 다니게 되면 기회비용이 커져서 회사를 퇴사하는 것을 주저하기도 하고, 경력이 애매해 아직 경력직 이직도 쉽지 않은 시점이 오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신입 사원일 때 취업 반수를 노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재훈 사원은 전생에 인연이 없는 사람. 전생에 법무팀과 함께 일할 때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다.

전생에는 몇 년 근무하지 않고 회사를 그만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재훈 사원의 말대로 원래 컨테이너사업부로 갈 사람이 나 때문에 법무팀으로 오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정재훈 사원이 말을 이어갔다.

“하하하.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

“네, 그리고 사실 법무팀 출신이 임원까지 승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음···.”

“그래도 장보고 과장님 같은 실적을 보이는 분이라면 앞으로 그런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하하.”

나는 정재훈 사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 나를 좋게 봐주는 건 고마운데. 나도 딱히 승진에는 관심이 없어서 말이지.”

“네? 승진에 관심이 없다고요?”

나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 정재훈 사원의 얼굴에 궁금증이 드리워졌다.

회사원들이 원하는 가장 큰 성취는 별게 없다. 바로 승진과 연봉 상승이다. 그런데 내가 관심이 없다고 하니 의외인 대답일 수밖에.

정재훈 사원이 물었다.

“과장님,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라는 뜻.

“과장님 부자죠?”

“무슨 소리야?”

“승진도 관심 없다고 하시고, 회사 생활도 항상 당당하시고···. 자금력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이 보인다고 할까요? 혹시 취미로 회사를 다니시는 건가요?”

“허허허.”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웃어 보였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티가 났나?’

아니면 정재훈 사원이 예리한 걸까?

정재훈 사원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나는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취미로 회사를 다닌다···.’

지난 몇 년간 자갈치 쩐주 최 부자와 두바이 국부 펀드에 취직한 동생을 이용해 각종 투자로 돈을 어마무시하게 끌어모았다.

먹고살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취미로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돈을 끌어모으는 이유도 따로 있었다. 앞으로의 전쟁을 대비한 일종의 군자금이었다.

* * *

-서울 근교 체육공원 대운동장.

잠시 후.

해신해운 창사 기념일 행사로 진행되는 체육대회가 한창 펼쳐지고 있는 중.

연단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총무팀 직원이 마이크를 들고 크게 소리쳤다.

“자. 이제 축구 시합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축구 시합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는 분들은 운동장으로 모여주세요.”

여기저기 빠르게 뛰어다니고 있던 행사 진행 요원 정재훈 사원이 법무팀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자, 축구 시합 한답니다. 우리 팀에서는 장보고 과장님입니다.”

“오! 장보고 과장? 볼 좀 차나?”

현재형 팀장이 물었다.

“나도 군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공 좀 찼는데 말이지. 이제는 나이 들어서 체력이 안 돼.”

“······.”

우리나라 남자들 중에 소싯적에 볼을 안 차본 사람은 없을지도 몰랐다. 너도나도 자기가 왕년에 한가락 했다고 말했지만 나서는 이는 없었다.

“끙.”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앞으로 걸어갔다.

운동장 쪽으로 나가기 위해 사람들이 앉아 있는 스탠드를 쭉 가로질렀다.

“아···!”

“저, 저 사람 누구야?”

“어머 진짜 잘생겼어.”

“우리 회사에 저런 훈남이 있었나?”

“왜 그 사람이잖아! 그 유명한!”

여직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탄성 비슷한 소리가 계속 터져 나왔다.

‘좋아 아주 좋아.’

이런 칭찬을 듣는 것은 질리지가 않았다.

여직원들의 강렬한 눈빛을 등 뒤로 나는 운동장에 들어섰다.

우리 팀은 경영기획본부와 컨테이너사업부의 연합팀.

상대는 벌크사업본부와 재무그룹의 연합팀이었다.

‘분위기가 묘하네?’

그냥 공놀이인데. 그깟 공놀이를 앞두고 양 팀 선수들 사이에 이상한 결의가 느껴졌다.

해신해운 오너가의 장남인 권동호 부사장이 맡고 있는 컨테이너사업본부와 차남 권동민 전무가 맡고 있는 재무그룹 사이의 경기였기 때문이다.

컨테이너사업본부 소속으로 우리 팀 사람들 중 가장 연장자인 부장이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사내에서도 축구광으로 유명한 인물. 해신해운의 축구 동아리 회장이기도 했다.

“자, 이번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됩니다. 다른 팀은 몰라도 재무그룹한테는 절대 지면 안 됩니다.”

그는 컨테이너사업본부 담당 임원인 권동호 부사장의 눈에 들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재무그룹에게 지지 말라는 지시라도 받은 것일까? 마치 전쟁을 앞둔 장수와 같은 결연한 자세였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내가 중앙 미드필더로 뛰면서 경기를 조율하겠습니다.”

“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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