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 30분에 딱 맞춰 출근했다. 마치 30분 이상의 서비스 노동은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당연히 이런 신입 사원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
보험파트장 원은재 부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근처로 다가왔다. 정재훈 사원을 슬쩍 바라보니 말했다.
“요즘은 나 때랑은 참 틀리군.”
원은재 부장은 자신의 신입 사원 시절을 소환하려고 했지만 정재훈 사원은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렇지 않나 장보고 과장?”
“네?”
“내가 듣기로는 승선 생활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는데 말이야.”
“······?”
“삼등 항해사들도 당직 시간보다 30분씩 정도는 일찍 올라오지 않나?”
허허허.
이 사람이 참 웃기네. 원은재 부장은 내가 처음 법무팀에 온 날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더니 오늘은 정재훈 사원을 타깃으로 삼은 모양이다.
물론 나는 그의 꼰대 짓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잖아요.”
나는 원은재 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삼등 항해사가 아니잖아요. 신입 사원이지.”
“······.”
원은재 부장의 표정이 한층 더 어그러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삼등 항해사는 당직 근무 전에 인수인계라도 해야 되니까 일찍 오는 거니까요. 뭐, 신입 사원들은 인수인계를 해야 되는 것도 아니니까 출근 시간에 맞춰서 오면 되지 않을까요?”
“······.”
원은재 부장은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끼리끼리 놀고 있네 그런 소리였다.
‘흐흐흐.’
아침부터 기대하지 않은 소득이 있었다. 오늘은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갑자기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눈을 옆으로 돌렸다. 정재훈 과장이 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감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장님······.”
“으음?”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
“네, 저를 장보고 라인 1호로 임명해주십시오.”
“장보고 라인?”
“네, 회사 생활을 잘하려면 라인을 잘 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흐흐흐.”
‘허허허. 운이 좋은 놈이군.’
장난으로 한 말일 테지만 가장 좋은 줄에 섰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재훈 사원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잠시 후.
“과장님.”
정재훈 사원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는 방금 전까지 현재형 법무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 왜? 무슨 일이야?”
“잠시 뒤에 한다고 했던 탱커팀 회의 말인데요.”
‘“그래.”
“회의 장소가 방금 변경되었다고 연락이 왔네요? 방금 권도성 차장님이 연락했습니다. 팀장님께도 방금 말씀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회의실이 어디로 변경됐는데?”
“9층이라는데요?”
“9층 VIP 회의실?”
“네, 거기요.”
“······?”
본사 9층에는 해신해운의 경영진인 권용호 회장의 집무실과 박원용 사장의 집무실이 있다. 그리고 VIP들을 위한 식당 및 회의실이 있었고, 경영진들의 비서들이 있는 비서실이 한쪽 구석에 위치하고 있다.
본사의 직원이라고 해도 임원이 아닌 일반 직원들은 좀처럼 방문할 일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탱커팀에서 주관하는 오늘 미팅은 도하에너지의 실무진들이 방문하는 것이었다. 벌크사업본부가 있는 6층의 회의실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던 것이 변경된 것.
‘음, 9층이라······?’
그 말은 단순히 실무진만 방문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때 현재형 팀장이 다가왔다.
“장보고 과장.”
“네, 팀장님.”
“준비됐으면 가지.”
현재형 법무팀장은 벌써 정장 재킷을 챙겨 입고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해신해운 본사 9층 VIP 회의실
잠시 후.
9층으로 내려서자 비서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직 도하에너지 분들은 도착하기 전입니다. 곧 올라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똑똑. 회의실 문을 두들긴 후 문을 열었다.
회의실 안에는 미리 도착한 탱커팀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 회의를 주관하는 권도성 차장이 바쁘게 회의를 준비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현재형 팀장과 나는 한쪽 구석에 마련된 자리를 찾아 앉았다.
털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오십니다.”
해신해운의 사장 박원용 사장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벌크사업본부장인 백호영 상무의 모습도 보였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박원용 사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자 놀란 표정.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박원용 사장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자, 다들 앉으시죠. 급하게 연락을 받고 나도 오후 일정을 취소했습니다.”
박원용 사장이 자리에 앉자 다들 의자에 착석했다.
“아직인가?”
“사장님, 밑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비서실장이 문 앞에서 대답했다.
잠시 후.
똑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도하에너지 직원들이 문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중동의 전통 복장을 착용한 남자들이 우르르 회의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두바이를 포함한 중동에서 자주 보던 복장이다. 하지만 중동 사막 지역의 전통 의상을 서울 한복판에서 보다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어?”
이런저런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어어!”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살짝 벌린 입 밖으로 감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게 누구야!’
도하에너지 일행 중에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씨익 크게 미소를 짓는 환한 표정.
오늘 이렇게 만날 것이라고는 예상을 하지 못한 아주 반가운 얼굴이었다.
도하에너지 (2)
-해신해운 본사 9층 VIP 회의실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짓는 사내.
그는 몇 년 전 두바이항에서 비너스호에 밀항했던 바로 그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였다.
압둘 무바라크.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경제 전문가. 카타르 제3 왕자의 최측근으로 경제 관련 정책보좌역이었다가 몇 년 전 제1 왕자의 견제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사람.
그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카타르 제3 왕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고 뉴스를 봐서 혹시나 했더니!’
카타르 제3 왕자의 최측근이었던 압둘 무바라크는 진작에 카타르로 금의환향했던 모양이다.
도하에너지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들어섰다.
권도성 차장이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짓더니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해신해운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회의 진행을 맡은 해신해운의 권도성 차장이라고 합니다.”
짝짝짝!
“오늘 도하에너지의 압둘 무바라크 사장님이 특별히 다른 스케줄을 취소하시고 우리 회사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권도성 차장의 말에 압둘 무바라크가 목례를 했다.
‘뭐? 사장이라고?’
허, 저 아저씨 진짜 출세했네.
‘아니, 원래도 잘나가긴 했으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거라고 해야 되나?’
그래도 불과 몇 년 전에 밀항자 신분이었는데.
‘흐흐흐.’
나는 비너스호에서 갑판 청소를 하며 본국으로 소환될까 봐 전전긍긍하던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의 모습이 떠올라 잠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눈치 없이 실소를 흘리자 옆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현재형 팀장이 팔꿈치로 내 갈비뼈를 찌르며 눈치를 줬다.
그래도 나는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영국으로 정치적 망명까지 가야 했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에너지 수출 기업 중 하나인 도하에너지(Doha Energy)의 사장이 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덕분에 말이다.
‘뭐지 이 뿌듯한 기분은?’
전생에는 무고하게 생명을 잃었던 사람이다.
전생에 밀항했던 BK해운의 선박에서 정체가 탄로 난 압둘 무바라크는 외교 문제를 걱정한 선박의 승무원들에 의해 본국인 카타르로 송환되었다.
그랬던 그가 현생에는 도하에너지의 사장이 되었다. 왕세자로 책봉된 제3 왕자의 최측근이니 앞으로의 그의 앞길도 창창할 것이 분명했다.
간단하게 참석한 사람들의 소개가 끝나고, 압둘 무바라크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압둘 무바라크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매우 기쁩니다.”
압둘 무바라크의 뜬금없는 소리.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도하에너지의 사장 자격에서 VIP 대접을 받으며 이 자리를 방문했지만 저는 사실 해신해운의 갑판부원 출신입니다.”
“켁!”
“······?”
“무슨 소리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장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사레들린 소리는 나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고, 이어지는 목소리는 깜짝 놀란 해신해운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였다.
어리둥절해하는 해신해운 사람들의 표정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던 압둘 무바라크가 말을 이어갔다.
“몇 년 전에 제가 숙청을 피해 밀항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올라탔던 배가 바로 해신해운의 컨테이너선이었습니다.”
“······!”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해신해운의 박원용 사장은 그제야 기억이 난 듯 이마를 소리 나게 탁 쳤다.
압둘 무바라크가 말을 이어갔다.
“그때 정체를 밝힐 수 없던 저에게 비너스호의 선원들은 갑판 청소를 시키더군요.”
“······?”
‘뭐, 뭐야? 저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소리에 나만 놀란 것이 아닌 모양.
깜짝 놀란 박원용 사장도 눈을 크게 떴다.
권도성 차장은 아예 안색이 창백해졌다. VIP 고객사의 사장에게 갑판 청소를 시켰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심지어 배의 항해사 중의 한 명은 저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두바이항으로 돌려보내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더군요.”
“······!”
‘저, 저 아저씨 저렇게 안 봤는데 뒤끝 있네?’
당시 비너스호의 일등 항해사였던 정지형이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를 모욕 주고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하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다.
‘음? 그런데 근데 그때 정지형 일등 항해사가 물에 빠지고 난리가 나지 않았던가?’
선원들이 그 낙상 사고의 원인으로 압둘 무바라크를 지목했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회의실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냉랭해졌다.
어색한 기운이 묘하게 감돌고 있었다.
해신해운 사람들은 느닷없는 소리에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고 도하에너지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런 종류의 어색한 이야기가 오고 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하하.”
그 반응을 보고 압둘 무바라크는 재밌다는 듯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배를 찾아온 불청객을 따뜻하게 맞아준 은인이 있었습니다.”
“······?”
“당시 선박에 근무하던 삼등 항해사였습니다.”
“음?”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두 나를 향했다.
“맞습니다. 바로 미스터 장입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고 저의 가장 소중한 친구입니다.”
“······!”
“오늘 이렇게 좋은 자리에서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니 참 반갑고 즐겁습니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이 아저씨 제법 기승전결이 있는 양반이었네?
제법 졸깃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압둘 무바라크가 이어서 말했다.
“해신해운 덕분에 저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평생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해신해운을 찾아와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오···!”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