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200)

나는 그의 눈빛을 뒤로하고 말을 이어갔다.

“방금 말씀드린 대로, AP사가 제안한 조건은 유가가 상승하는 경우 해신해운 입장에서는 큰 이득이지만 반대로 유가가 하락하는 경우에는 큰 손실을 볼 수 있는 리스크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반대했습니다.”

나의 말에 권동민 전무가 손을 들어 올렸다.

“장보고 과장?”

“네, 전무님.”

“지금 장보고 과장은 유가가 하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계약을 반대했다는 말을 하는 건가?”

“네, 맞습니다.”

“하하하.”

권동민 전무가 나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거야 원··· 내가 웬만하면 참고 참견하지 않으려고 했더니 말이야!”

권동민 전무가 느닷없이 불쾌한 음성을 터트렸다.

“······?”

사람들은 권동민 전무의 말에 다들 움찔했다. 물론 나는 빼고. 아무리 오너의 아들이라고 해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내가 겁을 낼 이유는 없었다.

권동민 전무는 나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제법 커져 있었다.

“장보고 과장, 육상으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됐다더니 경험이 없어서 그러는 건가?”

“······.”

“아니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지금 그런 짓을 하는 건가!”

이스다(ISDA) 계약 (3)

-해신해운 본사 10층 경영기획본부 회의실

권동민 전무.

해신해운의 재무그룹 본부장이자 해신해운의 오너인 권영호 회장의 차남이다.

그는 해신해운의 자금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해신해운의 실세 중 실세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최근 사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

해신해운의 최대 주주이자 최고 경영자인 권용호 회장의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권영호 회장은 재무에 관련해서는 박원용 사장과 권동민 전무에게 거의 전권을 일임한 상태라고 알려졌다. 회사의 돈줄을 쥐고 있는 권동민 전무의 입김이 회사 내부에서 점점 강해져 가는 추세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신해운의 오너 권영호 회장.

창사 기념일에 최우수 사원상을 수상할 당시 권영호 회장을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권영호 회장은 그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지 제법 오래되었다고 한다.

권영호 회장의 건강이 나빠진 이후 해신해운의 실무는 전문경영인인 박원용 사장이 최고 경영자로 나서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권영호 회장은 간간이 자택에서 영상 회의나 전화 등으로 회사 경영을 챙겨 오고 있다고 한다.

직원들에게도 신망 좋은 권영호 회장.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직원들이 많다는 소문이다.

걱정이 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

‘괜찮은 사람이지.’

재벌 경영인치고는 능력과 인품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전생에도 회사가 파산되는 상황까지는 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권영호 회장이 갑자기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상황이 해신해운에게는 불행이었다. 권영호 회장 사후에 경영권 분쟁에 본격적으로 휘말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기도 문제.

곧 금융 위기가 촉발하는 경기 불황으로 인해 해운업도 역대급으로 장기간 지속되는 불황을 겪게 될 예정.

그런 위기의 순간에 해신해운은 내분을 겪게 된다. 결국 회사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경영진의 자중지란으로 인해 해신해운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최대 주주인 권영호의 신임 아래 현재 해신해운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박원용 사장이다. 해운업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전문 경영인으로 직원들의 신망이 높다.

기업 오너이자 과감한 권영호 회장과 해운업 실무에 밝은 박원용 사장의 조합은 제법 시너지가 높은 조합이었다.

그동안 두 사람의 리더십 아래 해신해운도 세계 글로벌 선사 순위에서 뒤처지지 않고 경쟁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에 떠오르는 실세들이 있다. 바로 차기 권력들이다.

해신해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업부인 컨테이너사업본부의 본부장을 맡고 있는 권동호 부사장과, 재무그룹 본부장인 권동민 전무가 바로 그들이다.

곧 권영호 해신해운 회장이 머지않은 미래 새벽 지병으로 별세하고, 해신해운의 경영권을 둘러싼 자녀들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재벌 기업들의 지분 구조는 보통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해신해운도 예외는 아니다.

오너가라고 하여도 회사의 규모가 커진 이상 실제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그렇게 크지 않다. 여러 계열사를 확장하는 방법이었지만 경영권 방어에는 취약한 구조다.

해신해운 오너 일가의 지분 구조는 권영호 회장이 7.87%.그 외에 특수 관계인이 16.12%를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외 우호 지분들을 합치면 무리 없이 경영권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오너 일가가 직접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23~24%에 불과하기 때문에 경영권 방어와 관련해서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특히 최근 들려오는 소식들은 그런 우려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최근 해신해운의 경영권 문제와 관련해 외국계 자본의 움직임이 이슈가 되고 있다.

해신해운의 주주 사이에 외국계 지분이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는 추세에 있기 때문.

외국계 자금이 공격적으로 해신해운의 지분을 높여가고 있는데 그 중심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다. 여러 펀드를 통해 주식을 모으고 있지만 그 배후에는 한 인물이 있다는 소문.

하지만 그의 정체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소문에 따르면 최근 중동 쪽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해신해운의 주식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두바이와 그리스에서 선박업을 운영하는 해운업자라는 소문. 하지만 정확한 정체는 공개되지 않고 있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 정체불명의 사나이 측 세력이 최근 해신해운 지분 624만 주를 사들여 지분율을 12%까지 높이면서 일각에서는 해신해운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외국계 투자자들의 움직임을 두고 권영호 회장의 사후를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관련 업계에서 나오고 있었다.

물론 권영호 회장도 이에 대한 방비를 해둔 상황이다.

현재 권영호 회장 일가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4,000만 달러 규모의 신주 인수권부 사채(BW)를 발행해둔 상태였다.

BW는 채권을 매입한 투자자가 일정 기간 후 일정 가격에 기업이 새로 발행하는 주식을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인데, BW의 옵션을 행사할 경우 전체 발행 주식의 18%에 이르는 신주 1,291만 주를 살 수 있다.

그 경우 권 회장 오너 일가 측 지분이 40%를 넘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적대적 M&A를 여유 있게 방어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게 계획대로 잘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야······.’

나는 전생의 혼탁한 경영권 분쟁을 떠올렸다.

그리고 외국 자본에 의한 공격적 M&A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권영호 회장 사후를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그건 역시 후계자 문제.

권영호 회장이 현재 지병으로 투병 중인 상황임에도 공식적인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해신해운의 그룹사인 해신항공의 존재. 관계 그룹사인 해신항공이 현재 해신해운의 11% 남짓 되는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들의 의중도 사실 오리무중.

이론적으로는 만약 해신항공이 외국계 투자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면 양측의 지분율은 23% 이상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해신항공을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재계에서는 “해신항공의 회장은 해신그룹의 맏형이고, 해신그룹은 권씨 일가의 기업이다. 권영호 회장 사후에는 해신해운이 계열사로 있으니 지분을 추가로 취득하는 형식을 통해 해신해운의 경영권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해신해운 내부에서는 ‘설마 그럴 리가 있냐’며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 분위기.

아니 해신해운에서는 해신항공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전생에 해신해운 재무그룹 관계자는 권영호 회장 사후에 “해신항공은 적대적 경영권 인수 시도가 발생하면 해신해운을 위해서 백기사 역할을 할 수는 있는 관계사이다. 그리고 해신항공은 해신해운의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하면서, “현재로선 권영호 회장과 해신해운 자사주 지분이 높아 해신해운의 경영권 문제는 없으며, 당분간 전문 경영인에 의해 운영될 것으로 알고 있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물론 그건 그저 해신해운의 희망 사항이었지.’

권영호 회장의 친형인 해신항공의 회장은 동생인 권영호 회장의 사후 노골적으로 해신해운의 경영권 싸움에 개입했다.

그리고 당시 해신항공과 힘을 합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권동민 전무였다.

* * *

경영기획본부 회의실에서 진행 중이던 회의실에 갑자기 재무그룹 본부장 권동민 전무가 난입한 상황.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나타난 거지?’

그리고 평소 냉철한 성격으로 알려진 권동민 전무답지 않게 그의 목소리는 제법 커져 있었다.

뭔가 나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유가 뭘까?’

그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짐작되는 바는 없었다.

권동민 전무가 나를 한번 노려보더니 말했다.

“장보고 과장.”

“네, 전무님.”

“해기사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맞나?”

“네, 전무님 얼마 전까지 일항사로 근무했습니다.”

“그래, 뭐 해기사로 근무하는 동안 여러 가지 큰일을 많이 했다고는 전해 들었네. 하지만 본사 근무는 달라.”

권동민 전무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연설이 아니라 나를 타깃으로 한 잔소리.

전생에 내가 제법 오랜 기간 본사 근무를 했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권동민 전무는 나에게 이제 그만 육상으로 올라왔으니 소금기를 빼라며 쓸데없는 조언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장보고 과장, 젊은 나이에 과장직을 달았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그런 행동은 곤란하네.”

한차례 나를 노려본 권동민 전무가 말을 이어갔다.

“본사에서 내리는 정책 판단에는 항상 근거가 있어야 한다네. 객관적인 근거.”

“······.”

“해신해운 같은 큰 회사가 일개 직원의 감에 의존해서 의사 결정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

“바다에서는 운이 좋아서 그런 감이 통했는지 몰라도 이곳에서는 아니야! 알겠나?”

음,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였다.

전생의 기억이지만 나는 항상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행동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나는 전생의 기억이라는 정확한 팩트에 기반해서 행동한다.

현생에서는 발생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건 엄연히 ‘과거에 발생했던 정확한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어떠한가.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저명한 학자의 의견에 근거한 판단이라고 하여도 단순히 예측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물론, 그동안 내가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막무가내로 행동한 일은 여러 번 있었다. 나는 인정할 때는 인정하는 사람이다.

오해를 불식시켜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보통 직원들이라면 이런 실세 전무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고개를 조아리겠지만 나는 아쉽게도 그런 캐릭터는 아니었다.

나는 권동민 전무를 향해 차분하게 하지만 당당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전무님, 근거가 있습니다.”

“뭐?”

평소 그 앞에서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던 다른 직원들과는 달랐다. 오너의 아들이자 전무인 그의 면전에서 말대답을 할 간이 부은 직원은 그동안 없었다.

감히, 이런 건방진 새끼가! 권동민 전무는 그 말을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지만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전무님, 근거가 있습니다.”

“뭐?”

“국제 유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권동민 전무의 얼굴에는 노기가 서렸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헛소리를 한번 시작해 보라는 표정.

“미국 경제가 심상치 않습니다.”

“뭐? 크크크. 회장님이 예전에 칭찬한 적도 있고 해서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번 기회를 줘 보려고 했더니 이거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겠군.”

권동민 전무가 나의 말에 실소를 터트렸지만 나는 그것보다 다른 것에 집중했다.

‘회장이 권동민 전무에게 나에 대한 이야길 한 적이 있다고?’

권동민 전무가 한 말로 추측해보면 나에 대한 칭찬을 했던 것이 분명했다.

권동민 전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말을 이어갔다.

“자네는 지금 세계 경제를 이끌어 가는 게 아직도 미국 같은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네. 지금 세계 경제를 뒷받침하는 것은 중국 시장이야.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는 이상 유가는 당분간 문제없어.”

“······.”

“물론 나도 근거가 있어야겠지. 해신해운 같은 큰 회사의 재무 담당자들은 전 세계의 은행들을 상대한다네.”

“······.”

‘은행?’

은행 놈들은 제일 못 믿을 놈들인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더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아마 자네도 들어봤을 것이네. 미국의 IB라고 불리는 투자 은행들 말이야.”

“······?”

“그런 은행들이 VIP들에게 제공하는 정보들이 있네. 업계의 전문가들이 작성하는 전문적인 자료들이지. 자네의 어설픈 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보들 말이야!”

“······!”

‘이 모자란 놈이 진짜!’

전생에는 그래도 이 사람이 제법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살펴보니 그저 미국 투자 은행이나 다른 외부 기관의 의견을 듣고 귀를 팔랑거리는 모자란 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나저나 IB(투자 은행)라고?’

그놈들이 제일 위험한 놈들이다. 곧 망할 놈들이 그놈이니까 말이다.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투자 은행의 열렬한 추종자 권동민 전무를 바라보며 비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무님, 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1)

-해신해운 본사 10층 경영기획본부 회의실

권동민 전무에게 질문을 했을 뿐인데 회의실 사람들에게서 제법 재밌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켁켁!”

“······!”

“헙······!”

임원에게 대단히 실례되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고작 질문을 하나 했을 뿐인데.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얼굴이 질려갔다.

권동민 전무가 화를 냈다거나 특별히 불쾌한 표정을 지은 것도 아닌데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벌써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도형준 전무와 나 정도?

현재형 법무팀장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권세아 대리 역시 마찬가지.

‘그래 이런 식이었지.’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자유로운 토론, 수평적인 회사 문화를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전 세계에 지점을 두고 있고, 국내 직원보다 해외 직원이 많은 해신해운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수적인 다른 대기업에 비해서는 좋은 기업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해신해운의 경영진은 스스로 자부하는 편이었지만 우리나라 기업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구매팀장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어허! 장보고 과장 이게 무슨 버릇없는 짓인가!”

임원을 향해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을 하다니! 그것도 오너가의 일원인 권동민 전무에게. 저놈은 미친것이 분명하다. 나를 바라보는 구매팀장의 얼굴을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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