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모양인 듯 회의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음?’
한쪽 구석에는 권세아 대리도 자리하고 있었다. 권세아 대리는 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며칠 전 권세아 대리와의 주량 대결에서 무참히 패배한 이후 그녀를 슬쩍 피하고 있었다.
철컥! 회의실 문이 열렸다.
회의에 참석할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경영기획본부장 도형준 전무도 회의실로 들어섰다.
도형준 전무는 회의실 중앙으로 이동하면서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도형준 전무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의 인연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전생에서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던 인물.
하지만 삼등 항해사 시절 쓰나미 사건 당시 도형준 전무가 동남아시아 지역 본부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생에는 없던 인연이 이어졌다.
도형준 전무의 인생도 바뀐 것이 많았다.
전생에 그는 경영기획본부장까지 승진을 하지 못했다. 핵심 인재로 평가받던 그였지만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쓰나미 사건 당시 나를 만났기 때문일까? 그의 인생도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그는 동남아 지역 본부장을 마치고 본사 경영기획팀으로 발령을 받은 이후로도 전생과 달리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권영호 회장의 신임을 얻어 경영기획본부장이라는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다.
소문에는 경영권을 놓고 다투는 권영호 회장의 장남과 차남이 그를 자기 측근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그는 권영호 회장의 측근으로 중립적인 입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중립이라는 말은 경영권 분쟁 중에는 몸값이 계속 올라가지만 장남과 차남 중 한 명이 우위를 차지하기라도 하면 어떤 처지에 처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도형준 전무가 자리에 착석하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영기획팀장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회의를 주재하기 시작했다.
“자, 다들 바쁘실 텐데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급하게 회의를 소집했는데 모두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영기획팀장은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후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유가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런 상승세라면 앞으로 경영 계획을 세우는 데도 상당한 부담이 예상되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AP사 덕분에 저렴하게 연료유를 공급받고 있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질문을 하자 경영기획팀장이 고개를 돌려 구매팀장을 바라보았다. 구매팀장이 대신 대답했다.
“AP사와 체결된 MOU의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 그럼 새로 계약을 체결해야 되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구매팀장의 대답을 듣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근심하는 기색들.
“새로 계약이 체결되면 공급받는 선박유의 톤당 가격이 많이 상승하는 건가요?”
구매팀장이 질문에 대답했다.
“최대한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 중입니다. 다행히 AP사에서 자신들의 최대 VIP 고객인 해운 회사와 동일한 가격으로 선박유를 공급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오, 그건 다행이군요.”
“네, 하지만 문제가 있어 아직 계약을 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음?”
구매팀장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법무팀에서 AP사의 제안을 바로 승낙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했다.
이스다(ISDA) 계약 (2)
-해신해운 본사 10층 경영기획본부 회의실
회의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 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다양한 마음을 담고 있었다.
호기심, 어떤 사람은 기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걱정스러운 표정.
항해사 출신이 법무팀에서 근무한다는 것 자체를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새파랗게 젊은 놈이 너무 설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듯했다.
항해사 출신으로 본사 법무팀에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본사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잘생긴 외모(?) 덕분인지 아니면 그동안 쌓은 업적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회사의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유난히 불량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구매팀장이다.
‘그나저나 저 사람 말을 좀 이상하게 하네?’
나는 슬쩍 구매팀장을 노려보았다.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리는 법.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AP사의 구매 계약은 내가 반대해서 계약 체결이 안 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아직 ‘협상’ 중.
아무래도 구매팀장은 AP사와의 협상 과정에서 주도권을 나에게 빼앗긴 것에 대해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도 어딘지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모를 수가 없었다.
뭐, 그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선박유와 관련된 문제가 이렇게 전사적으로 이슈가 되는 일은 매우 드문 경우다.
원래라면 이 이슈를 선점해야 하는 부서는 구매팀. 선박유 구매와 관련된 업무를 주관하는 부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슈가 된 사안을 잘 처리하면 경영진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나에게 뺏긴 것이다.
‘원래 저런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전생과 달리 도형준 전무는 현생에 나를 만나 새로운 기회를 얻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구매팀장은 전생과 다르게 본인의 역량에 걸맞지 않는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나민 아세르와 맺은 MOU 덕분에 그는 그의 역량에 어울리지 않은 실적을 그동안 쌓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구매팀장은 본인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시작했다.
전생과 다르게 만년 부장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구매팀장의 입장에서는 최근 선박유와 관련된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사람이 눈엣가시였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 눈엣가시는 바로 나다.
나는 선박유와 관련된 이슈들에 사사건건 관여하면서 훼방(?)을 놓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 피해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모여 있었다.
‘일단, 구매팀장 문제는 나중에 기회를 봐서 따로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우선 급한 일은 따로 있으니.’
이 사람이 이렇게 욕심이 많고 옹졸한 성격인지 몰랐다. 하지만 일단 급한 것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회의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기대감이 서려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이놈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것인가? 뭐 그런 느낌?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연료유 팀장을 한번 노려보았다.
“흐흠!”
그는 그래도 나의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억지로 헛기침을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머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우선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법무팀의 장보고 과장입니다.”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몇몇 사람들은 나의 묵례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음, 구매팀장님이 워낙 간단하게 설명을 하셔서 제가 부연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우선 AP사의 제안을 우리가 확정적으로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음? 확정적으로 거절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거절한 것은 사실이라는 뜻입니까?”
“네, 맞습니다. AP사가 처음 제안한 오퍼(청약)는 거절했습니다.”
“······?”
사람들은 나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설명을 빠르게 시작했다.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카운터 오퍼를 한 상태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카운터 오퍼라··· 이유가 뭡니까?”
“AP사에서 VIP 고객사의 시세로 단가를 맞춰주는 대신 VIP 고객사와 달리 우리에게는 최소 구매량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음? 최소 구매량?”
“네, 맞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언뜻 생각하면 최소 구매량이 있는 것은 불리한 조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회의실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질문을 이어갔다.
“장보고 과장, 어차피 VIP 고객사에 제공하는 가격으로 맞춰준다는 뜻이니 계약 단가는 시세보다는 훨씬 저렴하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건 맞습니다.”
“그럼 최소 구매량이 있다고 해도 이득이 아닙니까? 당연히 그 최소 구매량보다 많이 구매해야 할 테니까요.”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유가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계약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
“유가는 항상 변동하는 점입니다.”
“당연한 소리를···?”
“최소 구매량을 AP사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정하게 되면 유가가 하락하는 경우에는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최소 구매량을 계약 기간 동안 매년 구매해야 합니다. 큰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음, 계약 기간이 장기간입니까?”
“네, 맞습니다. 일반적인 선박유 공급 계약은 계약 기간을 보통 1년 정도로 설정하고 매년 계약을 갱신하거나 다시 체결하는 방법을 취하지만 AP사와의 계약은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합니다. 장기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논의 중입니다. AP사도 그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음··· 그렇군요.”
“AP사와의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생각하면 장기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뭐, 최소 구매량이 있다고 하여도 유가가 상승세에 있으니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가가 상승세에 있다는 전망이 대세였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유가는 계속해서 상승할 예정이니 우리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였다.
똑똑! 회의실 문을 누군가 두들겼다. 그리고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음 저 사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뜻밖의 사람이 등장하자 당황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대부분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유난히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가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권세아 대리였다.
갑자기 등장한 사람이 바로 그의 이복형제이자 권영호 회장의 차남인 권동민 전무였기 때문이다.
재무그룹 본부장 권동민 전무.
그는 해신해운 그룹의 회장이자 오너인 권영호 회장의 둘째 아들이다.
학창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고 대학도 미국에서 졸업한 그는 공부에도 제법 소질이 있었는지 미국 회계사 자격증을 딴 후 외국 투자 은행에서도 잠시 근무를 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해신해운으로 입사해 재무그룹에서 계속 근무를 했고, 현재는 재무그룹 본부장이라는 보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권동민 전무는 회의실로 들어서며 상석에 있는 도형준 전무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묵례를 했다.
회의실 중앙 상석인 도형준 전무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영기획팀장이 권동민 전무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권동민 전무는 자리에 앉으며 도형준 전무에게 말을 건넸다.
“도형준 전무님,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오시는 줄 모르고 기다리지 않고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하하하. 구매팀장과 자금팀장을 불렀더니 회의에 갔다고 하더군요. 선박유 관련된 회의라고 하길래 관심이 있어 직접 올라왔습니다.”
“네, 잘하셨습니다. 좋은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제가 아는 게 있어야 의견을 드리지요. 하하하.”
권동민 전무가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권세아 대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권동민 전무가 등장하자 당황한 듯 고개를 탁자 위로 떨어뜨린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와 달리 권동민 전무는 권세아 대리를 향해 시선도 주지 않았다.
‘쯧쯧, 장남하고 경영권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는 권세아 대리를 집안에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더니 사실인가 보네.’
나는 이 자리에서 권동민 전무가 보여주는 태도를 보고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상하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전생에도 이미 들은 소문이다. 예전부터 알고 있던 내용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열 받는 건 왜일까?’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권동민 전무가 보여주는 태도는 나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새끼가 생긴 것도 얍삽하게 생겼네?’
전생에는 똑똑하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의 외모마저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권동민 전무는 회사의 실세 중의 실세. 그가 나 같은 일개 과장의 마음에 들 필요는 전혀 없었다.
물론 그것도 아직까지는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머릿속으로 이렇게 불손한(?)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권동민 전무는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 늦게 온 주제에 회의를 끊어서 죄송합니다. 다시 회의를 재개합시다.”
도형준 전무와 권동민 전무는 같은 직급이지만 아무래도 오너인 권영호 회장의 아들인 권동민 전무가 회의석상에서 발언권을 더 크게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권력의 속성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말하지 않아도 이 자리를 주재하는 사람이 도형준 전무에서 권동민 전무로 변경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영기획팀장이 권동민 전무의 말을 듣고 말했다.
“장보고 과장님, 하던 내용을 이어가시죠?”
“네, 팀장님.”
나는 권동민 전무를 향해 가볍게 묵례를 했다.
“오, 그 장보고 과장?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네, 전무님 법무팀의 장보고 과장입니다.”
“그래, 대단한 인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활약이 대단하다지요?”
음, 분명히 칭찬인데 이상하게 칭찬으로 들리지가 않네? 문제가 뭐지?
권동민 전무를 바라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눈빛!’
권동민 전무의 뱀같이 얍삽한 눈빛이 나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