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200)

이스다(ISDA) 계약은 장외 파생상품 계약에 이용된다.

그 명칭 그대로 거래소를 통하지 않고 계약의 당사자들이 일대일로 장외에서 파생상품에 관한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사용하는 계약 양식이라는 뜻.

그런데 파생상품의 기초가 되는 자산은 통화, 금리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원자재와 관련된 파생상품도 있다.

해신해운과 같은 국제 운송을 하는 회사는 대부분의 매출이 외화로 발생하고, 비용 중 선박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유가와 환율에 따른 리스크가 존재한다.

이 리스크를 헤지하기 위해 체결하는 거래가 바로 장외 파생상품 계약이다.

환차손이 발생하거나 유가가 급등해 비용이 늘어나는 경우를 대비해 반대 거래를 실시해 리스크를 헤지하고 대비하게 되는데 이는 해신해운과 같은 해운 회사도 마찬가지.

리스크를 대비하기 위해 환차손 위험을 헤지(Hedge)하는 거래나, 선박유 가격 등락에 따른 위험을 헤지하기 위한 장외 파생상품 거래를 체결하게 된다.

‘그래서 팀장님이 나에게 이 계약서의 검토를 맡기신 거구나!’

최근 해신해운의 최고 이슈는 선박유 문제였다.

선박유 구매 계약 체결과 관련해서 구매팀과 경영기획팀 거기에 법무팀과 터미널팀까지 여러 팀이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구매팀이 주관한 AP사와의 선박유 구매 계약 협상 이후 경영기획팀에서는 장기적인 선박유 관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예상대로이긴 한데···.’

전생과 비교하면 시기는 좀 더 빨라졌다.

전생에 이 계약서는 좀 더 시간이 지난 이후 체결된다.

전생에도 금융권 출신으로 회사의 리스크매니지먼트 담당을 위해 스카웃한 인재인 진채호 부장의 주도로 체결되었다.

“음···.”

나는 마우스 스크롤을 빠르게 내리며 계약의 내용을 살폈다.

‘그다지 변한 건 없어 보이네.’

첨부된 이스다(ISDA) 계약서의 내용은 전생에 체결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뭐, 당연하지···.’

진채호 부장이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현시점에 유가가 하락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겠지.

대부분의 경제 기관과 경제지, 전문가들의 예상도 다르지 않았다.

진채호 부장이 아무리 실력 있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유수의 경제 기관이 발표하는 내용과 다른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이 아닌 이상 지금 시점에 누가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 이후 세계 경제가 급격하게 위축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미국에서 발생하는 모기지론 부실 사태로 인해 세계 최대 투자 은행이 파산할 것이라는 것도.

금융 위기 이후 위축된 세계 경제로 인해 유가가 급격하게 하락한다.

선박유가 하락하자 해신해운의 비용도 줄어든다. 호재였다.

문제는 장외 파생상품에서 큰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고유가에 배팅하던 해신해운은 리스크 관리를 위해 투자 은행들과 체결했던 장외 파생상품 계약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는다.

하지만 절감된 선박유 구입 비용을 고려하면 큰 소실도 아니었다.

하지만 단일 거래로 인해 큰 손실이 발생하자 그 일에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했다.

당연히 그 책임은 진채호 부장의 몫이었다.

리스크매니지먼트 파트장이라는 보직에 있기도 했지만, 경력직으로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비호해 주려고 하는 고위 임원도 없었다.

결국 진채호 부장은 장외 파생상품 계약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회사를 퇴사했다.

전생에는 큰 인연은 없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경력직으로 함께 입사한 사이.

함께 입사한 사람 중 가장 연장자로 입사 동기회장을 자처했기 때문에 진채호 부장이 없는 동기 모임은 상상할 수 없었다.

“흐흐흐. 제가 한 번 살려 드리는 겁니다.”

해신해운은 대기업으로 전 세계에서 수많은 계약서가 매일 체결된다.

약관이나 표준 계약서를 활용하는 경우나 해운 회사들이 자주 체결하는 운송 계약 등은 특별히 본사 담당자 혹은 법무팀의 검토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각 영업팀의 재량으로 계약서를 검토한 후 체결한다.

하지만 법무팀의 검토를 거친 후 체결되는 계약도 있다.

담당자가 익숙하지 않은 계약이거나, 처음 체결하는 유형의 계약 또는 계약 금액이 큰 계약 또는 손실이 크게 발생할 수 있는 계약의 경우 본사 담당팀을 거쳐 본사 법무팀에 검토를 요청한다.

법무팀은 업무 협조 요청을 받으면 경중에 따라 자체 인력을 통해 검토를 하거나 외부 로펌(법무법인)에 검토를 맡긴다.

용선 계약같이 법무팀의 처리 경험이 많은 계약서는 주로 법무팀 내부적으로 처리하게 되고, 선박 금융 계약이나 대규모 투자 계약과 같은 대형 계약은 외부 법무법인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고문 계약이 체결된 법무법인의 도움을 받아서 일을 처리한다.

이스다(ISDA) 계약의 경우에는 금융 계약으로 해신해운과 같은 해운 회사 직원들이 익숙한 계약이 아니다.

특히 파생상품과 같은 전문적이고 어려운 내용을 정하고 있는 계약이기 때문에 외부 법무법인(로펌)의 도움을 받는 것이 타당한 계약의 유형이다.

‘뭐, 아무리 회삿돈이라도 쓸데없는 일에 돈 쓸 필요는 없지.’

하지만 나는 외부 로펌에 일을 맡길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이 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도록 막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계약서에 대한 의견을 짧고 강렬하게 남긴 후 업무 협조 요청서를 반려했다.

< 띠링! >

- 법무팀 : 절대 불가 -

- 작성자 : 장보고 과장

이스다(ISDA) 계약 (1)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며칠 뒤.

현재형 법무팀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휴······.”

현재형 팀장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다.

“장보고 과장!”

“네, 팀장님.”

“잠깐 와보게.”

“네.”

현재형 팀장은 내가 다가서자 그의 책상 옆에 놓여 있는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장보고 과장, 잠깐 앉게. 이야기 좀 하지.”

“네, 팀장님.”

각 팀의 팀장들 자리 옆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들이 있어 간단한 회의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이거 한번 보게.”

현재형 팀장은 자리에서 출력한 프린트물을 나에게 내밀었다.

“회의 요청?”

+

수신 제위,

최근 전사적으로 논의되고 선박유와 관련된 여러 이슈들을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관 팀 회의를 소집하오니 본 메일의 수신 팀 팀장님들께서는 아래 일시에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중략) ···

참고 :

- 참석 임원 : 경영기획본부장님 예정

경영기획팀장

+

경영기획팀에서 소집하는 회의라···.

‘제법 판이 커졌구나.’

메일의 ‘수신인란’에는 제법 많은 팀들이 있었다. 수신인란에 기재되어 있는 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재무그룹에서는 자금팀과 구매팀, 터미널사업본부의 터미널개발팀과 터미널운영팀, 경영기획본부의 법무팀과 경영기획팀까지 다양한 팀들이 수신인에 기재되어 있었다.

‘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이렇게 된 건가.’

작은 공이 구르고 굴러 제법 크게 뭉쳤다.

AP사의 선박유 구매 협상에서 시작된 작은 이슈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부산신항 유류 중계기지 개발, 그리고 ISDA 계약 문제까지 최근 여러 팀들이 관여되기 시작하면서 전사적인 이슈가 되었다.

많은 팀이 관여되어 있다 보니 이해관계가 복잡해지고 의견 통일이 힘들어졌다.

결국 경영기획본부장인 도형준 전무가 움직인 것이다.

그가 경영기획팀장을 시켜 유관 팀장들을 한 번에 불러 모은 회의를 소집한 것이 분명했다.

‘역시 도형준 전무님이군.’

예리한 사람답게 중요한 순간임을 인식한 것이다.

상념에 빠져 있는 나를 깨운 것은 현재형 팀장의 목소리였다.

현재형 팀장이 말했다.

“장보고 과장 이 회의에 자네도 참석하게.”

“네, 팀장님.”

“그런데, 회의에 앞서 의견을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네?”

“이스다(장외 파생상품) 계약서 검토 건 말이야.”

현재형 법무팀장이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말을 이어갔다.

“법무팀 의견으로 절대 체결 불가라는 코멘트를 남겼잖아.”

“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말이야.”

현재형 법무팀장의 궁금증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현업팀에서 주관하는 계약서에 법무팀이 절대 불가라는 의견을 남기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계약 체결 여부는 전적으로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현업 팀의 영업적 판단 업무이고 최종적인 판단은 최고 경영진의 경영상의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는 형식적으로 지켜야 되는 절차가 있다.

사내 절차서상 법무팀 검토를 거치도록 규정되어 있는 계약서에 법무팀이 절대 불가라는 코멘트를 남긴다면?

담당자 입장에서는 법무팀 의견을 무시하고 경영진에 품의를 올리기 쉽지 않다.

아니, 어려운 게 아니라 그런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리스크가 심한 계약을 체결하는 사람들 중에는 법무팀 검토가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면 법무팀의 검토를 피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형 팀장이 말을 이어갔다.

“법무팀이 주관하는 업무가 아니라면 계약 체결 여부 자체를 법무팀이 결정하는 경우는 없다네.”

“네···.”

“해당 사업에 대해서는 현업 팀이 가장 잘 알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떤 사업을 추진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은 돈 문제이지 법률 문제는 아니라네. 왜 그런지 아는가?”

“네, 법률 리스크는 피해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 돈이 안 되는 사업은 접는 것이 맞겠지만 돈이 될 것이 분명한데 리스크가 있는 계약은 리스크를 제거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지.”

현재형 법무팀장의 말은 맞는 말이다.

게다가 법률 리스크(Legal Risk)는 다양한 리스크 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은가.

계약 체결 과정에서 발생하는 리스크의 종류는 다양하다.

거래 상대방의 경영 상태 악화, 신용도 하락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신용 리스크, 그리고 금리, 환율, 주가 등의 변동으로 발생하는 시장 리스크, 회사의 자금 부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재무적인 리스크 등등.

그리고 그중에서 법무팀이 관여할 수 있는 리스크는 매우 좁고 한정적이다. 법률 리스크는 회사 입장에서는 중요하기도 하지만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리스크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사내 변호사나 사내 법무팀이 제시하는 검토 의견은 모호한 경우가 많다.

최종적인 판단은 영업팀의 영업적 판단과 경영진의 경영상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계약의 리스크와 그 결과를 알고 있는 이상 이 계약은 막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대답했다.

“경영기획팀에서 보낸 이스다(ISDA) 계약은 리스크가 큽니다.”

“그래? 어떤 리스크를 말하는 건가?”

“국제 유가가 일정 가격 이하로 떨어지면 해신해운이 막대한 손해를 보는 구조의 계약입니다.”

“유가가 상승하면?”

“유가가 상승하는 경우에는 반대로 해신해운이 이득을 보는 구조이긴 합니다.”

“으음? 그럼 자네는 유가가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건가?”

“네, 맞습니다.”

현재형 팀장은 나의 말을 듣고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턱을 살짝 부여잡는 것을 보니 이런저런 가능성을 고민해보는 표정.

“뭐, 구체적인 계약의 구조는 모르겠지만 언뜻 생각해보면 공평해 보이는데?”

현재형 팀장이 말을 이어갔다.

“쉽게 말해서 기초 자산인 유가가 오르면 우리가 이득이고, 유가가 떨어지면 투자 은행이 이득을 본다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음?”

“유가가 상승하는 경우 해신해운이 이득을 보지만 해신해운이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한선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유가가 하락하면?”

“손실액은 한도가 없습니다.”

“음··· 그건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군.”

현재형 팀장이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더니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불리한 구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

그 이유는 나도 알고 있다. 유가가 상승할 것이라고 모두 예측하기 때문이다. 기댓값이 다르다는 뜻.

“대부분 유가가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지 않은가. 은행 입장에서는 한도를 설정해 놓는다고 해도 그렇게 불리한 구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군.”

“맞습니다.”

“그리고 사실 유가가 하락하면 비용을 아끼게 되어 이득을 보니 이 파생상품 거래에서 손실을 보더라도 피해 보전이 가능하지. 유가가 상승하면 반대로 선박유 구입 비용은 늘어나지만 이 파생상품 계약을 통해 수익을 얻게 되니 유가 리스크를 헤지할 수 있고.”

“네, 맞습니다.”

역시 현재형 팀장답게 정확한 분석이다.

“음, 그런데도 반대한다는 것은 결국 유가가 하락할 거라고 장보고 과장은 확신한다는 뜻이겠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네. 무슨 뜻인지. 그럼 오늘 오후에 회의에 참석하게.”

“네.”

“흐흐흐. 그래 같이 가서 한번 봅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되는군. 하하하.”

현재형 팀장은 평소와 다르게 이 상황이 재밌게 느껴졌다는 듯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 * *

-해신해운 본사 10층 경영기획팀 회의실

똑똑.

현재형 팀장과 나는 경영기획팀장의 자리 옆에 위치하고 있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경영기획팀이 주로 사용하는 회의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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