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신해운은 세계 10위 안에 드는 글로벌 해운 회사이고, 세계에서 가장 큰 3대 조선소가 모두 한국에 있다.
우리나라가 명실상부한 해운 조선업의 강국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무하메드 알리의 표정을 살폈다.
‘거의 넘어온 표정이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신규 사업을 구상하는 AP 본사에 소개할 만한 사업임에는 틀림없었다.
특히, 본사는 해신해운 그리고 이 장보고라는 사내와의 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지 않은가. 무하메드 알리도 감각이 있는 사나이. 자신에게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릴 사람은 아니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그의 결심을 돕기 위한 마지막 한 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 지사장님 커리어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음······?”
“본사에는 AP사의 제안으로 사업을 처음 구상한 것으로 보고하겠습니다.”
“물론 나민 아세르 사장님께도 말입니다.”
“······!”
“준비를 시작해서 본사에 보고하려면 지금부터 바로 시작해야 됩니다. 지사장님만 동의하시면 제가 바로 실무진들이 협의를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나의 말에 무하메드 알리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류 중계기지 건설 프로젝트 (2)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며칠 후 퇴근 시간이 지난 늦은 시각.
해신해운 본사 건물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하지만 법무팀이 위치한 10층은 아직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아함~!”
나는 뻐근한 어깨를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크게 했다.
나는 지난 며칠간 벌어진 일들을 정리하느라 최근 야근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음, 아무도 없나?’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낮에는 사람이 많아 시끌벅적한 곳이었지만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자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인사팀과 총무팀이 있는 10층 왼편은 이미 전등이 모두 소등된 상태로 깜깜했다.
“장보고 과장님!”
그때 내 뒤쪽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왔다.
“꺅!”
나는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인기척에 놀라 제법 귀여운(?) 소리를 내지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호호호. 과장님도 깜짝 놀라실 때가 다 있네요.”
“네? 그게 무슨.”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자였다.
‘이 사람이 아직까지 퇴근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그 주인공은 경영기획팀의 권세아 대리였다.
나는 고개를 슬쩍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오후 10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경력직으로 입사한 지 몇 달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권세아 대리의 정체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지금 해신해운에서 그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오너 가족들과 회장 비서실장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여느 다른 직원들처럼 평범하게 출근하고 퇴근하면서 성실하게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경역기획본부 임원인 도형준 전무에게 슬쩍 물어보니 제법 업무적으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해신해운의 핵심 경영진 중 한 명인 도형준 전무도 그녀의 정체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해신해운에 다섯 손가락도 채 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나의 등 뒤로 나타난 권세아 대리는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해신해운의 다른 직원들도 흔히 입는 옷차림이었지만 그녀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고급스러운 느낌이 흘렀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등장에 나는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권, 권세아 대리님?”
“음? 과장님 그새 제 얼굴도 까먹으신 건가요?”
“아, 네? 허허허. 그게 아니고, 아, 아니 그럴 리가 있나요.”
평소와 다르게 횡설수설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권세아 대리는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대리님, 아직도 퇴근 안 하셨어요? 허허허.”
나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어색하게 웃었다.
권세아 대리는 나의 말에 책상 옆 파티션에 팔을 들어 올려 잠시 기대더니 나를 흘겨보았다.
꿀꺽.
나는 이유를 알 순 없지만 그녀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살짝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세아 대리가 말을 이어갔다.
“제가 아직도 집에 못 가고 있는 게 누구 때문인데요?”
“네?”
이게 무슨 소리야? 뭐, 뭔 소리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나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제가 퇴근을 안 하고 있는 게 누구 때문이냐고요.”
“······?”
‘이게 도대체 무, 무슨 소리지?’
권세아 대리가 나 때문에 퇴근을 안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꿀꺽.
나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푸하하하.”
나의 긴장한 표정을 읽은 것일까.
권세아 대리는 생긴 것과 다르게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뭐, 뭐야?’
깜짝이야. 이 여자 갑자기 왜 이래?
“과장님, 그 표정 뭐예요?”
“네?”
“왜 갑자기 그렇게 얼굴이 빨개졌어요?”
“제가요? 아 아닌데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활짝 웃으며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툭!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 폴더를 나에게 건넸다.
“음? 뭡니까?”
“선박유 공급 시장 분석한 자료하고, 유류 중계기지 건설 비용과 효과를 분석한 자료예요.”
“이걸 왜 저한테?”
“도형준 전무님 지시 사항이긴 한데, 과장님이 부탁하신 거 아닌가요?”
‘음, 제법 예리하네.’
아니 모를 수가 없나? 며칠 전 있었던 AP사와의 협상에 그녀도 참석했었으니까.
똑똑한 권세아 대리가 이런 것도 짐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나는 권세아 대리가 건네준 서류를 펼쳐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음, 과연!’
외국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에서 컨설팅 회사를 다녔다더니 그녀가 분석해준 자료는 알토란 같은 핵심 정보들이 가득했다.
“고마워요. 대리님.”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나의 예상과는 달리 싸늘했다.
“음? 과장님? 그게 끝?”
“네?”
“고맙다는 말로 끝?”
“네······?”
나는 당돌한 권세아 대리의 페이스에 말린 기분이었다. 회귀한 이후 가장 강적을 만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음······ 과장님은 이럴 때는 참 센스가 없단 말이지······.”
권세아 대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과장님, 아직도 일 다 못 끝내셨어요?”
“네?”
“저는 이제 퇴근할 생각이거든요.”
“아, 네.”
“······저기 과장님! 양심이 있는 분이라면 근처에서 맥주라도 한잔 사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
‘둘이서 지금 맥주를 마시자고?’
경력직으로 입사한 동기라는 명목으로 오며 가며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단둘이 뭔가를 해본 적은 없었다. 대부분 다른 경력직 입사 동기들과 함께하는 자리였다.
내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이 길어지자 권세아 대리는 큰 눈으로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빠르게 대답했다.
“아! 다, 당연하죠. 제가 거하게 한잔 사야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바로 짐을 챙기겠습니다.”
우당탕! 나는 서류 가방을 들어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쓸어 담았다.
“그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아 아닙니다. 저도 사실 지금 퇴근하려고 했거든요.”
“네?”
권세아 대리는 내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내가 방금 전까지 작성하고 있던 파일들이 화면에 표시되어 있었다.
“하하하.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데스크톱의 전원을 그냥 꺼버렸다.
“저장도 안 하시고.”
“괜찮습니다. 별거도 아닙니다.”
“네?”
“제 머릿속에 있습니다.”
권세아 대리가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준비를 마치고 걸음을 옮겼다.
“자자, 빨리 가시죠. 제가 근처에 잘 아는 곳이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보여준 나의 어리바리한 모습을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제법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전생의 기억까지 합치면 여의도 본사에서 근무한 시간은 제법 길다.
여의도에 숨은 맛집과 분위기 좋은 술집은 나의 머릿속에 데이터베이스화된 지 오래였다.
“과장님, 같이 가요!”
앞장서서 걷고 있는 사내의 등을 바라보는 권세아 대리의 눈빛도 반짝이기 시작했다.
* * *
-해신해운 여의도 모처 골목길.
늦은 밤. 어두운 골목길.
젊은 남녀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기요?”
“네.”
“정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그럼 들어갑니다.”
“네······.”
나는 권세아 대리의 말에 포장마차 천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여의도에 포장마차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한번 와보고 싶었다나 뭐라나.
“저는 근사한 곳에서 대접을 하려고 했는데요.”
“저는 이런 곳이 더 좋아요.”
그녀는 의외로 소탈한 성격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 여기 소주랑 맥주 한 병씩이요! 안주는 제일 맛있는 걸로 아무거나!”
권세아 대리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서서 한쪽 구석에 놓인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거침없이 손을 들어 큰 소리로 주문했다.
“음, 저기 권세아 대리님.”
“네?”
“맥주 한잔하자고 하신 거 아니었나요?”
“네,”
“그런데 갑자기 왜 소주를······.”
“호호호,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의외로 융통성이 없으시네요?”
“대리님, 소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즐겨 마셨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몰라요.”
“네?”
“주량이 얼만지 모른다고요.”
“······.”
“필름 끊겨본 적이 없거든요.”
“아······. 네.”
이쯤 되니 이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권영호 회장이 숨겨놓은 딸이 아닌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권세아 대리가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장보고 과장님, 유류 중계기지 말인데요.”
“네? 네.”
‘뭐야? 이 자리에서 갑자기 또 일 이야기?’
하지만 그녀는 제법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질문을 이어갔다.
“사업에 제법 난관이 있어 보이던데, 부산신항에서 유류 중계기지를 건설하는 사업을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음, 글쎄요.”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확신은 없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사업의 성패를 장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상황.
전생에도 실패했던 사업이니까.
하지만 AP사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전생의 실패 요인은 상당 부분 제거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큰 산을 넘으면 다른 산들이 보이겠지.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AP사 한국 지사장인 무하메드 알리로부터 AP 본사에서도 검토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직 AP사의 확정적인 의견은 아니지만 제법 긍정적인 검토가 진행되고 있으니 기다려보라는 전언이 있었다.
권세아 대리가 말을 이어갔다.
“과장님,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일을 그렇게 크게 벌이셨어요?”
“제가요? 아직 뭐 일을 벌인 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