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200)

해신해운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느낀 것일까?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음, 그래서 사실은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나민 아세르 사장님의 의중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그 말에 구매팀장은 살짝 기대하는 눈빛을 보였다.

나민 아세르와 개인적인 인연은 없다. 하지만 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회사에 많은 호의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에게 기대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나민 아세르 사장님 의견은···.”

“······.”

“MOU 수준은 안 되지만 AP사의 VIP 고객에게 제공하는 수준의 계약으로는 한번 고민을 해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오오···!”

무하메드 지사장의 말에 구매팀장이 살짝 신음성을 흘렸다.

살짝 상기된 표정. 아마도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좋은 제안인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VIP 고객이라는 것은 해신해운보다 훨씬 큰 대형 해운 회사가 분명했다. 규모의 경제 덕분에 꽤나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과 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면 지금 맺고 있는 MOU 수준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좋은 조건의 계약일 것이다.

“시세보다도 좋은 조건으로 공급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해신해운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조건은 아닙니다.”

“네?”

‘그럼 그렇지.’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가 아닌가?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는 없다.

“시세보다 저렴하게 공급하는 대신 미니멈 가격을 설정해야 합니다.”

“미니멈 가격이라면?”

“시세가 그 미니멈 가격보다 떨어지는 경우에도 계약 기간 동안에는 미니멈 가격을 지불한다는 조건입니다.”

“음··· 그게 전부입니까?”

“연간 최소 구매 수량도 설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세가 떨어졌다고 다른 회사에서 구입하면 한국 속담처럼 우리 회사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거 아닙니까?”

협상력이 제법 뛰어난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은 한국 지사장답게 우리나라의 속담도 적절하게 섞어가며 협상을 주도했다.

반면 예상치 못한 조건에 구매팀장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구매팀장은 최근 몇 년간 실적이 좋아 오늘 협상에 대해서는 대표 이사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상황이었다.

선박 연료유 가격이 상승하는 추세이니 불리할 것이 없는 계약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자칫하면 회사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계약이다.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 다행인 점은 오늘 이 자리에 해신해운의 전문가가 동석해 있다는 것.

구매팀장은 왼쪽 옆에 앉은 진채호 부장을 슬쩍 바라보았다.

탁탁탁! 구매팀장의 표정을 읽은 진채호 부장은 앞에 놓인 노트북으로 타이핑을 시작했다.

[구매팀장님, 좋은 조건입니다. 여러 기관에서 대부분 유류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의 경제 성장이 심상치 않습니다. 현재 시세보다 낮은 가격이라면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됩니다.]

구매팀장은 진채호 부장이 회사 그룹웨어로 발신한 메시지를 읽었다.

다행이다. 진채호 부장의 의견은 자신의 생각과 동일했다. 구매팀장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표정이 분명했다.

다들 제법 밝은 표정이었다.

AP사에서 알아서 좋은 조건을 제시해주니 협상 분위기가 심각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꼭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나다.

심각한 얼굴을 짓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 보였다.

‘이거 큰일인데···.’

나는 경영기획팀 리스크매니지먼트 파트장 진채호 부장의 메시지를 읽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의견은 다르다.

지금 논의되는 내용은 전생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신해운은 베이징 올림픽 직후에 벌어지는 경제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그 결과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세계 경제는 중국, 러시아,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높은 성장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물론 미국과 같은 선진국들의 경제 성장률은 높지 않았지만 중국을 비롯한 개발 도상국이 세계 경제를 부양하고 있는 상황.

일부 기관에서는 미국 경기와 유로 지역 경제의 부진으로 세계 경제 성장률이 조금 둔화되는 경기 둔화기로 돌입하는 예측을 하고 있지만 세계 경제를 주도하며 고속 성장을 하는 중국의 지속적인 성장세를 의심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리고 미국발 금융 위기가 멀지 않았지.’

세계 경제가 다시 한번 휘청거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띠링! >

+

<메인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진행에 따른 메인 퀘스트를 진행합니다.

“선박 연료유와 관련된 계약으로 인해 해신해운에 막대한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습니다! 유리한 계약 협상으로 리스크를 제거하세요!”

세부 퀘스트 : 선박 연료유 구입

클리어 조건 : 리스크 제거

제한 시간 : 관련 계약 체결 전까지

보상 : 명성 + 100, 글로벌 명성 상승, 사내 명성 상승, 해신해운 수익 구조 개선, 비용 절감

실패 시 : 해신해운 수익 구조 악화

+

‘역시 예상대로네.’

예상했던 내용의 퀘스트가 떠올랐다.

이대로 두면 해신해운에 막대한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저 사람인데.’

이미 구매팀장의 마음은 계약 체결로 기운 상황이 분명했다.

또?

그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난동(?)을 부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권세아 대리가 있는 자리에서 말이다.

연료유 구매 협상 (3)

-해신해운 본사 8층 구매팀 회의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AP사를 상대로 협상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 영감탱이!’

의뭉스러운 협상의 고수. 나민 아세르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를 상대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자리에는 AP사의 지사장인 무하메드 알리가 와 있지만 그는 나민 아세르의 최측근 심복. 나민 아세르의 대리인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온 것이 분명하다.

눈앞에는 AP사의 지사장 무하메드 알리가 있지만 나의 협상 상대는 나민 아세르라는 뜻.

우리는 밀항자 사건 이후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AP사의 사장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친구 사이에도 계산은 철저해야 한다. 그리고 나민 아세르는 해신해운의 선박에 밀항자를 태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한 지 오래.

AP사가 해신해운에 아무런 이유 없이 계속 호의를 베풀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하단 말이야.’

지금 AP사의 한국 지사장 무하메드 알리가 제안하는 내용은 해신해운의 입장에도 나쁠 게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우리에게도 상당히 좋은 조건이다. 지금 생각하기로는 말이지.’

이 시점만 해도 모두들 유가가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는 시기니까.

AP사가 제시하는 조건은 AP사의 최고 VIP 고객사에게 제시하는 조건으로 해신해운이 글로벌 유류 시장에서 받을 수 있는 조건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었다.

‘나민 아세르가 이 시점에 해신해운을 찾아와서 이런 조건을 제시하는 이유가 뭘까.’

비록 이번에 새로 장기 구매 계약을 체결하면서 최소로 구매해야 되는 물량을 조건으로 정한다고 하더라도 해신해운에게는 좋은 조건으로 해석된다.

애초에 국제 유가의 시세가 계약 단가보다 떨어지지 않는다면 손해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가까운 미래에 국제 유가가 곤두박질치게 될 예정이지만 이런 예상을 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런 예상을 하는 사람은 있어도 이에 근거해서 계획을 수립하는 기업은 없을 것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눈앞에는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띠링! >

+

<메인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진행에 따른 돌발 퀘스트를 진행합니다.

“동북아시아의 허브 항구들 사이의 경쟁이 나날이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AP사와 함께 해신해운 거점 항구인 부산신항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세요!”

세부 퀘스트 : 허브(Hub)항

클리어 조건 : 허브 항구 경쟁력 강화(세계 3위 이내)

제한 시간 : 5년 이내

보상 : 명성 + 100, 글로벌 명성 상승

실패 시 : 해신해운 경쟁력 약화, 재무 구조 악화, ???

+

‘음?’

허브 항구의 경쟁력을 강화?

그것도 부산항을 세계 3위 이내로 만들라고?

현재 부산신항의 순위는 세계 5위권.

두 단계만 끌어올리면 되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해운산업 관련 경제지에서 발표한 수치에 따르면 컨테이너 항만 중에서 항만 처리량 세계 1위는 싱가포르항이다. 그리고 2위는 상하이항, 3위는 홍콩항으로 집계되었다.

홍콩항은 최근 저성장세 때문에 순위가 밀리고 있는 실정이지만 싱가포르가 1위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컨테이너 화물 처리량 1위를 지속적으로 차지하던 세계 최대 컨테이너항이었다.

3위가 되기 위해서는 홍콩항을 넘어서야 하는데 그것은 실제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보아도 부산항은 세계 5위권에 들어선 이후 해신해운의 파산과 함께 순위가 하락한다. 최고 순위가 5위였다는 뜻.

퀘스트 내용을 곰곰이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뭔가 힌트가 있을지도 몰라.’

AP사와 협상 중인 타이밍에 이런 퀘스트가 부여된 이유가 뭘까.

불현듯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해신해운이 크게 말아먹은(?) 사업.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부산신항을 동북아 최대 허브 항구로 키우고자 하는 것은 단지 해신해운만의 과제는 아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항만업계의 숙원 사업과도 같은 일.

그리고 해신해운뿐만 아니라 해운 항만 산업에 대한 국가와 산업계 모두의 노력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이유로 부산신항이 경쟁력을 갖추는 문제는 우리나라 해운 산업과 항만 산업 전체의 화두로 최근 떠오르고 있었다.

부산항의 화물 처리량은 세계의 수위에 드는 수준이지만 중국 항만들의 성장세가 매우 뚜렷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쟁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치열한 경쟁에서 언제 도태될지 모르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 부산항은 지정학적 위치는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한다.

중국과 러시아를 배후로 광범위한 시장을 확보하고 있고, 유럽 - 싱가포르 - 중국 - 부산 - 일본 - 북미를 연결하는 세계의 가장 중요한 항로에 속해 있다.

특히 우리나라 항구들은 1990년대까지는 우리나라의 수출입화물의 물동량을 처리하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던 반면,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환적 화물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허브 항구로서의 입지를 크게 성장시켰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제 허브 항구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인 싱가포르나 홍콩에는 비교할 수 없었다.

특히 싱가포르항은 대표적인 환적 터미널로 중국의 성장세를 동력으로 하는 상하이항의 맹렬한 추격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컨테이너 항만 순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항구.

싱가포르 항구가 컨테이너 화물 처리량 1위를 기록하기 전까지는 홍콩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저성장 기조에 빠진 모습이었다.

‘싱가포르라···.’

지정학적으로도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전 세계의 원자재가 중국으로 들어오고, 중국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이 전 세계로 뻗어나간다. 그때 반드시 거치는 곳이 바로 싱가포르항이다.

싱가포르항이 이런 국제 허브 항구의 경쟁력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그런데 그 원인 중에 하나로 평가되는 것이 바로 선박유.

싱가포르에서 선박 급유 시장이 크게 형성되어 있다.

아시아에서 출항해 국제 항행을 운항하는 선박들이 싱가포르에서 급유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싱가포르항에 급유 목적으로 입항한 선박은 1년에 4만 척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다.

이는 부산항의 10배에 달하는 숫자로 부산항의 선박 급유 시장은 싱가포르항과 비교하기 부끄러운 수준.

그 이유는 바로 선박유의 가격 차이.

부산항에서 공급하는 벙커유(선박유)는 싱가포르에 비해 평균 5%가량이 높다는 보고가 있다. 평균 가격이 그렇다는 것이니 변동하는 유가의 특성상 많게는 10% 넘게 차이 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업계 관계자 중에서는 ‘싱가포르항이 커진 이유는 선박들이 급유하러 싱가포르 항구에 들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배경에서 부산신항에 유류 중계기지를 건설해 선박 급유 시장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수출입 화물량이나 환적 화물량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신해운은 전생에 이런 아이디어 착안해 신규 사업을 추진했다.

‘문제는 크게 말아먹었다는 거지···.’

그 사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부산항에 선박 급유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선박유 중계기지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추진 단계에서 사업이 실패한 것.

더 큰 문제는 그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회사가 바로 해신해운이고, 사업의 실패로 많은 재정적 손실을 입게 된다.

해신해운은 국내외 다른 업체들과 함께 부산신항에 선박유 중계 시장을 만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했다.

합작 회사를 설립해 유류 중계기지를 만들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는데, 유류 중계기지는 정박 중인 선박에 기름을 넣을 수 있는 시설이다.

동북아 물류 거점을 지향하는 부산항의 숙원 사업 중 하나였고, 해신해운의 터미널사업본부도 장기적인 수익 창출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투자한 사업이다.

국적 선사들 중 가장 규모가 큰 해신해운이 국내의 관계 업체들과 합작 회사(조인트 벤처, Joint Venture)를 설립했다.

‘그래도 부산신항에 선박유 중계기지를 건설한다는 게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야.’

전생에는 실패했던 사업.

하지만 전생에 실패했다고 이번에도 반드시 실패한다고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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