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하메드 알리 지사장도 나를 발견했다.
“하하하. 이제 배를 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해신해운 본사에 계신 줄은 몰랐네요.”
“하하하. 본사로 출근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미스터 장도 오늘 회의에 참석하시는 겁니까?”
“네, 법무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오늘 협상이 쉽지 않겠군요. 하하하.”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나와 인사를 마친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은 회의에 참석한 연료유 구매팀장을 비롯한 현재형 팀장과 다른 참석자들과도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도 명함 좀 돌려야겠네.’
나도 정장 상의 주머니에 넣어둔 명함 지갑을 꺼내 들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우선 명함을 교환하는 것이 비즈니스 매너.
나는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을 비롯해 그와 함께 우리 회사를 방문한 AP사 직원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과 함께 방문한 AP사의 직원들은 총 3명으로 그중 한 명은 한국인 직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해신해운 법무팀의 장보고 과장입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친 후 명함을 상대방이 읽기 편한 방향으로 돌려 건넸다.
“반갑습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 명함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명함을 교환한 후 악수를 가볍게 나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악수를 할 때 상대방의 손을 강하게 잡지 않는 것이 예의.
하지만 중동을 포함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비즈니스 매너는 달랐다.
악수를 하면서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Dead fish”(죽은 생선)라고 표현할 정도 실례되는 행동이다.
손에 힘을 전혀 주지 않고 상대방에게 맡겨 놓는 경우 죽은 사람의 손을 만지는 기분이 들게 하고, 전혀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 무성의하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외국인들 중에는 간혹 힘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손을 강하게 잡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악수 방법도 Dead Fish의 반대되는 경우이지만 표준적인 비즈니스 매너에는 맞지 않는 악수 방법 중 하나.
하지만 종종 이런 경우가 있다. 힘을 과시하려는 유형이거나 협상에 앞서 무슨 이유로 기선제압을 하려는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이다.
‘음?’
지금 이 사람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뭐야?’
AP사의 젊은 직원이 나를 향해 손을 내밀더니 손을 아주 강하게 부여잡았다.
‘누구지?’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의 이 사내.
하지만 떠오르는 이름은 없다.
건장한 사내였다. 큰 키를 자랑하는 나보다도 키가 컸고, 살짝 마른 체구인 나와 비교해서는 덩치가 훨씬 컸다.
‘하지만 쉽지 않을 텐데?’
나도 손에 힘을 주고 응수하기 시작했다.
< 띠링 !>
+ 스킬 [태권도 Lv.10]을 사용합니다. +
- 신체 능력이 상승합니다.
+ 스킬 [명사수 Lv.5]을 사용합니다. +
- 악력이 상승합니다.
갑자기 밀려드는 악력.
AP사의 젊은 남자 직원이 깜짝 놀라 손에 힘을 더 주기 시작했다.
“으읍!”
하지만 그는 금세 대결을 포기했다. 그의 입에서 짧게 신음성이 흘렀다. 그리고 손에 힘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살며시 웃으며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저 자식?’
의뭉스러운 짓을 하는 놈인데 정체가 뭐지?
두 젊은 수컷들이 의미 없는 힘겨루기로 체력을 낭비하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거의 인사를 마쳐갔다.
잠시 후. 인사를 마친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 착석했다.
활발하게 인사를 나누고 미소를 짓던 참석자들 사이에 잠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폭풍 전 고요 같은 건가?’
비즈니스 협상이 이루어지는 곳은 총성 없는 전쟁터.
전쟁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류를 쳐다보거나 노트북을 꺼내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전투를 앞두고 저마다 보유한 무기를 다시 한번 챙겨보는 것이다.
연료유는 해신해운 입장에서도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비용.
이 협상의 결과가 회사 전체의 수익성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연료유 구매 협상 (2)
-해신해운 본사 8층 구매팀 회의실
이곳에 모인 해신해운 직원들은 다양한 팀 소속.
하지만 당연히 지금 이 자리에서 해신해운을 대표하는 사람은 담당 부서의 장(長)인 구매팀장이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제법 낯설다. 전생에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는데 기억과는 달랐다.
‘구매팀장, 저 사람이 저런 인상이었던가?’
슬쩍 고개를 돌려 구매팀장을 바라보았다.
전생의 기억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
그는 전생에는 무기력해 보이는 사람으로 어떻게 팀장까지 승진했는지 알 수 없었던 인물이다. 업무에 그다지 의욕이 없어 보이는.
그런데 지금 보이는 인상과 기운은 전생의 기억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랄까? 아니면 마치 대단한 실적을 올리는 영업왕을 보는 그런 기분이랄까?
‘외모는 별로 다르지 않은데······.’
회색 스트라이프 정장을 차려입고 안경을 쓴 구매팀장은 차분해 보이지만 모험을 즐기지 않고 안정을 추구할 것 같은 전형적인 대기업의 샐러리맨의 모습.
‘승진이라도 앞두고 있나?’
전생에는 부장으로 커리어를 마감했던 사람. 하지만 전생의 기억과 달리 임원 승진을 노리기라도 하는 건가?’
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대기업 외부에서 보면 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을 동경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제법 높은 연봉, 그리고 회사의 인지도가 주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대기업 직원들의 비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승진 경쟁이다. 그리고 승진 경쟁은 단순히 실적이나 업무 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
그런 까닭에 어쩌면 같은 신입 사원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대기업의 직원들은 임원을 노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된다.
임원.
임원은 기업의 고위직을 말하는 것이지만 본래의 의미는 임시 직원이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정직원이 아니라는 소리지.
그 말은 고용이 보장된 정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잘릴 수 있는 직원이라는 뜻이다. 임시로 고용하는 직원.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대기업에 채용된 직원들은 누구나 미래에 임원이 되기를 꿈꾼다.
대기업에 들어갈 때는 정직원으로 채용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만 입사한 후에는 임시 직원이 되기 위해 밤낮을 바친다.
직장인들의 모순이랄까?
입사 초기에는 샐러리맨의 신화를 들으며 자신감으로 무장한 상태. 그러나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했던 사람들도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심을 잃는 자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런 사람들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임원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구분되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말이다.
다행인 것은 인생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그렇게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니까.’
전생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본사에 와서 알게 된 유관 팀의 과장.
그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나오고 어학에도 능통하며, 명석한 두뇌로 업무 능력도 탁월했다.
사람들은 그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겸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팀과 사업부에서도 에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어려운 일을 척척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은 당연히 임원으로 승진할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 큰 변곡점이 발생한다.
바로 해신해운의 파산.
어느 날 멀쩡히 다니던 회사가 갑자기 파산한다.
그의 커리어는 꼬일 대로 꼬여버렸다. 이직한 회사는 운이 나쁘게도 경력 직원을 대우하지 않는 회사였다. 그리고 다시 이직한다. 그런데 이직한 회사가 또다시 불황으로 직원을 감축한다. 그의 커리어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결국 여러 회사를 전전하다가 재능과 역량을 피워 보지도 못하는 커리어로 직장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해신해운에서 가장 촉망받던 인재의 마지막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커리어였다.
반면에 직원들 중에는 전생의 구매팀장 같은 사람도 있다.
임시 직원이 될 가능성이 없으니 애초에 가늘고 길게 정년까지 다니다가 부장으로 퇴직하는 게 목표인 사람들.
구매팀장도 그런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어떤 이유로 그가 구매팀장으로 팀장 보직까지 승진했다는 것.
그는 업무 능력 자체는 뛰어나지는 않지만 무난한 업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특출 난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큰 실책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생과 달리 현생에서는 제법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가 보여준 최대 실적은 최근 회사의 연료유 비용 절감.
그런데 그건 내가 밥상을 차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AP사와 체결한 MOU 덕분에 비용을 상당 부분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 그럼 설마?’
구매팀장이 전생의 기억과 달리 의욕적으로 변한 이유가 그 일 때문일까?
내가 밥상을 차려준 덕분에 구매팀은 대단한 업무 실적을 쌓을 수 있게 됐다.
어쩌면 구매팀장은 그 덕분에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한번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나 덕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텐데.
‘글쎄···.’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공하면 자기 덕분이고 실패하면 남 탓하는 것은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범인들이 보여주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닌가?
그가 나의 활약을 시기하지만 않아도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구매팀장의 변한 인상에 주목하고 있는 사이, 그는 협상 준비를 마친 듯 보였다.
구매팀장이 대화를 시작했다.
그와 AP사 지사장은 비즈니스 협상에서 의례 떠들어대는 형식적인 이야기들을 잠시 교환했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오늘 미팅의 주된 목적인 연료유의 가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AP사의 지사장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해신해운과 체결한 MOU 만기가 곧 도래할 예정입니다. MOU는 해신해운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나민 아세르 사장님의 경영 판단으로 체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네, 덕분에 우리 회사도 비용 절감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매팀장의 말에 지사장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구매팀장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가능하면 MOU 기간을 더욱 연장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말을 마친 구매팀장이 AP사의 지사장 무하메드 알리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구매팀장은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의 속내를 읽어내지는 못했다.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사실 MOU가 장기간 체결된 탓에 우리 회사에도 제법 부담이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음···.”
“특히 최근 국제 유가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경제 호황과 중국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탓에 곧 톤당 100불을 넘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네, 그래서 저희도 큰 걱정입니다. 아시다시피 선박유 구매 비용이 해운 회사의 비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질 않습니까.”
“그렇지요.”
“특히 최근 컨테이너선 사업을 주로 하는 선사들 사이에 경쟁이 매우 심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다른 비용은 고정적인 지출이다 보니 줄일 수 있는 데 한계가 있어서···.”
해신해운이 지출하는 비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 중 선박 금융 비용이나 용선 비용은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비용.
계약을 해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종결하지 않는 이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원칙적으로 없었다. 결국 비용 절감을 위해서는 선박 연료유나 항비 같은 변동비를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이 말했다.
“음, 그런 내용은 저도 잘 알고 있지만··· 이 MOU 자체가 나민 아세르 사장님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탓에 회사 내부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실정입니다.”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이 말을 마치고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민 아세르 사장의 최측근. 아마도 MOU가 체결된 배경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구매팀장을 슬쩍 바라본다.
‘음? 저 사람 표정은 왜 저래?’
얼굴이 살짝 상기된 표정. 그는 입을 샐쭉거렸다. 그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매팀장은 임원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실적이 필요했다. 오늘 협상 자리가 매우 중요했던 것.
협상의 주인공은 자신이어야 했다. 무게의 추가 나에게 기우는 것은 그가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