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고의 원인은 사고 이후에도 조사 과정에서도 쉽사리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에서 그 원인이 밝혀진다.
그건 바로 해도의 부정확성!
국제 항행에 종사하는 선박에서는 국제 해도(Inetnational Chart)를 사용한다.
국제 해도란 국제 항해에 편리하도록 국제적으로 통일된 해도를 말한다.
1972년 국제수로기구(IHO)의 협정에 의해 전 세계의 주요한 해역을 포함해 간행되는데 국제수로기구에 가입된 각국의 기관들이 해도를 간행하게 된다.
국제수로기구는 해양 명칭 표준화와 국제수로 업무 협력 증진 등을 관장하는 국제기구인데 우리나라는 국립해양조사원이 1957년 국제수로국에 가입해 있다.
문제는 연안에 대한 해도 작성의 정보가 부정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항로 주변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지만 개발 도상국이나 후진국에서 작성되는 해도의 경우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런 까닭에 경험이 많은 선장들은 해도의 정보 등을 최대한 활용하지만 처음에 입항하는 항구의 경우 측심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항구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입수해 각자의 노하우로 선박을 입출항한다.
특히 전생에 사고가 발생한 항구는 VL그룹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터미널의 항로이기 때문에 국가에서도 사실 관리를 방치하고 있는 실정.
해도의 정확성을 더욱 담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사고의 원인은 수심이었다.
VL그룹이 신규로 확장 이전한 터미널의 입출항 항로에 대한 측심 정보가 부정확했던 것이다.
사고가 발생한 시점은 사고 발생 지역의 인근 해역에 대해 브라질 기관이 공식적으로 업데이트한 지 30여 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부산항이나 인천항 같은 항구의 입출항 항로는 준설 공사 등을 통해 엄격히 관리되고 있지만 그런 수준 높은 공적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려운 국가도 많은 것이 국제 항행의 현실이었다.
사고 발생 지역은 수심 40m가량이라고 알려졌으나 몇 년 후 밝혀지는 국제수로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수심은 25m 정도에 불과했다.
겉으로 보면 바다의 모습은 언제나 한결같다. 하지만 바다의 본질은 외유내강.
평화로운 바닷속에서는 강한 조류 등으로 인해 급격한 변화가 벌어지기도 했다. 사고가 발생한 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용재 형!”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내가 신용재 과장에게 말했다.
“응?”
“VL그룹에서 신규로 만들었다는 터미널이요.”
“응.”
“VL그룹이 기존에 사용하던 터미널 바로 옆에 새롭게 전용 터미널로 개발한 곳 말하는 거죠?”
“그렇지, VL그룹 광산 화물이 나오는 곳 근처거든.”
“음, 제가 예전에 씨맨스 클럽에서 다른 외국 회사 항해사들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음? 무슨 이야긴데?”
“그곳 연안 수심 정보가 상당히 부정확하다는 이야기가 해기사들 사이에서 퍼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화물 싣고 나올 때 수심이 안 나와서 불안하다면서요.”
“오, 벌크선도 안 타봤으면서 잘 알고 있구나. 그래서 화물을 다 싣고 출항할 때는 터미널에서 지정해주는 밀물 타이밍에 맞춰서 빠르게 빠져나와야지 그때 못 빠져나오면 다음 타이밍까지 정선해야 되거든.”
“그 정도로 수심이 안 나와요?”
“응. 그런데 원래 터미널도 마찬가지야.”
“아, 외국 항해사들이 말이 새롭게 만드는 터미널 쪽은 수심이 더 안 나오는데 해도상으로는 수심이 깊게 표시되어 있다고 이상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거든요.”
“그래?”
대답하는 신용재 과장의 목소리가 제법 진지했다.
“그 사람들 말이 그 해도 업데이트된 지가 30년도 넘었다고 하던데요.”
“나도 한번 봐야겠네 해도 업데이트 일자까지는 기억이 안 나네.”
“그래서 말인데요.”
“음?”
“주로 출항하는 항로 주변에 저수심 구역 측심을 한번 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입출항하는 선박의 항해사들에게 사운딩(측심) 좀 부탁해 보세요. 정보를 모아서 VL그룹에 제안하면 아마 피드백이 있지 않을까요?”
“······!”
신용재 과장이 잠시 침묵했다.
“음, 좋은 생각인 것 같네. 이런 VL그룹 같은 세계 최대 광산 회사들은 운임으로 한두 푼 아끼는 게 목표는 아니니까.”
“네, 입찰할 때 선박 운항의 안전 관리 측면을 부각해서 제안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새롭게 이전하는 터미널에 대한 위험도까지 평가해서 제안하는 회사는 없을 테니까.”
신용재 과장의 목소리가 제법 밝았다.
“보고야, 고맙다! 또 신세 지네.”
“뭘요.”
“이번에 계약 따내면 내가 다음에 한국 들어가면 크게 한턱 쏠게.”
“이거 아니라도 쏴야죠. 보이스 피싱 막아서 아낀 돈이 얼만데.”
“아 그건 그렇네.”
“하하하.”
신용재 과장과의 전화 통화는 활기차게 마무리됐다.
‘이 정도면 되겠지?’
전생에도 전용 계약을 크게 따냈던 신용재 과장이다.
이 정도 힌트가 있으면 이번에도 큰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흐흐흐.”
신용재 과장과의 전화를 마치자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정재훈 사원이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장님 무슨 통화를 그렇게 오래 하세요.”
“음, 왜 무슨 일 생겼어?”
“그건 아니고 좀 전에 팀장님한테서 연락이 왔거든요.”
“그래?”
“네, 지금 구매팀과 회의 중이라고 전화 통화 마치면 8층 회의실로 바로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지금 바로?”
“네.”
“무슨 회읜데?”
“선박유 구매 계약 관련이라고 하시던데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구나.’
삼등 항해사 시절 겁 없이 AP사 본사로 쳐들어가 나민 아세르와 단판 승부를 벌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체결한 MOU의 만기가 벌써 도래하고 있었다.
연료유 구매 협상 (1)
-해신해운 본사 8층 구매팀 회의실
해운 회사는 시장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업종.
같은 해운 회사라 할지라도 회사가 주로 운항하는 선종(선박의 종류)에 따라 수익과 비용의 구조가 천차만별이다.
국내에서 가장 큰 해운 회사인 해신해운의 경우에도 컨테이너선 사업부와 벌크선 사업부의 시황은 그때그때 시장의 상황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컨테이너 사업부는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리는 와중에 벌크선 사업부는 적자를 겨우 면하는 실적을 내는 경우도 있다.
물론 해운업 전체를 강타하는 호황과 불황의 해운 사이클(Cycle)은 선종을 불문하고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해운 회사의 업황은 그 장기 사이클 안에서도 계속 변동하며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한다.
그리고 해운 회사의 수익 구조는 비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특징이 있다. 업종의 특성상 외부 영향에 의한 등락폭이 클 수밖에 없다.
해운 회사의 비용 중 비중이 가장 높은 것들은 선박 금융 비용, 용선 비용, 화물 비용, 유류 비용이다.
선박 금융 비용은 선박을 구입하는 데 소요되는 금융 비용을 말하고, 용선 비용은 선박을 용선(임차)하는 비용이다.
그리고 화물 비용은 터미널에서 선박을 선적하거나 하역하는 비용과 내륙 운송하는 비용이고, 유류비는 선박 연료유를 구입하는 비용이다.
특히 유류 비용은 변동 비용으로 연료비가 항구별로 매일 다르게 변동하는 특징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와 지역의 정치 상황, 경제적 요인, 재고량과 생산량이 선박 연료유 시장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선박은 하루에도 수십 톤 이상의 선박유를 소모한다. 따라서 매일 수백 척을 운항하는 해신해운에서 연료유 비용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해신해운에서 선박 연료유 구매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는 재무그룹 산하의 구매팀이다. 본사 구매팀에 독립적인 연류유 구매 파트를 설치해 선박 연료유 구매 업무를 총괄하게 하고 있다.
해신해운 본사 재무그룹은 8층에 위치하고 있는데, 구매팀은 가장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똑똑똑.
끼이익! 노크를 하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
“어, 장 과장 왔나?”
현재형 법무팀장이었다.
“여기로 오게.”
“네, 팀장님.”
나는 고개를 꾸뻑 숙이며 회의실에 먼저 도착한 참석자들의 면면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긴 테이블 오른편의 가운데에는 현재형 팀장과 구매팀장이 앉아 있었다.
‘내 자리는 저긴가 보군.’
나는 현재형 팀장 오른쪽에 비워진 의자로 걸어갔다.
“음?”
그때 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끗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영기획 쪽에서도 사람들이 참석했구나.”
그 사람은 같이 경력직으로 입사했던 경영기획팀의 리스크매니지먼트 파트장 진채호 부장과 권세아 대리였다. 본사 10층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지만 업무적으로 엮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권세아 대리도 나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살짝 그리더니 찡긋 눈인사를 했다.
“장보고 과장!”
“경영기획팀에서도 참석했네요?”
진채호 부장이 넉살 좋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내가 지금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거든. 선박유 관련이라서 참석하게 됐네.”
“오, 무슨 내용인가요?”
선박유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좀 이따가 회의 시간에 들어보시게. 영업 비밀을 이렇게 빨리 알려줄 수 있나.”
“흐흐흐. 그런가요.”
“그래, 회의 끝나고 커피나 한잔하자고.”
“네, 부장님.”
나는 두 사람과 인사를 짧게 나눈 후 현재형 법무팀장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착석했다.
나는 현재형 팀장에게 조용히 귓속말로 물었다.
“팀장님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아, 나도 갑자기 연락을 받았거든. AP(Arab Petorolem)사에서 갑자기 방문한다는 연락이 왔다고 하네?”
“네? AP사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구나.
삼등 항해사 시절 겁 없이 AP사 본사로 쳐들어가 나민 아세르와 단판 승부를 벌여서 따낸 MOU의 만기가 곧 도래한다.
다시 계약을 협상할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그래. 큽, 흐흐흐.”
“······?”
"으하하하!“
말을 마친 현재형 팀장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야.”
“옛날 생각이요?”
“그래, 두바이에서 우리 둘이 AP사를 쳐들어가지 않았나?”
“쳐··· 들어갔다고요?”
“그래!”
‘기억이··· 좀 다른데?’
그의 말은 나의 기억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가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쳐들어갔다니?
나는 매너 있게 나민 아세르와 비즈니스 협상을 한판 겨뤘다. 물론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약간의 블러핑이 있었지만 쳐들어갔다고 할 정도로 품위 없는 행동은 한 사실이 없었다.
“그래, 그래서 그 나민 아세르를 상대로 자네가 협박을 하지 않았나?”
“협박······ 이라고요? 협박이 아니라 협상이죠.”
“에이! 협상? 협상은 무슨 협박이지!”
“네···?”
“자네가 AP사 나민 아세르 사장을 겁박했잖아. 그래서 깜짝 놀란 나민 아세르 사장이 사람들을 내보내고 독대한 것 아닌가.”
“······.”
‘그게 아닌데.’
나민 아세르 사장이 사람들을 내보낸 건 협박 때문이 아니고 밀항자를 우리 배에 태우려고 고단수에 음흉한 영감탱이가 미리 수작질을 부리려고 선수를 친 거라고요!
협박 때문에 겁나서 그런 게 아니고!
하지만 나의 억울한 외침은 속마음에 그쳤다.
나의 억울한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현재형 팀장은 재밌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뭐, 큰 성과가 있었잖아. MOU 체결이라는 큰 성과를 얻어냈으니 됐지 뭐.”
‘되긴 뭐가 돼요!’
밀항자 때문에 해경에 쫓기고 일항사 구하겠다고 바다에 뛰어들고 난리 친 건 난데!
“나는 그때 깜짝 놀라 땀을 한 바가지를 흘렸다네. 그때 생각만 하면 나는 아직도 가끔 큰 웃음이 난다네. 하하하.”
“······.”
급기야 현재형 팀장이 웃음소리를 크게 터트렸다.
‘뭐, 내 기억하고는 좀 다르긴 한데···.’
그래도 팀의 상사가 저렇게 즐거워하니 굳이 기억을 고쳐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현재형 팀장의 말에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최근에 입사한 진채호 부장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고 있다.
권세아 대리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작게 미소를 짓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연료유 구매팀장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밀고 있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는 듯했다.
AP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정유 회사 중 한 곳.
두바이 재계와 정계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알려진 나민 아세르 사장을 협박했다니?
불필요한 오해는 피해야겠지.
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어··· 제가 삼항사 시절에 두바이에 있는 AP사 본사에 법무팀장님과 함께 간 건 사실인데요.”
“오? 진짜?”
“네, 그래도 협박하고 그런 건 당연히 아닙니다. 협상 과정에서 발생하는 약간의 블러핑이죠. 하하하. 팀장님이 좀 과장을 하셨네요. 협박이라니. 허허허.”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려보았다.
나의 설명을 믿는 건지 아닌지 사람들의 표정은 애매했다.
똑똑똑!
문이 열리고 구매팀의 팀원이 들어섰다.
“팀장님, AP사 분들 도착하셨습니다.”
“오, 그래? 안으로 모시게.”
“네.”
다행히 AP사의 직원들이 약속 시간에 맞춰 회의실로 들어섰다.
“오!”
나는 회의실로 들어서는 AP사의 직원들을 확인하고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낯이 익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이름은 무하메드 알리.
가장 먼저 회의실로 들어선 사람은 AP사의 한국 지사장 무하메드 알리였다.
무하메드 알리 지사장은 나와도 인연이 있는 사내.
그는 오재민 의원이 국회에서 유조선 단일선체 금지법안을 발의할 당시 우리나라의 선주협회와 ‘해양환경보호와 유조선 이중선체 도입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할 때 국회를 방문했던 사람이다.
“음? 미스터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