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200)

보통 이 정도로 위세를 부렸으면 일반인이라면 주눅이 들기 마련인데 도통 겁을 먹지 않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상황 파악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놈들이 더 있나? 그는 내 등 뒤로 다른 사람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눈알을 굴려댔다.

“없어요.”

“뭐?”

“더 올 사람 없다고요.”

“······.”

“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주먹으로 승부합시다.”

“이 새끼가! 으아악!”

검은 정장의 사내가 나의 도발에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하나, 둘, 셋!’

나는 상대와의 간격을 살피며 앞뒤로 살짝 통통 뛰어올랐다.

< 띠링! >

+ 스킬 [태권도 Lv.10]을 사용합니다.

- 폭풍 10연속 발차기를 시전합니다.

- 데미지가 상승합니다.

“아뵤!”

퍽퍽퍽! 오랜만에 나의 발끝에서 폭풍 같은 발차기가 연이어 펼쳐졌다.

그는 제대로 된 방어도 하지 못한 채로 머리, 가슴, 배, 다리를 얻어맞았다.

“으어어······.”

털썩. 거구의 사내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비, 비겁하다.”

“음?”

일방적인 결과였지만 정정당당하게 치러진 사나이들 사이의 승부였다.

비겁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하지만 나의 생각과 달리 검은 정장의 사내는 매우 참담한 표정. 그는 눈은 억울한 일을 당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주먹으로 승부하자더니······.”

“······?”

“주먹이라고 해놓고 바, 발차기라니······!”

털썩. 검은 정장의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10연속 발차기에 정신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

음, 뭐 발차기?

아무래도 상대방은 주먹으로 승부하자는 말을 오해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순진한 놈이었네.’

“가, 감사합니다.”

현금 수거책이 옆으로 다가와 나에게 고개를 꾸뻑 숙였다.

“감사요?”

“네,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허허허.”

나는 지나치게 순진한 현금 수거책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자신도 모르게 사기 범죄 사건에 가담한 가해자가 이렇게 순진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 딱히 그쪽을 도와주고 싶어서 제가 나선 건 아닙니다.”

“네?”

“어쨌든 큰 범죄에 가담하신 거니 경찰에 자수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자, 자수요?”

“네, 만약에 자수하지 않으면 제가 신고할 생각이니 알아서 잘 판단하세요. 자수해서 자수 감경이라도 받는 게 좋을 겁니다.”

현금 수거책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 띠링 !>

< 띠링 ! >

+

<메인 퀘스트 달성을 축하합니다.>

“당신의 활약으로 보이스 피싱의 위험에 처한 해신해운 직원의 가족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보상 :

- 명성이 상승합니다.

- 당신의 사내 평가가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 신용재 과장이 이직할 가능성이 낮아졌습니다.

- 해신해운의 벌크 영업력이 강화됩니다.

- 다수의 전용선 계약을 체결할 기회가 생겼으니 잘 활용하세요!

+

* * *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현재.

브라질에 주재원으로 파견 나가 있는 신용재 과장과 통화 중 잠시 나는 얼마 전에 있었던 화끈한 혈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검은 정장의 사내는 해양경찰 차진혁 경감의 도움을 받아 경찰로 인계했다.

알고 보니 검은 정장의 사내는 부산의 소규모 건달 조직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차진혁 경감은 거경파의 No.3 변도수의 도움을 좀 받아 뒤탈이 생기지 않도록 잘 처리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연락해왔다.

그나저나 검은 정장 사내와의 정정당당한 주먹 대결(?)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실소가 그려졌다.

‘그런 손맛은 오랜만이었어.’

아니 발맛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나는 이런 데스크보다는 현장 체질인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본사에서 근무하다 보니 승선 생활의 다이나믹함이 그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보고야!”

내가 잠시 상념에 빠져 있자 수화기 너머로 신용재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이어갔다.

“보이스 피싱이 심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우리 가족한테 그런 일이 생길 줄은 생각도 못 했네.”

“흐흐흐. 별일 아닙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전화로 조심하라고 연락한 게 다가 아니고 직접 찾아와서 도와줬다고 하시던데?”

“네, 다행히 저도 부산 본가에 있었거든요.”

“그래. 다행이다. 잘못하면 어머니가 평생 저축한 돈을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날릴 뻔했다.”

그건 정말 다행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기 사건과 같은 범죄들은 결국 돈 문제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강력 범죄 같은 흉악한 범죄는 아니다.

하지만 사기 범죄는 그 피해 금액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어떤 피해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야기하기도 한다.

사기 사건을 경제적 살인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 전생에는 그런 큰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런 일을 막아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었다.

신용재 과장이 말을 이어갔다.

“형, 브라질에서는 별일 없어요?”

“아, 나야 뭐 잘 있지. 최근 큰 거래처 사람을 알게 돼서 거기를 잘 뚫어보려고 노력 중이거든. 잘만 하면 큰 건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큰 거래처? 어딘데요?”

“VL그룹이라고 들어봤어? 너는 주로 컨테이너선을 탔으니 못 들어봤을 수도 있겠네.”

“허허허. 형 저도 일항사까지 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들어봤죠.”

“하하하. 그래. 세계 광산 업체 중에 세 손가락에 안에 드는 회사거든. 브라질에서 가장 큰 회사이기도 하고.”

“VL그룹이라니 그거 다행이네요!”

“그래, 운이 좋았지.”

신용재 과장은 한참 VL그룹에 대해 자랑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브라질 VL그룹은 해신해운의 벌크 사업부가 그동안 오랜 시간 공을 들여도 계약을 따내지 못한 회사였다.

이제 갓 브라질에 부임한 신용재 과장에게 어떤 인연이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단한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신용재 과장이 말했다.

“아, VL그룹 하니까 생각난 건데 말이야.”

“네.”

“이제 곧 VL그룹에서 전용 터미널을 신규 터미널로 이전할 계획이거든.”

“아 그래요?”

“그래, 바로 옆이기 한데 지금 터미널은 공간이 좁아서 확장 이전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아마 신조선 발주도 제법 늘어날 것 같아. 그때를 노려볼 계획이긴 한데···.”

“뭐 고민이라도 있어요?”

“음, 일단 영업선은 확보가 됐는데 아무래도 한 방이 부족해.”

“한 방이요?”

“그래, 지금 거래하고 있는 해운 회사들이 많으니까. 이를 돌릴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해. 이런 회사들은 단순히 가격 경쟁력만으로 계약을 따낼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

“음······.”

VL그룹? 신규 터미널?

‘아! 그래 그 사건이 있었구나!’

전생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VL그룹의 신규 터미널을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한 사건.

그건 VL그룹과 용선 계약(선박 임대차 계약의 일종)을 체결한 해운 회사의 선박이 신규로 오픈한 터미널을 무리하게 출항하면서 발생한 침수 사고였다.

VL그룹 전용선 계약 (2)

현지 시각 20XX년 X월 XX일.

브라질 인근 해상에서 브라질 항구를 출항하던 초대형 광석 운반선(VLOC: Very large Ore Carrier)이 침수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산적(Bulk) 화물은 곡물이나 광석과 같이 포장되지 않은 화물을 말하는데 이러한 산적 화물을 운반하는 화물을 벌크선(산적 화물선: Bulk carrier)이라고 부른다.

해운업계 실무에서 벌크 선박은 선박의 사이즈(규모)에 따라 종류를 구분하고 있다.

가장 작은 사이즈인 1만~3.5만 톤급의 핸디사이즈(Handysize) 선박부터, 3.5만~5.8만 톤급 핸디맥스(Handymax), 5.2만 톤급 수프라막스(Supramax), 6만~8만 톤급으로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의 최대 크기를 말하는 파나맥스(Panamax), 8만 톤급 이상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석탄 적출항인 리처드 베이에 입항이 가능한 선박의 최대 크기를 말하는 케이프사이즈(Capesize), 그리고 18만~25만 톤급 또는 그 이상의 초대형 산적 화물선을 말하는 초대형 광석 운반선(VLOC: Very large Ore Carrier)으로 구분된다.

이렇듯 브라질 인근 해상에서 사고가 발생한 VL그룹의 전용선은 벌크선 규모 중에서 가장 큰 크기인 초대형 광석 운반선.

초대형 선박에 침수가 발생했으니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사고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선박 침수 과정에서 선장의 뛰어난 판단 아래 선원들이 모두 무사히 대피해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양 사고의 원인을 놓고 선박 회사와 보험사 등 관계사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하지만 사고의 정확한 원인은 몇 년이 지나도록 밝혀지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한 시각은 현지 시각 20XX년 X월 XX일 오전 9시경.

VL그룹과 전용선 계약을 체결한 외국의 해운 회사가 운항하는 약 30만 톤급(300,660DWT) 벌크선 “쥬피터”호가 브라질의 항구에서 철광석 29만 4,000톤을 싣고 출항해 100km가량 운항을 계속했다.

터미널로부터 100km 정도 운항을 계속한 시점.

“쥬피터”호의 선장은 밀물 타이밍을 맞춰 이제 해도상으로 위험한 저수심 구역을 충분히 벗어났다고 판단했다.

그때였다.

쿵! 끼이익! 콰과광!

갑자기 이 거대한 선박이 흔들리는 충격이 발생한다. 그리고 선원들도 모두 들을 수 있는 충격음이 발생했다.

‘큰일이다. 선저에 충격이 발생했구나!’

경험이 많은 베테랑 선장은 직감적으로 선저(선박의 바닥)에 충격이 발생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선장의 선박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하기 시작한다. 항해사들과 베테랑 선원들이 선체에 파손된 곳이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선장은 선박에 침수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다행인 점은 선박이 급격하게 기울지는 않고 있었다. 충격에 비해 파공된 부위가 크지 않거나 급격한 침수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경험이 많은 선장은 빠르게 상황 판단을 내린다.

선장은 빠르게 해도를 펼치고 위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고 지역은 이곳 터미널을 입출항하는 선박들이 항로로 이용하는 곳.

만약 이곳에 선박이 좌주하게 되면 추후 선원들이 터미널을 입출항하는 선박들의 항로를 방해할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가 좋겠다.’

선장은 사고지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약 20m 이하의 수심이 나오는 사구 지역을 찾아냈다.

선장은 직접 조선을 시작해 선박의 좌현을 사고 지역 위에 조심히 올려놓는 방법으로 선박을 임의로 좌주시킨다.

그리고 선원들에게 즉각적인 퇴선 명령을 내린다.

“쥬피터”호의 선원 20명은 신속히 퇴선을 결정해 모두 탈출했으며, 구명정을 타고 있다가 출동한 인근의 구조선으로 갈아타 빠르게 구조됐다.

“쥬피터”호는 사고 직후 터그보트(Tugboat) 4척을 통해 저수심 연안으로 옮겨졌으며 갑판상까지 바다에 잠기게 된다.

사고 이후 선급, 해상 보험 손해 사정인 등을 통해 구난 원인을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브라질 해군은 브라질 연안에서 좌초한 “쥬피터”호를 가라앉히기로 결정한다.

해저면과 충돌해 임의 좌초한 이후 꾸준히 사후 처리가 진행돼 왔다. 선박 안에 있는 연료와 철광석을 완전히 제거해 해상 오염 발생을 차단했다.

이후 “쥬피터”호는 연안 150km 지점의 사퇴(sand bank) 심수 지역으로 예인돼 정박한 상태에서 선박 손상 정도와 상태를 점검받았다.

그리고 브라질 해군은 마지막 마무리 작업으로 “쥬피터”호를 수장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고 이후 “쥬피터”호를 운항한 해운 회사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브라질 광산 회사인 VL그룹 역시 기업 이미지에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고의 원인은 해상업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는데, 사고의 총 손해 규모는 최근 수년간 발생했던 선박 사고 중 가장 큰 수준인 1,600억 원 이상에 달할 것으로 알려져 선박 보험을 인수한 보험사들의 재무 건전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해운 회사와 선박 보험 계약을 체결했던 보험 회사들은 쥬피터호에 대한 전손 처리를 확정했다.

보험 가액은 약 1천억 원 수준. 하지만 선체 발굴 및 손해사정 등에 구난 관련 추가 비용이 투입되면서 보험사가 지급해야 할 보험금은 1,500억 원 이상이었다.

선박 보험을 인수한 보험사들은 통산 손실액의 80% 이상을 재보험 등을 통해 대비하고 있지만 재보험사가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면서 몇 년에 걸친 장기간의 소송전이 벌어진다.

* * *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하마터면 대형 사고가 발생할 뻔한 일이었지.’

그런 대형 선박이 침몰하고 선박유나, 철광석이 바다에 버려진다고 생각하면 결코 작은 사고가 아니다. 경제적 손실뿐만 아니라 유류 오염 등 큰 해양 오염을 발생시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기회이기도 하지.’

누군가의 위기는 다른 사람에게는 기회.

VL그룹과 오랜 비즈니스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외국 해운 회사가 운항하는 선박에 사고가 발생한 것은 다른 해운 회사들에게는 기회였다.

VL그룹이 신규 터미널 확장 이전 이후 대규모 발주하는 계약에서 많은 해운회사들이 입찰에 뛰어든다.

그 입찰에 전생에 승리한 사람은 신용재 과장이었다.

‘그나저나 그때 어떻게 입찰을 따낸 거지?’

전생에는 신용재 과장이 해신해운을 떠나 이직한 한국의 중형 해운 회사에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어떤 방법으로 계약을 따낸 것인지는 기억에 없었다.

‘방법이 없을까.’

VL그룹과 대규모 장기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최근 투자 유치를 추진 중인 해신해운에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해신해운은 국내외 사모펀드(PE)들을 중심으로 2천억 원 규모의 투자 유치 작업을 추진 중에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배가 침몰한 원인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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