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200)

아무래도 2억 원이나 되는 거금의 현금이었기 때문에 이런 거금을 송금할 방법은 두 가지다. 직접 현금을 전달하거나 아니면 소액으로 나눠서 여러 개의 대포 통장으로 돈을 송금하는 방법.

하지만 ATM으로 현금 다발을 쌓아놓고 송금하는 것은 주변의 시선이 있기 때문에 기피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방법은 소액 보이스 피싱 범죄의 경우에 활용되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중간에 다른 사람과 접선을 할지도 몰라.’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습하기로 결심했다.

본인을 제이엘(JL) 머니의 직원이라고 소개한 현금 수거책은 돈 가방을 받아 들고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거액의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보다 많은 돈에 당황한 듯 허겁지겁 등에 메고 있던 백팩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변제 영수증 한 장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허접한 양식으로 작성된 영수증으로 한눈에 봐도 회사에서 정식으로 발급한 영수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 허접해서 이런 영수증에 속아 돈을 지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허접한 서류를 보고도 속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알고 보면 허술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사기를 당하는 순간에는 그런 의심을 할 생각조차 없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사기꾼들의 능력이다.

나는 지금 억지로 속아주는 연기를 하기도 힘든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제법 공손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마치 진짜 제이엘(JL) 머니의 직원이라도 되는 듯한 모습.

“그럼 저는 일을 마쳤으니 가보겠습니다.”

“아, 예······.”

“변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현금 수거책은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그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마친 후 문밖을 나서기 시작했다.

‘예의가 바른 놈이네······.’

아마도 이놈은 자신이 보이스 피싱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사를 받게 되면 죄책을 면하긴 힘들 것이 분명했다.

“잠시 기다리세요. 제가 쫓아갔다 오겠습니다.”

“응?”

“경찰에 연락해뒀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곧 용재 형이 전화한다고 했으니 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 그래 알겠어.”

나는 긴장한 표정의 신용재 과장의 어머니를 뒤로한 채 빠르게 문을 벗어났다.

골목을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금 수거책을 발견했다.

< 띠링! >

+스킬[고소고발 Lv.17]을 사용합니다.

- 범인을 추적합니다.

+스킬[잠입 Lv.6]을 사용합니다.

- 민첩성이 상승합니다.

- 인기척을 감춥니다.

- 상대방이 당신을 인지할 가능성이 떨어집니다.

‘이 소리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수거책의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다.

보이스 피싱에 가담한 현금책들은 일당을 받는 외에 수거한 현금의 일정 비율을 인센티브로 지급받는 경우가 있었다.

오늘 제법 큰 건을 달성한 현금 수거책은 휘파람을 불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핸드폰에 집중한 탓인지 내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도 제법 큰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있는지도 몰랐다.

잠시 후.

은행의 지점들이 모여 있는 어느 번화가.

휴대폰으로 보이스 피싱 조직원의 지시를 받던 현금 수거책이 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접선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인기척을 감춘 채로 가까이 다가섰다. 건물 모퉁이에 살짝 몸을 숨긴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사람은?’

현금 수거책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가락 하는 놈인가?’

비주얼은 제법 범상치 않아 보였다.

두 사람은 사람의 인기척이 없는 골목길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금 수거책 사내는 검은 정장의 사내가 자기를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엘(JL) 머니의 직원을 만나기로 한 자리. 그런데 회사원이라고는 믿기 힘든 험상궂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

무시무시한 포스를 뿜어내고 있는 이 사람을 회사원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었다.

검은 정장의 사내가 현금 수거책을 향해 손을 위아래로 까닥였다. 가까이 오라는 뜻.

기껏해야 20대 초반밖에 되지 않는 현금 수거책은 쭈뼛거리며 검은 정장의 사내에게로 다가섰다.

“어, 안녕하세요? 제이엘 머니에서 나오셨나요?”

“······.”

검은 정장의 사내는 현금 수거책의 인사에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손을 휙휙 내저었다.

“인사는 됐고, 돈은?”

“네?”

“오늘 찾아온 돈 말이야. 돈은 어디 있냐고?”

“아, 네. 여기 있습니다······.”

현금 수거책이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현금이 든 종이 가방을 꺼내자 검은 정장의 사내가 빠르게 종이 가방을 낚아챘다.

“음?”

종이 가방을 뒤지던 사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 종이 가방을 뒤지던 검은 정장의 사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검은 정장의 사내는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종이 가방을 뒤집어 가방 속 현금 뭉치를 바닥으로 쏟아냈다. 그는 들고 있던 현금 뭉치를 수거책의 발 앞으로 집어 던졌다.

현금 뭉치 속에 섞여 있던 가짜 돈이 바닥에 흩어졌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검은 정장의 사내가 화가 난 듯 소리를 내질렀다.

“이 새끼가 간이 부었구나.”

“네? 그게 무, 무슨?”

“너 이 새끼 돈 어디로 빼돌렸냐?”

“빼돌렸다니요?”

“동태눈깔이냐? 네가 보기엔 저 돈이 진짜 돈 같아 보이냐?”

거구의 검은 정장의 사내가 현금 수거책의 멱살을 잡아 들었다. 현금 수거책은 몸이 반쯤 들린 듯 발등을 동동거렸다.

“캑캑!”

멱살을 잡힌 현금 수거책이 호흡이 원활하지 않은 듯 캑캑거리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이 돈이 감히 누구의 것인 줄 알고 이런 짓을 한 것이냐?”

“캑!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게? 제이엘(JL) 머니 아닙니까?”

“흐흐흐. 제이엘? 이 새끼가 진짜!”

퍽! 왼손으로 현금 수거책의 멱살을 잡고 있던 검은 정장의 사내가 오른손을 휘둘러 복부를 가격했다. 배에 통증을 느낀 현금 수거책은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컥!”

“야 이 새끼야! 그 돈 안 가져오면 우리 둘 다 죽은 목숨인 거 몰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퍽퍽퍽! 검은 정장의 사나이가 발을 들어 올려 현금 수거책을 잘근잘근 밟아댔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사기 친 돈 어디로 빼돌렸는지 말해!”

“사기라니요? 저는 제이엘(JL) 머니 직원으로 가서 채무자들한테서 돈을 받아 온 것뿐입니다.”

“허! 이 미친 새끼가! 보이스 피싱이라는 거 다 알고 있으면서 계속 연기하네?”

“네? 보, 보이스 피싱이라고요?”

“허! 이 새끼가 끝까지!”

검은 정장의 사내는 발길질을 멈추고 쪼그려 앉았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현금 수거책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야, 너 감히 그 돈이 누구 돈인 줄 알고 손을 댄 거냐?”

“······.”

검은 정장의 사내가 주변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경고하듯 말했다.

“제이엘이니 회사니 뭐 이런 헛소리는 그만하고. 너한테 연락한 놈들은 중국에서 보이스 피싱을 하는 제법 큰 범죄 조직이다.”

“네? 범죄 조직이요?”

“그래! 중국의 제법 큰 범죄 조직이라는 말이야!”

“헉! 그, 그런!”

“아주 흉악한 놈들이니 말을 듣지 않으면 너나 나 같은 놈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닌 놈들이다.”

“······.”

“빨리 숨겨놓은 돈 당장 챙겨와 어디 있어!”

“저, 저는 숨긴 게 없습니다. 이게 제가 받은 돈 전부입니다.”

이놈은 곱게 말해서 들을 놈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검은 정장의 사내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격적으로 위해를 가할 생각이었다.

“이 새끼가 좋은 말로 정리하려고 했더니 정신을 못 차렸구나.”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정장 상의 주머니에 차고 있던 칼을 조용히 꺼내 들었다.

VL그룹 전용선 계약 (1)

-부산 영도 어느 번화가

스릉!

검은 정장의 사내가 칼집에서 칼을 꺼내 들자 살벌한 소리가 들려왔다.

칼을 보자 깜짝 놀란 수거책이 크게 소리쳤다.

“사, 살려주세요! 자, 잘못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내가 보더라도 제법 진정성이 느껴지는 반성이었다.

하지만 검은 정장 사내의 성에는 차지 않은 듯했다.

“반성을 하지 말고 돈을 가져오란 말이야!”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의 폭행이 계속됐다.

‘저놈은 아무래도 단순한 수거책은 아니구나.’

일단, 저놈을 잡아서 족쳐봐야겠다.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있는 현금 수거책도 이만하면 충분히 반성을 한 듯싶었다. 어쨌든 내가 준비한 가짜 현금 다발에 속아서 저런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골목 한쪽 구석에 숨어 몸을 숨긴 채로 상황을 지켜보던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거기 동작 그만!”

“음? 뭐야?”

검은 정장의 사내는 손에 칼을 쥔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훑어보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지나가던 일반인스러운 비주얼이 아닌가?

“뭐 경찰은 아닌 것 같고··· 뭐 하는 놈이냐?”

“저기 그 손에 든 거 그거 칼 아닙니까? 대낮에 위험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요!”

“뭐? 허허허.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검은 정장의 사내가 손을 휙휙 내저었다.

“위험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다가 제명에 못 죽는다.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상관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고 가던 길 마저 가라.”

검은 정장의 사내가 나에게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수거책을 바라보았다. 좋은 말로 이쯤 경고했으면 잘 알아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만 세상일이 흘러가지는 않는 법.

“갈 때 가더라도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뭐야?”

“중국에 있다는 그 보이스 피싱 조직 말인데요? 누굽니까 그놈들이?”

“뭐? 하! 이런 미친 새끼가!”

그때 나를 빤히 바라보던 현금 수거책이 소리쳤다. 그는 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하긴 나 정도로 잘생긴 외모라면 쉽게 잊을 수는 없었겠지.

“저, 저 사람입니다! 이 종이 가방을 준 사람이 바로 저 사람입니다!”

“뭐?”

검은 정장의 사내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는 곱게 보내줄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검은 정장의 사내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소매를 걷어 올리며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덩치가 제법 있는 건달들이 걷는 방법으로 위풍당당(?)한 팔자걸음이었다. 보통은 골목에서 이런 걸음걸이만 봐도 다들 알아서 옆으로 피해 가지 않았던가?

물론 나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일단 칼은 좀 부담스러우니까.’

나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놓여 있는 짱돌 한 개를 손에 쥐었다.

< 띠링! >

+스킬 [명사수 Lv.5]을 사용합니다. +

- 제구력이 상승합니다.

나는 마치 메이저 리거와 같은 유려한 동작으로 냅다 집어 든 돌을 휙 집어 던졌다.

퍽!

“으악! 뭐, 뭐야!”

돌이 빠르게 날아가 칼을 쥐고 있던 검은 정장의 사내 손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도, 돌이잖아!”

“······.”

“새끼가 비겁하게!”

음? 저기요. 건달로 보이는 놈이 할 만한 대사는 아닌데요?

의외로 정정당당한 대결을 선호하는 사람인가?

검은 정장의 사내는 돌에 맞은 손이 제법 아픈 듯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손을 부여잡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뭐, 갑자기 돌은 던져서 좀 미안한데요. 비겁한 걸로 따지면 연장 들고 설치는 쪽이 더 비겁한 거 아닙니까? 특히 저 같은 일반인을 상대로 할 때는 말이죠.”

“뭐?”

“무기는 버리고 원하는 대로 사나이답게 주먹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합시다.”

“하! 이런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을 봤나! 너 이 새끼 뭐 하는 놈이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누군데요?”

“······하! 이 정신 나간 새끼!”

그는 갑자기 우악스럽게 정장 상의를 벗어 던졌다. 정장 안에는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드러난 팔뚝 위로는 화려한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봐주기를 바라는 듯 문신이 그려진 팔뚝을 어색한 동작으로 들어 올렸다.

‘어디 유명한 조직인가?’

나는 유심히 문신들을 바라보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

검은 정장의 사내는 팔뚝에 그려진 문신을 한참 자랑(?)했지만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검은 정장의 사내는 걸걸한 입담과는 상당히 신중한 성격이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에게 달려드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