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제가 미리 준비한 고소장의 초안입니다.”
“······?”
“어촌계장이 계원이 아닌 사람에게 김 양식업권을 불법으로 임대하고 수협에 자신이 직접 어업 활동을 한 것처럼 상품을 납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내용과 그 증거입니다.”
말을 이어가던 백경운 변호사가 어촌계장을 바라보았다.
“계장님, 명예훼손을 말씀하셨으니 잘 아시겠네요.”
“무슨 소린가?”
“명예훼손에는 사실을 기재해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와 허위사실을 기재해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허위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가 있습니다.”
“음···?”
“그런데 계장님은 어떤 명예훼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
“제가 사실을 적시했나요? 아니면 허위사실을 말했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허위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시겠습니까?”
허위사실을 적시한 명예훼손은 사실적시 명예훼손보다 더 중하게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 명예훼손의 내용이 허위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허위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한다면 감추고 싶은 이 문제가 공론화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건 어촌계장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설령 그 내용이 사실이라도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계장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라고 지금 인정한다면 백경운 변호사의 말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니 이것을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말문이 막힌 어촌계장이 백경운 변호사를 노려보았다.
백경운 변호사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 사실이라면 양식산업 발전법 위반이나 업무상 배임죄 여부가 문제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의뢰인의 양식장 면적에 대한 문제이니 아마 다른 마을 분들은 큰 관심이 없으실 겁니다.”
“······?”
“그런데, 이건 어떨까요? 어촌계에 지급된 보상금 문제라면?”
그 말에 사람들의 눈빛이 빛났다.
“만약, 정당한 어촌계원이 아닌 사람에게 보상금이 지급되었고, 그 보상금의 일부를 대가로 수령한 사람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
사람들이 또다시 어촌계장만을 바라보았다. 어촌계장은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무, 무슨 헛소리인가!”
어촌계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미친놈들이! 이건 다 헛소리일세. 누명이야. 나는 그런 짓을 한 사실이 없어!”
백경운 변호사가 실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계장님이 한 짓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뭐, 뭐라? 말장난하지 말게! 자네가 나를 노리고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글쎄요.”
“그, 그리고, 아무런 증거도 없질 않은가? 전부 저놈들이 지어낸 소설 같은 이야기야! 영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야!”
‘저 뻔뻔한 새끼.’
마지막 순간까지 임기응변을 짜내고 포기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적이지만 오히려 존경심이 생길 정도.
이 어촌계장과 전생에 그다지 악연은 없었다.
전생에는 해신해운이 억울하게 이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지급했지만 어촌계장과 개인적인 악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그가 각종 비리로 처벌을 받은 사실은 들었지만 그저 남의 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현생에 이렇게 엮인 이상 저런 파렴치한 짓을 계속 자행하도록 놔둘 생각은 없다.
도저히 갱생의 여지가 없는 놈이라면 응당 이 기회에 참교육을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무슨 히어로는 아니지만···.’
하지만 이번 생에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이런 일을 하라고 하늘이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오지랖을 부리기 위해 두 사람의 열띤 설전에 참전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손을 들며 다가서자 어촌 계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네는 어촌계원이 아니니 당장 총회장에게 나가시게!”
“······.”
“뭣들 하는가 다들 이놈들을 안 쫓아내고!”
하지만 이전과 달리 어촌계장의 다급한 외침에도 섣불리 움직이는 사람들이 없었다.
어촌계장의 행동에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혹이 전부 해소되기 전에 섣불리 어촌계장의 편을 들다가는 이후에 어떤 불똥이 자기에게 튀게 될지 몰랐다.
‘분위기는 얼추 넘어왔군.’
나는 조용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외부인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저, 계장님?”
“왜 그러는가?”
“그런데, 새로 온 손님들이 있습니다.”
“뭐?”
그제야 사람들은 총회장 뒤편에 새로 도착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튼실한 체격에 날카로운 포스를 뿜어내고 있는 사내.
바로 차진혁 경감이 도착한 것이다.
차진혁 경감은 뒷문에 서서 잠시 관망하고 있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로 향하는 것을 알아차리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한 젊은 사내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따라 걷고 있었다.
차진혁 경감이 앞으로 도착하자 나는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했다.
“이분은 해양경찰의 차진혁 경감입니다.”
사람들은 진짜 경찰이 이 자리에 나타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표정.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차진혁 경감님께는 제가 미리 첩보와 함께 부탁드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바로, 배상금을 불법으로 배분받은 사람을 찾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
“경감님,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요?”
차진혁 경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진혁 경감이 옆 사람의 어깨를 두들기자 그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 저 사람은?”
어촌 마을 사람들 중에 그 사람의 정체를 알아낸 사람이 있었다.
“우리 마을도 아니고 옆 마을 다른 어촌계 사람인데?”
“뭐?”
사람들은 그제야 새로 등장한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 말이 맞다고 소리쳤다.
“경감님, 이 사람의 수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미 일차 수사를 마쳤습니다. 전부 자백했습니다.”
“그럼 뭐라고 하던가요. 공범까지 자백한 것인가요?”
“네, 배상금을 지급받은 돈의 일부를 어촌계장에게 지급했다고 자백했습니다.”
“······!”
“뭐? 진짜야?”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촌계장의 얼굴은 이미 폭발하는 화산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나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거짓말이다! 여러분 이거 전부 거짓말인 거 다 아시죠?”
“······.”
하지만 어촌계장의 외침에 동조하는 이는 없었다.
“여러분 저 사람들의 말은 다 거짓말입니다! 내가 이 마을에서 어촌계 일을 보아온 것이 수십 년인데 저놈들 말을 믿고 나의 말을 못 믿는 겁니까?”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사람들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저 사람이 자백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증거도 없이 저를 모함하는 것이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증거가 없지 않나! 이건 함정 수사야. 아니 기획 수사가 틀림없네. 저 비대위 놈들이 나를 모함하기 위해서 꾸며낸 일이야!”
“······.”
사람들은 어촌계장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 이 새끼가 진짜!’
황당하네. 이렇게 억지를 부리다니 참으로 거짓말이 능숙한 놈이었다.
그리고 감히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
“경감님, 증거가 없습니까?”
차진혁 경감이 나의 말에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당연히 있지요. 이미 송금 내역 등 금융 자료를 전부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현금을 전달한 장부도 이미 압수했습니다.”
“어, 어!”
증거를 가져오라고 외치던 어촌계장의 얼굴이 삽시간에 시꺼멓게 변해갔다.
나는 전의를 상실한 어촌계장을 바라본 후 도매상에게 다가섰다.
“하고 싶은 이야기 없습니까?”
“······.”
도매상은 마지막 희망을 잃은 듯 보였다. 그가 기대한 것은 어촌계장의 인맥이다.
마을 유지로 정, 관계에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 있으니 이번의 위험도 잘 해쳐 나갈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예전과는 달랐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전부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매상은 조용히 그동안 있었던 일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보이스 피싱 (1)
-부산 어느 마을 어촌계 총회장
도매상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로 말했다.
“어촌계장입니다.”
“······?”
“인근 개발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양식장을 고의로 훼손하고 훔쳐 간 사람 말입니다.”
“······!”
“전, 그저 어촌계장이 사람을 시켜서 건네준 물건들을 거래처에 유통시킨 것이 전부입니다!”
‘저게 억울할 일인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저놈도 그저 한패일 뿐이다. 믿고 있던 어촌계장이 잡혀갈 분위기이자 뒤늦게라도 손절하려는 것일 뿐.
나는 도매상에게로 다가서며 물었다.
“알았잖아요.”
“네?”
“훔쳐 온 물건이라는 거 알고 팔았던 거잖아요.”
“······.”
도매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사람들의 냉정한 시선뿐.
도매상은 포기한 듯 천천히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도매상이 사건의 전말을 실토하자 그 이후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차진혁 경감의 주도하에서 현장이 정리되고 있었다.
< 띠링! >
+
<메인 퀘스트를 달성을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달성을 축하합니다.
“당신의 활약으로 해신해운은 어민들의 어장을 훼손했다는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났습니다!”
보상 :
- 해신해운의 평판이 상승했습니다.
- 당신의 명성이 급격하게 상승했습니다.
- 지역 주민들에게 당신의 명성이 울려 퍼집니다.
- 사내 평가가 올라갑니다.
- 유관 팀에서 당신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
* * *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며칠 후.
띠리링!
전화기 소리가 울리자 정재훈 사원이 빠르게 수화기를 들고 당겨 받기 버튼을 눌렀다.
각 팀의 신입 사원들에게 맡겨진 ‘주된 임무’ 중 하나가 팀 전화나 부재중 전화를 잘 받는 것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3년은 일해야 한 명 몫을 해낼 수 있다거나, 신입 사원을 교육하는 데 최소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등의 말이었다.
물론 나는 꼰대스러운 발언에 동의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각 팀의 신입 사원들이 팀 내부의 자잘한 잡무를 맡는 것은 관례상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정재훈 사원은 지나치게 솔직한 성격이 흠이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해신해운 법무팀 정재훈 사원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브라질 지사에 근무하고 있는 신용재 과장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과장님이랑 통화하고 싶은데 자리에 계신가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정재훈 사원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과장님.”
“응?”
“브라질의 신용재 과장님이라고 합니다. 연결해드릴까요?”
“오? 그래 돌려줘.”
“네. 알겠습니다.”
나의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다. 나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장보고 과장입니다.”
“보고야, 나 신용재 과장.”
“예, 형. 잘 지내시죠?”
“덕분이지.”
“네?”
“어머니한테 연락받았다. 덕분에 보이스 피싱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하시더라.”
“흐흐흐. 뭐 전화로 조심하라고 말씀드린 게 전부인데요 뭐. 별일 아닙니다.”
“그게 어디냐. 정말 고맙다.”
지난 며칠 전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그건 지난 주말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 * *
-부산 영도 장보고의 집
며칠 전 일요일 아침.
나는 부산 출장을 마치고 금요일 부산 영도 본가에 잠시 내려와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와 늦잠을 자고 있던 중.
전화기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음? 이 전화번호는?’
발신자 표시는 신용재 과장으로부터 받은 그의 어머니 전화번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