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200)

“법리 문제야 정 안되면 외부의 해상 변호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면 될 일 아닌가. 회사의 사내 법무팀이라면 법리보다도 이런 발상의 전환이 더 중요한 법이지. 가장 중요한 자질은 실무를 완벽히 이해하고 거기에 법률 지식으로 덧붙이는 것이지.”

“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변호사이고,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 대학인 한국대학 법대를 졸업한 사람이 오히려 사내 법무팀원들에게 법률 지식보다 실무적 지식을 강조하다니.

일반적인 회사원이라면 가지기 힘든 자세였다.

과연 빠르게 승진한 능력자다운 자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현재형 팀장이 만족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세게 팡팡 두들겼다.

‘왠지 미안하네?’

하지만 한편 살짝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사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해기사라고 해도 지금 이 자료만으로 어민들의 면허 구역까지 확인할 재간은 없다.

나는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재판 과정에서 불거진 쟁점을 현재형 팀장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게 누구의 아이디어였더라.’

전생에 눈치 빠르게 이 쟁점을 밝혀낸 사람이 따로 있었다.

‘뭐,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아주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보다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드러난 사건 이면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기 때문이다.

내가 지적한 쟁점은 전생에도 법원에서 치열하게 공방이 오간 쟁점이다.

해신해운을 대리한 해상 변호사들이 치열하게 주장을 전개했지만 당시 법원의 판결은 해신해운의 패소였다.

‘이 쟁점을 부각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지.’

전생의 법원은 당시 “해신해운의 선박을 운항하는 선장 등은 정치망 어장, 양식장 등을 피해 운항해야 할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일부 승소 판결이라는 것은 원고들의 청구가 전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일부분은 인정이 되었다는 뜻이다.

당시 재판부는 “어장의 규모, 훼손 형태, 사고 일시 무렵의 기상 상태 등에 비춰 해신해운 소속의 해당 선박 외 다른 선박이 어장을 훼손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이 판결의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지.’

당시 사건을 취급한 재판부는 당시의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해신해운 선박이 아니라면 어장, 어구 등을 훼손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선박이 없다며, 가장 근접한 시간에 인근 해역을 지나고 있던 해신해운의 선박이 어장을 훼손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음에도 법원은 이런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어업 면허 구역과 관련해서는 ‘해신해운의 선박이 어업 면허 구역 밖에 있는 어구를 훼손했더라도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선박은 주위 상황 및 다른 선박과 충돌할 수 있는 위험성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도록 시각·청각 및 당시의 상황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 항상 적절한 경계를 해야 한다”며 “선박의 선장 등은 정치망 어업 보호 구역 인근을 지날 경우 어구의 존재 등을 잘 살피면서 안전하게 운항할 주의 의무가 있음에도 이를 게을리한 직무상 과실이 있다”고 판시했다.

이어서 “어구가 면허 구역을 이탈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책임 제한의 요소로 고려할 수 있을 뿐 배상 책임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다만, 어구가 면허 구역 밖에 있었던 점 등을 감안해 해신해운 측의 책임을 70%로 제한했다.

결국 손해의 범위에 대해서는 우리의 주장이 일부 받아들여졌다. 어망 수리비, 어망 설치 작업이 진행된 기간 동안의 조업 손해비 등을 포함해 일부인 3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이 이루어졌다.

‘재판으로 이 사건을 가지고 가면 또다시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그 진범은 이 사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어민들의 어구를 훼손했기 때문에 진범을 체포해 피해가 계속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일단 부산으로 한번 내려가 봐야겠어.’

결심을 마친 나는 현재형 팀장에게 말했다.

“출장을 좀 다녀오겠습니다.”

“출장?”

“네, 이 사건은 법정 소송으로 끌고 가는 것보다는 사전에 합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으음.”

고민하는 눈치의 현재형 팀장. 나는 그가 결심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영국 변호사들이 즐겨 말하는 구절을 조용히 읊었다.

“Settlements are always better than rullings.(합의는 언제나 판결보다 낫다.)”

나의 말에 현재형 팀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래, 맞는 말이네. 그렇게 하게. 부산에서 일하면서 사건 처리와 관련해서 법무팀장 전결로 가능한 일들은 선 조치 후 보고 하도록 하게.”

“······!”

제법 파격적인 신뢰였다. 선 조치 후 보고라니.

웬만큼 신뢰하는 부하 직원이 아니라면 법무팀장 전결 사항을 임의 처리하도록 하는 경우는 없었다.

“뭐 그리 놀라나?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신뢰는 당연하지. 임원 전결 사항이 있으면 미리 나에게 알려주고.”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의 신뢰에 큰 웃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정재훈 사원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장님, 무슨 일이에요?”

“정재훈 사원, 일단 빨리 짐 챙겨.”

“네?”

“출장이다. 바로 부산으로 간다.”

정재훈 사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과장님, 저도요······?

“그래.”

“저도 꼭 가야 되나요?”

“우리 파트에 둘밖에 없잖아.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아, 오늘 저녁에 소개팅 약속 있는데······.”

“뭐······?”

나를 바라보는 정재훈 사원의 표정은 제법 간절했다.

“인사팀 동기한테 부탁해서 겨우 약속 잡은 거란 말이에요.”

“약속을 좀 변경하면 안 되나?”

“이번에도 겨우 약속 잡은 거란 말이에요!”

“······.”

“제가 약속을 파토 내면 아마 다음 기회는 없을 텐데!”

정재훈 사원의 간절한 표정을 보고 있자 선뜻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신입 사원들과 달리 아주 당당하게 회사 생활을 해서 사람들이 정재훈 사원을 가리켜 있는 집안의 아들이 아니냐는 말도 돌았다.

그런 정재훈 사원이 보기 드물게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사 일이 우선이지 무슨 소리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소리를 하면 꼰대 상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테니까.

안 그래도 나이에 비해 너무 취향이 나이 들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물론 잘생긴 외모 때문에 그런 취향마저도 ‘진중하다’거나 ‘어른스럽다’, ‘기품 있다’라는 칭찬으로 퇴색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나밖에 없는 후임을 실망시킬 순 없었다.

‘이 방법밖에 없나.’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떠올렸다.

“내가 해줄게.”

“네?”

“소개팅 내가 해준다고.”

“정말요?”

“그래, 나 못 믿냐?”

나는 핸드폰 사진첩을 뒤졌다. 그리고 빠르게 정재훈 사원의 눈앞에서 핸드폰을 흔들었다.

“음? 과, 과장님 잠시만요 제대로 못 봤어요.”

“이번 일 잘 마무리하면 한번 고민해볼게.”

나의 말에 정재훈 사원은 빠르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평소 나의 잘생긴 외모를 부러워하며 주변에 예쁜 사람이 많을 것 같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오던 사람이 아닌가?

그의 상상은 사실이었다. 정재훈 사원은 한껏 큰 기대에 부푼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장님, 흐흐흐.”

“왜?”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번 출장 동안 최선을 다해서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

이럴 때는 제법 처세에 능한 사람처럼 보였다.

* * *

-부산 중앙동 해신해운 부산 지사 운항팀 회의실

같은 날 오후.

빠르게 부산으로 달려온 우리는 바로 부산 지사 운항팀으로 향했다.

회의실로 들어서자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운항팀은 대부분 해기사 출신들이었고, 승선하는 동안 계속 연락을 주고받기 때문에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어! 보고야 왔냐!”

인사를 하며 회의실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나를 반겼다.

“같이 온 법무팀 정재훈 사원입니다.”

“반갑습니다. 운항팀장입니다.”

운항팀장이 우리를 반갑게 반겼다.

“팀장님, 일단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일이 급하니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지. 일단 자리에 좀 앉게.”

나는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본선 위치는 어딥니까?”

“아직 부산신항 터미널일세. 선적 작업만 마치면 곧 출항할 예정이라네.”

“다행히 출항 전이군요.”

“빨리 나가야 해. 안 그래도 스케줄이 약간 지연됐거든. 부산항에서 시간을 따라잡으려고 스케줄도 최대한 조정했다니까.”

“음, 그래요? 그런데 본선 선장님은 사고 관련해서 뭐라고 하던가요?”

“배에서는 아니라고 하지. 사고도 없었고, 어장이나 어구들도 없었다고. 이번에 입항하면서 평소보다 살짝 돌아서 온 감은 있지만 평소 다니는 항로를 벗어나진 않았다고 특이 사항도 없었다고 하더라고.”

“어민들은요? 요구 사항이 구체적으로 뭡니까?”

“아주 막무가내로 우리한테 책임을 묻고 있지. 자기들이 양식장하고 어구가 훼손된 것을 발견하기 직전에 그 방면으로 지나간 배는 해신해운 선박이 마지막이니 우리 책임이라는 거야.”

“뭐, 합의안 같은 건 제시된 건 없고요?”

“어민들은 10억 원 이상이 피해라고 하면서 10억 원을 합의금으로 주면 고소도 취하하고 민사 소송도 안 하겠다고 하긴 하는데···.”

“금액이 좀 크긴 하네요.”

“그래서 본사에서도 선뜻 결정을 못 하는 게 아니겠나.”

우리나라 돈 10억 원이 소가(소송의 가액)인 소송.

큰 소송이건 사실이다. 하지만 해신해운 정도의 대형 선박 회사 입장에서는 크게 주목할 만한 소송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회사라 하더라도 근거 없이 상대방이 요구한다고 매번 합의금을 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10억이라는 돈을 떼를 쓰며 요구하고 여론전을 펼친다고 해서 선뜻 지급하기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뭐 일단 상황은 예상대로 기억 그대로구나.’

그럼 일단, 좀 움직여 볼까?

나는 운항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팀장님, 그럼 일단 배를 좀 세워야겠습니다.”

“뭐? 뭘 세워?”

“부산신항에 있는 “가이아”호요. 출항하지 말고 배를 잠시 세우자고요.”

“뭐? 장보고 일항사, 아니 장보고 과장 또 배를 세우자고?”

‘음? 이게 무슨 소리지?’

나는 운항팀장의 ‘또’라는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M.V “가이아”호 어장 훼손 사건 (2)

-해신해운 부산 지사 운항팀

‘이거 잘못하면 사람들이 오해하겠네.’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무턱대고 배를 세우는 그런 사람으로 오해할 만한 소리였다.

나는 정색한 후 대답했다.

“팀장님, 무슨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음?”

“배를 또 세운다니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턱대고 선박들 운항을 못 하게 방해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오해하겠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배를 세웠던 적이 있긴 있다.

쓰나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해적들의 피랍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다른 방법이 없는 그런 순간들 말이다.

운항팀장도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뭐 장보고 과장······.”

“네, 팀장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금은 자네가 육상직으로 전환했으니 내가 하는 말인데.”

“네.”

“장보고 과장이 승선할 때는 말이야. 운항팀원 중에 장보고 과장이 승선한 배를 담당하면 꼭 사고가 생긴다며 다들 걱정이 많았다네.”

“허허허. 팀장님 농담도 참!”

“아닌데?”

“네?”

“농담 아니라고.”

“······.”

음, 아무래도 사람들 사이에 아주 심각한 오해가 있는 모양이네?

‘내가 아니었으면 더 큰 사고 때문에 스트레스로 제명에 죽지도 못했을 놈들이!’

하지만 운항팀장은 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

나의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항팀장이 말을 이어갔다.

“하하하, 뭐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고. 그래도 장보고 과장이 배를 타는 동안 유독 배를 많이 세운 건 사실이지 않은가?”

“······.”

‘뭐, 그렇긴 하지.’

나도 염치가 있는 인물. 배를 자주 세운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달리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리고 문제는 지금 이 순간이다.

이번에도 배를 잠시 세워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으흐흠! 그래도 팀장님 일단 할 일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음?”

“수중에 다이버를 투입해서 검사를 좀 해야 되는데 최대한 빨리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으음, 운항 스케줄이 더 지연되면 안 되는데······.”

“최대한 스케줄에 지장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기차를 타고 오면서 미리 업체에 연락을 해뒀습니다.”

“무슨 업체?”

“오션플래닛이라고 아시죠?”

“수중 작업하는 잠수 회사 아닌가?”

“네, 수중 공사 업체인데요. 잠수 다이버들을 좀 준비해 달라고 요청해 뒀습니다. 가이아호 스크류에 걸린 어망들을 전부 회수하려고요.”

“음?”

운항팀장이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장보고 과장이야.”

“네?”

‘왜 이렇게 놀라는 거지?’

운항팀장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그물들을 회수해서······.”

하던 말을 멈춘 운항팀장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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