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200)

그리고 어쨌든 나를 위해 자리도 마련해주고 노력해준 현재형 팀장을 공격하는 모양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슥,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저기···.”

침묵이 흐르던 회의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모여졌다.

“그거 보여드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뭐?”

박기성 부장이 나를 노려보며 반문했다.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여유로운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당당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실력 말인데요. 제가 보여드리면 되잖아요.”

주재원

-해신해운 본사 지하 1층 매점

잠시 후.

제법 강렬하게 법무팀 데뷔전을 치른 나는 머리를 식힐 겸 지하의 매점을 찾았다.

첫날부터 매일 얼굴 볼 사이인 팀원을 상대로 날을 세울 생각은 아니었지만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장보고 과장님!”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사람은 정재훈 사원.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오, 과장님 진짜 대박!”

“음?”

정재훈 사원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말했다.

“흐흐흐. 과장님, 회사에서는 항상 말을 조심해야 되거든요. 누가 어디서 보고 들을지 모른답니다. 사람들이 사내 소문은 정말 빨리 퍼진다고 하더라고요.”

소문을 신경 쓰는 사람치고는 말이 많은 유형의 사내로 보였다. 듬직한 체구에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외모와 성격이 매치가 잘되지 않는 스타일이랄까.

“며칠 전에도 8층 재무 그룹의 직원들이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당사자들은 다들 알고 있다는 걸 자기들만 모르는 눈치라니까요.”

“뭐, 사내에서 연애도 할 수 있지 그거 가지고 그럽니까?”

“남자가 유부남이거든요.”

“······.”

음, 생각보단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애써 점잖은 표정을 유지했다. 비슷한 나이대인 정재훈 사원 앞에서 상급자로서의 품위를 벌써 잃을 생각은 없었다.

“음, 뭐 그럴 수도 있죠. 저는 남의 이야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뭐, 사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는 법. 앞으로 갈 길이 바쁜 나는 상관없는 일에는 큰 관심을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유부남 직원의 배우자도 우리 회사 직원이거든요.”

“······?”

“사내 커플로 결혼한!”

“······!”

뭐? 이건 생각보다 놀라운 소리였다. 생각보다 본사는 사랑이 싹트는 곳이었다.

갑자기 호기심이 생기는걸?

“으흠! 그래서 뭐, 누굽니까? 그 사람이?”

“과장님 관심 없다고 하시더니?”

“······.”

“그나저나, 과장님 덕분에 오늘 정말 속이 시원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이죠?”

아마 박기성 부장을 상대한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연기를 하기로 했다.

혹시라도 내가 일부러 박기성 부장에게 대든 것으로 법무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아직 곤란했기 때문.

그리고 이 정재훈 사원이라는 사람에 대한 파악도 아직 부족한 상황이지 않은가. 이 사람을 상대로 본심을 전부 드러내는 것은 아직 성급한 짓이다.

정재훈 사원이 말을 이어갔다. 그는 회의실에서 있던 상황을 떠올리며 아직도 흥분한 표정이었다.

“사실 제가 처음 팀에 온 날도 저랬거든요.”

“누가요?”

“박기성 부장이요. 제가 처음 온 날에도 저한테 저런 헛소리를 했다니까요.”

‘재밌는 사람이네.’

정재훈 사원은 그날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는 듯 속사포로 박기성 부장에 대한 뒷담화를 털어댔다.

“손님들 오면 커피 타 오라고 시키고, 물이 적으면 물이 아깝냐고 난리 치고 물을 많이 타면 또 맛없다고 난리라니까요. 여기가 무슨 다방인가? 그냥 대충 마시면 되지 회사에서!”

정재훈 사원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박기성 부장에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정재훈 사원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나의 동의를 구려고 말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재훈 사원은 손을 들어 올려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찰싹 치며 말했다.

“하하하. 제가 너무 흥분해서 과장님 앞에서 입방정을 떨었네요.”

그는 반성의 차원에서 입술을 몇 차례 더 때렸지만 그다지 반성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마도 박기성 부장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동지애를 느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직 나는 그 정도는 아닌데.’

“과장님, 뭐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커피 심부름 시키셔도 됩니다. 박기성 부장이 하도 저를 괴롭히니 이런 말씀을 드린 거지 뭐 크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뭐, 겁나서 부탁하겠습니까? 그리고 요즘 시대에 뭐 부하 직원들한테 그런 부탁 하고 하는 시대인가요. 제가 직접 하면 되죠.”

“하하하. 과장님도 농담 잘하시네요. 하하하. 그럼 저, 저는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정재훈 사원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더니 빠르게 자리를 비웠다.

‘재밌는 사람이네. 그래도 신입 사원이라면 저런 쾌활한 모습도 필요하겠지.’

진중한 외모와는 달리 방정맞은 스타일이었지만 젊고 솔직한 모습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 * *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며칠 후.

법무팀에 적응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법무기획이라는 정체불명의 신설 파트를 만든 상황이다 보니 우선 업무 절차서를 만들고 업무 분장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었다.

새롭게 일을 시작하다 보니 절차서를 만드는 일부터 서류 작업을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지만 크게 분담되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신조선 인수 때도 마찬가지고 서류 작업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재훈 사원은 생각보다 일머리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굉장히 솔직한 성격이라 가끔 그의 멘트에 깜짝 놀랄 때도 있었지만 업무 처리 능력은 손색이 없었다.

‘혹시 회사 유력자의 아들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신입 사원이 저렇게 대담하게 회사 생활을 한다는 게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나도 삼항사 시절에는 저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대체로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다.

‘아직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오늘도 내 뒤통수를 노려보며 호시탐탐 내 약점이 보이길 노리고 있는 박기성 부장의 따가운 시선을 지금도 감지할 수 있다.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사건이 필요했다.

하지만 법무팀이 바쁘지 않은 것은 회사 입장에서는 사고 없이 일이 잘되어간다는 뜻이다. 회사에 새로운 분쟁이 발생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니까.

제법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때.

삑! 드르륵!

10층 사무실 중앙에 설치된 문 앞에 사원증을 터치하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20여 명쯤 되어 보이는 사람들 무리가 나타났다.

“음? 무슨 일이지?”

크게 소란스러울 일이 없는 본사 10층 사무실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자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정재훈 사원이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과장님, 이번에 주재원으로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인가 봐요. 인사하러 다닌다고 하던데.”

“아! 주재원.”

나는 정재훈 사원의 말에 경력직 오리엔테이션 교육이 이루어지는 강의실 옆에서 주재원 교육이 진행되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해외 주재원 파견이라니 부럽다.”

정재훈 사원은 부러운 눈빛으로 주재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는 게 부러워?”

며칠 동안 제법 친해진 나는 정재훈 사원에게 말을 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럼요. 해신해운이 대졸 공채 시장에서 인기 있는 이유도 사실 그것 때문이거든요. 과장 정도 직급이 되면 거의 대부분 주재원 기회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구직자들 사이에서 큰 메리트로 작용한답니다.”

정재훈 사원은 말을 마치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저 사람들은 대부분 컨테이너사업부 사람들이거든요. 주재원 자리 대부분이 컨테이너사업부 소속이니까요.”

정재훈 사원이 침울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컨테이너사업부를 희망했으나 법무팀으로 온 비운(?)의 사내가 아닌가.

물론 법무팀에서도 해외 주재원 자리는 있다.

문제는 법무팀 소속으로 주재원 파견을 나갈 수 있는 곳은 미주지역본부 1자리에 불과하다는 것.

미주지역본부는 좋은 주재원 자리로 평가받았지만 20여 명이 넘는 법무팀 직원들이 한 자리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자리라는 뜻.

과거에는 여러 나라에 주재원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현지의 법무 인력을 늘리면서 자리가 많이 축소된 상황이었다.

“BK해운만 해도 싱가포르하고 런던에도 법무팀 직원들이 파견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회사는 법무팀 규모는 제일 큰데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니까요.”

정재훈 사원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때 주재원으로 파견 나가는 사람들이 법무팀장에게도 인사를 하기 위해 우르르 법무팀원들이 있는 자리로 몰려왔다.

법무팀 직원들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 인사를 나눴다. 주재원으로 나가면 최소 3년간 근무를 하기 때문에 앞으로 3년 동안은 만날 수 없기 때문.

나는 주재원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전생에서는 인연이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현생에서는 아직 연을 쌓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그때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 저 사람은?’

낯이 익은 얼굴. 기억 속의 얼굴보다는 젊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보고야!”

나에게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해양대학교 재학 시절 학교를 함께 다닌 2년 선배 신용재 과장이었다.

신용재 과장은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벌크선에서 주로 승선했기 때문에 같이 승선할 기회도 없었다.

그가 몇 년 전에 육상직으로 전환해서 벌크사업부로 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신용재 과장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번 생애에서는 처음 만나는 것이지만 그의 젊은 얼굴은 예전의 기억 그대로였다.

“그래, 본사에 왔다는 말은 들었는데 나도 교육받고 출국할 준비를 한다고 바빠서 인사도 못 했네.”

“저도 발령받아서 본사로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형도 이번에 주재원으로 나가요?”

“그래 원래는 다른 분이 나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운이 좋았지 뭐.”

“주재원으로 나가는 곳이 어디라고 했죠?”

“브라질이야.”

“브라질?”

“그래, 최근 그쪽 벌크 시장이 뜨겁거든.”

브라질 그리고 벌크 시장.

그의 말을 듣자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해신해운의 주력 사업 분야는 정기선 시장인 컨테이너운송 사업. 하지만 2000년대 후반 들어 해신해운은 사업 다각화에 박차를 가한다.

벌크 회사를 흡수 합병하고, 터미널 사업과 3자 물류 사업과 물류 IT 서비스 사업까지 종합 물류 회사로 발돋움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된다.

벌크선 시장은 완전 경쟁 시장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영업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상업 분야.

해신해운이 1등 국적 선사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했다.

이때 해신해운의 벌크사업부에서는 남미 시장에서의 영업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남미의 자원 시장을 노리는 것이었다.

최우선 목표가 바로 세계 최대의 광산 업체인 브라질의 VL그룹이었다.

브라질의 VL그룹은 호주, 영국의 광산업체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광산업체이다.

주력은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으로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양의 철광석은 세계의 공장으로 대부분 운송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들도 남미에서 가장 큰 시장인 브라질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국동제강은 2000년대 초반부터 브라질 고로 사업에 진출한 상태. 우리나라의 국동제강과 세계 최대 철광석 회사인 브라질 VL그룹은 지분을 합작 투자해 현지에 제철소를 설립해 운영 중이었다.

세계 최대의 광산 회사이자 국내 대기업들과도 제휴가 활발한 기업.

거래만 성사시킬 수 있으면 남미 시장에서 해신해운의 영업력을 크게 확대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VL그룹이라.’

VL그룹은 해운 불황기와 상관없이 곧 안정적인 화물 운송을 위해 해운 회사들과 대규모 장기 운송 계약을 체결한다.

이때 한국의 해운 회사들 중 벌크선 시장에 뒤늦게 뛰어든 후발 주자인 한 중형 해운 회사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해운업계의 불황 속에서 승승장구하며 성장세를 구가하는 해운 회사의 존재감이 빛났다.

그 비결이 바로 VL그룹과의 장기 운송 계약.

VL그룹으로부터 다수의 운송 계약을 한국의 중형 해운 회사가 따낸 것은 단연 업계의 화제가 되었다.

전생에 이 전용선 계약을 따낸 해운 회사들은 해운 불황기를 기회로 삼아 크게 성장하고 불황기를 버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VL그룹의 계약을 성사시킨 주인공이 바로 ‘신용재 과장’이었다.

해신해운을 퇴사하고 규모가 훨씬 작은 중형 해운 회사로 자리를 옮긴 신용재 과장이 VL그룹과의 계약으로 업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브라질로 출국했던 신용재 과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신해운을 퇴사하고 다른 회사로 이직한다.

그리고 회사를 떠난 이후 그는 브라질 현장에서 닦아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탁월한 영업 성과를 올리게 된다.

‘이 사람은 잡아야 된다.’

이 사람은 해신해운에 꼭 필요한 인재.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회사를 떠난 이유가 뭐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렇게 큰 사건은 아니었는데······.

‘아!’

그건 신용재 과장이 브라질로 출국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집으로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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