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200)

정재훈 사정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직 엘리베이터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법무팀은 경영지원 부서잖아요. 인사팀같이 사내 파워가 있는 부서도 아니고, 회사 내에서 별로 안 쳐주거든요. 장보고 과장님은 사내에서 엄청 유명하신 분이라고 하던데, 굳이 이 팀으로 올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요.”

“······.”

“다른 좋은 팀도 많은데 굳이······.”

신입 사원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당돌한 소리처럼 들렸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쩝,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고.’

나도 원해서 법무팀으로 가는 것은 아니니까.

정재훈 사원이 내 표정을 한차례 살핀 후 말을 이어갔다.

“저도 사실 컨테이너 영업팀으로 발령 내달라고 했었거든요. 해신해운은 컨테이너 사업 비중이 제일 크잖아요. 컨테이너 사업부에서 시작해야 앞으로 커리어가 잘 풀린다고 하더라고요.”

“허허허. 그런데 왜 법무팀으로 발령이 났습니까?”

“쩝, 이번 신입 사원 중에 법대 출신이 저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부모님이 법대 가라고 해서 갔던 건데 이렇게 취업해서까지 제 발목을 잡을지 몰랐네요.”

“허허허. 그렇군요.”

정재훈 사원이 고개를 슬며시 돌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과장님,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음?”

“제가 법무팀으로 발령 난 이유도 알고 보니 장보고 과장님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음? 무슨 소리야 이게.’

나를 바라보는 정재훈 사원의 얼굴은 제법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법무팀

-해신해운 소강당 엘리베이터 앞

정재훈 사원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했다. 그가 법무팀으로 발령 난 이유가 나 때문이라니?

‘무슨 소리야 이게.’

이 사람은 이번에 처음 보는 사람이다. 전생에는 인연도 없었던 사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정재훈 사원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사실 농담한 겁니다. 죄송해요 과장님.”

“네?”

“의외로 진지한 스타일이시네요.”

‘뭐야 이 자식?’

···제법 당돌한 스타일이네?

“그런데, 사실 그래도 제가 전혀 근거 없는 소리 한 건 또 아닙니다.”

“음? 무슨 뜻이죠?”

“인사팀장님 말이 원래는 제가 희망했던 컨테이너사업부로 발령이 날 예정이었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법무팀에서 갑자기 충원을 요청했는데 신입 사원들 중에는 저 말고는 법무팀으로 갈 사람이 없었다고······.”

“음,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왜 저 때문이라는 건지?”

“얼마 전 정기 인사 때 법무팀으로 발령이 나서 와보니 인원을 충원한 이유가 새로 파트를 신설하는 것 때문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음, 신설 파트?”

“네, 법무팀 안에 새롭게 법무기획 파트를 하나 신설했는데 사람이 갈 사람이 없다고······.”

“법무기획 파트라는 파트도 있습니까?”

“네, 법무팀장님이 말씀하시기로는 장보고 과장님이 기획 쪽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다며······.”

“······.”

이게 무슨 소린가?

나는 경영기획팀으로 보내달라는 거였지 이런 파트를 만들어 달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나 때문에 새로운 파트를 신설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정재훈 사원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

“뭐,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만든 파트는 아니고요.”

“아, 그건 정말 다행이군요.”

공식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각종 특혜 시비에 시달릴 뻔했다.

안 그래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입장이니 초반에는 좀 조용히 지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어찌 됐든 나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지 현재형 팀장이 제법 요란스럽게 행동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과장님, 그럼 가기 전에 간단하게 팀 소개를 좀 해드릴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재훈 사원이 설명을 시작했다.

“법무팀 안에 총 파트가 3개가 있거든요. 기업법무 파트, 보험클레임 파트, 컴플라이언스 파트. 기업법무 파트 안에 법무기획 파트라는 내부적인 파트를 만든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팀장님 말씀으로는 일이 잘되면 인사팀과 이야기해서 공식적인 파트로 만들어 볼 생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저도 법무기획이겠군요.”

“네, 맞습니다.”

“파트원은 누군가요?”

정재훈 사원은 손을 들어 올려 자기를 가리켰다.

‘음, 그게 전부?’

“한 명?”

“네, 우리 둘밖에 없습니다.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장보고 과장님이 일종의 파트장이고 제가 유일한 파트원이죠. 흐흐흐.”

웃고 있는 정재훈 사원의 얼굴. 하지만 그리 밝은 표정만은 아니었다.

신입 사원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설 파트에서, 그것도 법무팀 경력이 전혀 없는 경력직으로 갓 입사한 젊은 과장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회사원이라면 라인을 잘 타야 되는데. 법무팀에 회사 내부에 입지가 전무한 경력직 과장이 상사라니.

정재훈 사원 입장에서는 힘들게 입사한 회사 생활이 꼬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것이다.

살짝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뭐 회사원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회사원은 까라면 까야지.

틱틱거리는 정재훈 사원의 모습도 어느새 귀엽게 느껴졌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흐흐흐. 이놈아, 지금은 모르겠지. 얼마나 좋은 기회를 잡은 것인지를.’

얼마 지나지 않으면 알게 된다.

자신이 이번에 잡은 줄이 썩은 동아줄이 아니라는 것을.

금줄, 아니 다이아몬드 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해신해운 본사 10층 법무팀

우리는 10층에 내려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과장님 자리는 여깁니다.”

정재훈 사원이 손을 뻗어 정면 쪽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신해운 빌딩 10층은 경영지원본부인 인사팀과 총무팀, 경영기획본부인 법무팀과 경영기획팀이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큰 빌딩의 한 층 전체를 사용하다 보니 옆으로 길게 책상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법무팀은 거의 중앙에 위치했다.

양쪽 끝에 양 본부의 담당 임원실과 회의실이 있고, 왼쪽에서부터 인사팀, 총무팀, 법무팀, 경영기획팀 차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법무팀원들이 사용하는 책상은 세로로 총 4줄로 배치되어 있었다,

나에게 배정된 자리는 첫 번째 줄의 뒤에서 두 번째 자리. 아마도 내 옆자리는 정재훈 사원의 자리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창가 쪽은 팀장들의 책상이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 앞으로 반대쪽을 향해 파트장 그리고 팀원들의 책상이 쭉 연결되어 있었다.

“오! 장보고 과장 왔나?”

현재형 팀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네, 팀장님.”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현재형 팀장이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로 걸어왔다.

‘이제 본사로 왔으니 사회생활을 좀 해야겠지?’

그는 내가 이곳으로 오게 만든 원흉(?)이었지만 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현재형 팀장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자, 그럼 첫날인데 일단 팀원들한테 소개도 해야 하니 회의실로 잠깐 모입시다.”

“네, 팀장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현재형 팀장의 말에 정재훈 사원이 빠르게 움직였다.

회의실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모으는 일은 팀에서 막내인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잠시 후 회의실.

법무팀 사람들이 회의실로 모두 들어섰다.

총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의실 의자에 착석하고, 나는 정재훈 사원과 함께 한쪽 구석으로 자리했다.

정재훈 사원은 내가 앉은 탁자 위로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과장님, 팀원 명단입니다.”

“오, 고마워요.”

부탁하지도 않은 자료를 준비하다니. 그는 첫인상하고는 다르게 제법 일머리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됐다.

“팀장님, 모두 모였습니다.”

“음, 수고했네.”

정재훈 사원이 현재형 팀장에게 사람들이 모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자, 모두 바쁘시죠? 그래도 오늘 새롭게 팀으로 합류한 사람이 있으니 간단하게 인사를 하려고 불렀습니다.”

현재형 팀장이 나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제가 말한 대로 이번에 우리 팀에 합류한 장보고 과장입니다. 다들 소문을 들어서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팀장의 말에 사람들이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의 미소는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무표정한 표정이었다.

“자세한 소개는 본인한테 직접 들어봅시다.”

현재형 팀장이 말을 마치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장보고라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 일등 항해사로 근무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 걱정이 많이 앞섭니다.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너그럽게 봐주시고 앞으로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짝!

사람들이 박수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뭐, 장보고 과장에게 궁금한 거 있는 사람 없습니까?”

짧은 자기소개를 마치자 현재형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때 현재형 팀장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내가 손을 들어 올렸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박기성 부장.’

나는 탁자 위로 시선을 돌렸다. 정재훈 사원이 건네준 법무팀 명단을 빠르게 살폈다.

‘지금은 이 사람이 파트장이구나.’

그는 부장으로 법무팀의 보험클레임 파트장이었다.

전생에 내가 본사로 올라왔을 당시 법무팀장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그는 해신해운에서 오랜 시간 선박 보험 및 P&I 보험 등 관련 업무를 담당한 사람으로 현재형 팀장보다 오히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사내 변호사에 업무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받은 현재형 팀장이 경영진에 의해 팀장으로 깜짝 발탁되었기 때문에 파트장들은 오히려 현재형 팀장보다 연장자였다.

법무팀은 총 3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중 박기성 부장이 맡고 있는 보험클레임 파트가 가장 인원수가 많았다.

선박 보험과 P&I 보험을 취급하는 보험 업무와 운송 과정에서 화물 손상 등 클레임이 발생하는 경우 이런 분쟁을 핸들링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파트였다.

박기성 부장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반갑습니다. 나는 박기성 부장입니다.”

“네, 부장님.”

“장 과장,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했죠?”

20대 중후반. 젊은 나이. 나의 대답을 들은 박기성 부장이 비릿한 실소를 흘렸다.

그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회의실이 제법 고요했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이 참 좋아졌네. 서른도 안 됐는데 벌써 과장이라니.”

“······.”

“우리 팀에 있는 대리들보다 훨씬 어린 거 아니야?”

“······.”

박기성 부장의 말에 안 그래도 조용했던 회의실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박기성 부장의 표정은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그는 현재형 팀장에게 팀장 자리를 빼앗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현생에 현재형 팀장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법무팀장이 되었을 사내.

나이도 어리고 입사도 자기보다 늦은 현재형 팀장에게 자리를 빼앗긴 박기성 부장은 나에게서 현재형 팀장의 모습을 본 것이 분명했다.

“허허허. 뭐, 실력만 있으면 빨리 승진할 수도 있는 일이지요. 다 프로 아닙니까. 천천히 지켜보시죠. 실력 있는 친구이니.”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현재형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박기성 부장이 현재형 팀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실력이요?”

“장보고 과장이 항해사로 일하는 동안 회사에 기여한 일이 많다는 건 박기성 부장도 잘 알지 않습니까?”

현재형 팀장은 박기성 부장이 딴죽을 걸기 시작하자 불쾌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뭐, 장보고 일항사가 실력 있는 항해사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법무팀에서도 그런 실력이 있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

“과장이면 회사의 허리에 해당하는 직급이 아닙니까. 제일 일을 많이 하고 잘해야 하는 자리이지요. 그리고 아무리 비공식적이라지만 파트장 역할이라니 걱정이 많습니다.”

박기성 부장의 말에 침묵이 감돌았다.

‘뭐야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

갑자기 회의실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법무팀의 No.1인 현재형 법무팀장과 No.2인 박기성 부장이 대립하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박기성 부장은 여러모로 아쉬운 사람이었다.

회사에 몇 안 되는 해상보험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인 사람이었다.

나의 실력을 운운하고 있지만 본인도 보험 관련 업무 외에 법무팀 본연의 역량인 법무 역량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전생에는 현재형 부장이 질병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대안이 없어져 버린 법무팀장 자리를 그가 어영부영 차지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닥쳐올 불황기에 해신해운은 수많은 분쟁에 휘말린다.

법무팀의 역량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법무팀장이 역량 미달이라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난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하는 행태만 봐도 쪼잔하게 법무팀장이 되지 못한 분풀이를 나에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뭐, 박기성 부장이 하는 말도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네? 굳이 첫날부터 이럴 필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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