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급이 대리가 아니네.
전생의 기억과는 좀 달랐다.
전생에 육상 직원으로 전직했을 때의 직급은 대리.
나와 비슷한 승선 경력을 가진 일항사가 육상 직원으로 전환하는 경우 통상 해신해운 본사에서는 대리 직급으로 발령을 내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현생에서는 좀 달랐으니까.’
아마도 현생에서의 활약 덕분이겠지. 보통의 경우보다 한 직급 위인 과장으로 발령이 난 이유는.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한 보람이 있네. 허허허.’
결심을 마친 나는 해사인사팀장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나의 결심을 해사인사팀에게 전했다.
“팀장님, 본사로 가겠습니다.”
“음.”
“기획본부로 가게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사실 나는 당연히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네.”
“허허허. 그렇습니까?”
“그래 자네라면 문제없겠지. 본사에서도 잘할 거라고 믿네. 내가 본사 인사팀에도 그렇게 연락을 해두겠네.”
“네, 팀장님 감사합니다.”
해사인사팀장이 자리에 일어서며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의 손끝에서 대학교 선배이자 승선 생활을 경험했던 선배 해기사의 마음이 느껴졌다.
눈앞에 아직 떠 있는 퀘스트 창.
손을 들어 올려 메시지 창의 [YES] 버튼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 띠링! >
+
<메인 퀘스트(전직) 달성을 축하합니다.>
“전직이 완료되었습니다!”
- 전직 클래스 : 해운회사 육상 직원
- 세부 클래스 : 해신해운 본사 기획본부 산하 과장
다음 주부터 본사로 출근하세요!
+
* * *
-여의도, 해신해운 본사 로비
다음 주 월요일.
이른 아침 출근 시간.
회사로 출근하기 위해 여의도역 출입구를 올라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직장인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금융 회사가 많이 위치하고 있는 여의도역. 이곳이 가장 번잡한 시간이 지금이다.
나는 여의도역을 가득 채운 인파 사이를 뚫고 본사로 첫 출근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여의도 3번 출구를 나와 5분 남짓 걸으면 해신해운 본사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로비로 들어섰다.
바쁘게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정장 차림에 비슷한 옷차림.
이들처럼 정장에 넥타이, 구두를 신고 가죽 가방을 들고 회사를 출근하는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로비 안내 데스크 근처로 다가섰다.
출입구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사원증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발급받지 못했기 때문.
내가 데스크로 다가서자 살짝 얼굴이 붉어진 안내 데스크의 직원이 얼굴에 친절한 미소를 드리웠다.
“호, 혹시 이번 경력직 교육 때문에 오신 건가요?”
“네.”
“네, 여기 있는 방문록을 작성하시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교육은 23층입니다. 좌측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데스크 옆에 세워진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경력직 OT 교육 장소 : 23층 소강당]
그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장보고 일항사!”
“음?”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사내.
법무팀장 현재형 부장이었다.
“현재형 팀장님!”
내가 웃으며 다가서자 현재형 팀장이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장보고 일항사 오랜만이군?”
“네,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하. 나야 뭐 잘 지내지.”
법무팀장 현재형 팀장의 얼굴을 살폈다. 예전보다 오히려 건강이 좋아 보이는 혈색.
“아! 그나저나 내가 실수했네. 이제 육상 직원으로 전환했으니 일등 항해사가 아니고 과장이라고 불러야지.”
“하하하. 팀장님도 벌써 알고 계셨네요?”
“당연하지. 누구 일인데 내가 모르겠나.”
현재형 팀장이 활짝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일단, 올라가지.”
“네.”
“일주일은 경력직 오리엔테이션 교육이라고?”
“네, 그다음에 팀으로 배치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일단 교육 잘 받고, 이번 주에 점심이라도 같이하세. 새로운 일과 환경에 적응하게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거야. 팀원 확충 관련해서 알려줄 내용도 있고 하니 점심을 함께하지.”
“네? 뭐, 알겠습니다.”
“그럼, 내가 연락하겠네. 교육 잘 받고.”
“네, 팀장님.”
현재형 팀장이 손을 흔들며 법무팀이 위치한 10층에서 먼저 내렸다.
‘그런데 내가 새로운 팀에 적응하는 걸 왜 법무팀장님이 신경 쓰는 거지?’
현재형 법무팀장의 뒷모습을 보니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두바이에서 함께 AP사를 찾아가 나민 아세르와 협상을 할 때 처음 만나 런던에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지만 원래 전생의 기억대로라면 현재형 팀장은 해신해운에 없을 시기다.
전생에서는 몇 년 전에 갑자기 발병한 병으로 빠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을 사람이다.
법무팀의 에이스라고 불리던 사내 변호사 현재형 팀장의 부재는 대가가 컸다.
불황 시기에 금융 기관, 해운 회사, 조선소들 사이에서 수많은 클레임과 분쟁이 발생하는데 이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데 역량 부족을 드러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현생에서는 나로 인해 미래가 변경되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두고 볼 일이다.
* * *
-해신해운 본사 23층 소강당
이번 경력직 입사자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는 소강당 안으로 들어섰다.
강당 안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에 같이 입사하는 경력직 입사자들인가?’
하나, 둘, 셋, 넷. 나까지 총 다섯 명.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아! 저 사람들이 이번에 입사했던 사람들이었구나.’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생에 오고가며 알고 지낸 사람들이었다.
가깝게 지내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전생에 부산 지사를 거쳐 본사 근무로 전보 발령이 났을 당시 본사에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강당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여직원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단아하게 예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미인이라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는데, 해신해운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순간.
“안녕하세요.”
그때 강당 앞쪽 문이 벌컥 열리더니 쾌활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깔끔한 커리어 우먼 같은 인상의 여직원이 깔끔한 미소를 지으며 강당으로 들어섰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는 그녀는 해신해운 인사팀의 유승아 대리였다. 귀엽고 발랄한 성격으로 사내 평가가 좋은 직원이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승아 대리가 강단 앞에 서더니 말을 이어갔다.
“안녕하세요. 면접하러 오셨을 때 다들 저 보셨죠? 인사팀유승아 대리입니다. 경력직 채용 담당으로 앞으로 이 주 동안 진행될 오리엔테이션 담당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유승아 대리의 말에 다들 즐겁게 웃는 표정으로 밝게 대답했다.
유승아 대리는 주변 사람들을 밝게 만드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일단, 얼굴도 익힐 겸 제가 이름과 발령될 팀을 불러드릴게요. 호명하면 자리에 일어서 간단하게 인사를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네.”
“음, 먼저 경영기획팀 진채호 부장님!”
“네.”
진채호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향해 묵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진채호 부장입니다. 이번에 경영기획팀 리스크매니지먼트 파트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금융권 출신이라 해운업계에 대해서는 아직 배워야 할 점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경력으로 입사하는 동기분들이 많이 도와주십시오.”
짝짝짝!
그가 인사를 마치자 사람들이 손뼉을 간단하게 치며 화답했다.
진채호 부장.
그는 나도 익히 잘 아는 인물이었다.
금융권 출신으로 회사의 리스크매니지먼트 담당을 위해 스카우트한 인재였다.
해신해운과 같은 선박 회사들의 운영 경비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선박유인 벙커시유.
내가 삼등 항해사이던 시절 싱가포르에서 밝혀낸 저질 선박유 납품 사건.
그때의 활약으로 해신해운은 AP사와의 MOU(양해 각서)가 체결된 상태였다.
해신해운은 이 거래로 지난 몇 년간 선박유 거래에서 다른 해운 회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상당한 이득을 거둔 상황이었지만 이제 곧 이 MOU도 만료될 예정이었다.
국제 유가가 오르고 내릴 때마다 회사의 수익도 크게 요동친다.
이런 유가 리스크뿐만 아니라, 환율 등 다양한 경영상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금융계에서 제법 전문가라고 이름이 있는 진채호 부장을 경영진에서 공을 들여 특별히 스카우트해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문제는 그 예측이 실패했다는 거지.’
리스크매니지먼트의 담당자들은 신이 아니다. 그들이 모든 경우의 수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진채호 부장이 아무리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은 당연한 일.
제법 업계에서 실력자라고 명성이 있었던 진채호 부장도 도 베이징 올림픽 이후 발생한 금융 위기가 촉발하는 국제 유가 하락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었다.
고유가에 배팅하던 해신해운은 리스크 관리를 위해 투자 은행들과 체결했던 장외파생 상품계약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된다.
사실 선박유 상승에 따른 리스크 헤지를 하기 위해 실시한 거래였으나 국제 유가가 폭락해서 얻은 이익을 고려하면 회상 입장에서 큰 손실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 거래로 인해 눈앞에 발생한 소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고, 담당 부장이자 거래 책임자인 진채호 부장은 딱 좋은 대상이었다.
경력직으로 사내 입지가 비교적 약했으니 경영진 입장에서는 그보다 좋은 먹잇감은 없었다.
유승아 대리는 다른 경력직 직원들을 호명했다. 자금팀 선박금융 담당으로 입사하는 차장, 홍보팀 과장, IT팀의 과장이 이번 경력직 입사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해상직에서 육상직으로 전환하신 장보고 과장님!”
유승아 대리가 나를 소개하며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장보고라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 해신해운 선박에서 일등 항해사로 근무했습니다.”
내가 소개를 마치자 유승아 대리가 소개를 이어갔다.
“장보고 과장님은 해신해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시랍니다. 외모 때문이 아니고, 소말리아 해적 사건에서는 직접 해적도 제압하시고 상도 많이 받으신 분이랍니다. 해신해운의 스타 항해사로 유명한 분이라서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보셔도 기사를 많이 발견하실 수 있답니다.”
“잘생겼다.”
“오~!”
진채호 부장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사람들이 유승아 대리의 말에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부끄럽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갑자기 칭찬을 들으니 살짝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뱃사람이 육지에 오면 부끄러움이 많아지고 순진해진다더니 나도 그런가 보네.
“그런데 장보고 과장은 어느 팀입니까?”
진채호 부장이 소리쳤다.
“아! 팀을 말씀 안 드렸네요. 장보고 과장님은 법무팀입니다.”
“······!”
뭐라고? 법무팀?
이게 무슨 헛소리야?
“네? 저는 경영기획본부로 간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나의 질문에 유승아 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경영기획본부안에 법무팀이 있거든요.”
“도대체 이게 무슨······?”
“법무팀장님이 인사팀장님한테 강력하게 요청하셨다고 하던데요.”
“네? 법무팀장님이요?”
“네, 도형준 전무님이 어쩔 수 없이 양보하셨다고.”
“······.”
깜짝 놀란 나는 당황한 마음에 말문이 막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소식이 이어졌다.
그건 바로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의 정체.
경력직 소개는 이제 한 사람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명이 남았네요.”
유승아 대리가 소강당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여직원을 바라보았다. 그가 마지막 경력직원이었다.
“직급순으로 소개하다 보니 가장 마지막이 되었네요. 이번에 입사하시는 분들 중에는 나이도 가장 어리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