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이 시내
‘아랍의 타워’라고 불리는 두바이의 최고급 7성급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
‘두바이는 올 때마다 빠르게 발전하고 있구나.’
매번 빠르게 변해가는 중동의 도시들을 보면서 오일 머니의 위력을 체감할 수 있었다.
“발키리”호 인수인계를 마치고 나는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저녁 약속을 위해 식사 장소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달리는 택시 창밖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전경이 여전히 놀랍게 느껴졌다.
‘오일 머니라....’
두바이항을 비롯한 중동의 항구는 석유나 천연가스를 실은 수많은 유조선과 LNG선들이 매일 바쁘게 오고 가고 있다.
매장된 석유와 천연가스라는 주요 자원을 생산하는 중동의 국가들은 해운업계에서도 놓칠 수 없는 큰손들이었다.
중동의 국가들은 전통적인 해운업이 발달한 국가가 아닌 화주 국가이기 때문에 해운회사의 입장에서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설정하기에 장점이 있는 곳이었다.
나는 현생에 중동의 유력자들과 인맥을 갖게 된 일이 아직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번에는 정말 운이 좋았어.’
중동 재계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AP(Arab petroleum)사와 두바이 국부 펀드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야말로 현생에서 쌓은 글로벌 인맥의 화룡점정이라 할 만했다.
두바이 국부 펀드를 운영하는 두바이 왕가의 일원인 아시드 빈 바크툼은 앞으로 두바이 재계를 장악할 인물. 그리고 나민 아세르는 두바이 재계를 대표하는 사업가였다.
이번에 한국으로 귀국하면 나는 승선 생활을 그만두고 육상직으로 전직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관계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앞으로는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의 계획에 꼭 필요한 ‘사업상 파트너’들이었기 때문이다.
* * *
-두바이 7성급 호텔 레스토랑
호텔에 도착하자 고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직원의 안내를 따라 이동했다.
이 호텔은 두바이의 인공섬 위에 건축된 랜드마크로 실제로는 5성급 호텔이지만 세계 최초의 7성급 호텔이라는 별명을 얻은 곳이었다.
돛단배를 형상화한 호텔 건물의 내부는 두바이의 부를 상징하려는 듯 황금색 장식들로 가득했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우리나라 말이 들렸다.
“형! 여기!”
익숙한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친동생 장해진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들어왔다.
“형, 두바이에는 무슨 일이야?”
“선박에 일이 좀 생겨서 일찍 하선하게 됐네.”
“음? 이번에 하선하려면 몇 개월 남았다고 하지 않았나?”
“원래 계획은 그랬는데, 일이 잘 풀려서 좀 일찍 교대하기로 했어.”
“그렇구나.”
두바이 생활이 제법 익숙해진 듯 동생은 자연스럽게 음식을 주문했다.
“두바이 생활은 좀 할 만한가 보네?”
“응, 처음에는 덥고 심심하고 힘들었는데 지내다 보니 할 만하네.”
동생은 덤덤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짜식, 처음에는 때려치우고 한국 돌아가겠다고 난리더니 이제는 살 만한가 보네.”
“하하하. 그땐 그랬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곳까지 왔을까. 그냥 인턴했던 미국 투자 은행 자리에 들어갈걸. 그 좋은 직장을 뿌리치고 이 사막 한가운데서 뭐 하는 짓인지 진짜 매일 매일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을 했었다니까.”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너무 좋지. 일도 재밌고. 그리고 무엇보다 기회가 많으니까.”
나는 동생의 말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과는 다른 선택. 나의 조언이 있었지만 최종 선택은 동생의 몫이었다.
전생에 동생은 우리나라 최고 대학인 한국대학을 졸업하고 미국계 투자 은행(IB)의 한국 지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로 투자 은행(IB)이 줄도산하고 동생이 다니던 회사도 파산에 이르게 된다.
이후 엘리트 인생을 살 것만 같던 동생의 인생도 첫 단추를 잘못 채운 탓인지 꼬여가기만 했다.
나는 동생이 이번 생에는 이곳에서 전생과는 다른 기회를 잡고, 다른 인생을 살기를 원했다.
중동의 부국들은 자원을 바탕으로 경제 위기도 제법 건실하게 버텨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일전에 말한 대로 해운, 조선 산업이나 원유 같은 자원 쪽으로 일을 맡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안 그래도 신기하게 형이 그 말한 뒤로 그쪽 파트로 발령이 났어.”
“그래? 다행이네.”
내가 나민 아세르를 통해 힘을 쓴 결과였지만 그런 사실까지 세세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나도 이제 승선 생활 그만두고 본사의 육상직으로 전환하는 걸 신청할 계획이라고 이야기했었던가?”
“음 예전에 일등 항해사까지만 배를 탈 거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긴 한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래, 이제 해진이 네가 나를 많이 도와줘야 해.”
“하하하. 내가? 형을?”
“그래, 국부 펀드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의 돈을 움직이는 큰손 아니냐.”
나의 말에 동생은 그저 별다른 대답 없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두바이의 큰손들과 인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듣고 있는 눈치.
“아, 형 그나저나 아직 확실히 정해진 건 아닌데. 우리 회사도 조만간 한국에 지사를 설립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어.”
“그래?”
전생의 기억과도 일치했다.
나는 동생이 최대한 빨리 업무 성과를 인정받아 새로 설립되는 한국 지사에 지사장으로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물론 그런 성과를 만들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해진아, 내가 전에 이야기했던 거 기억하지?”
“음? 뭐.... 경제 호황기가 몇 년 안 남았다는 거?”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최근 해운업 사이클도 그렇고, 경제 지표도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유가도 그렇고. 도대체 근거가 뭐야?”
“흐흐흐. 그건 형 영업 비밀이니까 못 알려주지.”
“음....”
나의 말에 동생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점이라도 보는 건가?”
“그럴 리가 있냐. 그런 미신을 믿고 형이 이런 소리를 할 것 같아? 형이 알려준 대로 투자해서 실패한 적이 있냐?”
“없지....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이번에 오는 경제 위기는 전 세계적인 규모가 될 수 있다니까 내가 알려준 대로 움직여야 해. 너무 늦지 않게.”
“응.”
“몇 년 뒤에 있을 중국 베이징 올림픽이 기점이 될 거니까. 그 전에 지표가 좋다고 해도 현혹되지 말고.”
“알았다니까.”
동생은 나의 잔소리가 지겨운 듯 손사래를 쳤다.
나는 동생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소리를 이어갔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미스터 장!”
그때 내 뒤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바이에서 나를 이렇게 친근하게 부를 사람은 몇 명 없는데?
내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 찰나.
“어!”
동생은 내 뒤로 나타난 사람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동생의 얼굴엔 살짝 긴장한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예상대로 그는 AP사의 사장 나민 아세르였다.
“미스터 장, 두바이에 왔는데 나한테 미리 연락을 하지 않은 겁니까?”
나민 아세르가 웃으며 크고 두꺼운 손을 내밀었다.
“아 죄송합니다. 예정에 없던 방문이라 미리 연락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나는 의자를 가리키며 나민 아세르에게 자리를 권유했다.
“사장님, 여기는 제 동생입니다. 그때 말씀드린 대로 두바이 국부 펀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오! 말로만 들었는데 이렇게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군요. 저는 나민 아세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장해진이라고 합니다.”
나민 아세르가 손을 내밀자 동생은 아주 공손한 자세로 손을 마주 잡았다.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어색한 한국식 예절이었지만 한국 비즈니스 경험이 많은 나민 아세르도 웃으며 두 손으로 손을 마주 잡았다.
두바이에서 일을 하는 동생은 나민 아세르가 얼마나 두바이 재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재계의 거물을 아는 것만으로도 동생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나민 아세르를 대하는 모습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쯧쯧.’
나는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며 혀를 짧게 찼다.
‘이 기회에 이 형님의 권위를 한번 보여줘야겠어.’
안 그래도 동생이 두바이 국부 펀드에서 고액 연봉으로 일을 시작한 후 집안에서 나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았다.
내가 자갈치 최 부자를 통해 일궈낸 자산 규모를 알게 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세세한 내역은 가족들에게 비밀로 한 상태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나민 아세르에게 다가가 아주 친근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며 그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
“해진아, 나민 아세르 사장님은 내가 평소 의형제나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분이시다. 그러니 앞으로 나를 대하듯 잘 모시도록 해라.”
“음?”
나의 말에 동생보다 더 놀란 사람은 나민 아세르였다.
하지만 그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동생은 나와 나민 아세르가 생각보다 더 가까운 사이인 것을 알게 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흡족한 동생의 반응을 살핀 후 나는 나민 아세르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이곳에 나를 찾아온 것인지 알고 싶었다.
“사장님, 그런데 제가 따로 연락도 못 드렸는데 제가 두바이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하하. 그건 다 아는 방법이 있지요.”
나민 아세르가 빙긋 웃어 보였다.
‘뭐야 이 영감탱이. 나한테 도청 장치라도 붙여놨나? 아니면 감시라도 하는 건가?’
“사실 제임스 요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미스터 장이 크게 한 건 했다고 하던데요.”
“네?”
“제임스 요원 말이 미스터 장이 이번에 제법 큰 건으로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포상금도 두둑하게 받을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끙.......”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CIA 요원이 이렇게 입이 싸다니. 제임스 요원은 생긴 것과 다르게 입이 가벼운 인물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그 사람도 참 일이 없나 보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렇게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정도로 한가한 인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형, 포상금이라니 무슨 소리야?”
“넌 몰라도 돼.”
“하하하. 미스터 장, 그런데 포상금까지 받았으면서 저한테 밥도 대접 안 하고 두바이를 떠날 생각이었습니까?”
나민 아세르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장님, 지난번에는 제가 크게 대접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물론 제가 대접해야지요.”
“하하하. 좋습니다.”
나민 아세르가 나의 말에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우리는 함께 먹고, 웃고 떠들며 마셨다.
두바이의 석양이 아름답게 저물어 갔다.
잠시 후.
“미스터 장.”
한참을 웃고 떠들던 나민 아세르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불렀다.
‘이 영감탱이 이럴 줄 알았다.’
아마도 이 자리에 온 본심을 털어놓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바쁜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해운회사의 일개 일등 항해사에 불과한 나와 그저 저녁 식사나 하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문득 지난 삼항사 시절의 서러움이 폭발했다.
이 영감탱이가 말도 하지 않고 비너스호에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를 밀항시켰던 기억이 떠올랐다.
압둘 무바라크를 살리기 위해 난리 생난리를 쳤던 기억이 마치 주마등처럼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긴장한 표정을 말을 이어갔다.
“네 사장님.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시니 긴장되는데요?”
“무슨 소립니까?”
“또 누구 밀항이라도 시키시려고 하는 건 아니죠?”
“하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라고?
그 말은 그런 종류의 무리한 부탁을 할 예정이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꿀꺽.
나민 아세르의 부탁으로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를 영국에 무사히 망명시켰다. 하지만 그 사건을 빌미로 그동안 나민 아세르의 많은 도움을 받아 온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밀항자 한 번 탈출시킨 것 가지고 그동안 너무 생색을 냈던 걸까?’
제법 긴장되는 순간이다. 나민 아세르가 어떤 무리한 부탁을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전직 퀘스트 (2)
-두바이 7성급 호텔 레스토랑
진지한 표정의 나민 아세르.
잘생겼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의 그가 엄격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미스터 장.”
“네, 사장님.”
“그런데 혹시 결혼했습니까?”
“네?”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했다.
‘노, 농담이 아닌가?’
이 양반도 참 종잡을 수가 없네.
가끔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면 살짝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호랑이 같은 안광이 나를 향하자 나도 모르게 살짝 움찔거리며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음? 사장님, 결혼이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하하하. 너무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
“그저 좋은 기회가 있어 제가 소개라도 해드릴까 했던 것이니까요.”
“좋은 기회요?”
“미스터 장의 능력이나 인품이 마음에 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내가 마음에 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