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선원인 선장과 기관장이 이 정도로 긴장한 표정을 짓는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목례를 한 후 컨테이너를 살피기 시작했다.
‘으으음, 여기도 이런 박스가 있구나!’
이곳에 있는 컨테이너 속에도 정체불명의 종이 박스와 철제 용기가 가득했다.
“일, 일항사 왔나?”
어느새 다가온 이희영 선장. 이희영 선장도 긴장한 듯 말을 순간 더듬었다.
“네, 선장님. 이게 다 도대체 뭔가요?”
“글쎄, 나도 정확한 건 모르겠네. 하지만 기관장 말이 폭약류 물질로 보인다는군.”
“···폭약이면 1.1등급 위험 물질인가요?”
“아마도 그렇겠지.”
“큰일이군요···.”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은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위험 물질이 실려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일항사가 확인하러 간 곳의 컨테이너에는 문제가 없던가?”
“아! 저는 컨테이너를 하나밖에 확인을 못 했습니다.”
“그래?”
“네, 그런데 그 컨테이너는 가스류 물질들이 잔뜩 쌓여 있더군요.”
“뭐? 이 미친놈들이!”
나의 말에 당황한 이희영 선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허허허···.”
그리고 그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앞으로 몇 개의 컨테이너에 이런 위험 물질이 얼마나 실려 있을지 도무지 예상이 되지 않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거야 원···.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싣고 가는 기분이군. 허허허.”
이희영 선장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아무도 따라 웃는 이가 없었다.
* * *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선교
잠시 후.
이희영 선장과 기관장을 포함한 본선의 사관인 해기사들이 전부 선교에 모였다. 이희영 선장이 사관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사관 전부를 호출한 것이다.
곽호진 이등 항해사가 마지막으로 헐레벌떡 선교 안으로 들어섰다.
“장보고 일항사님, 무슨 일입니까?”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곽호진 이항사가 옆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본선에 신고되지 않은 위험 물질들이 다량 실려 있는 것이 확인됐다.”
“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것 때문에 모인 거야. 의논하려고.”
언제나 명쾌한 답을 주던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곽호진 이등 항해사도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이희영 선장이 곽호진 이등 항해사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말을 시작했다.
“이항사도 왔고 그럼 전부 다 모였나?”
“네.”
“본선에 신고되지 않은 위험 물질이 대량 실려 있는 것을 확인했네. 1등급 폭발 물질부터 2등급 가스류까지.”
“······.”
“으으음!”
이희영 선장이 말을 마치고 사람들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희영 선장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장보고 일항사.”
“네.”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찬스 인터내셔널 (4)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선교
“발키리”호의 선교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대부분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 속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숨어있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이희영 선장이 앞으로의 계획을 나에게 물어본 것도, 이 사람들이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유.
그것은 그동안 내가 보여준 문제 해결 능력을 믿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쩝, 이번에는 좀 곤란한데.’
나라고 해서 딱히 절묘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전생에 발생한 “발키리”호 폭발 사고의 보고서에서는 전혀 언급이 안 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발키리”호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없었던 일이 새로 생긴 것인지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있었다.
이제 곧 전생에 폭발 사고가 발생한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월드로지스틱스의 화물이 발화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발화가 시작된 원인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생각해보니 애초에 전생에도 발화가 시작된 원인은 정확히 밝히지 못했다.
사고 당시 폭발의 원인은 폭죽이었다는 결론이었지만 발화의 원인은 미정이었던 것이다.
인접 구역에서 진행되었던 용접 작업은 거리가 멀어 사고의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이 당시 결론.
그렇다면 위험 화물을 적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주의나, 포장 불량, 이 부근의 높은 기온, 높은 해수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보고서에서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직접적인 원인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뿐 큰 의미는 없는 말이었다.
‘발화가 시작된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니 일단 선박이 폭발한 장소로 가는 것을 막아야겠지.’
굳이 폭발이 발생한 장소로 갈 이유는 없다.
폭발이 발생한 일자에 앞서 선박을 안전한 항구로 회항해서 위험 물질을 하역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장님 일단, 신고되지 않은 위험 화물을 발견한 이상 선박을 인근 항구로 가서 화물을 하역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음, 이로(계획된 항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함)하자는 말인가?”
“네, 다행히 우리 배가 기항하는 항구는 아니지만 다른 노선에 투입되는 자사 선박이 기항하는 항구가 있습니다. 대리점을 통해서 협조를 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
이희영 선장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위협이 구체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의로 항로를 변경한다는 것은 선장 입장에서도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선장님!”
그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이대성 삼등 항해사가 달려오며 소리쳤다.
“음? 삼항사 무슨 일인가?”
“헉헉, 본사로 긴급 보고한 이메일이요. 지금 답신이 왔습니다.”
회의에 앞서 부산 지사의 운항팀과 본사에 각각 이메일로 긴급 보고를 한 상황. 지금 본사로부터 답신이 온 것이다.
이대성 삼항사가 달려와 이희영 선장에게 수신된 이메일을 출력한 프린트를 건넸다.
이메일의 내용을 읽어가던 이희영 선장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으으음.”
이희영 선장이 작은 소리로 신음을 흘렸다. 아마도 그가 원하는 내용의 답변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선장님, 본사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내가 다가가자 이희영 선장이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일항사, 본사에서는 원래 세웠던 계획대로 항행을 계속하라는군.”
“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다음 항구에서 위험 화물들을 모두 하역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놓겠다는군. 일단 이로를 하지는 말라는 지시네.”
나는 이메일의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본사에서 보낸 지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수신 : M.V. “발키리”호
참조 : 이희영 선장
1. 업무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2. 보내주신 이메일의 내용은 잘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메일의 내용만으로는 선적된 화물들의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예정대로 항행을 계속하시고 다음에 기항하는 항구에서 하역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3. 상기 내용은 본 팀의 의견에 불과합니다. 발키리호의 본선 상황을 구체적으로 고려하여 본선과 승무원들의 안전에 가장 적합한 판단을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
“······.”
선박에서 본사에 질의하면 오는 답변은 항상 이런 식이다.
책임은 회피하면서 불이익은 감수하지 않으려는 태도. 어쩌면 해신해운이 망한 이유는 이런 탁상행정 혹은 복지부동하는 임직원들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일일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해신해운은 초기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동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규모를 갖추고 대형 선사의 반열에 들어선 이후부터는 현상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출 뿐 위험을 감수하려는 기업가 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
본산의 의견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나는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가라. 하지만 본선에서 최종 판단을 알아서 잘해라. 책임도 본선에서 져라.”
“······.”
“뭐, 이런 뜻이네요.”
사고가 발생하면 본선 책임으로 돌리기도 쉬웠다. 마치 꼬리 자르기처럼 본선의 항해사들에게 책임을 돌리면 그만이었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이희영 선장을 향해 슬쩍 웃어 보였다.
“흐흐흐. 선장님 이번에도 예정된 항로로 가라고 똑 부러지게 지시한 건 아니네요.”
“허허허. 항상 그렇지 뭐. 본사 말은 본선에서 알아서 잘하라는 거 아닌가.”
이희영 선장은 이메일을 받고 고민이 더 커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항로를 계속 진행하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발키리호는 중동의 항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위험 화물을 하역하는 것이 수에즈운하를 통과하고 지중해를 지나 유럽 서부까지 오랜 시간 항행을 해야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사이 폭발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수에즈운하에 진입하기도 전에 선박은 폭발한다.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위험 화물을 그 전에 하역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저, 선장님.”
“그래, 이항사.”
곽호진 이등 항해사가 손을 들어 올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선장님, 몰래 실렸다고 하는 화물들이 정확히 어떤 화물입니까?”
“포장지에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내용물을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상황이네.”
“그럼 아직 위험 물질인지도 판단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내부에 실려 있는 용기에 표시된 라벨로 봐서는 가스류나 폭발류 물질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이긴 해. 정확한 물질명은 기재가 되어 있지 않지만 말이야.”
“뭐, 그럴 수도 있는데 싱가포르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이항사의 의견은 화물을 실은 채로 계속 운항을 하자는 뜻인가?”
“네, 본사에서 온 지시 내용도 따라야 하니까요.”
말을 마친 곽호진 이등 항해사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다음 항구에서 제가 교대해야 되기도 하구요. 하하하.”
“······.”
“으흐흠!”
하여간 저 눈치 없는 새끼!
‘빨리 휴가 가려다가 저승에 빨리 갈 수도 있다 이놈아!’
곽호진 이등 항해사는 아무도 따라 웃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이대성 삼등 항해사의 곁으로 다가가기 위해 일어섰다.
딱!
“아야!”
그리고 곽호진 이항사의 뒤통수를 한 대 살짝 때렸다.
“이항사, 정신 단단히 챙기자.”
“흐흐흐. 농담입니다. 일항사님.”
곽호진 이항사가 눈을 흘기며 나를 잠시 올려 보더니 실없이 웃어 보였다.
나는 이대성 삼등 항해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금쯤 답이 왔을 때가 됐는데.’
이대성 삼등 항해사에게 조용히 귓속말로 물었다.
“삼항사, 다른 이메일은 온 거 없어?”
“아! 일항사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추가로 들어온 이메일이 있었는데 제가 우선 본사에서 온 이메일만 뽑아 왔습니다. 다시 가서 출력해 오겠습니다.”
이메일 출력을 위해 달려가는 이대성 삼항사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전생에 발생한 여러 사건들이 혼재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헉헉, 일항사님, 이메일입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이대성 삼등 항해사가 이메일을 건넸다.
그건 MI6 이안 요원으로부터 온 답장이었다.
+
미스터 장,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요청하신 내용을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최근 미국 해군이 오만해 인근에서 선박들에 대한 수색을 강화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아직 비공개된 정보이긴 하지만 중동을 담당하는 미 해군 5함대는 최근 오만해에서 국적 불명의 선박을 수색해 폭발물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요소 비료 40t을 압수했다고 합니다.
이번 작전은 구축함 ‘USS 콜’과 초계함 ‘USS 치누크’에 의해 수행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달에는 북부 아라비아해에서 AK-47 소총 1천400여 정과 탄약 22만 6천600발을 운송하던 국적 불상의 선박을 적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미군은 이들 선박에 실린 무기와 폭발 물질들이 국제 테러 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략)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 이안.
+
“음!”
MI6 이안 요원이 보내준 이메일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입 밖으로 흘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