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200)

컨테이너 화물은 실(seal)로 밀봉된 상태로 운송인인 해운회사에 인도된다.

컨테이너 내부에 실려 있는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seal)을 뜯어서 컨테이너를 개봉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

만약 해운회사가 운송하는 과정에서 이 실(seal)이 훼손된 경우에는 해운회사의 책임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찬스 인터내셔널이 신고한 대로 전자 제품이나 기계류가 선적되어 있다면 오로지 이 책임은 이희영 선장 자신에게 전가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위험물이 실려 있다는 근거도 희박했다.

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나의 말뿐이었다. 이건 오로지 그가 나의 말을 얼마나 신뢰하는지의 문제이기도 했다.

“휴···.”

이희영 선장이 한숨을 짧게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하지.”

“네?”

“전수 조사를 실시하지.”

“......!”

“본선의 안전이 최우선 아닌가?”

나는 이희영 선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나를 믿어준 이희영 선장에게 이제 내가 보답할 차례였다.

빠르게 달려가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지지직!

그리고 이럴 때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료 두 명을 빠르게 호출했다. 그들은 찰리와 조셉이었다.

* * *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갑판

설명을 들은 찰리와 조셉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타수 조셉은 유독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애써 웃음을 짓고 있었다.

찰리와 조셉에게 점검할 컨테이너 목록을 건네주었다.

“큰 걱정은 하지 마. 제일 위험한 컨테이너들은 내가 직접 확인할 거니까. 알았지?”

“예 써(Sir)!"

"알려준 대로 실(seal)도 제거하고, 수상한 물건들이 있으면 건드리지 말고 무전기로 나를 호출하도록.“

“네.”

“그럼 시작하자.”

찰리와 조셉이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 후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가볼까.’

직접 확인해야 하는 컨테이너들이 있었다.

위험 화물을 실어서는 안 되는 기관부 근처의 화물창 베이에 선적한 컨테이너들이 있었다.

위험 화물로 신고되었다면 배치하지 않았을 곳이지만 일반 화물로 신고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적재된 컨테이너들이었다.

‘우선 54번 베이부터 확인해야겠지.’

꿀꺽.

이 순간만큼은 나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54번 베이.

전생에 읽은 폭발 사고에 대한 보고서의 문구가 생생히 떠올랐다.

‘그때 54번 베이에 연화가 담긴 컨테이너가 폭발하면서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선체가 심하게 요동하였으며, 이후 이보다 작은 규모의 폭발이 2~3차례 계속되었다.’

처음 폭발한 컨테이너가 적재되어 있던 위치가 바로 지금 향하는 54번 베이였다.

찬스 인터내셔널 (3)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화물창

수에즈운하를 향해 운항하고 있는 “발키리”호에는 현재 약 5천여 개의 컨테이너가 적재되어 있다.

화물창을 향해 달려가면서 문득 선박에 빽빽하게 쌓여 있는 컨테이너를 바라보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5천 개의 컨테이너 중에 폭발할 위험 물질이 실려 있는 컨테이너를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몇 가지 행운이 따르고 있었다.

전생에 읽은 “발키리”호 폭발 사건의 보고서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과 회귀의 특전으로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띠링! >

+ 스킬[고소고발 Lv.14]을 사용합니다. +

- 폭발을 추적합니다.

- 논리력이 상승합니다.

- 범인을 추적합니다.

생각을 한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었다.

우선 위험 화물의 숫자.

현재 본선에서 파악하고 있는 위험 화물이 실린 컨테이너의 숫자는 103개. 본선에 적재된 5천여 개의 컨테이너 중에서 신고 된 위험 화물의 양이다.

하지만 전생에 폭발 원인으로 지목된 1등급 위험 화물을 싱가포르항에서 모두 하역한 상황.

그러나 본선에 위험 물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발키리”호에는 현재 제2.1급(인화성 가스), 제3급(인화성 체), 제4.1급(가연성 물질), 제5.1급(산화성 물질), 제5.2급(유기과산화물), 제6.1급(독물류), 제8급(부식성 물질), 제9급(유해성 물질) 등의 물질들이 적재되어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들 화물은 모두 위험 등급 2등급 이하의 물질들로 독성 등 위험이 있지만 1등급 화물과는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대폭발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은 물질이다.

하지만 폭발이 일어난다면 연쇄적으로 어떤 큰 피해를 야기할 것은 분명했다.

이들 위험물이 수납된 컨테이너 103개가 “발키리”호의 화물창 내 및 갑판상에 여전히 적재되어 있었지만 전수 조사 대상에서는 우선 제외했다.

대폭발의 위험이 크지 않으니 일단 찬스 인터내셔널의 컨테이너에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폭발이 일어난다면 아무래도 신고되지 않은 컨테이너 특히 찬스 인터셔널의 컨테이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내 추측이었다.

전생에 폭발한 월드로지스틱스에서 실었던 폭죽은 1.3등급의 위험물이었다.

폭발한 화물이 1.3등급이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일지도 몰랐다. 만약 더 위 등급의 화물이었다면 피해가 더 컸을 것이다.

국제해사기구에서 분류한 국제해상위험물규칙(IMDG Code)에 따르면 위험물은 제1급에서 제9급까지 구분된다.

제1급은 화약류(Explosives)를 말하는데 세부적으로 대폭발 위험성(Mass Explosion Hazard)이 있는 물질을 말하는 1.1등급 위험물, 분사(Projection) 위험성은 있으나 대폭발 위험성이 없는 1.2등급의 위험물, 화재 위험성이 있고 약간의 폭발(Blast) 위험성이나 분사 위험성, 양쪽 모두의 위험성이 있으나 대폭발 위험성이 없는 1.3등급의 위험물로 나뉜다.

찬스 인터내셔널에서 실은 화물이 1.1등급이나 1.2등급에 해당하는 물질인 경우 전생에서 발생한 피해보다 더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느새 첫 폭발이 일어난 화물창에 다다르고 있었다.

빠르게 달린 덕분인지 아직까지 화물창에서 감지되는 별다른 이상 징후는 없었다.

나는 2번 화물창에 도착하자 화물창을 가득 채운 컨테이너가 눈에 들어왔다.

‘2번 화물창에 실려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인가?’

“발키리호”의 “위험화물운송적합증서”에 따르면 위험 화물을 화물창에 선적할 경우(갑판하 선적)에는 제2번 화물창에만 선적 가능하다고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

이 선박의 하부 구조는 선수창, 제1번에서 제5번 화물창, 기관실, 제6번과 제7번 화물창, 타기실(상)/선미창(하)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화물창에서 2조의 폰툰식(Pontoon Type) 덮개(Hatch Cover: 좌우, 중앙)가 있고, 이 덮개는 화물창 번호에 선수 측에 A, 선미 측에 B를 붙여서(예를 들면 1A, 2B 등) 표시하고 있으며, 베이(Bay) 번호는 선수로부터 각 구획된 화물창마다 3개의 번호를 부여하고 있다.

2번 화물창의 기관부 근처의 베이 근처.

폭발 물질이 실려 있는 찬스 인터내셔널의 컨테이너가 있을 것으로 강하게 의심되는 화물이다.

‘50, 51, 52··· 저기다.’

처음 폭발이 발생했다고 알려진 54번 베이에 실린 컨테이너가 눈에 들어왔다.

2번 화물창에 실린 찬스 인터내셔널의 컨테이너는 총 3개였다.

54번 베이 좌현 끝부분 기관부에 밀집한 지역에 적재된 컨테이너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곳에 있는 컨테이너의 내용물을 먼저 확인한 후 전생에 이희영 선장이 사망한 장소인 62번 베이 근처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62번 베이에서 대규모 2차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곳에도 위험 물질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음! 저기 있는 컨테이너구나!’

화물창에 실려 있는 컨테이너를 살피던 나는 찬스 인터내셔널의 컨테이너를 발견했다.

일반 화물용 컨테이너 외부에 표시된 명세서에 찬스 인터내셔널의 상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위험 물질이 아니면 좋을 텐데.’

나는 컨테이너를 열기에 앞서 장착되어 있는 실(seal)을 끊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폭발물이 아니면 내가 혼자 독박 쓰는 거 아니야?’

만약 컨테이너 안에 위험 물질이 없고 정상적인 수출입 물품이 들어있다면 손해 배상 책임을 물을지도 모르는 상황.

이번 항차를 마치고 본사 직원으로 전직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는 배에 함께 승선하고 있는 선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그리고 뭐, 그동안 벌어 놓은 돈은 많으니까.’

자갈치 쩐주 최 부자를 통해 불려 놓은 돈은 이미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전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동생 장해진은 두바이 인맥인 나미 아세르를 통해 두바이 국부 펀드에 강제로 취직을 시킨 상황.

계획대로라면 앞으로의 투자도 문제없었다.

‘뭐, 위험 물질 아니라면···. 그동안 벌어둔 돈 좀 쓰지 뭐.’

결심한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실(seal)을 뜯어냈다.

툭! 끼이익!

실(Seal)을 끊어냈다. 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손을 뻗어 컨테이너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컨테이너의 문이 열렸다.

“무슨 냄새야 이거?”

문이 열리자 컨테이너 내부에 갇혀 있던 쾨쾨한 냄새가 빠져나오면서 코끝을 건드렸다.

손을 들어 얼굴 앞으로 흔들었다. 그리고 컨테이너 내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음?”

컨테이너 문이 열리자 앞에는 사과 박스 정도로 보이는 종이로 된 상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특이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상한 느낌이 나의 감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상자를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수상해 보이는 상자를 건드려도 되나?’

위험 물질이 들어있다면 함부로 건드리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위험이 생기면 경고해줬던 메시지 창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큰 위기 상황이라면 경고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나는 종이 상자 한 개를 조심히 집어 들었다.

종이 상자 위에는 가전제품으로 보이는 제품의 사진과 한자가 잔뜩 기재되어 있었다.

수출하는 물품의 상자에 중국어 기재만 되어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수상한 정황이었다.

“······이건 좀 이상한데?”

찌이익!

나는 과감하게 종이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음? 이건?”

종이 상자 안에는 작은 철제 상자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철제 상자 위에 붙어 있는 붉은색 바탕에 검정 불꽃 그림.

‘가스류?’

2등급 위험 화물인 가스류 물질이 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이 미친놈들이!’

철제 용기 내부에 실린 물질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인화성이나 독성의 위험성이 있는 가스류 위험 물질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그때였다.

지지직!

무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일항사님, 부갑판장입니다.”

무전을 보낸 사람은 부갑판장 찰리였다.

“찰리, 일항사다. 무슨 일이야?”

“확인하라고 한 컨테이너 안에 있는 박스에서 이상한 용기를 발견했습니다.”

“음······! 뭔데?”

“아, 아무래도 폭약 같습니다.”

“뭐?”

폭약이라고? 나는 깜짝 놀라 한동안 말을 잃었다.

“······.”

이내 정신을 차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차, 찰리! 건드리지 말고 기다려.”

“네.”

“선장님한테도 연락하고 바로 갈게!”

“예, 써(Sir).”

“기관장님한테 연락해서 부원들한테 소화 장비도 준비해서 와달라고 하고!”

“예!”

‘이 미친놈들이 도대체 이 배에 뭘 실은 거야.’

위험 화물로 신고도 하지 않은 가스류에 폭약이라니?

무전을 끊은 나는 찰리가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끝이 아닐지도 몰라.’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나의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 * *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화물창

찰리가 있는 화물창으로 도착하자 그곳에는 이미 연락을 들은 선장과 기관장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도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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