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00)

‘내가 누군지 아냐고?’

누군지 한번 면상을 확인해 봐야겠네.

“알았어요. 제가 한번 가볼게요.”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선원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섰다.

‘음? 이 사람이 지금 싱가포르 지점장이었구나!’

싱가포르 지점장은 나도 익히 잘 아는 사내였다. 정확히는 전생의 그를 잘 아는 것이겠지만. 그리 반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쯤이면 부장이겠군.’

그의 이름은 원은재 부장.

전생에 본사 근무 당시 알던 사내. 물론 지금은 훨씬 젊은 모습이었다.

내가 그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선대기획팀에서 관여한 프로젝트의 대부분이 해신해운이 망하는 것을 가속화했기 때문이다.

원은재 부장은 아마도 다음 정기 인사 발령 시즌에 본사 선대기획팀으로 발령이 날 것이 분명했다.

이 사람은 하위 직급에 있을 때는 제법 수완이 좋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사의 중요 부서 팀장이 된 이후에는 사람이 정반대로 변해버렸다.

자신의 능력 부족을 실감한 것인지 본사의 팀장이 된 이후에는 업무에 열중하기보다는 사내 정치와 처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세에서 수완을 발휘한 그는 해신해운의 현 회장이 사망한 이후 벌어지는 후계 싸움에 적극 가담한다. 그리고 회장의 자녀들 사이에서 벌어진 경영권 싸움에서 승리하는 첫째 아들의 최측근 심복이 되었다.

이후로는 업무 실적과 무관하게 승승장구했다.

결국 기획실 담당 임원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무능력의 정점을 보여주게 된다.

그때부터는 사람들 사이에서 ‘마이너스의 손’으로 불리게 되었고, 해신해운이 망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해신해운을 망하게 만든 해신오적의 일원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원은재 부장을 바라보자 그도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걸었다.

“이분은 누구신가요?”

내가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본선 일항사입니다. 장보고라고 합니다.”

“장보고? 오! 그 소문이 자자한 일항사?”

애매하네. 칭찬인지 욕인지.

칭찬을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어딘지 얄미운 표정으로 실소를 짓고 있었다.

원은재 부장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며 물었다.

“장보고 일항사? 반갑네. 싱가포르 지점장 원은재 부장이라네.”

“······.”

뭐지, 이 매너 없는 짓은?

같은 해신해운의 직원들이라고 하여도 육상 직원과 해상 직원들은 딱히 교류가 없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가 어린 항해사들을 상대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하대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렇게 싸가지가 없는 놈들 빼고는 말이지.’

이놈은 현생에서도 그다지 개선의 가능성이 없는 놈이 분명해 보였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은재 부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장보고 일항사, 본선에서 화물들 선적을 거부했다고 들어서 말이야.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이야.”

“착오요?”

“그래, 본선에서 화물을 내리겠다고 연락이 와서 내가 이렇게 바로 달려왔네. 일단 화물을 내리지 못하게 내가 하역 작업을 취해놓았네.”

원은재 부장이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시 이 사람이 선박을 방선한 이유는 내가 위험 화물을 선적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음, 착오는 아닌데요.”

“뭐?”

“위험 화물들이 있어서요.”

“허? 위험 화물?”

“네, 환적 화물 중에 위험 화물이 있었는데 절차 위반으로 본선 안전에 위험 요소가 있다고 판단해서 선적 거부 조치를 취한 겁니다.”

원은재 부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허허! 자네, 그동안 회사에서 오냐오냐해 줬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겁나는 게 없는 모양이군?”

“네?”

“이번에 컨테이너 50개 가까이를 선적하지 않으면 회사에 손실이 얼마나 발생하는지 알고 있냐 이 말이야! 어디서 일항사 따위가!”

“······.”

뭐, 정확하게는 얼마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선박이 폭발해서 입게 되는 피해와 비교하면 큰 피해가 아닐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이렇게 흥분했지?’

싱가포르 지점에서 담당하고 있는 화주의 물량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사람이 이렇게 흥분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이 화물을 유치하신 분이 혹시 지점장님이신가요?”

“그래! 이제 알았나? 컨테이너 100개 물량을 한 번에 따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이거 아무리 배만 탄다고 해도 요즘 영업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니까 이런 짓을 하는 게지 쯧쯧.”

‘100개라고? 이번 싱가포르에서 실린 위험 화물들은 46개 아닌가? 싱가포르 지점이 계약한 물량을 말하는 건가?’

원은재 부장은 다음 정기 인사 때 본사의 중요한 부서의 팀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기 인사를 앞두고 아마도 지점의 실적 향상에 목을 매고 있는 상황이니 화물을 내린다는 소리에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승진에 목을 매는 상황이니 실적 때문인가?’

이런 위험 화물들을 기본적인 절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로 선적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회사는 영업을 하는 곳이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회사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건 해신해운도 마찬가지.

영업을 최우선으로 하다 보면 절차를 소홀히 하기 쉽고, 절차나 원칙만 강요하다가는 치열한 시장에서 도태되기 쉽다.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밸런스를 조절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익이라는 회사의 최우선 목표 앞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원칙도 있다.

사람의 생명이 관련된 문제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선원과 선박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육상 직원들이 느끼는 감정은 선원들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

해운회사의 육상 직원들이 선박에 승선하는 선원들과 항상 같은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번 문제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점장님, 이 노선은 얼라이언스 선사들과 함께 공동 운항하는 노선 아닙니까? 공동 운항 절차 위반 소지가 있지 않나요?”

“음? 뭐, 뭐라고?”

원은재 지점장은 나의 지적에 살짝 놀란 표정.

얼라이언스(Alliance)는 해운 동맹을 뜻하는 말이다. 해운 회사들 사이에 전략적으로 맺는 제휴 관계를 말하는데, “발키리”호가 투입되어 있는 노선은 해신해운의 동맹 선사들과 공동으로 선박을 투입하고 있는 공동 운항 노선이었다.

이런 사실은 해신해운의 직원이라면 다 아는 사실. 하지만 얼라이언스 선사들 사이의 공동 운항과 관련된 문제는 승선 생활을 하는 일등 항해사가 크게 관심을 가질 만한 이슈는 아니었다.

“제가 알기로는 공동 운항 선사들과 체결한 공동 운항 계약서상으로 위험 등급 1.3 화물 등급 중에서 연화(폭죽)는 상하이를 제외하고 중국의 나머지 항구에서는 선적을 금지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

“이 화물은 중국의 선적항에서 싱가포르항까지는 공동 운항 선사의 피더선을 이용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선사에 이런 사실을 사전에 고지하셨습니까?”

원은재 부장은 불의의 일격을 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공동 운항에 관한 사항은 컨테이너 영업을 담당하는 자들이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될 내용. 기본적인 원칙을 지적하자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갑판의 사람들은 모두 침묵한 채로 우리의 대화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화물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기항해야 되는데 1.3등급 화물을 적재한 채로 로테르담 항구에 들어가려면 항만 당국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되는데 사전 승인 받았나요? 본선은 자료가 없는데요?”

“······.”

원은재 부장은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본사 화물 안전 및 클레임 절차에서는 위험 화물이 선적되면 컨테이너의 외부 표시가 위험물 명세서의 기재 사항과 일치하지 않는 등 이상 발견 시에는 선적 거부 등 조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 절차를 무시하고 계속 위험 화물을 선적하라는 말씀이신가요?”

“······.”

나는 침묵하는 원은재 부장을 뒤로한 채로 선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시작했다.

“갑판장님, 점검한 대로 절차 위반한 위험 화물들 전부 하역하세요!”

발키리호 폭발 사고 (5)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 갑판

갑판장이 싱가포르 지점장 원은재 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나에게 다가왔다.

위험 화물 처리 절차를 어긴 위험 화물들을 전부 하역하라는 업무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갑판장은 나에게 귓속말을 건네듯 조용히 말했다.

“일항사님?”

“네.”

“음, 위험 화물 컨테이너를 전부 다 다시 하역하라고요?”

갑판장이 힐끔 눈치를 주었지만 나는 모르는 체하며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네, 전부 다!”

“음, 그래도 화물들을 다시 하역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요. 뭐, 50개라고 해도 하나하나 찾아서 확인하려면 시간이 제법······.”

갑판장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잔업이 생겼으니 귀찮은 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스케줄이 마음에 걸렸다.

안 그래도 싱가포르항에서 체선으로 제법 시간을 지체한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또 하역 작업을 진행하게 되면 시간깨나 지체될 것이 뻔했다.

아무래도 본선의 운항 스케줄이 지연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운항 스케줄이 지연되면 본사로부터 한 소리 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건 선장을 비롯한 항해사들이 책임질 일이기 때문에 갑판장이 고민할 부분은 아니다.

“그런 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일단 절차서 내용대로 위험물이 들어 있는 컨테이너의 외부 표시가 위험물 명세서에 적힌 대로 일치하는지 확인해서 기재 사항이 제대로 작성되어 있지 않은 위험 화물들은 전부 하역합니다.”

선원들 중에는 잔업이 늘어나자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을 터.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도 눈치를 챘을 것이 분명했다.

바다라는 위험한 무대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선원들 사이에서 최고의 선원은 똑똑한 놈도 아니고 용감한 놈도 아니고 운이 좋은 놈이다.

그리고 해신해운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으로 소문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선원들 사이에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손해이기 때문에 일단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소문이 널러 퍼져 있었다.

“으흠! 빨리 합시다. 저도 확인해 보겠습니다.”

나는 선원들을 독촉한 후 원은재 부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원은재 부장도 내가 원칙론을 펼치자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는지 별다른 말이 없었다. 해상 직원이다 보니 원은재 부장이 직급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한 방 먹은 상황이라 잔뜩 화가 났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앞으로 본사로 가게 되면 사사건건 부딪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원망 어린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폭발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월드로지스틱스의 화물은 내가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소한 절차 위반이라도 있으면 전부 하역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적부 계획서에 따라 월드로지스틱스의 화물이 선적된 선수 쪽에 가까운 화물창 근처에 도착했다.

‘음, 이쯤 어딘데, 아! 저건가?’

폭죽이 선적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컨테이너가 눈에 들어왔다.

컨테이너 근처로 다가서서 컨테이너 외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기억 그대로네.’

전생의 기억대로 컨테이너 외부 표시에 기재되어 있는 위험물 명세서의 내용에 누락된 표시가 많았다.

아마도 전생에 폭발한 폭죽이 들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내부를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컨테이너를 열어 내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실(seal)로 밀봉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컨테이너를 개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물을 선적 거부해서 하역하는 마당에 밀봉된 장치까지 훼손하면 추후 분쟁이 심해질 소지가 있었다.

‘뭐 일단, 전부 하역해 버릴 계획이니까.’

입증 자료를 남기기 위해 컨테이너의 외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월드로지스틱스의 화물이 실려 있는 다음 칸을 향해 이동했다.

* * *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 선교(브릿지)

며칠 후.

싱가포르항에서 한바탕 난리를 겪은 “발키리”호는 항구를 출항해 수에즈운하로 향하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제대로 절차를 지키지 않거나 정확하게 신고가 되지 않은 위험 화물들을 일제히 하역했다.

싱가포르 지점을 포함해 중국의 대리점 그리고 본사의 유관 부서에서도 많은 클레임이 빗발쳤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본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원칙보다 우선되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결국 본선에서 정한 결정을 고수하기로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희영 선장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이희영 선장이 본선과 선원의 안전을 위해서 선장인 자신이 직접 최종 결정을 한 것이라고 클레임을 제기하는 유관 부서들에 통보한 것이다.

본선의 선장이 안전을 이유로 결정한 것이라고 하자 더 이상 다툴 명분이 없었다.

‘잘된 일이긴 한데······.”

그래도 찝찝하단 말이야.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상념에 빠져 있는 나의 등 뒤로 이희영 선장이 다가왔다.

“장보고 일항사!”

“네, 선장님.”

“또 무슨 일인가?”

“네? 무슨 뜻이신지?”

“왜 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나?”

“허허허. 제가요?”

“그래!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아, 그런 건 아닙니다.”

이희영 선장이 나의 말에 반색했다.

···뭐야 이 양반, 진짜로 좋아하는 표정이네?

“다행이군.”

“······?”

음?

“장보고 일항사, 혹시 시말서를 쓰거나 해야 할 일이 생기진 않겠지?”

“······.”

시말서가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지금 목숨이 달린 일인데 이 사람이 태평하게!

타는 나의 속도 모르고 눈치 없는 이희영 선장이 말을 이어 갔다.

“예전에 막내딸이 의대에 진학했다고 이야기했던가? 아직도 졸업을 못 했다네. 의대 등록금이 참 비싸더군. 허허허.”

“······.”

“그런 표정 좀 짓지 말게! 아무 일도 없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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