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큰 폭발음이 들리더니 불이 붙은 컨테이너가 갑판 위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불이 붙은 다른 컨테이너 1개는 윙브릿지(Wing Bridge)에 떨어졌고, 또 다른 컨테이너 1개가 연돌(Funnel) 위쪽으로 날아가면서 안테나 등 통신 설비를 망가트렸다.
이때 구명정이 파손되고 선교 천장이 무너져 내렸으며, 거주 구역 내 운동실과 갑판 창고에도 화재가 크게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기상은 맑은 날씨에 북동풍이 초속 3~5미터 정도로 불고, 파도는 1미터 내외, 시정은 양호한 상태였다고 한다.
폭발이 발생하자 이희영 선장은 폭발 직후 선교로 뛰어 올라갔다.
이희영 선장은 선교에 들어서자 이등 항해사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컨테이너가 천장을 뚫고 선교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천장이 무너져 내릴 때 이등 항해사는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이희영 선장은 이등 항해사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 다음 같은 날 12시 05분경 인마세트 C(Inmarsat C)와 중파(MF), 극초단파(VHF) 등으로 조난 신호를 발령했다.
천만다행인 것은 멀지 않은 곳에 네덜란드 군함이 있었다는 점이다.
“발키리”호의 조난 신호를 받은 인근의 네덜란드 군함에서 헬리콥터를 급파한다.
같은 날 12시 40분경 네덜란드 해군의 헬리콥터가 “발키리”호에 도착. 이등 항해사를 빠르게 실은 헬리콥터는 환자를 후송하기 시작한다.
이희영 선장은 같은 날 12시 30분경부터 잡용수 펌프를 가동하여 거주 구역과 선교 앞쪽 42번 베이에 붙은 화재를 진화하는 데 열중한다.
이희영 선장은 선교 측 화재 진압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불행스럽게도 화재가 확산되면서 추가 폭발이 연이어 발생하기 시작한다.
선미 쪽에서도 추가 폭발이 크게 일어난다.
결국 이희영 선장이 화마에 휩싸이고 이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이희영 선장을 제외한 나머지 선원들은 모두 네덜란드 군함으로 옮겨 타서 탈출한다.
“발키리”호는 화재가 오랜 시간 진압이 되지 않아 나머지 구역까지 화재가 확산된다. 결국 거주 구역까지 화재가 확산되고, 선미 부분에 선적된 화물 모두가 폭발/화재/열손/수침(水沈) 등의 손상을 입게 된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선체는 구조업자(Salvage)에 의해 화재 진압 및 구조되었고, 오만 부근의 살라라(Salala)항으로 입항하게 된다.
선박은 선미 부분 좌현 외판과 화물창이 하부부터 상갑판까지 대파되었고 거주 구역의 설비, 항해 장비, 구명정, 화물창 덮개, 모노레일, 기관실용 크레인, 소화 장비, 대부분의 기관 설비 등이 파손 등의 손상을 입었다.
선박은 그야말로 대파되는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큰 문제는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였다.
이희영 선장은 결국 사망했고, 이등 항해사 곽호진도 중상에 빠지게 된다.
곽호진 이등 항해사는 수술 끝에 가까스로 의식을 차리게 된다. 몇 달의 재활 치료를 거친 후에도 겨우 회복할 만큼 중상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번에는 막아야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눈앞에 있는 곽호진 이등 항해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곽호진 이등 항해사는 죽지는 않았지만 모르는 일이다. 현생에서도 죽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게 다 너 살리자고 하는 짓이다 이놈아!’
“일항사님,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그렇게 쳐다볼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닌데. 흐흐흐.”
내가 빤히 바라보자 곽호진 이등 항해사가 실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놈은 말도 잘 안 듣고 뺀질거리는 놈이다. 하지만 또 그렇게 얄밉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이 승선 생활을 하며 동고동락하는 동료이기도 했다.
나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곽호진 이등 항해사는 나를 바라보며 그저 실없는 웃음만 짓고 있었다.
* * *
-싱가포르항, M.V. “발키리”호 선교 근처 갑판
다음 날.
곧 하역 작업을 위한 접안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전화 통화를 위해 선교 밖으로 나와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르르.
휴대폰 진동 알람이 울렸다. 기다리고 있던 전화였다.
“여보세요?”
-보고야, 진혁이 형이다. 아직 싱가포르항이지?
전화를 건 사람은 해양경찰 차진혁 경감이었다.
“네, 부탁드린 건 좀 알아봤어요?”
-그래, 말한 대로 변도수를 몰래 만나봤거든.
나는 차진혁 경감에게 거경파 No.3 경상도 짜르 변도수를 만나 거경파의 동향을 파악해달라는 요청을 해둔 상태였다.
“그래요? 변도수는 뭐라고 하던가요?”
-네 말대로 최근 거경파에서 해외 사업 확대한다고 말이 많은가 봐.
“그래요?”
-그래, 그 해외 사업인지 뭔지 때문에 지금 조직의 No.2가 해외 출장 갔다는 말이 있다고 하던데?
“거경파 No.2라고요?”
-응, 주로 부산에서 활동하던 놈인데 주먹보다는 머리를 쓰는 놈이야. 양일모라고 그놈이 지금 출장 중이라고 한국에 없다네?
“음, 그래요?”
-그래, 뭐 또 필요한 건 없고?
“네. 고마워요.”
-조심하고, 한국 오면 보자.
“네.”
‘이것도 우연인가?’
하필 지금 거경파의 No.2가 해외 출장 중이라니?
그때, 선교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보고 일항사님!”
“무슨 일이야?”
“터미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 접안할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우리 차례랍니다.”
“알았어. 바로 갈게!”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선교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선교로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선은 위험 화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게 우선이겠지.’
* * *
-싱가포르항,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갑판
싱가포르항에 접안을 완료한 “발키리”호는 한창 하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부두의 대형 컨테이너 크레인들이 빠르게 컨테이너를 옮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곧 이번 항구에서 환적될 위험 화물들도 “발키리”호로 선적될 예정이었다.
이희영 선장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장보고 일항사.”
“네, 선장님.”
이희영 선장은 화물 적부 계획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지금 보니 적부 계획 중에 확인할 것들이 좀 있어서 말이야.”
“네, 선장님.”
‘아마도 위험 화물이 실리는 컨테이너의 위치 때문이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희영 선장에게 다가섰다.
“이렇게 적재하면 다음 항구에서 불편하지 않겠나?”
이희영 선장의 지적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의도적으로 위험 화물들을 선교와 기관부 근처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았기 때문에 선수 부근으로 위험 화물들이 배치된 상황이었다.
안전을 고려한 조치였지만 빠르게 컨테이너 화물들을 양하하고 적재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적재 방법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희영 선장도 이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네, 선장님. 그런데 이번 항구에서 위험 화물들이 여러 개 올라올 예정입니다. 위험 화물들을 기관부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적재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위험 화물?”
“네, 환적 화물 중에 1급 위험 화물들이 있습니다. 가급적 선박의 서늘한 장소에 적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혹시 몰라 가급적 주변에 발화 위험이 없는 화물들이 있는 곳으로 배치했습니다.”
“음....”
“선장님, 그리고 이건 사내 절차서인데요.”
“음?”
“위험 화물을 선적하는 경우에 대한 절차서입니다. 선장님도 한번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절차서에 따르면 선장은 화물 감독(Supercargo) 및 터미널 감독과 적부 계획(Stowage Plan)과 특별 화물(Special Cargo)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입수하여 이에 따른 준비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절차서에 기재된 원칙적인 내용들은 싱가포르항과 같은 화물의 움직임이 많은 항구에서는 현실적으로 모두 지키기 어려운 절차들도 있었다.
“선장님, 화물 안전 및 클레임(Cargo safety and Claim)절차서를 보니 위험 화물을 운송할 때는 위험 수납 컨테이너의 외부 표시가 위험물 명세서(Dangerous Cargo Manifest)상 기재 사항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하고, 위험 화물 신고(Dangerous Cargo Declaration) 또는 포장 증명서(Packing Certificate)를 수령해서 확인하도록 되어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흐흐흐. 그래서 만약 정보가 누락되어 있으면 선적 거부 조치를 할 예정입니다.”
이희영 선장이 말없이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희영 선장의 표정이 오묘했다. 얼굴은 살짝 붉어지면서 상기되어 갔지만 한편으로 눈빛은 차분했다. 화가 난 표정이면서도 나를 이해한다는 그런 표정?
아마도 이성적으로는 나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쌓아온 신뢰 관계 때문에 화를 참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희영 선장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본선에서 벌크 화물도 아닌 컨테이너 화물을 선적 거부하는 경우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이례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이희영 선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음...... 알겠네. 장보고 일항사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겠지.”
“네, 선장님 감사합니다.”
“뭐, 출항 시간이 좀 지연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절차는 지켜야 되니까.”
“네, 본선의 안전이 최우선이죠.”
“허허허. 그래 그 말이 정답이지.”
이희영 선장이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보이는 이희영 선장 덕분에 일이 쉬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럼 나도 준비를 좀 해볼까?’
안전모를 꺼내 들고 나도 한창 적재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갑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선교
잠시 후.
“일항사님!”
선교로 뛰어 들어오며 경박스럽게 소리를 질러대는 선원이 있었다.
이 목소리는?
‘역시 조셉인가?’
나의 예상대로 조셉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어갔다.
“일항사님, 선박 대리점하고 해신해운 대리점 직원들까지 몰려왔어요! 무슨 짓이냐고 난리 났어요!”
선교에 있는 사람들은 조셉의 말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 문제를 일으킨 원흉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발키리호 폭발 사고 (4)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선교
조셉의 말을 듣고 나는 앞으로 나서며 이희영 선장에게 말했다.
“선장님, 이 일은 아무래도 제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일항사, 나도 여기 일을 마무리하면 바로 내려가겠네.”
“네, 선장님까지 오실 필요도 없도록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
“음? 잘 아시잖아요. 제가 이런 일들 처리하는 데 전문이라는 거.”
“······.”
뭐지?
이 어색한 침묵은?
나는 고개를 돌려 선교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다들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대성, 곽호진 너희들마저도?’
곽호진 이등 항해사와 이대성 삼등 항해사도 시선을 피했다. 그나마 이대성 삼등 항해사의 얼굴에서는 미안한 표정이라도 읽을 수 있었다.
뭐, 물론 내가 수습한 사건들의 대부분은 내가 촉발시켰다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은 있었다.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건가? 그래도 이런 싸늘한 반응을 받을 정도는 아닌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고!
그때 어색한 침묵을 느낀 것인지 나의 오른팔로 대활약을 했었던 조셉이 다가오며 말했다.
“일항사님, 빨리 가시죠. 갑판장님하고 다들 일항사님만 기다리고 있어요.”
“음? 나를?”
“네, 일항사님이 빨리 오셔야 해결된다며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
‘으흐흐. 그래 제대로 된 반응은 이래야지.’
나는 이대성 삼항사와 곽호진 이항사를 한번 노려본 후 선교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장보고 일항사!”
문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이희영 선장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네, 선장님?”
“나도 바로 내려갈 테니까 사고 치지 말고.”
“······.”
* * *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갑판
조셉과 함께 선교를 벗어나 갑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셉, 그런데 무슨 일이야?”
“해신해운 싱가포르 지점에서 높은 사람이 왔다고 하던데요?”
조셉의 표정은 제법 진지해 보였다. 아마도 육상에서 회사의 높은 사람이 왔다고 하니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해신해운은 전 세계의 주요 항만 도시에 200여 개가 넘는 지점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해신해운 본사의 직원은 1,000여 명도 채 되지 않지만 해외 지점들에 근무하는 외국인 직원들의 수는 본사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의 몇 배에 달했다. 인적 구성만 놓고 보아도 글로벌 기업이라고 불리는 데 손색이 없었다.
해외 도시의 지점장은 보통 본사의 과장급 이상 직원들이 주재원으로 파견 나와 근무하는 곳인데, 현지의 외국인 직원들이 지점장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싱가포르 지점장이 누구였더라.’
하지만 이곳 싱가포르, 런던, 뉴욕, 로테르담과 같이 중요한 해외 거점 도시의 지점장 자리는 다른 곳의 지점장들에 비해 한 단계 직급이 높은 사람들이 파견 나오거나 회사에서 잘나가는 핵심 인재들이 거쳐 가는 경우가 많은 곳이었다.
요직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자리라는 뜻.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갑판에는 선원들 외에도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싱가포르 지점에서 연락을 받고 나온 사람들이 분명해 보였다.
웅성웅성.
가까이 다가가자 제법 흥분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등장한 것을 보고 “발키리”호의 선원들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갑판장이 나에게 다가왔다.
“일항사님.”
“갑판장님, 무슨 일입니까?”
“싱가포르 지점장이시라네요.”
“그래 무슨 일로?”
“일항사님이 선적 거부한 화물들 때문에 찾아왔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뭐 책임자가 누구냐고 선장 나오라며 자기가 누군지 아냐고···.”
“허허허.”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렀다.
절차에 맞게 일을 처리한 건데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