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00)

찰리가 붉은 깃발을 들어 올렸다.

“오리엔탈 그린”호가 우리의 진행 방향 앞에 있다는 뜻.

지지직!

무전기로 찰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항사님, 이대로 계속 진행하면 충돌할 것 같습니다.”

항상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던 찰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일항사님!”

조셉을 비롯한 사람들의 긴장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나의 손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이다!’

해도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눈앞의 바다를 응시하고 있던 나는 키를 아주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돌렸다.

이곳은 해도상으로 수심이 살짝 깊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었다.

“오, 옵니다!”

조셉이 큰 소리로 외쳤다.

천천히 우현쪽으로 회전을 하던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수가 우리 선박의 왼쪽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와 맞춰 추가로 우현 전타를 한 본선 발키리호의 선수도 오리엔탈 그린호의 중심선을 지나 오른쪽 현을 가리키고 있었다.

두 선박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선수의 조셉이 들고 있는 깃발로 크게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리엔탈 그린”호가 바로 근접 거리까지 다가왔다.

나는 선교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모두 조심하세요!”

사람들이 충격을 대비하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휙휙!

찰리가 깃발을 크게 휘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조셉이 소리쳤다.

“지, 지나간다! 써! 지나갑니다!”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수가 “발키리”호의 선수를 지나 좌현쪽으로 지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오리엔탈 그린”호의 좌현과 “발키리”호의 좌현 선수는 불과 몇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와아아!”

“살았다!”

“지나갔다!”

“발키리”호 선교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오리엔탈 그린”호가 눈으로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바로 옆으로 지나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끼이익! 끼이이익!

그때.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귓속으로 갑자기 선체의 어딘가가 긁히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발키리호 폭발 사고 (1)

-광양항 인근 해상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선교

끼이익!

선체가 긁히는 소리가 선교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큰 충격까지는 아니었지만 배가 충격에 살짝 흔들렸다.

‘음? 이 소리는?’

충돌을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선체가 긁히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가슴 한쪽 구석이 철렁했다.

선수에 서서 본선 “발키리”호를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 전용선 “오리엔탈 그린”호를 바라보고 있는 찰리를 보았다. 여전히 깃발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나는 무전기를 꺼내 들어 찰리를 호출했다.

“찰리, 브릿지입니다.”

“네, 일항사님.”

“지금 상황은 어때? 충돌은 없지?”

“네, 충돌 없습니다! 상대 선박은 무사히 지나가고 있습니다. 본선과의 거리는 멀지 않지만 무사히 통과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완전히 통과해서 지나갈 것 같습니다.”

방금 들린 소리는 다행히도 선박이 충돌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 나의 눈앞으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띠링! >

+

<메인 퀘스트 달성을 축합니다.>

“당신의 활약으로 선박 충돌의 위험을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축하합니다. 선박 충돌과 좌주의 위험을 모두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보상 :

- 당신의 명성이 급격하게 상승합니다. (+ 100)

- 도선사 협회가 당신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 칭호 [신의 항해술]을 획득했습니다.

+

퀘스트 달성 메시지가 떠올랐다.

‘역시 충돌한 것은 아니구나.’

메시지 창의 내용을 확인하자 이제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

충돌이 아니라면 우현 쪽 사구에 살짝 선체가 스쳤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선교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다들 방금 있었던 충격음으로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있었던 충격음은 선박이 충돌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얕은 수심인 우현 쪽에서 선저나 선체 부위가 모래 언덕을 살짝 스친 것 같습니다.”

“으으음!”

“그럼 다행이군.”

사람들이 나의 말에 안심한 듯 환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 선박 완전히 통과했습니다!”

선교 밖으로 나가 지나가던 “오리엔탈 그린”호를 바라보고 있던 조셉이 선교 안으로 뛰어 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동차 전용선 “오리엔탈 그린”호가 무사히 “발키리”호 옆을 완전히 빠져나가자 본선의 방향을 좌현으로 변침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키리”호는 정상 항로에 들어섰다.

“장보고 일항사, 고생했네.”

이희영 선장이 다가와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네, 선장님, 일단 혹시 모르니 정박지에서 긴급 점검을 한 이후에 항행을 이동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이네.”

이희영 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기관부에 연락을 취했다. 선박에 다른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써!”

조셉이 다가와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경례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지한 표정과 달리 익숙하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포즈.

진지한 그의 표정을 무시할 수 없어 나도 경례로 답하고 선박의 키를 넘겨주었다. 조셉은 밝은 표정으로 본선을 조선하기 시작했다.

‘일단 한고비 무사히 넘겼군.’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었다. 쉽지 않은 항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 띠링! >

+

<상태창>

이름 : 장보고

나이 : 27세

클래스 : 항해사

세부 클래스 : 일등 항해사

직업 레벨 : Lv.30

명성 : + 4435

스킬 : [항해술 Lv.22], [기관술 Lv.8], [태권도 Lv.10], [고무고무킥 Lv.11], [인명구조 Lv.12], [고소고발 Lv.14], [협상 Lv.15], [잠입 Lv.5]. [마도로스의 심장 Lv.13], [명사수 Lv.5]

칭호 : [수성의 달인], [인도네시아를 구한 영웅], [인도네시아의 국민 사위], [구조의 달인], [부산사나이], [용감한 시민], [최연소 이등항해사], [항로계획의 달인], [응급처치의 달인], [해신해운의 핵심인재], [바다를 사랑하는 젊은 청년], [국감스타], [용감한 선원]. [최연소 일등항해사], [화물의 달인], [바다의 수호자], [신의 항해술]

Remark : 전직을 원하는 경우 전직이 가능합니다!

+

* * *

-싱가폴 항구 정박지,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의 선교

며칠 후.

광양항 출항 당시 자동차 전용선 “오리엔탈 그린”호와 충돌할 뻔했던 위험천만한 순간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큰 사고 없이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방금 전 통화한 차진혁 경감의 소식에 따르면, 광양항 입출항로 준설 공사를 담당했던 업체는 부실 공사 및 횡령, 배임 혐의로 “발키리”호가 출항한 직후 해양 경찰로부터 압수 수색을 당했다고 한다.

당국에서도 수심을 확보하기 위한 준설 공사를 다시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선박 우리 “M.V. 발키리”호는 목적항 싱가포르 항구에 도착했다.

싱가포르 항구는 인근에서 가장 큰 대형 허브 항구로 주변 지역의 환적 화물(옮겨 싣는 화물)이 대거 몰리는 곳.

“발키리”호는 싱가포르 항구의 정박지에서 앵커(닻)을 내리고 정박 중인 상태였다. 정박지에는 몇 척의 선박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다른 선박들도 입항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구의 부두 근처에는 화물선과 예인선들이 바쁘게 오고 갔다. 선박 위로는 대형 크레인들로 컨테이너를 옮기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처럼 평온하기만 한 모습이었다.

“써,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걱정이라도?”

선교에서 항구를 바라보는 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평소와 다르다고 느낀 것일까?

조타수 조셉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아니. 왜?”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요.”

“그래?”

“네, 누구 한 명 때려잡을 것 같은 그런 표정?”

“음? 허허허.”

‘그 정도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조셉의 말에 나는 잔뜩 굳어있던 표정을 풀며 살며시 웃었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면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을 조셉도 그동안 몸으로 체험(?)하지 않았던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조셉이었다.

하지만 곧 이 선박에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그저 태평하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생에 발생한 “발키리”호 폭발 사고의 원인이 된 화물이 선적된 곳이 바로 이 항구였기 때문이다.

폭발을 막을 생각 하니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항사인 내가 혼자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어 선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예전과는 위치가 달랐다. 이제는 일등 항해사로 승선하고 있는 상황.

전폭적인 신뢰를 해주는 선장님과 믿고 따르는 동료들이 있다.

사고를 막기 위해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어야 했던 예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삼등 항해사 시절은 내가 생각해도 참 무모했지.’

무모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 사이 정박지에 떠 있는 선박들 사이로 작은 보트 한 척이 “발키리”호를 향해 접근해오고 있었다.

‘음, 저 배인가 보구나.’

본선을 향해 빠르게 달려고 오고 있는 작은 보트 위로 일어서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발키리”호에 찾아오기로 한 손님이 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 * *

“컨테이너선 해신 발키리호 폭발 사건”

곧 이 선박에서 발생할 사고의 공식적인 명칭이다.

화재 사고는 선원들 사이에서 선박에서 발생하는 사고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유형의 사고로 꼽힌다.

게다가 이번 사건은 단순한 화재 사건에 그치지 않고 대규모 폭발까지 발생해 선박이 대파되는 결과가 발생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본선 “발키리”호는 싱가포르를 출항하면 수에즈운하-로테르담-함부르크-템스포트 등의 항구를 거쳐 프랑스 르아브르항까지 운항할 계획.

그중에서도 이곳 싱가포르에서의 일정이 가장 중요했다.

전생의 사건 기록에 따르면, 이번 싱가포르항에서 선적한 위험 화물 중 하나가 폭발의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계획에 따르면 이곳 싱가포르항에 도착한 “발키리”호에는 총 46TEU(컨테이너의 단위)의 위험물이 선적될 계획.

그리고 위험물 46개의 컨테이너를 포함해 총 5천여의 컨테이너를 적재한 상태에서 “발키리”호는 다음 목적지인 로테르담항을 향해 출항한다.

그리고 유럽으로 들어가기 위해 수에즈운하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선적된 위험물들 중 어느 컨테이너에서 폭발이 시작된다.

사건 당시 폭발의 원인으로 추정된 화물은 위험 화물 중에서도 위험 등급이 높은 폭죽(Fireworks)이었다.

폭죽이 수납된 컨테이너가 선미갑판 위(54번 베이 3밴, 62번 베이 4밴)에 적재되는데, 이 폭죽에 대한 위험물 명세서에는 화물에 대한 정확한 내역이나 비상 연락처 등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그건 이 화물의 화주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였다.

화주와 위험물 내역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은 점은 당시에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독일 함부르크항에서 하역될 이 폭죽 화물에 대한 유일한 정보는 해신해운에 이 화물 운송을 위탁한 운송 주선인에 대한 것이었다.

이 화물을 해신해운에 위탁한 운송 주선인은 중국 남부에 위치한 월드로지스틱스(World Logistics). 하지만 사고 직후 수소문을 통해 겨우 찾아낸 월드로지스틱스의 주소지에는 그저 폐허인 창고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천문학적인 손해 배상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야반도주를 한 것인지, 아니면 해당 주소지가 가짜인지 여부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고, 넓은 중국 땅에서 정체를 숨기고 도주한 사람들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해신해운과 보험사는 피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책임자를 찾지 못했고, 제대로 된 구상을 하지 못한 채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 * *

-싱가포르항 정박지, 컨테이너선 “발키리”호의 선교

찰리가 선교가 들어오며 말했다.

“일항사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바로 내려갈게.”

찰리와 함께 갑판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이 사건의 유일한 단서가 될 수 있는 회사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사건의 유일한 단서. 그건 바로 중국 남부에 위치한 포워딩 업체(운송 주선인 회사)인 월드로지스틱스(World Logistics)였다.

전생과 같은 불상사를 막기 위해 나는 그동안 어렵게 인연을 맺은 글로벌 인맥을 동원했다.

그리고 월드로지스틱스에 대한 조사를 미리 요청해둔 상태였다.

‘이런 일은 아마도 이들이 전문(?)일 테니 정보를 좀 알아 왔겠지?’

내가 갑판에 도착하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나를 보며 크게 소리쳤다.

“Mr. Jang(미스터 장)!”

검은 중절모에 검은 정장을 입은 카리스마 넘치는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오래전 이곳 싱가포르에서 흑룡회에 맞서 함께 싸웠던 전우(?)였다.

이 사람의 정체는 바로 싱가포르 삼합회의 수장이자 해신해운의 고객사 중 한 곳인 TR Trading(티알 트레이딩)사의 대표 샤오 린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