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200)

그동안 몰려오던 불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전생에 광양항에서 발생한 좌주(물이 얕은 곳의 바닥이나 모래가 많이 쌓인 곳에 배가 걸리는 것을 말함) 사고가 떠올랐다.

전생의 기억.

광양항에서 화물을 가득 적재한 대형 벌크선이 악천우를 피해 평소보다 빠르게 출항하는 과정에서 모래 위에 좌주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좌주 사고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대형 벌크 선박의 선저가 바닥에 걸리면서 선저외판이 길이 약 20미터, 폭 7미터, 깊이 약 0.3미터로 굴곡 손상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생에 사고가 발생했던 선박은 해신해운의 선박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고는 해운업계에 크게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나도 기억하고 있는 사고였다.

해도의 정보가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는 이유로 선박 회사와 해도 제작 업체 사이에 법률 분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이 사고의 원인은 광양항을 준설한 업체의 부실 공사와 비리 때문이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준설업체가 계획한 대로 준설 공사를 실시하지 않았고, 준설해서 파낸 모래도 안전하게 처리하지 않고 통항로 바로 옆으로 몰래 옮기는 사고를 쳤던 것이다.

당시 준설업체는 부실 공사를 눈감는 대가로 항만의 관련자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지급한 사실도 밝혀졌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도선사에게 물었다.

“그럼, 여기서 좀 더 오른쪽으로 벗어나면 도대체 수심이 어떻게 됩니까?”

“음, 아마도 지금 컨테이너를 가득 적재한 발키리호라면 최소 1~2미터 정도는 수심이 부족할 것이네.”

이희영 선장이 도선사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이, 이런! 장보고 일항사, 지금 본선을 좌현으로 변침하는 것은 어떤가?”

“음, 선장님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상대선박이 우현 좌현으로 변침하면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뒤늦게라도 상대 선박이 충돌 위험을 대비해서 우현으로 대각 변침을 하기라도 하면 큰 충돌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모래위에 좌주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피해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으으음!”

이희영 선장이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작은 신음성을 흘렸다.

선교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조타수 조셉을 바라보았다. 대화를 듣고 있던 조셉은 벌써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짜식. 겁먹었구나.’

하지만 나는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조선을 해야겠다.’

잔뜩 겁에 질려있는 조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신의 항해술

-광양항 부근 해상, 선박 “발키리”호의 선교

광양항에서 발키리호가 출항한 이후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계속 느끼고 있었다.

불안감의 원인이 전생에 발키리호에서 발생한 화재 폭발 사고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이유였다. 지금 발키리호가 선박 충돌 사고의 위험을 목적에 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각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오히려 차분해지는 기분이야.’

하지만 오히려 위험의 정체를 알게 되자 나는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온갖 고생을 하며 퀘스트를 달성해왔기 때문일까? 나는 어느새 위기에 강한 스타일로 변모해 있었다.

불안 요소를 알게 된 이상 해결하면 그만이다.

마음을 다잡자 나의 눈빛도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조셉의 등 뒤로 다가섰다.

툭.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조셉의 어깨 위로 올렸다. 조셉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나에 대한 신뢰가 가득한 눈빛.

“조셉.”

“네, 일항사님.”

“지금부터 내가 직접 조선한다.”

“써(Sir)?”

“통항로 벗어날 때까지 내가 직접 조선한다. 옆에서 보조해줘.”

조셉이 나의 말에 고개를 돌려 이희영 선장을 바라보았다. 선장의 허락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희영 선장이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이희영 선장의 눈빛에서 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이희영 선장은 말없이 조셉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써(Sir).”

조셉이 활짝 웃으며 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조셉이 옆으로 비켜서고 나는 조타키 앞으로 다가섰다.

< 띠링! >

+

<메인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진행에 따른 메인 퀘스트를 진행합니다.

“선박 충돌의 위험이 있습니다. 사고 없이 위험을 제거하세요!”

세부 퀘스트 : 선박 충돌

클리어 조건 : 충돌 위험 제거

제한 시간 : 광양항 도선구 벗어나기 전까지

보상 : 명성 + 100, 글로벌 명성 상승, 칭호 [신의 항해술] 획득

실패 시 : 환경 오염, 선박 좌주 or 대파

+

* * *

-자동차 전용선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교.

같은 시각.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교.

선장은 여전히 육안으로 경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오리엔탈 그린”호는 약 16노트의 속력으로 계속 항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음? 이게 무슨 소리지?”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장은 귓속으로 들리는 긴 장음의 기적 신호를 포착했다.

“이건 무중 신호?”

발키리호가 울리고 있는 무중 신호(안개 등으로 시계가 불량한 경우, 선박 충돌 등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하여 기적 또는 다이어폰 등으로 소리를 내는 신호를 말함)가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원들에게도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바다는 갑자기 짙어진 해무(바다 안개) 때문에 시정이 불량했다.

베테랑 선원인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장도 무중 신호를 듣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면 우리를 향한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선장은 전자해도(ECDIS)의 영상을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전자해도와 레이더를 확인하던 선장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쨍그랑!

선장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조타수가 깜짝 놀라 선장을 바라보았지만 선장은 커피잔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크, 큰일이다.”

선장은 “오리엔탈 그린”호의 우현 근거리에 물체가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선장이 우측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쌍안경을 들어 올려 주시하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상대선의 마스트등(Mast light) 불빛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 듯했다.

‘이대로 계속 항행하다가는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선장이 다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 상대 선박을 호출해야 한다.’

선장이 VHF로 상대 선박인 “발키리”호를 호출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 순간.

지지직! 지지직!

때마침 VHF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장은 이번에는 VHF에서 호출하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 * *

-광양항 부근 해상, 선박 “발키리”호의 선교

오랜만에 직접 선박을 조선하기 위해 키를 손에 잡았다.

키에 손을 올리자 손을 타고 전기가 몸에 흘러 들어온 것처럼 찌릿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무협 소설에서 각성한 고수들처럼 각종 신체 능력이 향상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띠링!>

+ 스킬 [마도로스의 심장 Lv. 13]을 사용합니다. +

- 냉정함을 유지합니다.

-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이 떠오릅니다.

- 바다 고유의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 스킬 [항해술 Lv.20]을 사용합니다. +

- 항해 실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바닷길을 읽는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 바닷물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스킬 [기관술 Lv.8]을 사용합니다. +

- 선박의 속도 조절 능력이 상승합니다.

- 기관부와의 협업 능력이 상승합니다.

스킬이 발동되자 마치 바다의 움직임이 시각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바다 수면 위의 길이 눈앞에 보이는 느낌이었다.

선박의 항로 오른쪽으로 수심이 아직 여유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조금 더 여유가 있구나!’

키를 조심스럽게 우현으로 추가 전타(선박의 키 각도를 바꾸는 것을 말함)하기 시작했다.

“어! 이, 일항사! 조심하게!”

선박의 키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그 모습을 지켜본 도선사가 긴장한 표정으로 외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여유가 조금 있습니다.”

나의 말에 도선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희영 선장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확인하자 도선사도 그저 나를 믿고 내가 조선하는 것을 바라보기로 결심한 듯했다.

“발키리”호가 아슬아슬하게 수심을 타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된 것 같네.’

나는 키를 정침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조셉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셉, 잠깐 키를 잡고 있어!”

“예, 써!”

“일단 정침으로 유지하고 있다가 내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예, 써! 알겠습니다!”

나는 믿음직스러운 나의 오른팔 조셉에게 키를 잠시 맡겼다. 다시 한번 VHF 채널로 “오리엔탈 그린”호를 호출하기 위해서였다.

“오리엔탈 그린호! 여기는 발키리호입니다. 응답 바랍니다!”

-오,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장입니다!

“······!”

이놈들이 도대체 지금까지 뭘 하다가? 드디어 상대 선박에서 응답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와!”

“휴우······.”

“발키리”호 선교의 사람들은 “오리엔탈 그린”호가 응답하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짧은 환호성을 질렀다.

‘다행이다. 하지만 아직 위기 상황이 끝난 게 아니다.’

아니.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장과 교신을 시작했다.

“본선이 통항로 우측으로 최대한 붙어서 가고 있습니다. 귀선은 지금 당장 우현 대각도로 전타하십시오!”

-네?

선박 충돌 상황에서 가장 기본적인 회피 방법은 선박이 좌현 대 좌현(선박의 좌현이 서로 마주 보는 방향)으로 지나가도록 우현 전타를 하는 것이었다.

피항할 의무가 있는 선박이 우선적으로 취해야 할 조치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회피 가능한 선박 모두가 피항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키리”호가 계속 정침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우현으로 변침하는 것이 옳았다. 그래서 “발키리”호가 정침을 유지할 계획이니 “오리엔탈 그린”호만 우현으로 전타하라는 요구가 이상하게 들린 것이다.

“통항로 우측으로 해도상으로 표시되지 않는 저수심 구간이 있습니다.”

-······!”

“지금 당장 우현 대각도 전타하십시오!”

- 아, 알겠습니다!”

VHF 채널을 통해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장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타수! 빨리 우현 대각도 전타!”

“네?”

“충돌 위험이 있다. 빨리 대각도로 전타하게!”

“네!”

나는 VHF 무전기 너머로 들리는 대화 소리에 집중하며 눈앞의 레이더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오리엔탈 그린호가 우현 대각도로 전타하기 시작했다.

“오리엔탈 그린호! 다시 한번 우현 전타하세요!”

추가로 전타를 하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오리엔탈 그린”호의 선장은 다시 곧바로 조타수에게 대각도 우현 전타를 지시했다.

두 번의 우현으로 대각도 전타를 하는 오리엔탈 그린호는 이제 본선 발키리호를 거의 마주 보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두 선박은 바로 근접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보, 보입니다!”

해무를 뚫고 정면에서 자동차 전용선 오리엔탈 그린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키리”호의 선교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꿀꺽. 긴장한 사람들이 침을 삼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습을 드러낸 오리엔탈 그린호는 천천히 우현으로 돌고 있었지만 큰 원을 그리고 돌고 있는 상대 선박은 마치 우리를 향해 그대로 돌진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조셉은 통나무처럼 딱딱하게 긴장한 상태. 나는 조셉에게 다가섰다.

“조셉! 내가 지금부터 내가 직접 조선한다!”

“예, 예 써(Sir)!”

새하얗게 질린 표정의 조셉으로부터 다시 키를 건네받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발키리호의 선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나의 부탁을 받은 부갑판장 찰리가 구명조끼를 입고 대기하고 있었다. 찰리는 선수에 서서 눈앞으로 다가오는 “오리엔탈 그린”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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