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200)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하는 사람에 따라 신뢰가 없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차진혁 경감이 쓰러뜨린 거경파 조직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몸이 성한 놈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반병신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차진혁 경감이 나의 시선을 읽은 듯 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하하. 저놈들은 항복 안 했잖아. 무기도 들고 있고.”

“음,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저도 이 거경파 놈들 때문에 물속에서 죽을 뻔했었거든요.”

“그래?”

“네, 저도 화풀이는 해야죠.”

“그래 그래, 잘했다.”

내 말에 차진혁 경감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까?”

“일단, 거경파 똘마니들은 한군데로 모아서 좀 묶어놓고요. 이 두목은 깨어나면 대화를 좀 해보려고요.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음? 뭔데?”

차진혁 경감과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그럼 내가 일단 여기 정리 좀 해놓고 있을게.”

차진혁 경감이 거경파 조직원들이 쓰러져 있는 장소로 달려갔다.

‘뭐야 저 사람?’

그는 무겁지도 않은지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덥석 들어 올리더니 조직원들을 창고 한쪽 구석으로 들고 가 바닥에 패대기치기 시작했다.

쿵!

제법 충격이 심해 보였지만 거경파 조직원들 중 일어나는 놈은 없었다.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때린 거야?’

거경파 조직원들은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정신을 차린 놈이 한 놈도 없었다.

* * *

잠시 후.

“으으으.”

정신을 차린 변도수가 신음 소리를 흘렸다.

“뭐, 뭐야! 이 새끼들 이거 빨리 풀어!”

눈을 뜬 그는 끈으로 묶인 채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변도수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나머지는 다 어디 갔어?”

주변을 둘러보지만 작은 방 안에 자신의 부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새끼야! 내 부하들은 어디 있냐고! 부하들 건드렸으면 너 이 새끼 내가 가만 안 둔다!”

“쉿!”

변도수의 절박한 외침에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들어 올려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대신 최진혁 경감에게 미리 부탁해뒀던 거경파의 조직원들의 신상 명세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파일을 펼쳐 보였다.

“이름 변도수, 나이는 41세, 울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소규모 범죄 조직 동구파의 두목, 몇 년 전에 거경파에 합류해서 현재 거경파의 No.3로 불린다지?”

“…….”

탁!

나는 더 읽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파일을 세게 덮었다.

“그런데 진짜 No.3 맞습니까?”

“뭐 이 새끼야?”

“거경파 No.3가 진짜 맞습니까? No.3 정도 되는 간부가 이렇게 먼 곳까지 채권 추심이나 하러 온다는 게 말이 됩니까?”

“…….”

정곡을 찔렸다. 변도수는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명목상 No.3로 불리고 있지만 허울뿐인 자리 아닙니까? 실권은 다른 파 출신 놈들이 다 쥐고 있고!”

“…….”

“두목이라는 놈은 재벌, 정치인들 똥구멍이나 닦기 바쁘고!”

“…….”

변도수의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그러지 말고 저랑 일하나 같이합시다.”

“미친 새끼. 배신하라는 거냐?”

“배신이 아니고요. 건달이 건달 일만 하라는 거죠.”

“…….”

잠시 뜸을 들이더니 변도수가 말했다.

“흥, 근데 네놈은 도대체 정체가 뭐냐? 네가 뭔데 일을 같이하자는 거야?”

“뭐, 저는 못 믿으시겠죠. 하지만 이 사람은 믿을 수 있겠죠?”

벌컥!

철문이 열리고 탄탄한 체격의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차진혁 경감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연차 휴가 중이던 그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 쓰고 있던 복면을 벗어 던졌다.

“변도수 너 이 새끼!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복면을 쓴 사람이 차진혁 경감이라는 것을 확인한 변도수의 얼굴은 잔뜩 구겨지기 시작했다.

“거경파는 내가 무조건 박살 낸다. 너는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든지 아니면 같이 잡혀가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해!”

“…….”

차진혁 경감의 말에 변도수가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저 독종 차진혁 경감이 이 일에 개입한 이상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 * *

-광양항

몇 주 후.

몇 주의 시간을 바쁘게 보냈다. 거경파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필요한 준비는 최진혁 경감이 맡아주기로 했다.

그리고 바다에서 건져 올린 막대한 보물은 전생에서처럼 쩐주 최 부자를 통해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나는 본업을 위해 이곳 광양에 도착했다. 하선 휴가 기간이 빠르게 끝났다.

이곳에서 나는 해신해운의 컨테이너선 M.V. “발키리”호에 승선할 예정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선박의 선체에 새겨진 선명 “발키리”를 바라보니 복잡한 심경이 교차했다.

이번 항차를 마지막으로 승선 생활을 마무리하고 육상 직원으로 전환 신청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 발키리호가 현생에서 나의 마지막 배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감회가 새롭네.’

마지막 승선이라서 그런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발키리호를 마지막 배로 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건 이번 항차에 발생할 무서운 사건을 막기 위해서.

반드시 막아야 하는 사건.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발생하게 된다. 그는 전생과 현생을 이어가며 인연을 쌓은 사람이었다.

전생에 이 사건으로 죽은 사람은 바로 초임 3항사 시절 승선했던 비너스호의 선장 이희영이었다.

M.V. 발키리호

-해신해운 컨테이너 선박 M.V “발키리”호

발키리호.

199X년 X월 X일 국내의 대형 조선소에서 건조, 진수된 총톤수 64,054.00톤(길이 264.95미터×너비 40.00미터×깊이 20.17미터), 출력 74,520마력, 컨테이너 5,551TEU를 운송할 수 있는 대형 컨테이너 선박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이번 휴가를 마치고 발키리호가 아닌 다른 선박에 승선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선박으로 배정된 이유는 발키리호에 꼭 승선하겠다는 나의 각오(?) 덕분이었다.

발키리호에 승선하는 것은 제법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전생에 발키리호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아주 유명한 선박이었다.

우리나라의 해기사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해기사들도 발키리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곧 이 선박에서 발생할 사고 때문.

국내 해운 회사 역사상 최악의 폭발 사고.

우리나라 선적의 선박 중에서 가장 큰 폭발이 일어났던 대형 사고가 바로 이 선박에서 발생했다.

이 사고 이후 발키리호는 해상에서 발생한 사건 사고를 소개하는 교재나 자료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였다.

항상 나쁜 예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해기사들 사이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는 독보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사고는 이번 항차에서 발생할 예정이었다.

발키리호는 몇 시간 후인 20XX년 X월 X일 10시 30분경 광양항을 출항한다.

부산-카오슝-홍콩-싱가포르-수에즈운하-로테르담-함부르크-템스포트-르아브르항을 기항하는 노선을 항행할 계획.

그리고 사고는 싱가포르항에서 마지막으로 화물의 양화․적화를 완료하고 컨테이너 5,130TEU를 적재한 상태에서 수에즈운하로 향하여 항행하던 중 발생한다.

예멘국 아덴항 동방 약 140마일 거리인 북위 12도 40분 00초․동경 047도 22분 30초 해상에서 선미갑판 54번 베이에 적재된 위험화물이 수납된 컨테이너가 폭발하여, 선원 1명이 사망하고, 선미 부분 좌현외판과 화물창 등이 대파되는 화재, 폭발 사고가 발생한다.

대폭발로 인해 선박은 그야말로 누더기가 되었지만 인명 피해는 1명에 그친다. 용감한 선원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고의 규모에 비하면 인명 피해가 적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사망한 사람의 신원이다.

전생에 이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나도 익히 잘 아는 사람.

그는 내가 초임 3등 항해사고 비너스호에 승선했을 당시 선장이었던 이희영 선장이었다.

‘과거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었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른 선박에 승선한 상태에서 이희영 선장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곳에 온 이유였다.

이번 현생에서는 이희영 선장의 죽음을 막기 위해 이 선박에 승선하기로 결심했다.

* * *

-해신해운 컨테이너 선박 M.V. “발키리”호의 선교(브릿지)

발키리호의 갑판을 지나 선교로 들어섰다.

배에 올라오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슷한 구조의 컨테이너선이었지만 선박의 구조에 특이한 점이 없는지 빠르게 눈으로 살폈다.

선박을 둘러보며 어느새 나는 선교에 도착했다.

철컥!

문을 열고 조용히 선교로 들어섰다. 나의 눈에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왔다.

“오!”

“일항사님!”

“써!”

격하게 나를 반기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선교에는 있는 발키리호의 선원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연히도 초임 시절을 함께했던 비너스호의 선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이희영 선장, 조타수 조셉, 이제는 부갑판장으로 승진한 찰리, 그리고 기관장까지. 그리고 줄리엣호에서 같이 승선했던 곽호진 이항사와 이대성 삼항사도 이 배에 승선하고 있었다.

이번 생이 아니라면 다시 만날 수 없었던 얼굴들도 있다.

조셉은 원래라면 천식으로 인한 사고로 배에서 내렸어야 했고, 찰리는 마약 사건에 연루되어 큰 고초를 겪을 운명이었으니까.

현생에서 이어진 귀한 인연들이 결국 여기까지 이어졌구나. 왠지 모르게 뭉클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때 나의 상념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 여전히 경박스러울 정도로 쾌활한 목소리.

“써(Sir)!”

조셉이었다. 조셉이 나를 보며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그리고 조셉의 등 뒤로 이제는 베테랑 선원이 되어 부갑판장으로 승진한 찰리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조셉과 찰리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같이 넘긴 전우들이 아닌가? 이보다 반가울 수가 없었다.

“허허허, 일항사 왔나?”

중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희영 선장이었다.

이희영 선장과는 지난 몇 년간 기회가 없어 함께 선박에 승선할 기회가 없었다.

초임 삼등 항해사였던 나는 그사이 나는 능숙한 일등 항해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희영 선장은 흰머리가 제법 늘었다.

“이희영 선장님!”

“허허허. 전에는 초임 삼항사였는데 이제는 벌써 일항사가 되었군. 시간이 참 빠르네.”

“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나야 뭐 똑같지. 자네가 따로 연락 안 했지만 나는 그동안 장보고 일항사 소식을 많이 들었네.”

“네? 소식이요?”

“그래, 비너스호를 탈 때도 그랬지만 뉴스에 하도 자주 나오니 말이야. 자네 소식은 모를 수가 없지. 허허허.”

이희영 선장이 선교 한쪽 구석을 뒤지더니 신문을 꺼내 들었다.

이희영 선장이 들고 있는 신문의 헤드라인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 “태안 해상서 유조선 기름 유출… 긴급 방제” +

+ “해신해운 일항사 바다를 살리다! 이번엔 긴급 방제” +

+ 바다를 구한 영웅? 해신해운의 일항사로 밝혀졌다 +

“일항사님 짱! 써(Sir)!"

조셉이 나를 보며 여지없이 이번에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역시 왕년의 내 오른팔이었던 조셉은 여전했다.

저 신문 기사들은 나도 이미 여러 번 읽어본 기사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살짝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희영 선장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얼굴을 붉혔다.

이희영 선장이 웃으며 나의 어깨를 살짝 두들겼고, 나는 선교에 모인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희영 선장이 우리를 보고 인자한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

“자, 여러분 회포는 출항하고 여유가 좀 생기면 따로 자리를 마련하도록 합시다. 일단 장보고 일항사는 빨리 인수인계를 마치도록 하고, 할 일이 많다네.”

“네! 알겠습니다.”

이희영 선장의 말에 사람들이 활짝 웃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 * *

-광양항, 선박 M.V. “발키리”호의 선교

잠시 후. 발키리호가 출항할 시간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출항을 위해 승선한 도선사가 선교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도선사님, 일등 항해사 장보고라고 합니다.”

“오! 그 소문의 장보고 일항사?”

도선사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자 그는 나를 보며 알은척을 했다.

‘음? 아는 사람인가?’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상당히 관록이 있어 보이는 도선사의 얼굴. 어딘지 낯이 익어 보이는 얼굴이긴 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잠시 고민해보았지만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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