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선 검사하러 온 사람들이 접대받으면 되나요. 해신해운 항해사 자존심이 있지.”
“.......”
“그러니 오늘 이 자리는 제가 쏘는 걸로 하겠습니다.”
내 말에 선장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 일항사, 이렇게 많이 나왔는데 자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때 눈치 없는 이대성 삼항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선장님,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음?”
“장보고 일항사님은 투자의 신이라고 후배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합니다.”
“뭐? 투자의 신?”
“네, 후배 항해사들 사이에서는 장보고 일항사님하고 배를 타고 내리면 투자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그런 이야기 못 들어보셨어요?”
“.......”
선장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문.
같이 배를 탄다고 해서 모두 그런 기회를 얻는 것은 아니었다. 성실하고 괜찮은 후배들에게 소소한 팁을 전해주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중에는 제법 기회를 살려 큰돈을 번 후배 항해사도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론 내가 쩐주인 자갈치 최부자를 통해 얻은 수익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지만 말이다.
벌컥!
그때 갑자기 다시 방문이 열리더니 웨이터들이 우르르 들어와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웨이터들 뒤로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 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일항사님, 구해달라고 하신 게 이게 맞을까요?”
나는 상자를 열고 안에 들어 있는 위스키병을 꺼내 살폈다.
“오! 네 맞습니다. 달모어 40년!”
“하하하. 다행입니다. 정말 힘들게 위스키를 구해왔습니다. 이렇게 비싼 물건은 찾는 분이 없어 저희도 평소에는 준비해두질 않아서요.”
이 술은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현재형 차장과 마신 위스키였다.
“아, 그렇군요. 이거 사장님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저희야 매출을 올리면 좋은 거지요. 근처에 호텔에 근무하는 사람을 통해 겨우 구했습니다. 하하하.”
“네, 감사합니다.”
사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웨이터들에게 추가로 이것저것을 지시한 후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선장과 그 뒤로 앉아 있는 조영일 전무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묵례했다.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 위스키도 제가 미리 계산해뒀으니 편하게 드시다가 천천히 일어나십시오. 달모어 40년이라고 아주 비싼 겁니다. 아마 좀처럼 마시기 힘드실 겁니다.”
“······!”
“일, 일항사님! 저도 같이 가요!”
내가 말을 마치고 방문 밖으로 나서자 이대성 삼항사가 옷을 챙겨 헐레벌떡 내 뒤를 따라 달려오기 시작했다.
“······.”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조영일 전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 * *
- 대한중공업 조영일 전무의 사무실
다음 날.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대한중공업의 임원 조영일 전무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는 어젯밤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아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다.
해신해운에서 온 인수팀원들에게 접대를 해서 ‘물칠’을 좀 하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조영일 전무는 수화기를 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야!”
“전무님, 현장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현장? 현장이라고 하면 내가 어딘지 어떻게 알아!”
비서는 조영일 전무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긴장한 듯 목소리를 살짝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전무님.”
“그래 무슨 일이야?”
“해신해운으로 인도될 헤라호에 나가 있는 검사관이라고 합니다. 급한 일이라고 바로 전무님을 연결해달라고 합니다!”
헤라호에서 온 연락이라는 말에 조영일 전무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M.V. 헤라호 침몰사고 (3)
“바꿔 봐!”
“네, 전무님. 전화 연결하겠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조영일 전무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조영일 전무입니다.”
“전무님, 접니다. 홍 검사관.”
그는 선급에서 나온 선체 검사관인 홍일표 검사관이었다.
“그래, 또 무슨 일인가?”
“정말 골치 아픈 놈입니다. 이 미친놈이 아침부터 계측업체와 수중공사업체를 불렀습니다.”
“뭐?”
그 말에 조영일 전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었다.
“계측업체하고 수중공사업체를 불렀다고?”
“네.”
“왜? 누가?”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그 미친놈 있지 않습니까. 장보고 일항사 말입니다.”
“그놈이 왜?”
“이 미친놈이 오늘 아침부터 망치를 들고 다니며 선체를 전부 두들기더니 선체 중에 유독 약한 부분이 있다며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께도 계측해보고 선저 검사도 다시 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 이런 미친 새끼가!”
쾅!
소리를 버럭 지른 조영일 전무는 전화기를 책상을 향해 집어 던졌다.
“이 미친놈이! 이대로 가만히 두면 안 되겠어. 무슨 수를 써야지!”
조영일 전무의 얼굴에 음흉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 신조선 헤라호 갑판
“자, 장보고 일항사!”
다급하게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땀을 삐질 흘리며 달려오는 선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항사!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선장은 갑판 위로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들은 급하게 연락을 받고 온 수중공사업체의 직원들과 계측업체 직원들이었다.
“아, 선장님! 일찍 오셨네요.”
“으흐흠! 급하게 연락받고 달려오는 길이네.”
지금 시간은 오전 10시경.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지만 이제야 출근한 선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자다가 씻지도 않고 달려온 모습이었다.
급하게 연락을 받고 왔다고 하니 누구의 연락을 받은 것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마 조영일 전무 쪽의 연락을 받았겠지?’
내가 그의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을 쳐다보자 선장은 휴대폰을 슬그머니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어제 늦은 밤까지 이어진 술자리의 여파 때문인지 선장은 아직도 숙취가 해소되지 않은 모습. 근처로 다가서자 아직도 술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선저 중심부와 밸러스트 탱크 쪽 상태가 너무 나빠서요. 두께도 계측해보고 수중검사를 해서 선저 상태도 한번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그걸 우리가 왜 하나?”
“그럼 누가 합니까?”
“조선소에서 해야지! 신조선 인수하면서 그런 검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일이 없네!”
“조선소 검사 결과를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뭐?”
나는 선장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좀 걱정되는 게 있어서요. 조선소에서 부르는 업체는 어차피 하청업체들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조선소 일을 하청받아야 되는 입장인데 제대로 된 검사가 되겠습니까?”
“으으음! 그래도 검사하는 업체가 허투루 하겠는가!”
“또 혹시 모르잖아요. 조선소에서 사주는 고급 위스키 받아 마시고 검사는 나 몰라라 할지도.”
“음?”
“그래서 제가 어제 술까지 산 거 아닙니까? 뭐 저 없는 데서 따로 접대받으시거나 한 건 아니죠?”
내가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자 선장은 헛기침을 하며 손을 절래 흔들었다.
< 띠링! >
+스킬 [고소고발 Lv.11]을 사용합니다. +
- 범인을 추적합니다.
‘벌써 받아먹었구나.’
최도영 선장은 사람은 좋은데, 직업윤리의식은 없는 스타일의 사람으로 보였다.
최근에 해신해운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선원으로 전생에서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얼마나 받아먹었냐는 건데.’
식사나 술 같은 관용적으로 허용되는 수준의 접대가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혹시 뒷돈 같은 것을 받아먹었기라도 했다면 결코 단순히 취급할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싱가폴에서 선박유 밀수하던 놈들 일망타진한 이야기를 못 들었나?’
해신해운에서의 나의 입지는 이미 웬만한 선장들을 능가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와 승선하는 것을 피하는 선장들도 많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보니 나에 대한 소문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함부로 경거망동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최도영 선장의 경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은 많았지만 아직 물증은 없는 상태.
신조선 인수를 위해 조선소로 내려온 직후부터 선장은 내가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최대한 좋게 넘어가려고 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었다.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갑판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전부 몰려왔다. 필요한 장비를 다 옮기고 준비를 마친 듯 보였다. 그중 관리자로 보이는 사내가 다가오면 물었다.
“장보고 일항사님, 다 준비됐습니다. 시작할까요?”
말을 건넨 사람은 수중공사 업체의 담당자였다.
“어이! 어이! 시작은 무슨! 다 필요 없습니다.”
선장이 다급하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네?”
“제가 신조선 인수팀장으로 온 선장입니다. 작업 필요 없으니 배에서 철수하십시오.”
선장의 말에 수중공사업체 담당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양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뭐, 예상대로네.’
최도영 선장이 이 검사를 방해할 것이라는 것은 내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물론 그 대비책도 이미 마련된 상태.
나는 선장에게로 다가서며 말했다.
“선장님, 안 됩니다. 선박 인수전에 별도로 검사를 해야 됩니다.”
“뭐?”
내 말에 선장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일항사라도 선장의 말을 따르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것이다.
“선장님, 지금 추정되는 선체 외판 두께가 말도 안 되게 얇은 수준입니다. 기준치에 한참 모자라는 게 분명합니다.”
“자네 추측 아닌가? 자네가 전부 검사해본 것도 아니고! 조선소에도 제공한 보고 내용이 다 있잖아!”
“조선소 자료는 믿지 못하겠으니까 그렇죠,”
“그리고 선체 두께는 원래 운항하고 하면 쇠모되기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닌가. 운항하다가 보강하고 하면 아무 문제 없는데 왜 이렇게 일을 키우는 건가!”
“신조선인데 무슨 쇠모 이야기를 하십니까?”
“······.”
“그리고 제가 선체하고 탱크 내부 부식 상태가 심각하고 도장 상태도 엉망이라고 이야기했는데 혹시 확인해 보셨습니까?”
“······.”
내 말에 답변이 궁색해진 선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제가 이 업체도 제 돈 내고 불렀겠습니까? 본사 법무팀을 통해 이미 본사에도 다 보고 들어간 내용입니다.”
“뭐 본사?”
본사에 보고가 들어갔다는 말에 선장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네, 현재형 법무팀장님이 검사 결과가 나오면 조선소 측에 공유하지 말고 바로 본사로 보내 달라고 하던데요. 큰 분쟁거리가 될 수 있으니 보안 유지하라고 하면서?”
“······.”
“지금 계측을 중단하면 본사에서 따로 확인을 할 텐데 선장님이 책임지시겠습니까?”
“······.”
권도영 선장은 내 말에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짧게 한 번 끄덕인 후 걸음을 옮겨 브릿지(선교) 방향으로 사라졌다.
선장이 사라지자 수중공사업체 담당자가 나에게 다가섰다.
“오, 일항사님 기백이 대단하신데요?”
“네?”
“선장님을 상대로 이렇게 당당한 모습 멋진데요?”
“······뭐, 폼 잡으려고 한 건 아닙니다.”
내가 살짝 부끄러워하자 그는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크게 웃어 보였다.
‘여전하시네.’
수중공사업체의 담당자는 키는 크지 않지만 근육질로 탄탄한 체격을 자랑했다. 그야말로 상남자다운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나도 익히 잘 아는 사내였다. 그는 전생에도 나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나에게 스쿠버 다이빙 고급 과정을 교육해준 스승이기도 했다.
‘반갑긴 한데, 일단 회포는 나중에 풀어야지. 빨리해야 할 일이 많다.’
나는 고개를 돌려 두께 계측업체 직원들과 수중공사업체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자! 이제 시작하시죠. 계측 전에 선저의 부착된 따개비 같은 해양생물을 전부 제거해서 선저 면을 꼼꼼히 검사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수중공사업체 담당자가 대답했다.
“두께는 선체 외벽과 탱크 그리고 중심부위 선저 부분을 중심으로 꼼꼼하게 체크해주시기 바랍니다. 도장 상태가 엉망이고 부식이 벌써부터 심해서 제대로 된 품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 조선소 인근 장보고의 숙소 근처
수중 선체 클리닝 작업과 선체 계측 작업은 하루 종일 진행됐다.
선체 전반에 대한 검사를 실시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검사 결과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선체 두께는 기준치에 미달하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특히 전생과 마찬가지로 중심 부위의 선저 부분이 특히 취약했다.
보강공사 없이는 운항이 절대로 불가능한 수준이 틀림없었다.
나는 본사 보고를 위한 자료 정리를 마무리하고 늦게 퇴근길에 올랐다. 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마친 터라 숙소로 복귀하는 밤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빠아앙!
시내 대로변에는 차들이 빠르게 운행하며 소란스럽게 경적을 울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