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비리를 이번 기회에 꼭 밝혀야 한다.’
나는 머릿속으로 거물 정치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개인적인 비리뿐만 아니라 정책적 전문성이 결여된 인물.
이후 해운조선업계를 10년 이상 후퇴시킨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 산업계를 위해서도 하루빨리 실체가 밝혀져 정당한 처벌을 받는 것이 국익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우선은 급한 일부터 처리를 하고.’
나는 곧 벌어질 사건을 떠올렸다. 전생에 이 사건에 개입한 놈들이 김호영 일등항해사를 옭아맨 저열한 수법을.
* * *
며칠 뒤.
일과 시간이 끝났지만 아직도 나는 서류 더미 속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중. 신조선 인수업무 자체도 게을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밀린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드르르! 드르르!
‘음? 이 시간에 선장님?’
진동이 울리고 있는 휴대폰에 발신인이 표시되고 있었다.
“네, 선장님.”
- 장보고 일항사 아직도 일하고 있는 거야?
“네, 이제 다 끝나갑니다.”
- 아직 식사 전이지? 내가 문자로 장소를 보내 줄 테니 이리 와서 식사나 같이하지.
“아닙니다. 오늘 좀 피곤해서 일찍 들어가서 쉬려고 합니다.”
- 그러지 말고, 오늘 고생했으니 내가 간만에 술 한잔 사야겠네. 간단하게 한 잔만 하고 들어가시게.”
“......”
- 내가 문자로 장소를 보내주겠네.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 * *
- 조선소 인근 술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번화가 근처
‘뭐야 여기는?’
나는 어두운 골목 앞에서 서서 간판이 꺼진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 뭐 이런 곳에서 밥을 먹는다고?’
불이 꺼진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 내 근처로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다가왔다.
“혹시 장보고 일항사님이십니까?”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검은 양복의 사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덜컹!
그들이 문 근처로 다가서자 잠겨 있던 건물의 출입구가 조용히 열리기 시작했다.
‘뭐야 여기는?’
들어선 건물의 내부는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매우 화려한 고급 인테리어로 치장되어 있었다.
검은 양복의 사내는 긴 통로를 지나 가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VIP 룸 앞에 섰다.
“여깁니다.”
나는 그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 왔군요.”
내가 들어서자 신조인수팀의 팀장으로 함께 파견된 선장님이 손을 들고 일어서며 반갑게 맞이했다.
“장보고 일항사 왔나?”
“네, 선장님.”
나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세 명의 남자가 더 자리하고 있었다.
한 명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신조선인 헤라호의 선체검사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머지 두 명은 누구지?’
선체검사관에 비해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외모.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고급스러운 장소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자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놈들인가? 잘됐구나.’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이들은 오히려 내가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던 자들이 분명해 보였다.
M.V. 헤라호 침몰사고 (2)
나는 방 안에서 밝은 표정으로 서 있는 선장에게 다가섰다.
“선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음?”
“저는 혼자 계신 줄 알았습니다. 간단하게 반주나 한잔하는 자리인 줄 알고 왔는데요.”
“허허허, 그래? 내가 말 안 했던가? 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찌 됐든 여기까지 왔으니 어서 자리에 앉게.”
선장은 나의 팔을 잡으며 한쪽으로 끌었다.
나는 다소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선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조용히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장보고 일항사님 오셨어요?”
선장 뒤로 어색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대성 삼항사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삼등 항해사의 얼굴은 제법 상기되어 있었다. 이런 비싼 곳에서 고급 위스키를 마시는 것이 처음인지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쯧쯧쯧. 저렇게 정신 놓고 있으면 안 될 텐데.’
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대성 삼항사를 바라보았다. 이곳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접대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는 법이니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대한중공업 사람들이 분명해 보였다. 이들이 신조선을 검사하기 위해 나온 우리들에게 접대를 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이른바 ‘물칠’을 해서 검사를 수월하게 통과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평범한 회식 자리를 가장해 밥을 한두 번 먹다가 술자리로 이어지고 이런 비싼 술집에서까지 자리가 이어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동안 얻어먹은 게 많은 사람들은 검사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그냥 애써 넘길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이대성 삼항사를 향해 살짝 가볍게 눈치를 준 후 선장이 앉으라고 한 자리로 이동했다.
그 자리는 방의 가장 중앙. 누가 봐도 상석인 자리였다.
옆에 앉은 중년의 사내가 나에게 살짝 다가오더니 조용히 말을 걸었다.
값비싼 명품 정장들로 몸을 치장한 남자였다. 그는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장보고 일등항해사님, 저는 대한중공업의 조영일 전무라고 합니다.”
‘조영일 전무 이름이 익숙한데?’
전생에 신문 기사에서 그의 이름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이자의 정체는 내가 예상했던 바로 그자가 분명했다.
전생에 나는 신문 기사와 소문으로만 이자에 대한 정보를 접했기 때문에 그를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 네,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해신해운의 일등항해사 장보고라고 합니다.”
“아하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활약이 대단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허.”
나는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그의 왼쪽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살짝 꿈틀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명성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소문이 좀 과장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허허허. 그렇긴 하지요?”
나는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악수를 하면서 대답했다.
“어허! 장보고 일항사! 이 전무님은 해양대 출신 선배님이시네! 무슨 인사를 그리 대충 하는가.”
선장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나를 지켜보더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버럭 큰소리쳤다.
선장이 뿌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래서 해기사들이 육지에 나오면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소릴 듣는 게 아닌가!”
선장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나무랐다. 그의 말에 조영일 전무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참 동안 나를 나무라던 선장이 나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네도 앞으로 이 업계에서 큰일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언제까지고 배만 탈 순 없지. 이번 일을 잘 마치고 좋은 자리로 가는 게 어떻겠나?”
“네?”
말을 마친 선장이 조영일 전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선장님 말이 맞습니다. 우리 대한중공업도 해기사 출신들이 필요한데 장보고 일등항해사님 같은 인재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하하하!”
“그렇지요? 이 친구가 참 일을 잘하는 인재이긴 합니다! 하하하.”
선장은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인지 조영일 전무의 말에 동조하며 나를 향해 크게 웃어 보였다.
“전무님 해신해운에도 아시는 분들이 많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허허허. 맞습니다. 동기들 중에 해신해운 임원으로 승진한 친구들 몇 있지요. 제법 잘 나간다고 자랑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하하. 친구분들에게도 장보고 일항사 이야기를 좀 잘해주십시오.”
“물론이지요. 하하하.”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이어간 조영일 전무와 선장이 서로 만족스럽다는 듯이 서로를 보며 크게 웃어댔다.
‘지랄도 풍년이구나.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뭐 하자는 건지······.’
나는 이 두 사람의 대화가 살짝 불쾌했지만 아직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그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던 조영일 전무의 눈이 나를 향해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나이도 새파랗게 어린 놈이 태도가 건방지다는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도 아직 자신의 본심을 드러낼 수는 없을 터.
그도 산전수전을 다 겪고 대기업 임원의 자리에 오른 이가 아닌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이 정도로 인내심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영일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살짝 찌푸려졌으나 이내 그의 얼굴에는 곧 미소가 감돌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자 선장이 말을 이어갔다.
“자자자! 조 전무님, 이렇게 간만에 모였으니 다 같이 거국적으로 한잔하시죠.”
선장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위스키 병을 들어 올렸다. 위스키 병에는 30년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급 위스키가 분명해 보였다.
그가 요란하게 병을 흔들더니 사람들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일단 맞춰주는 척 연기 좀 해볼까?’
나도 대충 분위기를 맞추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연이어 위스키 잔을 입속으로 털어냈다.
급하게 술잔을 비워내는 나를 쳐다보던 선장이 말했다.
“자, 장보고 일항사 좀 천천히 마시게!”
“선장님 이거 비싼 술 아닙니까?”
“음? 그렇지.”
“이런 기회 아니면 제가 언제 또 마셔보겠습니까?”
“허허허.”
연속으로 위스키 잔을 털어대는 내 모습을 본 조영일 전무는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작은 표정 변화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던 조영일 전무의 눈은 시간이 지날수록 똥그랗게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빠르게 위스키 잔을 연거푸 들이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캬~!”
탁!
나는 위스키 잔을 내려놓고 다시 술병을 들었다.
“캬~!”
탁!
다시 위스키 잔을 가득 채웠다.
“캬~! 술맛 죽이네!”
탁!
혼자서 술잔을 채우고 비우고 또 채웠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십여 차례.
시끌벅적하던 방 안이 오히려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방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회식 자리를 엉망으로 만드는 불청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불청객은 나였다.
탁!
마지막 술잔을 내려놓고, 나는 손을 들어 입가를 살짝 닦았다.
“.......”
“캬~! 위스키 맛있네요.”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털어내자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선장님, 저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뭐?”
나의 말에 깜짝 놀란 선장이 일어나 달려왔다.
“일항사! 무슨 소린가.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접대받는 입장에서도 예의가 아니지!”
“예의요?”
“그래 비즈니스 매너라는 게 있지 않나?”
“음, 비즈니스 매너라.”
선장이 나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혼자서 저렇게 비싼 술을 다 먹어놓고 혼자 먼저 일어나면 어쩌자는 건가? 아무리 우리가 접대를 받는 입장이라도 눈치가 있어야지.”
“네? 접대를 받다니요?”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선장님, 신조선 인수검사를 하러 왔는데 조선소 사람들한테 이런 비싼 술을 얻어먹어도 되겠습니까?”
“뭐, 뭐?”
선장은 내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벌컥!
그때 잠시 밖으로 나가 있던 이대성 삼항사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항사님!”
“그래, 삼항사 계산했어?”
“네, 시키시는 대로 추가로 주문도 하고 결제했습니다.”
선장이 그 말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이대성 삼항사는 눈치 없는 타입인지 괘의치 않고 나에게 다가와 영수증을 내밀었다.
이대성 삼항사가 건네는 영수증에 적힌 금액을 힐끔 본 선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선장의 표정을 확인한 후 힐끔 조영일 전무의 표정도 살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