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200)

“장보고 이항사님, 소개해 드릴게요. 저희 회사에 이번에 입사한 장소희 기자랍니다. 장 기자, 이쪽은 장보고 이등 항해사님!”

“······.”

나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라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말문이 막혀 있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자 유혜영 기자는 내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호호호. 소희 씨 이쁘죠? 다른 회사 기자들도 소개해 달라고 난리랍니다. 장보고 이항사님은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네요.”

“아, 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우리도 왜 이런 미모면 방송기자를 하지 신문사에 왔냐고 물어본답니다. 호호호.”

“선배님!”

장소희 기자는 유혜영 기자의 말에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유혜영 기자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싱글벙글.

나는 장소희를 힐끔 쳐다본 후 딱딱한 사무적인 어투로 말을 이어갔다.

“장보고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장소희입니다. 신라일보에서 일하고 있어요.”

내가 살짝 목을 숙여 인사하자 장소희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우리 둘을 바라보던 유혜영 기자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보니 참 선남선녀같이 잘 어울리네. 소희 씨 내 말 맞지? 정말 미남이라고 내가 말해줬었지?”

유혜영 기자의 말에 우리는 둘 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이후로 유혜영 기자가 혼자서 많은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기계적으로 유혜영 기자의 물음에 몇 번 대답을 이어갔다.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나는 헤어지기까지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 * *

- 한강 강변

유혜영 기자와 헤어진 나는 한강 강변을 잠시 걸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장소희를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배에서 하선해 육상직원 근무를 시작하고 몇 년 후 나는 해신해운의 서울 본사로 발령받았다. 서울로 올라와 지내던 중 여의도 한 카페에서 그녀를 우연히 만났다.

전생에 우리는 불같이 사랑했지만 해신해운이 파산한 이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사업도 실패하고 원양어선 선원으로 나가면서 힘들게 생계를 이어나가던 순간들.

이후 나는 우연히 만난 쩐주 자갈치 최부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운 좋게 부동산 사업에 성공하여 부산에서 제법 자수성가했다는 평가를 듣는 사업가가 되었다.

하지만 가족들을 오랜 시간 고생시켰던 젊은 시절의 힘든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어쩌면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지도······.’

복잡한 심경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과거에 읽은 피천득의 수필 ‘인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만약 이곳이 평행세계라면 그녀가 다른 인연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 것도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르륵!

상념에 빠져 강가를 걷고 있는 중에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구지?’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은 발신자였다.

“여보세요?”

“Hello? Mr. Jang? (여보세요 미스터 장?)”

상대방은 외국인이었다. 들어본 목소리지만 익숙하진 않은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으로 상대방을 알아차리는 것은 무리였다.

“누구시죠? 장보고입니다.”

“하하하. 접니다. 당신의 장인(Father in law)이 될 사람.”

“네?”

“이거 섭섭하군요. 마헨 수비안토입니다.”

“······!”

나는 깜짝 놀라 순간 대답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쓰나미 사건 당시 만났던 바로 그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 * *

- 서울 모처 레스토랑

몇 시간 뒤.

나는 마헨 수비안토 장관을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향했다.

레스토랑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에는 마헨 수비안토 장관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서자 자리에 일어나 환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 미스터 장!”

“장관님!”

나는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한 후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자, 일단 밀린 이야기는 차차 하고 우선 자리에 앉지. 우선 음식을 시켜야 할 것 아닌가?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저도 배가 많이 고프네요.”

마헨 수비안토 장관이 웃으며 손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내가 자리에 앉은 후 물었다.

“장관님, 그런데 한국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하하. 이거 섭섭한데? 자네는 날 못 봤나 보군?”

“네?”

“오늘 오전에 자네가 연설하던 곳 말일세. 나도 그곳에 있었다네.”

“아!”

마헨 수비안토 장관이 인도네시아 대표로 UN 소말리아 해적 퇴치 그룹 회의에 참석했던 것이다.

“앞에 나갔더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요. 그리고 긴장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앞에 누가 있는지는 도저히 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하하. 농담일세. 당연히 그렇겠지. 그나저나 오늘 큰 상을 받은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간단하게 음식을 주문한 후 대화를 이어갔다.

“오늘 회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음! 큰 진전이 있었다네. 자네도 얼마 전에 소말리아 해적 푼틀랜드를 미국이 습격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

“네.”

“작전을 지휘했던 장군이 출석해서 궁극적으로 해적행위는 육상에서 시작되는 문제인 만큼 국제적인 해법도 육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 주요했다네. 오늘 참석한 나라들은 소말리아 해적 퇴치 연락 그룹을 결성하기로 했고. 미국을 비롯한 파트너국들은 자국 선박에 대한 공격에 대응해 보다 더 강력한 해적퇴치 정책들을 마련하고, 국제 공조하기로 결의했지.”

“다행이군요!”

“그리고 소말리아 해적 배후세력의 금융제재와 체포를 위한 제도가 추진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어 큰 반응이 있었다네. 그건 한국의 의원이 제안한 내용이었다네.”

아마도, 한국 대표로 참석한 오재민 의원이 제안한 내용이 분명했다. 전생에도 우리나라는 해적 자금 차단 특별회의를 주도했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오재민 의원에게 몇 가지 팁을 주었고 그는 훌륭하게 회의를 준비해냈다.

그는 최근 해운, 해양 분야 이슈들을 선점하며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국회의원으로 전문성을 갖춘 국회의원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비록 국감스타의 자리는 나에게 뺏겼지만 말이다.

오재민 의원의 제안이 실현되면 곧 국제사회는 해적들에게 선박 정보를 제공하고 석방 협상금을 챙기는 배후세력을 추적하게 된다.

미국, 영국, 아랍에미리트 등 60개가 넘는 수많은 국가들이 참가해 정보를 공유해서 용의자 리스트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의심되는 인물들의 자금 흐름을 추적해서 용의자를 추적해 체포하고 계좌를 동결하게 되면 소말리아 해적 비지니스는 결국 자금 부족으로 동력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소말리아 해적이 활개를 치게 된 원인도 ‘돈’이었기 때문에 자금이 마르게 되면 비즈니스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문제는 해적의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였다.

MI6 이안 요원으로부터 들은 정보에 따르면 현재 국제사회는 영국과 두바이에 소말리아인 출신의 해적 배후가 집중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특히 소말리아 해적에게 선박 정보를 제공하고 납치를 상의하는 국제해상보험업자, 선박중개업자, 보험 브로커들이 영국 런던에 모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용의선상에 오른 자들도 있으나 진짜 배후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

이안 요원이 싱가포르로 떠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마헨 수비안토 장관이 말을 이어갔다.

“자네도 잘 알다시피 인도네시아도 말라카 해협의 해적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 않은가? 이번 회의는 큰 의미가 있었다네. 여러 비선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에 따르면 자네 공이 작지 않다고 하더군?”

“하하하. 누가 그런 소릴 하던가요? 그런 잘못된 정보를 장관님께 전달한 사람이 누군가요?”

내 물음에 마헨 수비안토 장관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

“자네는 참 특별한 사내일세. 이등 항해사에 불과한 사람이 이런 일들을 해내다니.”

“그저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고? 글쎄, 과연 운으로 이런 일들을 해낼 수 있을까?”

나도 이번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볼까 한다네?”

‘음?’

나는 그의 말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기 때문.

“제안이라고 하시면?”

“인도네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이 있다네. 혹시 자네도 들어봤을지 모르겠군.”

“음? 혹시 인도네시아 에너지(Indonesia Energy)사가 아닙니까?”

“오, 역시 알고 있군. 인도네시아 에너지사에서 큰 사업을 추진 중이라네. 인도네시아에 연안 운송 사업을 위한 파트너사를 찾고 있다네.”

글로벌 인맥의 선물

- 서울 모처 고급 레스토랑

‘인도네시아의 국영기업인 인도네시아 에너지사가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나는 마헨 수비안토 장관의 말에 전생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경쟁사가 인도네시아의 국영 석유회사와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인도네시아 해운 물류사업에 진출했던 사업에 대한 기억이었다.

인도네시아 연안의 석유 및 가스 운송을 위한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사업으로 인도네시아 에너지는 1950년대에 설립된 인도네시아의 국영 에너지회사였다.

원유생산 및 원유수송, 석유화학제품 생산 및 판매 등 전방위적인 석유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최대 기업 중 하나.

전생에서는 해신해운의 경쟁회사인, 국내의 다른 해운회사가 따낸 계약으로 해신해운은 계약 체결 소식에 배를 아파했다.

자원 부국인 인도네시아의 자원 물동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평가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해신해운에서 관심이 있다면 내가 연결을 해주겠네.”

“정말요? 가,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갑작스런 호의에 깜짝 놀라 크게 대답했다.

“계약이 체결된다면 자네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

“네, 당연하죠.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나는 또다시 소리를 빽 지르며 크게 대답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

“하하하. 다행일세. 그럼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겠지?”

“네?”

“그럼, 자네도 내 작은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게.”

“네? 무슨 부탁을?”

그의 말은 좀처럼 알아듣기 어려웠다. 한 나라의 잘나가는 장관인 이 사람이 과연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을까?

마헨 수비안토 장관이 말을 이어갔다.

“마침 내 딸 샐리도 화보 촬영차 한국에 와있다네.”

“네?”

“한국에 며칠 더 머물다 갈 계획이라고 하더군.”

“······!”

“처음 한국에 온 것이라 길을 잘 모른다고 하니 있는 동안 자네가 관광 좀 시켜 주는 게 어떤가?”

내가 차마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마헨 수비안토 장관의 말이 끝나자 방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여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아빠! 일이 끝나서 좀 빨리 왔어요!”

방으로 들어선 여인은 내가 인도네시아 쓰나미 당시 전복된 요트 선실에 갇혀 있던 것을 내가 구조(?)했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살짝 지으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화보 속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아름답게 빛났다.

“오랜만이에요! 미스터 장!”

그녀가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으며 한쪽 눈을 찡긋 그렸다.

< 띠링 ! >

+스킬 마도로스의 심장[Lv.8]이 무력화됩니다. +

뭐? 또?

이쯤 되면 이 스킬은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순간이었다.

* * *

- 해신해운 본사 회의실

며칠 뒤.

나는 기획실의 도형준 상무를 만나기 위해 본사를 방문했다.

“장보고 이항사!”

도형준 상무가 활짝 웃으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상무님, 잘 지내셨습니까?”

“하하하. 축하해요. 이번에 큰 상을 받았다면서? IMO(국제해사기구)에서 수여하는 용감한 선원상이라니?”

“네, 어쩌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요.”

“아니야. 그동안 한 일이 많지 않은가? 회사의 자랑이나 마찬가지지. 해신해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허허허.”

나는 그의 칭찬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IMO(국제해사기구) 같은 큰 국제단체가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는 것이 어쩐지 나에게 과분하게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형준 상무가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큰 건이 있다고? 무슨 소린가?”

“네, 동남아지역본부장으로 계실 때 자카르타 항구에서 만났던 마헨 수비안토 장관 기억하시나요?”

“인도네시아 장관이라면 그 쓰나미 사건 때 만난 분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상무님도 그때 대사관 직원이랑 같이 오셨잖아요.”

“하하하. 그래 나도 기억이 나네. 자네를 사위로 삼겠다고 했던 그분이지?”

“네······. 맞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는 내 표정을 바라보며 한바탕 크게 웃어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이번에 서울에서 열리는 소말리아 해적 퇴치 그룹 회의에 인도네시아 대표로 참석하셨다고 해서 며칠 전에 잠깐 만났습니다.”

“오? 그래?”

“네.”

“일국의 장관을 사적으로 만났다고? 언제 들어도 자네의 인맥은 정말 상상초월이군.”

“허허허. 저도 사실 황당하긴 한데요. 그렇게 됐네요.”

나는 도형준 상무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동남아 지역본부에 계실 때 인도네시아 국영 석유회사인 인도네시아 에너지(Indonesia Energy)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인도네시아 에너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기업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내가 동남아지역본부에 있을 때 계약을 뚫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는데도 번번이 실패했다네. 한국 해운회사 중에 오래 거래한 곳이 있다고 하더군.”

“네, 저도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 말에 도형준 상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인도네시아 에너지가 곧 현지에서 물류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래?”

“네, 그런데 해외 투자를 받아 합작회사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음! 자사 물량을 취급하는 법인을 설립하는 건가?”

“네, 일단은 물류 합작법인을 설립해서 인도네시아 에너지사의 원유와 석유화학제품을 운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고 차차 자국 연안의 물류를 전담하게 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인도네시아 에너지 회사의 물동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만 있어도 제법 큰 계약이 될 것 같은데......”

도형준 상무가 눈빛을 빛냈다.

자세히 검토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법 큰 건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에서 가장 큰 나라로 성장가능성이 높은 나라.

해신해운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해신해운에서 관심이 있으면 마헨 수비안토 장관이 힘을 써주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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