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요원 이분은 차진혁 경위님이십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안 요원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차진혁 경위가 내민 손을 덥석 마주 잡았다.
“음?”
차진혁 경위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두 남자가 마주 잡은 손이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았다.
‘왜 이래?’
두 사람의 얼굴은 평온했다.
하지만 마주 잡은 두 손은 하얗게 핏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부들부들
두 사람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이안 요원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안의 얼굴이 점차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진심을 다하는 표정.
‘음? 뭐야?’
이 아저씨들 뭐 하는 거야?
설마 힘 싸움?
< 띠링! >
+ 경고: 두 명의 위대한 전사들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
‘하? 뭐라고? 새우 등?’
나를 아주 약골 취급하는 내용이네?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창을 바라보는 나도 두 사람을 상대로 가볍게 호승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적재판 (1)
- 남해지방해양경찰청
두 사람의 대결을 바라보며 나도 참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 띠링! >
+ 경고: 무모한 행동을 자제하세요! +
뭐?
소말리아 해적, 싱가포르 범죄조직인 흑룡회, 러시아 마피아들과 싸울 때도 말리지 않았는데?
나는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잠시 가라앉힌 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괴수대전을 바라보았다.
“······.”
역시 참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네.’
아무리 내가 태권도와 이종격투기를 수련했다지만 이들에 비하면 아마추어가 분명했다.
내가 잠시 참전(?)을 고민하는 사이 두 괴수들의 대결이 마무리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하하하. 이거 안 되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뭐? 이안 요원이 졌다고?’
내 예상을 깨고 항복 선언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안 요원이었다.
이 사람은 MI6의 살인면허를 받은 최정예 요원인 더블오나인(009)이라고!
그런데 이안 요원이 졌다고? 뭐야 저 사람?
창백해진 이안이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차진혁 경위를 바라보았다.
다부진 체격으로 근육질인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근육이 유달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키도 190cm가 넘는 이안 요원에 비해서는 10cm가량 작아 보였다. 평범한 체구의 차진혁 경위가 이안 요원을 힘으로 제압한 것이다.
“하하하. 과연 MI6 요원이시군요. 조금만 더 했으면 제가 먼저 포기했을 겁니다.”
차진혁 경위가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가 겸손하게 말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이안 요원과 달리 차진혁 경위는 그다지 표정 변화도 없어 보였던 것.
“오늘 조사가 제법 즐거울 것 같군요.”
차진혁 경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보고야, 오늘 참고인 조사 받으면 나중에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갈 수도 있다고 말해줬지?
“네, 괜찮아요.”
“오케이.”
“이안 요원 진술서는 익명으로 보고서만 남겨두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서 조사를 할 준비를 해 놓고 있겠습니다. 커피 한잔들 하시고 준비가 되면 올라오십시오.”
차진혁 경위가 방긋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차진혁 경위가 떠나자 이안 요원을 바라보았다.
“이안 요원, 무슨 일입니까?”
“하하하. 차진혁 저 사람은 정말 소문대로 괴물(Monster)이네요.”
“네? 차진혁 경위를 알고 있습니까?”
내 물음에 이안 요원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사실 오기 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음? 어떻게?”
“세계 해군 특수부대들이 모여서 기량을 겨루는 대회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설적인 기록을 세운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 특수부대의 괴물이라고 불리는 사내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꿀꺽. 괴물?
“그럼, 그 괴물이 바로?”
“네, 바로 저 사람입니다. 미스터 차진혁.”
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이안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제가 MI6에 들어가기 전에 SBS에 복무했다는 이야기를 드렸지요?”
“네.”
“그때 사실 저도 그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부대의 주니어였죠. 그래도 SBS에서는 발군의 실력이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하하하.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상대가 되질 않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네요.”
나는 그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 사람이 괴물인 건 여전하군요.”
“......!”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이안이 정색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미스터 장, 제가 약한 게 아니라 저 사람이 괴물인 겁니다.”
“물론 그렇죠.”
나는 이안 요원의 실력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다. 그가 SBS 저격수들 사이에 신화적인 인물이라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의 실력은 나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차진혁 경위가 한 방에 러시아 마피아 세르게이를 잠재운 기억을 떠올렸다.
좀처럼 제압할 수 없었던 세르게이도 차진혁 경위의 주먹 한 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 버리지 않았던가?
이안이 나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흠흠, 그나저나 잘 아시겠지만 제 특기는 격투술이나 힘자랑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네?”
“제 특기는 사격입니다. 알잖아요?”
“아, 네 그렇죠. 하하하.”
“······.”
“······.”
이안 요원은 스스로 말하고도 변명처럼 들렸는지 살짝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안 요원이 대화 주제를 전환하려는 것처럼 다급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흠흠! 그나저나 미스터 장, 이번에 또 사건이 있었다고요?”
“네, 허허허.”
“사고가 끊이질 않는군요? 사고를 찾아다니는 건지······.”
“하하하. 어쩌다 보니.”
내가 사고를 찾아다닌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미스터 장의 태권도 실력을 제가 잘 아는데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었다고요?”
“네. 이후에 알게 된 내용인데 차진혁 경위님 말로는 러시아 마피아들 사이에서 이름난 칼잡이였다고 하더군요.”
“음! 큰일 날 뻔했군요.”
이안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나에게 작은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이건 제 선물입니다.”
“음? 뭔가요 이게?”
상자를 열어보니 고급 시계가 들어있었다. 나는 영국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이안이 선물로 준 고급 슈트와 명품 시계를 떠올렸다.
“음? 시계?”
“네, 한번 보시죠.”
“전에 런던에서 명품 시계를 선물로 받았는데요?”
“이건, 좀 다릅니다.”
“네? 뭐가요?”
이안은 주변을 살짝 둘러보더니 나에게 귓속말을 이어갔다.
“하하하. 사실 부가적인 기능이 좀 있습니다.”
“음?”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아마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미스터 장 주변에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고 특별히 ‘C’의 허락을 받아 가지고 나온 물건입니다.”
“······!”
나는 잔뜩 기대되는 표정을 시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상자 밑에 들어있는 설명서를 읽어보는 나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이안은 내가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 * *
- 부산지방법원 청사 앞
며칠 후.
나는 부산지방법원에 도착했다. 오늘 해적재판이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부터 부산지방법원 앞은 각종 언론에서 나온 기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최근 며칠간 텔레비전과 각종 신문에서는 소말리아 해적들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가 떠들썩하게 보도되고 있었다.
나도 얼마 되지 않은 과거의 일이지만 최대한 소말리아 해적들에 공격을 받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건을 복기했다.
소말리아 해적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었기 때문.
나는 피랍 당시의 정황을 증언하기 위해 줄리엣호의 선원들을 대표하여 증인으로 출석한 것이다.
최근 며칠간 언론들은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한 기사들을 전격 보도했다.
줄리엣호를 피랍하려고 시도했던 해적들이 영국 해군으로부터 인계되어 국내로 송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곧 국내에서 최초의 해적 재판이 열리게 되는 상황이 여론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다들 난리구나.’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아랍권 방송과 일본의 방송국과 신문, 영국과 미국의 특파원 등 외신들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한 재판은 세계에서도 흔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적들을 생포해서 국내로 송환해 재판까지 하는 것은 상당한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기 때문이고, 이들을 국내로 송환에 재판까지 하는 것도 매우 드문 사례였다.
국내로 송환된 해적들에 대한 수사를 맡은 사람은 남해지방해양경찰청의 차진혁 경위였다.
해양경찰의 촉망받는 인재인 것이 분명했다. 이런 굵직한 사건을 맡았다는 것은 그의 입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
차진혁 경위는 빠르게 해적들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검찰로 사건을 송치하는 것으로 그의 능력을 입증해냈다.
사건을 송치받은 부산지방검찰청도 국민들의 관심도가 높고 구속수사인 점을 고려하여 최단 시간 내에 수사를 종결짓고 기소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국내에서는 최초로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한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한 재판이 세간의 이목을 더욱 집중시킨 이유가 있었다.
바로 오늘 재판은 일반적인 형사공판 절차와는 다르게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참여재판은 국민이 형사재판에 배심원 또는 예비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제도로 미국의 배심원 제도와 비슷한 재판 형태.
하지만 미국 사법제도의 배심원제와 달리 우리나라의 국민참여재판은 유죄, 무조의 평결을 내리지만 법적인 구속력은 없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소말리아 해적 사건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하게 된 것은 상당히 의외의 상황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평가였다.
이미 줄리엣호 피랍사건으로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들이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것은 피고인들인 해적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이다.
* * *
- 부산지방법원 301호 형사법정
나는 해적재판이 진행될 형사법정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여기도 사람이 많네.’
웅성웅성.
부산지방법원에서 가장 큰 301호 법정이었지만 방청석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했다.
수십여 국내 언론매체를 비롯해 아랍권, 일본과 유럽의 신문사들까지 특파원들이 있었고 방청을 신청한 50여 명의 일반 시민들로 인해 부산지방법원에서 가장 큰 301호 법정의 80여 방청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나는 한쪽 구석에 겨우 자리를 마련했다. 증인으로 나설 때까지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방청할 생각이었다.
그때 법정 입구 쪽에 앉아있던 법정 경위가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일어서주십시오!”
경위의 외침에 법정에 들어선 사람들이 모두 기립했다.
법대 뒤로 문을 열고 들어선 재판부가 법대 위에 서서 방청석을 향해 묵례를 했다.
“그럼 오늘 오전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의 말과 함께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줄리엣호에서 생포된 5명의 해적들이 수형자 규정에 맞춘 짧은 머리에, 녹색 수의 입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법정에 들어서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부두목 압둘 아라이와 가장 젊은 해적이었던 부바카라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의 해적들도 경직된 표정으로 피고인석에 착석했다.
타국인 이곳까지 끌려와 재판을 받는 상황이니 긴장하는 것은 당연.
재판부는 재판절차 안내와 배심원 설명 등을 간단하게 마친 후 피고인들에 대한 인정신문 절차에 들어갔다.
재판부는 3명의 법관들로 구성된 합의부였다. 그중 가운데 앉은 재판장이 말을 이어갔다.
“피고인 압둘 아라이에 대한 인정신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인정신문은 피고인들의 인적사항 등을 확인하는 절차.
일반적으로 간단하게 진행되는 절차이지만 피고인들이 소말리아 해적들인 관계로 우리말을 영어와 소말리아어로, 다시 소말리아어를 영어와 우리말로 순차 통역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지연되고 있었다.
“통역이 문제군.”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
방청석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기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우리나라에서 소말리아 말을 할 수 있는 통역인을 구하는것이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나는 강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