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허허. 저는 잘 모르겠네요.”
부장이라고 불린 50대 정도로 보이는 BK해운의 고문 변호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부장이라고 불린 것으로 보아 그는 부장검사나 부장판사 출신의 전관변호사가 분명해 보였다.
‘이놈들이 정말 어이가 없네?’
두 사람의 대화는 우리에게도 똑똑히 잘 들렸다. 내가 들었으면 백경운 변호사도 마찬가지.
나는 고개를 돌려 백경운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젊은 변호사인 백경운 변호사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크게 얼굴을 씰룩거렸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면서 그도 살짝 흥분하기 시작했다.
선원법 재해보상 (3)
- BK해운 부산지사 회의실
BK해운 법무팀장이 눈치 없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백 변호사님은 어디 소속이신가요?”
“개업한 변호사입니다. 제가 개업해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음? 이렇게 젊은데?”
“네.”
“허허허. 이거 참 대단하시군요. 그래서 이렇게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어쏘 변호사 생활을 안 해봐서 몰라서 그런 건가?”
“네?”
“이 일을 맡은 걸로 봐서 백 변호사님은 해상 분야에 관심이 많은 거 같은데요.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백 변호사가 경험이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내가 선배이니 충고를 좀 해도 될까요?”
“······.”
뭐, 경험이 없어서?
그나저나 웃기는 놈이네. 처음 본 사람한테 충고를 한다고?
나의 불손한 눈빛에도 BK해운 법무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백 변호사님, 아직 잘 모르시겠지만 해상 변호사들 중에도 여러 부류가 있지만 잘나가는 해상 변호사들은 사건을 가려서 받는답니다.”
“네?
“잘나가는 해상 변호사들은 모두 선주인 선박 소유자들을 대리하고 싶어 한답니다. 서울의 유명한 대형 로펌의 해상 변호사들도 사건을 맡을 때는 선주인 BK해운 같은 곳을 대리하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
“백 변호사님도 해상 변호사로 성공하시고 싶으시면 BK해운 같은 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것은 자제하시는 게 좋습니다. 큰 대기업에 찍혀서 좋을 게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부장님?”
“그렇습니다. 으흐흠!”
BK해운의 법무팀장이 말하자 고문 변호사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고 있네.’
나는 이놈들이 하는 소리가 같잖아서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일단 이 자리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백경운 변호사가 우리를 대표해 협상에 임하고 있는 상태.
나는 고개를 돌려 백경운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백경운 변호사가 대답을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살짝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설마 저딴 놈들이 하는 소릴 듣고 긴장한 건 아니겠지?’
긴장한 표정의 백경운 변호사가 말을 이어갔다. 조용한 목소리로.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BK해운 사람들이 고개를 만족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런데 아시죠? 의뢰인들 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씀 하시면 변호사법 품위유지의무 위반으로 대한변협에 징계를 신청할 만한 일이라는 것도요.”
“음흐흠!”
“아마 경험이 풍부하신 분들이니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
백경운 변호사의 말에 BK해운의 법무팀장과 고문 변호사는 당황한 듯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들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젊은 초짜 변호사가 이렇게 당돌하게 받아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백경운 변호사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 톤을 유지했다.
“그런데 도대체 핵심이 없네요.”
“네?”
“그래서 도대체 BK해운에서는 뭐 얼마를 주시겠다는 건가요?”
“음?”
“가족들한테 합의하자고 했다면서요. 경험 많은 변호사님들이니 이제 변호사를 시작한 후배를 상대로 쪼잔하게 굴지는 않으시겠죠?”
“······.”
“얼마면 되겠습니까?”
“······.”
“얼마에 합의해드릴까요? 한번 제안해 보시죠. 고민은 해볼 테니.”
“······.”
‘흐흐흐.’
나는 백경운 변호사가 선배를 모시는 모습을 보며 흡족한듯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래! 역시 이거지.
선배를 잘 모신다더니 개뿔!
전생에 들었던 백경운 변호사의 별명이 떠올랐다.
내가 이번에도 그를 선택했던 이유.
평소엔 얌전하지만 소송을 시작하면 미친개가 되는 사나이. 사람들은 그를 ‘투페이스(Two face)’라고 불렀다.
* * *
- BK해운 부산 지사 빌딩 앞
약 한 시간 뒤.
장래의 해상 변호사계의 미친개가 될 사나이.
소송에 들어가면 돌변하는 남자!
투페이스(Two face)의 미친 활약(?) 덕분에 당연히 합의는 결렬되고야 말았다.
빌딩 밖으로 나오는 이대성 실항사의 얼굴도 살짝 상기되어 있었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는 표정.
“......”
백경운 변호사는 제법 흥분한 듯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살짝 한때 두들기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살짝 흥분했네요,”
'뭐? 살짝 흥분?'
허허허. 이 사람 큰일 낼 사람이네? 크게 흥분했다가는 진짜 큰 사고를 치겠어?
하지만 의뢰인을 위해서 이렇게 싸워주는 변호사를 만난다면 좋은 일이기도 했다.
물론 변호사가 흥분해서 될 만한 협상을 파투 냈다면 그건 또 변호사의 자질을 의심해봐야 하는 문제.
하지만 이 건은 달랐다. 거대 기업을 상대로 패기 있게 싸워줄 변호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어차피 합으로 끝날 사건은 아니었으니까.’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경운 변호사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장보고 이항사님 죄송합니다. 믿고 사건을 맡겨주셨는데 제가 너무 흥분해서 합의가 불발됐네요.”
“하하하. 괜찮습니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습니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습니다.”
나는 크게 웃으며 백경운 변호사를 위로했다.
사실 오늘 BK해운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합의가 될 가능성은 사실 없었다. 그저 상대방의 입장을 알아보려 한 것일 뿐.
오히려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백경운 변호사의 장래랄까?
‘해상 변호사 업계에서 매장되는 건 아니겠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막 나가는 모습에 내가 살짝 당황할 지경이었다.
백경운 변호사가 말을 이어나갔다.
“좋게 합의로 끝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군요. 일단 민사소송을 준비해서 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따로 준비할 것은 없을까요?”
이대성 실항사가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료는 일단 기본적으로 필요한 자료는 준비가 다 된 것 같습니다.”
잘생긴 외모이지만 냉철하게 생긴 백경운 변호사가 갑자기 살벌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일단 업무상과실치상죄로 형사고소도 같이하겠습니다. 제대로 상대해줘야 정신을 차릴 듯싶네요.”
“오! 형사로 고소도 같이 진행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사실관계가 다퉈지는 사건에서는 형사 사건을 먼저 진행하는 게 도움이 많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고소도 같이 진행하는 방법이 좋은 의견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 띠링! >
+ 스킬 [고소고발 Lv.5]을 사용합니다. +
“그리고.”
백경운 변호사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요. 이번에 BK해운에서 그동안 보상한 내역이라고 보여준 자료를 살펴보니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어떤 문제가?”
“계약서의 구조가 좀 이상하던데요? 통상임금이라고 표시해둔 금액을 기준이 있고 정기 상여금이나 수당이 따로 구분되어 있더군요. 보상금액하고도 차이가 있는 것이 아무래도 BK해운에서는 상병 선원들에게 재해보상금을 지급할 때 적용되는 통상임금을 일부러 축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군요.”
“······!”
이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전생에 통상임금 관련 소송으로 기업들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BK해운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
내 표정을 살피던 백경운 변호사가 더욱 악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요. 이제 무서워.’
그리고 백경운 변호사가 이어서 말했다.
“장보고 이항사님, BK해운 선원들 좀 아는 사람들 없습니까?”
“그건 왜요?”
“사람들 좀 모아 오실래요? 단체로 소송 걸어서 그동안 못 받은 돈 받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오······!”
제대로 걸렸네. 아주 무서운 사람이네 이 사람?
“허허허! 좋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선원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겠군요.”
나는 백경운 변호사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BK해운은 새로 업계에 등장한 미친개에게 제대로 물린 모양이었다.
나는 기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백경운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BK해운의 앞날이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 * *
- 백경운 변호사 사무실 회의실
며칠 후.
그동안 우리는 고소장을 제출했고, 고소인 보충 진술을 마친 상황.
이제 곧 경찰에서 BK해운에 고소된 사실을 통지하고 조사 일정을 잡을 단계였다.
나는 백경운 변호사와 함께 BK해운을 상대로 통상임금 관련 단체소송을 제기할 선원들의 명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백경운 변호사 사무실의 여직원이 안으로 들어섰다.
“장보고 이항사님, 음료수 한잔 드시고 하세요.”
“네? 네. 감사합니다.”
아주 친절한 분이시네.
“......”
백경운 변호사의 표정이 오묘했다.
“김 주임, 나도 있는데?”
“아 변호사님, 계신 줄 모르고 한 개만 사왔네요. 죄송해요.”
“......”
드르륵!
그때 탁자 위에 놓아 둔 내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음?”
그동안 연락이 뜸했던 학교 선배의 이름이 표시되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 보고야 잘 지내지?”
“네, 형.”
“그래 이야기 많이 들었다. 잘나간다고 하던데.”
“잘나가기는요. 그냥 여러 일들이 좀 있었네요.”
“그래, BK해운에 있는 형한테 연락받았는데.......”
‘음? 또?’
벌써 몇 번째 같은 전화를 받고 있었다.
고소장을 제출하고, 단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BK해운은 주변 인맥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백경운 변호사에게도 여러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따르릉!
회의실에 비치된 전화기도 울리기 시작했다.
- 변호사님, BK해운에서 전화 왔습니다. 통화를 원하신다고.
“내 알겠습니다. 연결해 주세요.”
백경운 변호사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항사님, BK해운이랍니다. 스피커폰으로 연결하겠습니다.”
“네.”
- 여보세요? 백경운 변호사님? BK해운의 법무팀장입니다.
“네 팀장님, 안녕하세요.”
- 그래 그동안 잘 지내셨고? 지난번에 너무 갑작스럽게 만나서 이야기를 제대로 못 나눴네요.
“네, 다음에 또 인사드릴 기회가 있겠지요.”
- 그 갑판장 재해보상 건 말인데요.
“네.”
- 뭐 우리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닌데 백 변호사 입장도 봐서 적당히 합의를 하면 어떨까 해서 연락했습니다.
“합의하면 저희도 좋죠. 합의금은 얼마 정도로 생각하고 계신가요?”
- 우리는 2억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신가요?
“......”
- 물론 형사고소도 취하하는 조건입니다.
“......”
- 그리고 단체 소송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정리하는 조건이고요.
“......”
백경운 변호사가 침묵을 이어갔다.
‘또 또!’
저놈들이 또 미친개를 건드렸구나.
돌변한 백경운 변호사가 말을 이어갔다.
“향후 예상되는 치료비만 1억 원입니다. 선원법상 일실보상금으로 지금될 금액도 1억이 넘더군요. 2억으로 합의하자는 말은 선원법상 이상 책임은 안 지겠다는 뜻 아닙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