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다행이다. 다친 사람도 없으니.’
평화로운 분위기, 안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셉과 찰리는 외국인 선원들을 모아놓고 자신들의 무용담을 털어놓기에 바빴다.
‘이 바다의 짠 냄새도 그리웠다.’
좁은 시타델에 오래 갇혀 있던 줄리엣호의 선원들은 오랜만에 느끼는 짠 바다 바람마저도 새삼 반갑게 느껴졌다.
SBS 부대원들은 갑판에서 선원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간단한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문제는 해적두목을 생포하라는 퀘스트인데.’
나도 간단한 검진을 마친 후 주변을 살피며 이안에게 다가섰다. 아무래도 나 혼자서 이 넓은 선박을 수색할 순 없는 노릇.
“이안 요원,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이런 해적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 그런가요?”
“해적들은 선원 이나 민간인들만 상대하는 놈들이 아닙니까? 비겁한 놈들이죠.”
“그렇군요. 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이안 요원이 직접 왔습니까?”
“저도 마침 두바이에 체류 중이었습니다. 한국 대사관에 나가있는 레이첼이 런던 본부로 급하게 연락을 해왔다고 하더군요”
“레이첼 요원이라면? 그 기자회견 장에서 만난 미녀 요원?”
“네? 하하하 아마 맞을 겁니다.”
이안 요원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해신해운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하더군요. 레이첼을 급하게 찾았다고.”
“해신해운 본사에서요?”
“네, 급하게 연락을 해왔다고 하더군요. 아마 법무팀 소속 직원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법무팀? 아!”
“미스터 장이 해적에 피랍됐다고 하더군요. 영국 해군의 함정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더군요.”
“······!”
나를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까지?
MI6는 몰라도 영국해군까지 나서주다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뭐,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해서는 몇몇 국가들이 공동으로 대응을 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아! 그래도 이번 일에는 MI6의 국장님이 큰 힘을 써주셔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국장님이라면 그 밀항자 기자회견장에서 만났던 C?"
"네 맞습니다.“
“국장님이 왜?”
“국장님은 미스터 장이 장래에 MI6 요원이 될지도 모른다고. 저보고 반드시 구출하라고 하시더군요.”
“허허허.”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도무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나도 그저 따라 웃었다.
한편 머릿속으로 현재형 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본사 법무팀 현재형 차장님이 대사관으로 연락해 레이첼을 찾았나 보군.’
런던 사보이 호텔에서 나는 술을 취해 현재형 차장에게 그 동안 활약상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다.
당시 술에 취해 MI6 요원을 만난 이야기도 무용담인양 떠들어댔던 기억이 살며시 떠올랐다.
내가 몇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MI6 국장과도 친분을 쌓았다는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현재형 차장이 유일했다. 사실 내가 말하는 대로 그냥 믿기도 힘든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현재형 차장은 내가 AP사의 사장 나민 아세르와 담판 협상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 나에 대한 신뢰가 제법 큰 사람이었다.
나는 이안 요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퀘스트를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이안, 선박에 승선한 해적들은 다 제압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확인된 해적들은 전부 제압했습니다.”
“음. 그래요?”
내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이안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불안해서요.”
“뭐가 불안합니까?”
“아무래도 선박에 해적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딱히 근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좀 불안하네요.”
“음, 시타델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질 않았으니 불안한건 당연하지요. 일단, 선원들 건강상태만 확인하고 나면 마무리 수색을 한 번 더 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그렇군요.”
나를 바라보며 이안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
“하하하. 미스터 장, 그런데 그것 때문에 방탄조끼를 아직 벗지 않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아직 불안해서요.”
나는 아직 방탄헬멧과 방탄조끼를 벗지 않은 상태였다. 퀘스트 때문이다.
‘두목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기습 공격이라도 하는 날에는 위험한 순간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
나는 이안요원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안 요원 혹시 해적 무리들 중에 두목을 잡았습니까?”
“두목이요?”
“네.”
“음, 글쎄요.”
“지금 생존자들에게 확인하면 두목이 있는지 아니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군요. 제가 한번 팀장들을 만나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미스터 장, 그럼 고생하셨을 텐데 쉬고 계시죠.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면 안 되겠습니까?”
“음?”
“해적들의 실체가 궁금해서요. 한번 신문하는 것을 보고 싶군요.”
이안이 내 표정을 살피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블랙그룹의 팀장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안 요원이 팀장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SBS 블랙그룹 제3부대 찰리팀이 다시 수색을 위해 선박 하부 구역으로 진입을 시작했다.
알파팀장은 이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해적들이 모여 있는 곳을 다가갔다. 살아남은 해적들은 모두 5명이었다.
알파팀장은 무릎을 꿇고 있는 해적들 앞에 섰다. 그는 해적 들을 얼굴을 살피더니 그중 한 사내를 지목해 묻기 시작했다. 해적들 중에서 어려보이는 사내를 지목했다.
“What's your name?(이름이 무엇입니까?)”
“I am Bubakra. Sir(제 이름은 부바카라입니다. 써)"
대답하는 해적의 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해적들은 SBS 부대원들에 의해 동료들이 많이 사살된 터라 그들의 얼굴은 두려움이 가득했다.
알파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Who's the boss?(두목이 누구입니까?)”
“…….”
부바카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눈을 흘기며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알파 팀장이 목소리를 높여 다시 물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 중에 두목이 있습니까?”
“…….”
부바카라는 눈치를 살피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사체들 중에 두목의 사체가 있습니까?”
“…….”
이번에도 부바카라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 띠링! >
+스킬 [협상 Lv. 5]을 사용합니다. +
- 설득력이 올라갑니다.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두목이 무섭다고 해도 수색에 협조하는 게 좋을 겁니다.”
“…….”
“이분들은 영국의 특수부대원들입니다. 이배에 있는 이상 언젠가는 발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해적들 중에 가장 어리고 순진해 보이는 부바카라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도 영국 해군 특수부대인 SBS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팀장님, 해적들이 수색에 협조하면 처벌에 참작이 되겠지요?”
내 말에 알파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바카라 뿐만 아니라 생포된 해적 전원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수색에 협조하면 특별 공헌자로 선처 받을 수 있도록 건의해보겠다.”
“…….”
“단 1명!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이다.”
해적들이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변하는 분위기를 감지한 것인지 가장 어린 해적 부바카라가 선수를 쳤다.
부바카라가 빠르게 소리를 질렀다.
“두목은 모선(Mothership)에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 탑승한 사람중에 두목은 부두목 겸 행동대장인 압둘 아라이입니다!”
“……!”
두목이 모선(Mothership)에 남아 있다고?
그나저나 부두목 압둘 아라이? 익숙한 이름이다.
그 이름을 듣자 갑자기 전생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전생에 대한민국 선박 피랍 사건으로 가장 유명했던 사건.
“삼해 루비호 피랍 사건”
우리나라의 해군 청해부대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대한민국의 함해해운 소속 선박 삼해 루비호를 소말리아 인근의 아덴만 해상에서 구출해낸 사건이다.
당시 삼해 루비호 피랍에 가담한 해적들은 전원 19세에서 29세 사이의 젊은 청년들로 모두 푼틀랜드 지역에 주소를 둔 청년들이었다. 총 13명의 해적들 중 8명은 사살, 5명은 생포되었다.
훗날 밝혀진 정보에 따르면 당시 삼해 루비호 피랍에 관여했다가 우리나라 해군에 생포되거나 사살된 소말리아 해적 13명 모두의 인적사항이 확인되었다.
당시 사살된 8명 가운데는 두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사살자 가운데 두목의 신원은 아브디 샤크(Abdi Shakh).
소말리아 해적들 사이에서 일명 샤크(상어)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악명이 높은 자였다.
그리고 그 행동 대장이자 부두목이었던 문제의 해적. 그의 이름이 바로 압둘 아라이였다.
압둘 아라이를 포함한 5명의 생포된 해적들은 우리나라 해군에 의해 이송되어 부산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압둘 아라이는 당시 삼해 루비호의 선장을 저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재판을 받고 우리나라 교도소에 수감되는데, 훗날 출판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대한민국의 교도소는 밥도 맛있고 생활하기 좋다”는 말을 남겨 사람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이들이 유명한 이유는 또 있었다.
우리나라 해군에 의해 소말리아 해적들이 다수 사살 당하자 소말리아 해군들이 이례적으로 외신에 성명을 발표해 대한민국 선박에 대한 보복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이 작전 이후 <로이터> 통신은 소말리아 해적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공개했다.
당시 ‘모하메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해적이 밝힌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인질을 살해하려고 계획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복수할 방법을 찾고 있다. 우리는 결코 몸값을 요구하지 않고 한국 배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있은 이후 소말리아 해적들은 다른 외국군대의 유사 작전을 대비해 납치한 선박의 선원들을 내륙으로 이동시키고 내륙의 경비 활동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 * *
압둘 아라이의 이름을 떠올린 내가 다급하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두목을 본 장소는 어디입니까?”
“……!”
나는 마지막 질문에 부바카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는 것을 목격했다.
뭔가 숨기는 눈 빛이 분명해 보였다.
부바카라는 살짝 고개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나는 그의 시선이 힐끔 향하는 곳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이, 이안 요원?”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안 요원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시선을 빠르게 교환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말없이 동시에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헉!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구나.’
줄리엣호의 선원들이 모여 있는 곳.
그 뒤로 보이는 컨터이너의 상단. 그곳이 바로 부바카라의 시선이 머문 곳이었다.
선원들이 서 있는 곳 뒤로 맨 뒤에 선장이 앉아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선장님! 다들 이쪽으로 피하세요!”
나는 크게 소리쳤다.
“응?”
선원들 사이에서 김호태 선장이 손을 들었다. 그는 내 말이 잘 들리지 않는듯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김호태 선장이 선원들 무리 맨 뒤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그때였다.
덜컹.
줄리엣호의 선원들이 모여 있는 곳 뒤편 컨테이너 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컨테이너에서 빠르게 뛰어내려 김호태 선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작전 완료
- 선박 “M.V 줄리엣”호의 갑판
컨테이너 위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검은 그림자.
그는 다름 이 선박을 공격한 해적단의 부두목이자 행동대장. 그의 이름은 압둘 아라이였다.
갑판 위에서 뛰어내린 압둘 아라이가 주변을 살피더니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김호태 선장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선장님! 피하세요!”
나는 달려가 가며 소리쳤다. 압둘 아라이는 김호태 선장을 인질로 삼을 계획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압둘 아라이와 김호태 선장 사이의 거리가 불과 몇 미터남지 않았다.
‘큰일이다.’
그 순간 내 눈앞에 구원자가 등장했다.
퍽!
“으아아악!”
외국인 선원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찰리가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나타나 압둘 아라이에게 달려들었다.
압둘 아라이는 총기를 휴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찰리는 겁을 먹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압둘 아라이도 김호태 선장을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총을 바로 사용할 생각을 하지 못한듯 보였다.
갑자기 사각에서 달려든 찰리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다다닥! 덥석!
찰리는 마치 레슬링 선수처럼 압둘 아라이의 하체를 겨냥해 태클을 시도했다.
“으아아악!”
찰리가 괴력을 발휘해 자신보다 거구인 사내를 들어 올려 밀어내기 시작했다.
압둘 아라이는 찰리의 태클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옆으로 주르륵 밀려갔다.
쿵!
큰 충격 소리와 함께 압둘 아라이는 등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