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5/200)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말도 맞습니다. 운이 좋으면 피랍당하지 않고 도주에 성공할 가능성이 제법 높습니다. 해적선을 발견하는 게 조금만 더 빨랐다면 도주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해적들을 자극해서 화가 난 이들이 RPG로 선체나 선교를 겨냥하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잘못하다가 선체에 구멍이라도 나면 감항성(선박이 항행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성능을 말함)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내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해적이 승선한 이후에 선원들이 시타델로 대피하다가 발각이라도 되는 경우에는 정말 최악의 상황이 발생합니다. 한명이라도 인질이 되는 순간 선박은 피랍될 수 밖에 없습니다. 피랍당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저항하다가 인명피해가 발생하면 그것보다 큰 비극은 없습니다. 단 한명도 피랍당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들 내 말에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호태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좋겠나?”

나는 전생에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피랍될 위험에 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 *

나는 전생에도 해적선에 쫓긴 경험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일찍 해적선을 발견해 빨리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도망 친 이후에 기사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는데 국내의 다른 선박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되었다는 기사 였다.

당시 나는 같은 인도양에서, 비슷한 선종에 승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은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현생에서도 앞으로 인도양을 지나 소말리아 해적들이 상시로 출몰하는 지역인 아덴만을 계속 통과해야 하는 스케줄이다.

해적들의 위협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전생에서는 소말리아 해적들이 한창 활개를 친 다음에야 인근의 국가들이 해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들이 해적들의 횡포를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공동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해군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현생에서 그 시기를 앞당길 계기가 필요한 순간일지도 몰랐다.

‘무엇인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이번 사건이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고급 정보를 글로벌 인맥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점도 전생과는 다른 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선미에서 빠르게 추격해오는 고속보트를 바라보며 앞으로 계획을 떠올렸다.

해적들이 피랍을 시도하는 경우 일반적인 상선의 매뉴얼은 선속을 최대로 증가시키고 회피조선(지그재그로 조선하여 해적들이 선박위로 승선하는 것을 막는 방법)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컨테이너선은 선속(선박의 속도)가 빠르고, 건현(높이)가 높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해적들의 승선을 막을 수는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문제는 해적들이 총기로 위협하는 경우다. 해적들이 갑판위에 있는 선원들이나 선교를 향해 총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해적들이 승선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원들은 위협사격을 하는 해적들이 승선을 했는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어려움이 생긴다.

승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선박에는 물대포가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해적들이 총기로 위협사격을 하는 경우에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여러 모로 해적들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선교의 측면(Wing Bridge)에 나가서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도 위험하고, 선박의 뒷부분인 선미 쪽의 공간으로 해적이 승선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해적의 승선여부를 바로 확인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위험한 일을 다른 선원들에 맡길 수는 없지.’

내가 이 일에 지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 * *

나는 김호태 선장을 비롯한 선교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앞으로 계획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우선 고속보트가 접근하기 시작하면 최소 인원만 남기고 시타델로 대피합니다. 그리고 최소인원으로 선박을 회피조선을 실시하면서 해적들의 승선시점을 최대한 저지하면서 지연시켜야 됩니다. 항로는 구조대가 올 가능성이 높은 육지에 가까운 쪽으로 크게 대각으로 변침할 생각입니다. 만약, 해적들이 승선했다고 판단되면 즉시 시타델로 도주하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내 말에 사람들이 신음소리를 흘렸다.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해적들의 승선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는 말에 걱정이 많아진 것이다.

“이항사님, 모두 다 같이 시타델로 피난하면 되지 않습니까?”

곽호진 삼등항해사가 손을 들며 물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해적들이 쫓아온다고 해서 바로 기관을 정지하고 시타델로 숨을 수는 없습니다. 해적들의 승선을 저지하고 도주할 가능성도 전부 배제할 수는 없고, 구조 신호를 보고 출동할 구조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에 김호태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음, 이항사의 의견이 타당한 것 같군. 그럼 내가 직접 마지막까지 선교를 지킬 테니 일항사가 사람들을 데리고 시타델로 먼저 피난 가도록 하게.”

“아닙니다! 선장님, 차라리 제가 마지막에 가겠습니다.”

선장의 말에 일등항해사가 자신이 남겠다고 나섰다.

두 사람의 표정이 제법 비장해 보였다.

하지만 안 될 일이다. 안타깝지만 그런 멋진 역할은 내 몫이다.

나에게 새로운 삶을 살 기회가 주어진 것도 어쩌면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분은 시타델로 가셔야 합니다. 이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이항사 그게 무슨 소리야?”

“선장님과 일항사님은 사람들을 데리고 시타델로 먼저 가십시오. 제가 마지막까지 해적들의 승선을 저지하다가 마지막에 시타델로 도망가겠습니다.”

“이항사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건 선장이 해야 할 일이야!”

“선장님은 따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음?”

“우리가 시타델에 숨는다고 백프로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그렇지.”

“혹시 최악의 경우 우리가 해적들에게 피랍되기라도 한다면 선원들 중에 선장님이 있고 없고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일항사님도 마찬가지이고요. 만약 선장님이 다치시기라도 하면 저들과 협상할 사람도 없고, 책임질 사람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으으음!”

내말에 김호태 선장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결심한듯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알았네. 이항사의 말대로 하지. 그런데 혼자서는 무리 아닌가? 아무래도 사람이 더 필요하겠지?”

“네. 그건 그렇습니다. 제가 물대포를 쏘면서 승선을 저지할 때 후방을 살필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누가 좋을까······.”

김호태 선장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선원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선장의 시선을 받으면 움찔 하며 다들 슬금슬금 뒤로 피하는 모양새.

나도 사람들을 쭉 한번 둘러본 후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사람들은 저승사자라도 본 듯 화들짝 놀래 시선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네요.”

“음?”

“마침 이 배에 저와 손발이 잘 맞는 친구들이 있네요.”

내 말에 선교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타수 조셉을 향했다.

조셉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뿌듯한 모양. 해적이 두렵지만 이런 기회에 자신이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키를 잡은 채로 배를 운항하고 있는 조셉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서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의 표정은 매우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내 오른팔을 자처하는 조셉은 자신이 이런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 우리 조셉 많이 컸네?’

나는 조셉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조셉은 놀려야 제 맛이지.

“찰리입니다.”

“······.”

내 대답에 조셉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과거 인도네시아 쓰나미 사건 당시 씨맨스클럽에서 많은 적들을 앞에 두고 내 옆을 지킨 듬직한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조셉은 자신의 예상과 달리 이름이 불리지 않자 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셉에게 찰리는 나의 최고 심복이 누구인지를 두고 겨루는 경쟁자이자 외국인선원들 사이의 암묵적인 리더 자리를 두고 다투는 라이벌이었다.

“써(Sir)······?"

조셉의 애처로운 눈빛이 나를 향하자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조셉입니다.”

그제야 조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몹시 위험한 일이지만 남자라면 나서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게 바로 지금이다. 조셉은 씨맨쉽을 아는 사나이였다.

* * *

- 선박 “M.V. 줄리엣”호의 선교

몇 시간 후.

조셉은 긴장한 표정으로 키를 잡고 있었다. 나는 선교에 서서 쌍안경을 들어 바다를 살피고 있었다.

선박에서 해적을 대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예방책은 바로 선교에서 견시를 충분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 견시자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선교에 있는 우리는 모두 방탄조끼와 방탄헬멧을 착용한 상태.

나는 방탄조끼와 헬멧을 쓰고 있는 조셉을 바라보니 예전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흐흐흐. 오랜만이네.”

삼등항해사로 근무하던 시절 쓰나미를 피하겠다고 방탄헬멧과 방탄조끼를 입고 농성을 벌였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조셉, 옛날 선상반란산건 기억나?”

“네?”

“쓰나미 피하겠다고 비너스호 기관 정지시키고 시동키 뽑아서 선장실로 도망갔을 때도 이렇게 입고 있었잖아.”

내 말에 조셉도 방긋 웃어보였다. 조셉도 나와 함께 그간 사건사고를 많이 겪은 탓인지 제법 대담한 성격으로 변한 듯 보였다.

“써, 그런데 이렇게 선교에서 헬멧까지 쓰고 있어야 되요?”

“당연하지. 해적들이 나타나면 선교로 위협사격을 할 가능성이 가장 높거든.”

해적의 위협사격은 대부분 선교를 겨냥하기 때문에 선교에 있다고 해도 방탄조끼, 방탄헬멧을 쓰고 있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인 점은 해신해운이 몇 년 전 간담회에서 내가 제안한 건의사항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해적들의 공격을 대비해서 대대적인 보호 장비들을 도입한 상황이었다.

선박마다 방탄조끼, 방탄헬멧, 방탄고글 그리고 유리창에 방탄필름까지 부착되어 있다.

그리고 최신식 피난처인 시타델과 고수압 물대포까지 준비해서 나름 최선의 대비를 갖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해적들은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나타나기 때문에 누구도 안전을 담보할 수는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조셉과 찰리도 웃고 있었지만 긴장한 빛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나는 선미 방향을 바라보았다.

‘얼마 못 가서 곧 따라 잡히겠구나.’

바다 바람이 짜게 느껴졌다. 힘든 시간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해적 공격 개시

- 선박 “M.V. 줄리엣”호의 선교

해적들이 나눠 탄 것으로 보이는 검은 보트는 우현과 좌현 양쪽에서 줄리엣호를 추격해 오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거리.

줄리엣호는 전속력으로 운항 중이었다. 하지만 해적들이 탄 것은 고속보트.

속도차이가 제법 있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줄리엣호가 따라 잡힐 것이 분명했다. 고속보트의 성능이 예상보다도 더 좋은 것 같이 느껴졌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보트 위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위로 보이는 물건. 긴 작대기? 아니 그건 소총이 분명했다.

‘역시 AK인가.’

해적들이나 테러범들의 필수품. AK 소총으로 짐작되는 총들을 들고 있었다.

선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찰리가 외쳤다.

“이항사님! 좌현 쪽 보트가 거의 따라 붙었습니다.”

탕탕탕!

“음?”

총소리였다!

해적들이 배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위협사격을 시작한 것이다.

선교까지 화약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기분.

“모두 고개 숙여!”

내가 외치자 찰리와 조셉이 자세를 허리 밑으로 낮췄다.

탕탕탕!

해적들은 자신들이 승선하는 것을 선원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줄리엣호로 접근하기 전에 선교를 향해 위협사격을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해적들 중에는 소총을 꺼내들고 허공을 향해 사격하는 놈도 있고 선교 근처를 향해 총을 갈겨대는 놈도 있었다.

찰리가 창 밑으로 몸을 낮춘 채로 선교 밖을 바라보다가 크게 외쳤다.

“이항사님! 보트가 선원구역 외부 비상계단 쪽으로 접근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탕탕탕!

또다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찰리! 위험하니까 일단 안쪽으로 들어와서 대기해!”

“네!”

“위험하니까 선교 안에서 CCTV를 관찰하고 있어. 내가 나간다. 물대포는 내가 직접 쏜다.”

“혼자서 나가신다고요?”

“그래 일단 위험하니 나 혼자 가는게 나아.”

“음, 그래도 혼자서는 위험하지 않을까요?”

“일단 CCTV를 잘 보고 있다가 보트가 붙는 방향을 조셉에게 알려줘. 지그재그로 운항하면서 보트를 밀어낼 수 있게.”

“네.”

“그리고 선미 쪽에서 승선하는 놈들이 없는지 잘 봐야해. 보트가 한 척 더 있을 수도 있어.”

찰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CCTV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행인 점은 해신해운은 해적들이 승선하는 것을 대비해서 선교에 이를 감지할 수 있는 적외선 CCTV를 설치한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선교에서 CCTV를 이용해 해적의 승선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

해적의 승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시타델로의 피난시기를 결정하고 기관 정지 등 대응행동을 취할 수 있는 판단을 하기에 용이했다.

CCTV와 시타델은 나의 의견이 강하게 받아들여져서 설치된 장치였다.

줄리엣호의 경우에는 해적의 승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CCTV 8대를 선미부와 양현 선미 측에 설치되어 있었다.

“잘 보고 있어 나는 갑판으로 나간다.”

“조심하세요!”

나는 말을 마치고 물대포가 설치된 곳으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유독 갑판에서 부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 선박 “M.V. 줄리엣”호의 갑판

내가 빠르게 달려서 도착한 곳은 선원구역 외부비상계단을 조준해서 물대포를 쏠 수 있는 간판 위.

이곳으로 달려 온 이유는 한 가지.

해적들이 피랍하기 위해 승선할 때 선원구역의 외부비상계단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줄리엣호의 선원들은 미리 해적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외부비상계단에 철조망을 설치해 놓은 상태.

해적들이 외부비상계단에 올라오더라도 철조망을 넘어서 선박으로 올라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강한 물대포를 뚫으면서 올라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대로 안심할 순 없다. 아니 사실 걱정이 되는 순간이다.

‘그래도 좀 겁나는 건 사실이네.’

아무리 나라도 이런 상황에서 겁을 먹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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